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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 없는 회귀-294화 (294/316)

294화

“SH전자를 가장 잘 운용할 수 있는 인재였기에 성훈 씨를 사장으로 뽑은 겁니다. 남들이 볼 땐 파격 인사다 뭐다 말이 많겠지만, 회사 내에 권성훈 씨보다 나은 사람이 없어서 내린 결정이니 너무 부담 갖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수혁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질문에 답했다.

“죄송하지만,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대표님 입장에선 숙고하시고 결정하셨겠지만, 저는 불안합니다.”

“뭐가 그렇게 불안하신 겁니까? 혹시 감당 못 할 회사를 떠맡긴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사장직을 맡는 것에 대해 싫어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겁니다. 하지만 사회 경험도 얼마 있지 않은 미천한 제가 이제 막 설립되는 회사를 운영하는 건 누구라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성훈은 갑작스럽게 들어온 행운이 좋으면서도 감당을 못하고 있었다.

“예전에 권성훈 씨의 입사 지원서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내용을 보니 우리나라 전자 기업들이 대부분 하드웨어나 완제품 생산에만 집중하지 소프트웨어와 기본 부품을 소홀히 하는 현실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더군요.”

“우리나라 대기업들이 큰돈이 될 만한 사업만 하고, 기초 토대를 이루는 분야는 외면하는 것 같아 보완하고 싶은 마음에 그렇게 썼습니다.”

“우리 회사에서 쌓은 경험을 토대로 사업을 벌일 계획이셨군요.”

“…….”

수혁의 말을 들은 성훈은 당황했는지 말을 잊지 못했다.

“하하, 혹시나 해서 슬쩍 한번 떠본 건데, 이렇게 얻어걸릴 줄은 몰랐네요.”

“대표님 말씀을 부인하진 않겠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일할 때만큼은 최선을 다하려 했으니 오해는 안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조금 답답한 면이 없지 않아 있지만, 정직한 성격인 것 같아서 마음에 드네.’

수혁은 성훈의 답변을 들으며 미소를 지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만의 큰 포부가 있는 법입니다. 하지만 뜻을 펼치려면 적절한 환경이 필요한 법이지요.”

“적절한 환경이라 하시면 SH전자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 그렇습니다.”

“음……. 이런 말씀 드려서 죄송하지만, 여러 루트를 통해 나름대로 알아본 결과 제가 생각하는 기업은 아닌 것 같더라고요.”

성훈은 행여나 수혁의 기분이 상할까 조심스러운 투로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회사를 조사하신 걸 보면 그래도 관심은 있으셨던 모양입니다.”

“아무래도 신경이 쓰여서요. 대표님께서 언급하신 것처럼 우리나라의 취약 분야인 소프트웨어와 기본 부품 쪽으로 창업을 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SH전자는 타 회사의 제품을 대신해서 생산하는 듯 보였습니다.”

“잘 보셨습니다. MK이노베이션이라는 미국 회사에 특허 수수료를 내고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기본 부품을 생산하고 있는 기업을 인수하여 설립한 법인이 SH전자니까요.”

수혁은 순순히 그의 말을 인정했다.

“타사의 도안을 바탕으로 생산을 하는 것이라면 제가 운영하고 싶은 회사와는 거리가 있는 듯 보여서 고민이 됩니다. 차라리 그 시간에 최필재 사장님 밑에서 실력을 키우는 게 더 낫다고 보이거든요.”

성훈은 돈보다는 미래를 위해 투자하고 싶었다.

“SH전자에 대한 저의 비전을 아직 말씀드리지 않아서 성훈 씨가 그렇게 생각하시는 겁니다. 저는 SH전자의 첫걸음을 MK이노베이션으로부터의 독립으로 설정했습니다.”

“그 말씀은 기본 부품 말고 다른 제품을 생산할 계획을 갖고 계신다는 겁니까?”

“원래는 사장직을 수락하시면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상황을 보니 이것저것 가릴 때가 아닌 것 같네요.”

수혁은 성훈을 설득하기 위해서 숨겨 두었던 카드를 공개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회사에 관해서 제가 모르고 있는 부분이 아직 있는 모양이군요.”

“임직원들 모르게 작업하던 게 있었거든요. 저 괜찮다면 사내 화상 프로그램으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보여 드릴 게 있어서요.”

“네, 언제쯤에 접속하면 될까요?”

“바로는 안 되고, 40분 후에 뵙도록 하죠. 저도 짐을 정리하고 준비를 좀 해야 할 것 같아서요.”

“미국은 지금 밤이지 않습니까? 차라리 내일 다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뉴욕은 현재 시각 23시로 화상 대화를 하기에는 늦은 시간이었다.

“아닙니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오늘 모든 논의를 마무리 짓도록 하죠. 아, 최필재 사장님께는 저랑 할 이야기가 있으니 업무 수행이 어려울 것 같다고 말씀드리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럼, 잠시 후에 뵙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수혁은 도서관에 있는 짐을 챙긴 뒤 허드슨 타워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허드슨 타워 5001호, 수혁은 집에 들어오자마자 가방을 내려놓고 화상 프로그램을 실행시켰다.

“벌써 왔어? 오늘은 도서관에서 밤을 새운다고 했잖아.”

“급하게 할 일이 생겼거든. 그것보다 이것들을 스캔 좀 해 줘라.”

수혁은 이전에 스케치했던 생산 공정도를 찬식에게 건네줬다.

“알았어. 바로 해서 갖다 줄게.”

“응, 부탁할게.”

‘시간이 30분 정도 남았으니까 전송할 자료가 뭐가 있는지 살펴봐야겠다.’

수혁은 부품 생산에 들어갈 재료의 비율과 생산 방식에 대해 적어 둔 문서 파일들을 폴더 하나에 모아 두는 중이었다.

“여깄어. 배고플 텐데, 먹을 것 좀 갖다 줄까?”

“아니야, 괜찮아. 수고했어. 대화가 길어질 수도 있으니까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

“훗, 요즘 늦게 자는 게 습관이 돼서 괜찮아. 필요한 게 있으면 이야기하고.”

김찬식 팀장은 수혁이 편하게 일할 수 있도록 문을 닫고 나갔다.

“오셨습니까?”

“네, 대표님. 면접 때 얼굴을 뵙는 건 처음인 것 같습니다. SH소프트의 권성훈 사원입니다.”

“반갑습니다. 강수혁입니다.”

성훈은 약속 시간에 맞춰 화상 프로그램에 접속했다.

“제가 파일을 보내 드릴 테니, 검토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본격적인 대화는 그 이후에 나누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요.”

“알겠습니다, 대표님.”

수혁은 파일을 업로드했고, 성훈은 곧바로 다운을 받아 살펴보기 시작했다.

‘권성훈 사원은 대학, 대학원 시절에 전자공학과 재료공학을 전공했으니 내가 보내 준 파일들을 무리 없이 이해할 거야.’

성훈이 파일을 검토하면서 둘 간에는 침묵만이 맴돌았다. 수혁은 그가 부담 없이 살펴볼 수 있게 화면 밖을 벗어나 침대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대표님, 계십니까?”

“검토를 마치셨습니까?”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보고 있던 수혁은 성훈의 음성에 급하게 일어나 책상에 다시 앉았다.

“양이 방대하고 실전 경험이 풍부하지 않아 정확히 이해하진 못 했지만, 보내 주신 파일이 부품 생산에 필요한 공정도와 공식들이 적혀 있다는 건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저, 그런데 이것들을 정말 대표님께서 작성하신 겁니까?”

성훈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수혁에게 물었다.

“네, 그렇습니다.”

“대단하십니다. 수많은 연구 인력이 다년간 노력해도 실패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혼자 힘으로 이런 세부적인 사안들까지 모두 적어 내실 수 있다니……. 믿겨 지지가 않습니다. 하지만 석연치 않은 점이 하나 있습니다.”

“석연치 않은 점이요?”

기계 분석 프로그램을 활용한 수혁은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성훈의 말에 의아해하였다.

“설비를 갖춘 공장이라면 바로 생산할 수 있게 재료 비율이나 생산에 적정한 환경까지 상세히 적어 놓으셨지 않습니까? 심지어 온도와 습도까지 고려하셨더군요.”

“네, 전자 부품에 들어가는 재료 중에는 기온과 습도에 민감한 것들도 있어서 적정 온도와 습도를 설정하는 건 필수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실제로 실험을 해 보지 않으면 파악하기 어려운 수치들을 어떻게 산출해 내셨냐는 겁니다. 여러 논문을 인용하시고 논리적으로 흠결이 없어서 얼핏 보면 완벽해 보이지만, 실전에서 검증이 되지 않은 생산 공정도는 신뢰성이 있다고 보기 어렵거든요.”

성훈은 보통의 설계도라면 수많은 실험을 거친 후에 완성된다는 걸 꼬집고 있었다.

“흠, 일리가 있는 말씀입니다.”

‘공정대로 생산을 하면 하자가 없다는 걸 알 텐데…….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까?’

수혁은 예상치 못한 질문에 당황했지만, 표정 관리를 하며 할 말을 정리했다.

“일전에 Z1 개발 건으로 WG와 협력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덕에 저는 현명길 회장님과 친분을 쌓을 수 있었고, WG전자 연구소를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었습니다.”

“아, 그럼. WG전자 실험실을 사용하신 적이 있겠군요? 대충 어떤 상황이었는지 그림이 그려지네요.”

“그렇습니다. 참고로 비밀리에 진행된 실험이라 우리 회사 내에서도 저 외에는 아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훗, 알아서 이해해 주니 고맙군.’

수혁은 지레짐작 넘겨짚는 성훈의 모습에 웃음이 터질 뻔했지만, 꾹 참으며 대답했다.

“방금 드린 것들 외에도 성훈 씨께서 관심 있어 하는 제품이 있으면 연구, 개발을 자유롭게 하셔도 됩니다. 이만하면 꽤 나쁘지 않은 제안 같은데, 사장직 수락을 재고해 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사실, 대표님께서 보내 주신 파일들을 살펴보면서 이미 마음을 정했습니다. 맡겨만 주시면 SH전자를 잘 운영해 보겠습니다.”

성훈은 SH전자라면 자신의 비전을 펼치기에 충분히 훌륭한 회사라고 판단했다.

“하하, 좋습니다. 박유신 사장님께 연락을 드려 법인 설립을 조속히 마무리하라고 하겠습니다.”

“저도 슬슬 SH소프트에서의 생활을 정리해야겠습니다.”

“SH전자 사무실을 판교에 얻을 예정이라 짐을 옮기는데, 불편함은 없을 겁니다.”

“사무실에 쌓아 놓은 짐이 상당한데, 다행이네요. 저, 대표님. 괜찮으시다면 오늘부터 업무를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현재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업무가 있으십니까?”

수혁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반문했다.

“10월에 인수한 생산 공장들을 시찰하고 싶습니다. 설립 이후, 빠르게 부품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작업이라서요.”

성훈은 파일 내용을 숙지한 뒤, 시설들을 둘러보며 곧바로 생산이 가능한지 파악하려 했다.

“물론입니다. 잠시 후, 제가 직접 최필재 사장에게 말씀을 드려 업무를 보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조치해 드리겠습니다.”

수혁은 적극성을 드러내는 성훈의 모습에 반색하며 말했다. 이후 이들은 SH전자에 대해서 짧게 대화를 나눈 뒤 화상 프로그램을 종료했다.

‘준비는 모두 마쳤으니, 이제부터는 반격에 들어가야겠어. 비록 치명타는 못 주겠지만, 우리가 만만한 회사가 아니라는 걸 보여 주지.’

수혁은 제이슨이 했던 만행들을 떠올리며 생각에 잠겼다.

* * *

시간은 흘러 11월이 되었다. 완연한 가을에 접어든 뉴욕은 그나마 남아 있던 여름의 열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날이 점점 쌀쌀해지는 것 같아. 그나저나 김건우 사장님께서 조금 늦으시네?’

수혁은 맨해튼에 있는 한 사무실에 건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부터 일을 시키는 건 너무 잔인하니까 오리엔테이션만 간단히 해야겠다.’

이날은 지오스토리 뉴욕 지사에서 근무할 직원들이 미국에 도착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 295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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