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없는 회귀-288화 (288/316)

288화

“19세기 들어 화성학적인 밸런스를 고려하거나 테크닉을 중시하는 작곡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음악의 경우에는 연주 경험이 있거나 이론을 아는 사람들로서는 환영할 일이었지만, 일반 대중들로서는 하나의 벽이 세워진 거나 다름이 없었죠. 하지만 이전에는…….”

“화성학은 음율 간의 최적화된 조화를 발굴하여 자칫 단조로워질 수 있는 음악에 색채를 부여해 준 학문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작곡가가 표현하고 싶은 주제나 감정을 원활히 전달할 수 있게 도움을 줌으로써 대중의 클래식에 대한 친밀감을 더 높였으면 높였지, 장벽을 조성했다는 말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제이슨은 수혁의 설명이 끝나지 않았음에도 말을 자르고 들어갔다. 그는 클래식 이론에 대해서는 자신감이 넘쳤기 때문에 이번 기회를 잘 살리고 싶었다.

“제이슨, 방금 언급한 부분은 충분히 논의될 가치가 있긴 하지만, 수혁 군의 발표가 끝나고 이야기를 나누면 어떨까요?”

“아닙니다. 교수님과 다른 분들만 괜찮다면 제이슨과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셀레나는 발표 중간에 끼어든 제이슨을 제지하려 했지만, 수혁은 개의치 않는 모습을 보였다.

“학생들로서는 재미있을 것 같은데, 어떠세요?”

“훗, 저야 오히려 고맙지요.”

‘멍청한 놈, 스스로 무덤을 파는구나.’

제이슨은 수혁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이며 생각했다.

“화성학에 관한 최초의 문헌은 1558년에 나온 <화성 교정>이었습니다. 하지만 과연 그 이전의 작곡가라고 해서 멜로디의 조화를 고려하지 않고 음악을 만들었을까요?”

“꼭 학문으로 적립되지 않아도 예술적 감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떤 음들이 서로 잘 어울리는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고대의 음악이라도 음 간의 조화는 당연히 고려되었겠지요. 그런데 다 아는 사실을 굳이 말씀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수혁의 질문에 제이슨은 무슨 그런 당연한 걸 묻냐는 투로 퉁명스럽게 답변했다.

“핵심을 저 대신에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과거에는 연극이나 문학 혹은 작곡가의 개인적 경험을 바탕으로 음악이 작곡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즉, 클래식 음악에는 그에 맞는 스토리가 있다는 이야기지요. 따라서 초심자가 음악을 감상하려면 배경이 되는 스토리를 토대로 등장인물들의 감정을 느끼는 게 매우 중요해집니다.”

“음악 전개에 맞춰 스토리를 연상하는 거야 기본 중에서도 기본인데, 뭘 그렇게 장황하게 말씀하십니까? 오페라나 오케스트라 공연에 가면 청중들에게 카탈로그를 나눠 주는데, 사람들은 누가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카탈로그에 적힌 대략적인 스토리를 숙지합니다. 게다가 요즘 같은 정보화 시대에는 모르는 사람도 드물고요.”

제이슨은 상대의 말이 진부한 것처럼 몰아가며 승기를 잡으려 애를 썼다. 그러나 수혁은 이와 같은 공세에도 흥분하지 않고 침착하게 말을 이어 갔다.

“소모적인 대화가 계속되니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을 아십니까?”

“독일의 거장 베토벤이 유럽에 자유 의지와 혁명을 전파한 나폴레옹을 찬양하기 위해 만든 노래 아닙니까? 하지만 훗날, 나폴레옹이 여타의 전쟁광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 베토벤은 그에 대한 존경심을 거둬들이지요.”

“방금 하신 말씀이 정확히 카탈로그에 나와 있는 설명과 유사하다고 생각합니다. 베토벤이 운명 교향곡을 쓸 때의 심정과 프랑스 혁명에서 비롯한 유럽인들의 기대와 환희를 느끼려면 관련 역사와 계급 구조, 그리고 시대상 등을 상세하게까지는 아니어도 대충은 알고 있어야 합니다.”

수혁은 제이슨의 말에 맞장구를 치듯 이야기했지만, 실상은 애 둘러서 비판을 하는 중이었다.

“흠, 이제야 처음으로 공감 가는 말씀을 하시네요.”

“제이슨, 혹시 클래식을 들으며 우신 적이 있습니까?”

“클래식은 음미하는 마음으로 차분히 듣는 거지, 감정에 치우치면 음악의 본질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물론 상황에 따라서는 감동이 몰려와 울컥할 수는 있지만, 감정을 조절할 수 없다면 음악이 들릴 리가 만무하지 않겠습니까?”

“음악을 이성으로 듣는 분의 전형적인 답변이군요. 19세기까지만 해도 클래식 음악은 현대의 락, 발라드, 팝과 같이 대중문화로 여겨졌습니다. 다시 말하면 발라드 음악을 듣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처럼 옛 유럽인들은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희로애락을 느꼈다는 겁니다.”

이 둘은 애당초 감상의 목적이 달랐기 때문에 대화는 계속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었다.

“클래식을 상업 음악들과 동급 취급을 하다니 더 이상 말할 가치가 없군요.”

“역사 공부를 하셔야겠습니다. 당대의 작곡가들과 연주가 중에 생계를 위해서 음악을 하지 않은 사람들이 얼마나 된다고 그렇게 고상한 척을 하십니까?”

“그만들 하세요.”

제이슨과 수혁의 대화가 열기를 띠는 것을 넘어 말다툼으로 넘어갈 조짐을 보이자 셀레나 교수는 토론을 중단시켰다.

“나름의 견해를 두고 주관을 내세우시는 건 좋으나 서로에게 인신공격을 일삼는 건 옳지 못한 태도입니다.”

“죄송합니다, 교수님.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수혁이 말도 안 되는 예시로 본질을 흐리는 바람에 저도 모르게 흥분했네요.”

그녀의 중재에 수혁은 곧바로 사과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제이슨은 끝까지 물고 늘어지며 추한 행태를 보였다.

“제이슨. 누구 편을 드는 건 제 성격과 맞지 않지만, 대화 초반에 상대를 도발하고 공격적인 언행을 시작했던 건 바로 본인이었습니다. 수혁 군이 사과하는데도 끝까지 이러신다면 토론은 여기까지 할 수밖에 없습니다.”

“흠…… 죄송합니다. 클래식에 대한 애착이 크다 보니 말이 과했던 것 같습니다.”

“휴, 클래식이라는 게 꼭 이론적인 부분을 세세히 알고 있어야 향유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심정은 이해되나 상호 간에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 줬으면 좋겠습니다. 원래 이러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본의 아니게 분위기가 무거워졌네요. 아직 시간이 15분 정도 남았으니 여러분들에게 클래식 음악을 간단히 들려 드리겠습니다.”

셀레나 교수는 어깨에 메고 있는 바이올린 케이스를 내린 다음 악기를 꺼내 들었다.

“설마, 바이올린을 연주하시려는 건가?”

“못 들었어? 케이턴 대학에 들어오시기 전에는 바이올리니스트로 활동하셨데. 국제 콩쿨 대회에서도 2번 우승하셔서 그쪽 세계에서는 엄청 유명하신 분으로 알고 있어.”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신 덕분에 국제 매너를 자연스럽게 익혔던 거지. 그러다가 한 사교 모임에서 총장님 눈에 띄어 케이턴 대학에 온 거고.”

“MBA보단 음대 교수가 더 적합하지 않나?”

“음악을 너무 치열하게 하셔서 바이올린을 직접 가르치는 건 하고 싶지 않아 하신다고 들었어. 게다가…….”

학생들은 악기를 조율하는 셀레나를 보면서 설왕설래하였다. 준비를 마친 그녀는 현란한 속주를 통해 화려하면서도 깊이 있는 연주를 들려 줬고, 엄청난 실력에 학생들의 입은 떡 벌어졌다.

짝-짝-짝

3분가량의 짧은 연주가 끝이 났고 학생들로부터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 곡은 파가니니의 대표곡 카프리스 24번입니다. 준수한 외모와 당대 최고의 테크닉을 겸비했던 파가니니는 팝스타 저리 갈 정도의 인기를 갖고 있었지요. 그리고…….”

연주를 마친 셀레나는 학생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간단한 설명을 곁들였다.

“혹시 악기를 연주할 수 있는 분 계신가요? 마침, 저한테 보조 바이올린도 있고, 여기 피아노도 있네요.”

선주는 고객들의 편의와 즐거움을 위해 갑판 한쪽에 피아노를 설치해 두었다.

“바이올린을 잠시 빌려도 괜찮을까요?”

“물론이죠. 자, 여기요.”

수혁은 제이슨과 경쟁할 생각이 없었으나 거듭되는 도발에 승부욕이 생긴 상태였다.

‘그렇게 침착한 척, 교양 있는 척은 다 하다니 속으로는 약이 단단히 올랐던 모양이군. 그런데 어쩌나? 내가 가장 자신 있는 종목을 고르다니, 참 운도 없는 녀석이야.’

의도를 알아챈 제이슨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천재로 불렸던 그는 공부뿐만 아니라 음악에도 천재적인 재능을 드러냈는데, 가르치는 선생마다 프로 연주가와 큰 차이가 없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부담 갖지 마시고 아시는 곡이 있으면 편하게 하세요.”

“네, 감사합니다.”

수혁은 교수의 보조 바이올린을 받아 들더니 능숙하게 조율했다. 그리고 곧이어 연주가 시작되었다.

“이 곡도 많이 들어 본 건데…….”

“방금 교수님이 소개해 준 파가니니의 곡이야. 카프리스 24번 못지않게 높은 인지도를 갖고 있고, 연주 난이도도 최상으로 평가받는 곡인데, 실수 하나 없이 연주하다니 동기지만 정말 대단한 친구 같아.”

학생들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연주하는 수혁의 모습에 경탄하고 있었다.

‘도구 이용 프로그램을 사용했는데도 벅찬 느낌이 드는 건 처음인데?’

수혁은 프로그램 덕분에 무리 없이 연주하고 있었지만, 신체를 쉴 새 없이 움직여야 했기에 손가락에서 통증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파가니니의 음악을 회귀하기 전부터 알고 있었기에 머릿속에서 음을 떠올리며 프로그램을 활용하고 있었다.

“와우, 대단합니다. 파가니니의 라캄파넬라를 악보도 없이 완벽히 연주하시다니 너무 놀래서 말이 안 나오네요. 바이올린을 공부한 지 얼마나 되셨습니까?”

연주를 마친 수혁이 활을 내려놓자 곧바로 셀레나 교수의 호평이 이어졌다.

“바이올린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파가니니만큼은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습니다. 귀동냥으로 듣던 음악을 조금씩 따라 하니 간신히 연주할 수준은 되더군요.”

“감정 표현과 깊이는 둘째 치더라도 테크닉만큼은 완벽한 연주였습니다. 파가니니의 곡은 워낙 어려워 프로 연주가들도 실수를 종종 하는데, 수혁 군은 한 음도 틀리지 않았습니다.”

“과찬이십니다.”

수혁은 항상 하던 데로 겸손한 반응을 보이는 것으로 상황을 마무리하려 했다. 그런데 그때, 제이슨이 자신도 해 보겠다며 셀레나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저, 교수님. 괜찮다면 저도 연주해 볼 수 있을까요?”

“음, 식사까지 시간이 얼마 안 남았긴 하지만, 10분 정도는 미룰 수 있으니 한번 들어 보도록 하죠.”

셀레나는 수혁을 끝으로 선내로 들어가 식사를 하려 했지만, 제이슨에게 기회를 주지 않으면 피곤해질 거라는 걸 직감하고 선선히 허락했다.

“저는 바이올린이 아니라 피아노를 연주할 거라서요.”

“아, 그래요? 준비되시면 편할 때 시작해 주세요.”

“네, 교수님.”

제이슨은 셀레나가 건네주는 바이올린을 마다하고 피아노가 있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대로 그냥 넘어갈 놈은 아니지.’

수혁은 피아노 덮개를 벗겨 내는 제이슨을 보며 생각했다.

“파가니니를 제법 아는 것 같던데, 리스트라고 들어 봤어?”

제이슨은 연주에 앞서 뜬금없이 질문을 던졌다.

- 289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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