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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 없는 회귀-290화 (290/316)

290화

“적당히 하고 그만 꺼지라고. 할 일이 없으면 네 친구랑 다른 데 가서 놀면 되는데, 우리에게 말을 거는 이유가 도대체 뭐야?”

머리끝까지 화가 난 루나는 보통 때와 달리 강경 대응을 하고 있었다.

“애들 소꿉장난 가지고 뭘 그렇게 당당하게 구는 거야? 승부라고? 누가 보면 대단한 거라도 한 줄 알겠어.”

“네가 먼저 유치하게 사람 신경을 건드렸잖아. 내가 이전부터 쭉 지켜봤는데, 이건 진짜…….”

“루나, 그만해. 내가 이야기할게.”

수혁은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는 루나를 제지했다.

“너, 아까 하려던 이야기가 뭐야?”

“훗, 이제야 물어보네? 거성 전자 부품 사업부를 네가 인수한다는 소문이 있던데, 사실이냐?”

“응, 그런데?”

“푸하하하하, 이런 등신 같은 녀석. 인수 합병을 진행하려면 최소한 회사 사정은 알아보는 건 기본 상식인데 그걸 까먹다니. 어떨 때 보면 쥐새끼같이 영리한데, 또 어떻게 보면 죽을지도 모르고 달려드는 불나방 같단 말이야.”

제이슨은 수혁이 본인의 회사에 로열티를 내야 한다는 사실을 파악하지 못한 줄 알고 있었다.

“네가 WG 측에 압력을 넣기 위해 수수료를 올린다는 건 알고 있었어. 내가 회사를 인수한 이유는 현명길 회장님께 갈 수 있는 피해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서였지.”

“풋, 네가 인수하지 않았으면 기존 인상만으로 만족하려고 했는데, 마음이 변했어.”

“뭐라고?”

수혁은 이미 가격을 15% 올린 상황임에도 제이슨이 더 인상하겠다는 뉘앙스를 풍기자 황당해했다.

“말귀를 못 알아듣네? 잘 들어. 난 기존에 받던 특허 수수료를 15%가 아니라 40%로 인상할 거야.”

“단순히 승부욕이 강한 건 줄 알았는데, 그냥 인간적으로 형편없는 사람인 거였군.”

“후후, 그러니까 왜 이렇게 설치고 다녀? 주변에서 이야기를 안 해 줬어? 날 건들면 험한 꼴을 겪게 될 거라고 말이야.”

제이슨은 승기를 잡았다고 느꼈는지 불쾌해하던 기색은 사라지고 온몸에 여유가 넘쳐 흘렀다.

“WG전자라는 거대 고객을 잃게 되면 너로서도 손해일 텐데, 괜찮겠어?”

“너 내가 누군지 잊은 모양인데? 특허권에서 나오는 수수료는 나에겐 푼 돈일 뿐이야. 그리고 WG가 과연 계약을 해지하려고 할까? 우리가 가진 부품보다 성능이 좋은 건 어디에도 없는데 말이야.”

“네 말이 맞아. 하지만 다행인 건 MK이노베이션에서 보유한 특허가 스마트폰 생산에 있어서 비중이 그렇게 크지가 않다는 점이지. 그리고 가격을 그렇게 무식하게 올리면 제소당할 수도 있는데, 괜찮겠어?”

수혁은 저들이 보유한 특허권의 제한을 받지 않은 부품을 개발한다는 것을 숨겼다.

“어디다 제소하게? 한국? 마음대로 해. 여차하면 한국 기업과의 거래를 모두 끊으면 되니까. 곱게 이야기하면 사정을 좀 봐주려고 했는데, 역시 넌 부드럽게 대해 주면 안 되는 놈이야.”

“언제 부드럽게 대해 줬다고 그래? 누가 들으면 오해하니까 말을 바로 해 줬으면 좋겠어.”

“넌 진짜 바보 같은 놈이야. 거성과의 특허권 사용 계약이 11월이면 끝나는 건 몰랐지? 넌 거성전자 오너에게 사기를 당한 거라고. 좋게 말할 때 지금이라도 빌어라. 지금부터 발생하는 모든 일은 네 혀끝에 달려 있으니까.”

제이슨의 말투는 자상했지만, 사실상 협박이나 다름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수혁아,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사과하는 척이라도 하는 건 어떨까? 넌 잘 모르겠지만, 제이슨은 화나면 앞뒤를 안 가리는 애라서 지금은 비위를 맞춰 주는 게 여러모로 좋을 것 같아.”

루나는 제이슨이라면 수혁네 회사를 아무런 죄책감 없이 공중분해 할 수 있는 인물이란 걸 알았기에 형식적으로라도 사과를 할 것을 종용했다.

“루나, 그게 무슨 소리야? 저런 놈은 맞춰 주면 맞춰 줄수록 상대를 옭아맬 스타일이야. 이럴 땐 강공으로 나가서 다시는 못 건들게 만들어야 해.”

“수혁, 좀만 조용히 말해.”

그녀는 제이슨이 듣지 못하게 조용히 귓속말로 말했지만, 수혁은 오히려 들으라는 듯이 큰 소리로 말했다.

“친구의 소중한 조언을 무시하면 안 되지. 동양의 작은 나라 출신이라 그런가, 신사답지 못한데?”

“후, 특허권 사용 계약을 해지하든 뭘 하든 네 마음대로 해라.”

수혁은 제이슨의 차별적인 발언에 분노가 솟아올랐지만, 꾹 참고 넘어가기로 했다. 그는 애당초 인수 합병의 목적이 시설 확보와 제조 경험이 풍부한 인력을 데려오는 데에 있었고, 부품의 경우 직접 개발에 나설 참이었기 때문에 제이슨의 협박은 무의미했다.

“주변에 다른 친구들도 있는데, 말 좀 삼가지 그래?”

“누구야?”

되는 대로 말을 쏟아 내던 제이슨은 자신을 제지하는 목소리에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스콧, 남의 일에 왜 끼어드는 거야?”

‘아까 날 도와줬던 친구군.’

수혁은 스콧 피닉스가 루나와 함께 도움을 줬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언제까지 툭하면 동양인 운운하며 교양 없이 말할 거냐? 케이턴 대학 MBA는 한국 외에도 일본이나 중국처럼 다양한 국적을 가진 친구들도 있어. 다들 참고 있지만, 네가 내뱉는 말 한마디에 상처를 받고 있다고.”

“쳇, 남이야 알 게 뭐야. 폴, 찰리 그만 가자.”

제이슨은 센 척하며 말했지만, 차별적 발언으로 인해 타국 학생들이 따가운 시선을 보낸다는 것을 알아채고는 급하게 자리를 떴다.

“쓰레기들끼리 알아서 잘 어울려 주니까 피할 수 있어서 편하네. 다들 괜찮아?”

스콧은 제이슨의 일행들이 떠난 것을 확인하고 안부를 물었다.

“고마워, 덕분에 아까 무사히 연주를 마칠 수 있었어.”

“고맙긴, 뭘. 난 인종 차별이라면 치를 떠는 사람이라 가만히 있을 수 없겠더라고.”

스콧 피닉스가 자란 LA는 다른 주보다 유독 이민자들이 많았던 탓에 그의 곁에는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지닌 친구들이 있었다. 따라서 스콧은 특정 국가나 인종을 비하하며 시시덕거리는 찰리나 제이슨에게 분노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사례를 하고 싶은데?”

“훗, 사례 같은 거 받으려고 나선 건 아니니까 마음만 받을게. 그것보다 배우를 하고 싶은 생각 없어? 최근 들어 동양인 배역이 늘고 있는데, 너라면 조연이 아니라 주연도 할 수 있을 것 같거든.”

“나보고 배우를 하라고?”

“혹시 피닉스사라고 들어 봤어? 스콧네 집안이 경영하는 회사인데, 영화랑 연예 계통 쪽에서는 최고라고 알려진 곳이야.”

루나는 자연스럽게 대화에 참여했다.

“극장에서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소개되는 그 피닉스를 말하는 거야?”

“응, 맞아. 현재 우리 아버지가 영화 배급 쪽을 맡고 있고 난 매니지먼트를 책임지고 있어.”

스콧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연기는 젬병이라서 생각이 없지만, 너랑은 친하게 지내고 싶어.”

수혁은 그로서는 드물게 상대에게 호감을 드러냈다.

“하하. 나도 왠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마음에 들었는데, 잘됐네. 그럼, 다음 주 주말에 클럽에 놀러 갈까?”

“좋기는 한데, 내가 춤추고 그러는 건 별로 안 좋아해서…….”

“괜찮아. 어차피 클럽이 내 소유라 우리는 조용한 곳에서 술이나 마시면 되니까. 루나 너도 시간 되면 수혁이랑 같이 와.”

“나야 좋지. 요즘 수혁이 너무 바빠서 심심했었는데, 잘됐다.”

루나는 스콧의 제안에 흔쾌히 응했다.

“벌써 10시인가 보다. 오늘 만나서 반가웠어. 난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어서 먼저 갈게.”

“응, 또 보자.”

배는 어느새 선착장에 가까워지고 있었고, 스콧은 수혁과 루나에게 인사를 한 뒤 일행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 * *

허드슨 타워 근처 공원, 수혁과 루나는 배에서 내린 뒤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오늘 조금 의외였어.”

“뭐가?”

“나한테는 까칠하게 굴었으면서 스콧한테는 엄청 잘해 줬잖아.”

루나는 장난기 어린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날 도와줘서 잘해 준 것도 있지만, 사람 자체도 괜찮아 보이더라고. 비록 1년이지만, 친하게 지내면 우리랑 잘 어울릴 수 있을 것 같았어.”

수혁은 평범한 이유를 들며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나름의 계산을 하고 내린 결정이었다.

‘피닉스사의 아들이면 세계적인 영화배우나 톱스타들과 같은 거물들과 친분이 있을 거야. 나중에 SNS 서비스를 개시할 때 이들을 활용하면 적지 않게(분명) 이득을 볼 수 있을 거야.’

그는 필요에 의해 사람을 사귀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능력이 어느 정도 쌓인 후로는 받은 만큼 타인에게 돌려줄 수 있게 되자 거리낌이 없어졌다.

“스콧은 이 바닥에서도 인간성이 좋기로 유명해서 네 판단이 맞을 거야.”

“딱 봐도 친구가 많을 스타일이긴 해. 그것보다 아까 하려던 말이 뭐였어?”

“응? 어떤 걸 말하는 거야?”

“제이슨이 나타나기 전에 나한테 뭔가를 말하려고 했잖아.”

수혁은 루나에게 갑판에서 있었던 일을 상기시켜 주었다.

“아, 맞다. 네가 예전부터 우리 아빠를 보고 싶다고 말했었잖아.”

“그런 적이 있긴 하지만, 억지로 소개를 받는 건 원하지 않아. 아담 회장님이 섣불리 사람과 친분을 쌓는 타입은 아니시잖아.”

“오, 어떻게 알았어? 가족에게는 한없이 자상하시지만, 타인과는 쉽사리 안면을 트시는 분은 아니시거든.”

수혁은 국제 제품 박람회에서 느꼈던 아담의 인상을 똑똑히 기억했다. 일전에 그는 관계의 물꼬를 트고자 여러 방면으로 노력했지만, 별 진전 없이 첫 만남을 마무리한 경험이 있었다.

“처음에는 널 보는 거에 대해서 시큰둥하시더라고. 하지만 내 베스트 프렌드니까 한 번만 만나 달라고 조르니까 끝내 허락을 하셨어.”

“고마워, 루나. 아담 회장님은 IT와 소프트웨어 업계에서는 존경받는 분이셔서 기회가 닿으면 말씀을 나누고 싶었거든.”

수혁은 루나를 보며 감사한 마음을 표현했다.

“훗. 그러니까 스콧에게 잘 보일 생각하지 말고, 옆에 있는 친구한테 더 잘하란 말이야.”

“하하하, 알았어. 앞으로 너한테 더 잘할게.”

루나의 농담에 수혁은 웃음을 터뜨렸다.

“루나, 회장님은 언제쯤 뵐 수 있을까?”

“이번 주 토요일 저녁에 같이 볼래? 어차피 장소는 우리 집에서 보는 거라 왔다 갔다 하기도 편할 거야.”

“좋아. 정확한 시간만 알려 주면 맞춰서 찾아갈게.”

“벌써 집에 다 도착했네? 후, 마음 같아서는 너랑 맥주 한잔하고 싶은데, 아무래도 안 되겠지?”

허드슨 타워에 도착한 루나는 이대로 헤어지기 아쉬운 눈치였다.

“오늘 이래저래 신세도 졌는데, 안 될 게 어딨어? 괜찮으면 우리 집에 가서 찬식이랑 같이 마시자.”

“오케이. 그럼, 먼저 가 있어. 집에 맥주가 잔뜩 있어서 가지고 갈게.”

“응, 좀 이따 봐.”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수혁과 루나는 각자의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담 회장을 만나기 전에 준비를 단단히 해 둬야겠어.’

활짝 웃으며 집으로 들어가는 루나와 달리 수혁은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계획을 짜고 있었다.

- 291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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