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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 없는 회귀-286화 (286/316)

286화

허드슨 타워의 5001호.

“지각해서 죄송합니다. 마지막 수업이 늦게 끝난 걸 깜빡하고 친구랑 여유 부리다가 늦었습니다.”

“아닙니다, 대표님. 저도 방금 접속했던 참이었습니다.”

아파트에 도착한 수혁은 숨돌릴 틈도 없이 노트북을 켜고 박유신 사장과 화상 회의를 시작했다.

“시간이 늦은 관계로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일전에 거성전자 관련 지시들은 잘 이행되고 있습니까?”

“어제 김현성 대표와 드디어 연락이 닿았습니다.”

“후, 고생하셨습니다.”

김현성 대표는 직원으로부터 SH가 회사를 인수할 의사가 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불쾌감을 표하며 대화를 거부했다. 그러나 수혁의 거듭된 설득과 유연한 대처로 상황은 조금씩 풀리고 있었다.

“김현성 대표가 마음을 연 배경에는 현명길 회장님의 보이지 않는 지원이 있었습니다.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 모르겠지만, 회장님을 언급하며 인수 계획에 처음으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핸드폰 시장이 갈수록 확대되고 있는 상황에서 회사를 넘기라는 말을 들었으니 화가 나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요. 하지만 MK이노베이션 측에서 터무니없는 수수료를 요구하고 있고, WG전자를 상대로 납품 단가를 인상 시키고 싶어도 눈치가 보여 난감했을 겁니다.”

수혁은 WG전자와 거성전자의 사이가 갑을 관계임을 말하고 있었다.

“현명길 회장님께서 부품 사업부를 SH에 넘기는 대신, LCD 생산의 일부를 맡기기로 하셨답니다.”

LCD는 액정 디스플레이의 약자로 기존의 두껍고 둥근 브라운관과 얇고 평평한 특징을 가졌기에 TV와 모니터 시장에 큰 영향을 주었다. 2000년대 이후 LCD에 대한 수요는 점점 커졌는데, WG가 LCD 시장을 석권한 상태였기에 거성전자 입장에선 하청으로 들어가는 것이 나쁜 선택이 아니었다.

“당장이야 자존심이 조금 상하겠지만, WG전자의 하청 업체가 되면 원래보다 안정적이면서도 더 많은 수익을 올릴 수 있어서 거절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게다가 대표님께서 제시한 인수 금액이 통상적인 시장 평가액보다 2배 이상 높았던 점도 크게 작용한 것 같습니다.”

“거성전자 입장에선 효자 품목을 판매하는 거라 속이 쓰릴 수도 있겠지만, 사업 부서 중 하나를 팔아서 엄청난 이득을 챙겼으니 속으로는 오히려 쾌재를 부르고 있을 겁니다. 아, 인수인계 과정은 어떻게 이루어질 예정입니까?”

수혁은 가장 핵심이 될 수 있는 질문을 던졌다.

“돈이 입금되는 대로 생산 공장을 바로 넘겨주겠다고 하셨습니다. 말이 나와서 그러는데, 인수 자금은 어떻게 마련하면 좋을까요?”

“SH커뮤니케이션 지분 중 일부를 정리하면 충분할 겁니다. 아, 그전에 주식 지분 현황은 파악해 보셨습니까?”

“네, 안 그래도 자료를 뽑아 둔 게 있습니다.”

박유신 사장은 책상 위에 쌓아 놓은 서류들을 뒤지다가 하나를 끄집어냈다.

“대표님의 지시대로 MK이노베이션을 비롯한 우호 세력이 SH그룹의 지분을 얼마나 사들였는지 파악해보았습니다. 이들은 그룹에서도 핵심 사업인 SH소프트와 SH커뮤니케이션의 주식을 집중적으로 사들였는데, 지분 비율은 각각 15.3%와 19.7%였습니다.”

“어쩐지, 매출에 비해 시가 총액이 너무 빠르게 상승한다 싶었는데, 저들이 손을 써서 그랬군요. 이처럼 대규모 매수가 이루어질 때까지 눈치를 못 챈 이유가 뭡니까? 상장한 지 불과 6개월 정도밖에 안 된 걸 고려하면 충격적인 결과로 볼 수 있겠네요.”

수혁은 MK그룹이 예상보다 많은 지분을 보유한 사실에 크게 놀랐다.

“주식 흐름을 확인해 보니 3월 말부터 차명으로 주식을 야금야금 사들인 다음, 8월 말쯤에 대규모 양도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쇼. 대표님의 지분이 과반을 넘는 데다 추가 발행도 전면 중단시켜 놨기 때문에 경영권이 흔들릴 일은 없을 겁니다.”

“단순히 경영권만 생각하면 사장님의 말씀이 옳겠지만, 제이슨이 주요 이사가 된다면 이래저래 피곤한 일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당분간 제 명의로 주식을 틈틈이 매입해서 관리를 해야겠습니다.”

수혁은 제이슨을 상대로는 한 치의 방심도 용납되지 않음을 잘 알고 있었다.

“거성 전자에 지급해야 할 3,000억 상당의 금액은 SH에듀케이션 지분을 정리해서 사들이는 게 더 낫겠습니다.”

이야기를 들은 유신은 SH소프트와 SH에듀케이션을 건드리지 않는 방향으로 계획을 수정했다.

“사내 유보금으로 절반을 충당하고, 절반은 사장님 말씀대로 진행하세요. 금액 전체를 SH에듀케이션에서 끌어 쓰면 주식이 급락하여 주주들이 큰 피해를 보게 될 테니까요.”

“알겠습니다, 대표님.”

“그리고 제가 명단을 드릴 테니, 지오쇼핑 경영은 아랫사람한테 맡기고 인재 영입에 힘써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회사를 인수하게 되면 기존 인력들도 우리 회사에 편입되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습니까? 게다가 기본 부품 사업은 안정적인 매출이 장점이긴 하지만, 급성장할 여지가 거의 없지 않습니까?”

유신은 가뜩이나 거액의 지출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인력을 더 채용하려는 수혁의 행보가 이해되지 않았다.

“거성 전자의 제조 노하우를 토대로 기존에 없던 혁신적인 제품을 개발하려면 기존 인력으로는 부족하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음, MK이노베이션의 원천 기술이 아닌 다른 형태의 부품을 제작하실 계획이시군요.”

“그렇습니다. 사실, 거성전자 부품 사업부가 3,000억에 불과한 것은 인수 비용 책정이 매출액을 토대로 이루어져서 그런 거지, 원천 기술을 갖고 있었다면 배 이상의 비용을 지출해야 했을 겁니다.”

수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비용 마련에 대한 대책도 세웠으니 회의가 끝나면 바로 협상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시일은 어느 정도 걸릴 것 같습니까?”

“공장을 인계받고 부서 개편까지 고려하면, 아무리 빨라도 10월 중순은 돼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 대표님. 회사명과 사장으로 염두에 둔 인물이 있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지요. 회사명은 SH전자로 정해 뒀고, 사장으로 역임할 분으로는 권성훈 사원을 낙점했습니다.”

“사원이라면 올 초에 있던 대규모 채용 때 뽑혔던 신입 사원을 사장으로 승진시킨다는 말씀이십니까?”

유신은 수혁의 발언에 당혹스러운 감정이 들었다. 그가 종종 외부에서 임원급 인사를 데려오는 경우가 있었지만, 사원을 단숨에 사장으로 진급시킨 적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권성훈 사원 외에도 기존 직원 중 SH전자로 발령 날 사람들이 제법 있습니다. 모두 영전해서 가는 거기 때문에 불만은 딱히 없을 테니 조속히 진행해 주세요. 그리고 강남이나 판교를 중심으로 SH전자 사옥으로 활용할 건물도 알아봐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대표님…….”

유신은 수혁의 지시에 곧장 대답하긴 했지만, 석연치 않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혹시, 하시고 싶은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저, 그게…… 아닙니다.”

“편하게 말씀하세요. 아직 초입 단계라 수정해야 할 사안이 있으면 빠르게 고칠 수 있으니까요.”

“이런 말씀 드리기 죄송하지만, 권성훈 사원을 사장으로 승진시키면 다른 직원들의 사기가 크게 저하될 것입니다. 방금 근무 기록표를 검색해 보니 모든 부문에서 우수한 퍼포먼스를 보여 주고 있긴 하지만, 근속 연수가 1년도 채 안 된 사람을 사장으로 임명하는 건 매우 이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훗. 왜 그 질문을 안 하나 했는데, 역시나 물어보시는군요.”

수혁은 유신의 질문을 예상이라도 한 듯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권성훈 사원은 처음 채용할 때도 제가 눈여겨봤던 분입니다. 보통의 신입 사원들과 달리 대학원을 다니시던 분이라 나이도 어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한국대에서 시행되었던 면접에서 인상 깊은 모습을 보여 줬기에 때가 되면 중용하려 했습니다.”

“대표님의 뜻이 그러시다면 이대로 진행하겠습니다.”

유신은 수혁이 한 번 뜻을 정하면 굽히지 않음을 알았기에 더 이상 토를 달지 않았다.

‘권성훈 씨는 보통 분이 아니야. 유일하게 스탯을 확인할 수 없던 사람이기도 했고.’

수혁은 면접 당시, 통찰 기능을 활용하여 상대의 스탯을 파악했는데, 권성훈 사원만이 유일하게 측정이 되지 않았다. 이는 성훈의 통찰력과 지혜 스탯이 수혁의 그것을 능가했기에 벌어진 현상이었다.

‘위즈덤 컴퍼니를 세워 재계에서도 이름을 날렸던 사람이니, 믿고 맡겨도 될 거야.’

위즈덤 컴퍼니는 2010년대 중반에 등장한 제조 회사로 다국적 기업이나 대기업들이 거들떠보지 않는 품목들 위주로 개발 및 개량 작업을 추진하여 큰 성공을 거둔 바가 있었다. 위즈덤 컴퍼니는 매출 면에서는 대기업에 뒤지는 모습을 보였지만, 세계 1위를 달성한 제품을 3개나 보유할 정도로 경쟁력을 갖춘 기업이었다.

“감사합니다. 지금은 이해가 되지 않겠지만, 나중에 제 뜻을 저절로 알 날이 있을 겁니다. 회사 인수가 마무리되면 권성훈 사원에게 연락하라고 전해 주세요. 이번 인사는 제가 직접 챙기겠습니다.”

“네, 대표님.”

“중간에 보고할 사안이 생기면 김찬식 팀장님께 전달해 주시길 바랍니다. 이상으로 회의를 마치겠고, 장시간 회의를 하느라 수고하셨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대표님.”

회의를 마친 수혁은 노트북을 덮은 뒤, 가방에서 논문과 전공 서적을 꺼냈다.

‘회사 인수가 확정됐으니 오늘 내로 퀘스트를 완료하고, 바로 분석에 들어가자.’

수혁은 논문과 전공 서적을 독파하며 지능 스탯을 키우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회의를 마친 지 2시간쯤 지났을까, 일주일간 노력을 아끼지 않은 수혁은 지능 스탯 50 달성에 성공했고 그의 눈앞에는 화면이 떴다.

<필요 스탯을 모두 충족하셨습니다. 기계 분석 프로그램을 활성화하시겠습니까?>

수혁은 갑자기 뜬 도움말 창을 의아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이상하네? 퀘스트가 끝나면 보통 퀘스트 창이 먼저 뜨고 도움말은 나중에 켜지는데? 휴, 지금 상황에서 그게 뭐가 중요하겠어. 활성화 작업을 바로 시작해 줘.’

<여타 프로그램과 같이 사용자가 원할 때 자동으로 실행될 수 있게 조치하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도움말의 안내가 있고 난 뒤, 얼마 되지 않아 화면에는 작업 진행률이 표시되었다.

<작업 완료까지 95% 남았습니다. 90%, 86%…….>

‘후, 드디어 끝났다.’

화면에 완료 표시가 뜨자 어플을 종료한 뒤, 잠시 휴식을 취했다.

‘시간도 늦었는데, 그냥 내일부터 할까?’

일주일간 적잖은 피로가 누적된 수혁은 미리 사 둔 공구와 회귀하기 전에 사용했던 스마트폰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설립 시기에 맞춰 공정도를 넘겨주려면 조금이라도 일을 해 놓는 게 좋을 거야.’

5분가량 고민하던 수혁은 커다란 종이와 만년필을 꺼낸 뒤 작업에 돌입했다.

- 287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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