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5화
맨해튼 빌딩의 한 사무실, 수혁은 홀로 책상에 앉아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 오셨나 보다.’
사무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수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맞을 준비를 했다.
“대표님, 벌써 와 계셨네요?”
김건우 사장은 수혁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그는 직원들을 픽업하기 위해 버스를 렌트하여 공항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사무실이 널찍하니 보기가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조만간 뉴욕에 제대로 된 지사를 세울 계획이라 당분간만 써야죠.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도록 하고 직원들과 인사를 먼저 나눠야겠습니다. 안녕하세요. SH그룹 강수혁 대표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대표님.”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직원들은 기존에 SH소프트에서 일하던 사람들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10월 공채에서 새로 뽑힌 신입 사원이었다.
“여기 매뉴얼이 있으니 하나씩 받아 가서 주말 동안 천천히 읽어 보세요. 아마 업무를 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수혁은 직원 교육을 받지 못하고 온 신입들을 위해 매뉴얼을 손수 제작했다.
“내일은 일요일이니까 하루 쉬고, 월요일부터 본격적인 업무가 시작될 텐데, 주임과 대리급 사원들은 신입 사원들이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친절히 가르쳐 줬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현재 MBA에 재학 중이라, 여러분들과는 매주 토요일밖에 만나지 못합니다. 제 공백이 느껴지지 않게 선임급 사원에게 지시 사안을 틈틈이 전달할 예정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수혁은 직원들을 세워 놓고 차분히 설명했다.
“혹시, 궁금하신 사안이 있으면 마음껏 질문해 주세요.”
“안녕하십니까, 뉴욕 지사 지점장을 맡게 된 김민호라고 합니다. 지오스토리의 서비스 개시 시점이 정확히 언제인지 알고 싶습니다.”
민호는 SH커뮤니케이션에서 일하다가 최필재 사장이 SH소프트의 오너로 부임하게 되면서 함께 넘어간 핵심 인재였다. 필재는 수혁을 가장 잘 도와줄 수 있는 인재가 누군지 고민하다가 그를 적임자로 여기고 미국으로 보냈다.
“홍보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이용자가 없을 뿐이지 지오스토리는 오늘부터 서비스가 개시되었습니다.”
“그럼, 오늘부터 바로 업무에 돌입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미국 시장 홍보는 어렵더라도 최소한 한국에 있는 고객들은 이용할 수 있게 조처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깜짝 놀랄 수 있는 발언이었지만, 김민호 지점장은 침착하게 대응책을 제시했다.
‘사장님이 사람 하나는 제대로 보내 준 것 같군.’
수혁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기민하게 반응하는 민호를 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지오스토리는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국내 고객들에게 접근할 계획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것보다 전 여러분들이 내주 수요일을 대비하는 데 집중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다음 주 수요일이면 레일로에 배너가 걸리는 날이군요.”
민호는 지점장답게 회사 현안에 대한 파악은 모두 끝마친 상태였다.
“그렇습니다. 수요일이 되면 사이트에 접속하는 고객들의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할 겁니다. 그러니 한국에 있는 서버 관리팀과 긴밀히 연락하여 돌발 상황에 대처할 수 있게 준비를 해 둬야 합니다.”
수혁은 서비스 개시 후 2주간은 서버 관리를 하는 직원이 회사에 항상 상주할 수 있게 지시를 내려뒀다.
“최필재 사장님께서 안 그래도 화요일에는 비상 대기를 하실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한국에 없으니 고생이 많으시네요.”
지오스토리의 대표는 수혁이였는데, 현재 한국에 없는 관계로 필재가 대표 대리를 겸임하고 있었다.
“저도 회사가 정착할 때까지는 야근할 생각이니 지시하실 부분이 있으면 저녁이나 밤에도 편안히 찾아오시길 바랍니다.”
“하하, 감사합니다. 지점장님 덕분에 참 안심이 됩니다.”
수혁은 김민호 지점장이 여러모로 마음에 들었다.
“직급 편제나 이런 부분들은 지점장님께서 편하신 대로 짜 주세요. 사장님, 임직원분들이 지낼 숙소는 어디에 있습니까?”
“이곳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에 지낼 곳을 마련해 두었습니다.”
김건우 사장은 수혁의 질문에 곧장 대답했다.
“잘하셨습니다. 다들 피곤하실 텐데, 이만 해산할까요?”
“대표님, 전 잠시 직원들과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월요일 근무를 대비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한 것 같아서요.”
“알겠습니다, 사장님. 서로 할 이야기들이 있다니까 가시죠. 지점장님, 대화가 끝나면 문단속만 신경 써 주세요.”
“네, 대표님.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수혁은 직원들에게 인사를 한 뒤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새로 부임한 지점장께서 의욕이 넘치시더군요.”
건우는 맨해튼 거리를 걷던 중 먼저 말을 걸었다.
“어떤 분인지는 더 지켜봐야 알겠지만, 기대가 되는 건 사실입니다. 이젠 어디로 가십니까? 전 근처에서 친구랑 약속이 있어서요.”
“저야 뭐 집에 들어가서 가족들을 돌봐야겠지요.”
“벌써 8시가 넘었군요. 가족들이 기다릴 테니, 어서 들어가 보세요.”
“대표님,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왜 이러시지?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나?’
수혁은 건우의 표정이 심상치 않음을 알아챘다.
“이전에 저랑 함께 보셨던 건물 부지 있지 않습니까?”
“네. 오래된 건물이 매물로 나와 토지와 함께 사들인 다음, 철거하고 다시 짓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SH그룹이 세계적인 기업으로 발돋움하기 위해서는 미국 시장 공략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수혁은 뉴욕에 지오스토리뿐만 아니라 다른 계열사 직원들도 사용할 수 있는 지사 건물을 건설할 계획이었다.
“토지 매입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지만, 철거 후 건물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뉴욕시의 승인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행정 당국에서 재정상의 이유를 근거로 승인을 미루고 있습니다.”
“이상한 일이네요. 현재 회사 재정 상황은 매우 양호한 편이라 공사 대금 마련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상황이거든요.”
수혁은 SH그룹에 쌓인 사내 유보 금액이 충분한 것을 확인하고 일을 추진했기에 의아해할 수밖에 없었다.
“제가 재정 상황이 요약된 보고서까지 들이밀어 봤지만, 공원과의 거리가 상당히 가까워 지금 당장은 승인이 어렵다는 답변만 돌아왔습니다. 일조량이 줄어들면 식물에 해를 끼칠 수 있다며 황당한 이야기만 계속하더군요.”
“임대업도 아니고 일자리 창출에 도움이 되는 기업이 들어오겠다는 걸, 행정 당국이 막다니 도저히 이해가 안 됩니다. 흠, 일단 제가 따로 알아보겠으니 사장님께서는 귀가하세요. 가족들이 기다리겠습니다.”
“믿고 맡겨 주신 일을 잘 처리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건우는 힘없이 대답하고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떤 놈이 뒤에서 수작을 부린 것 같은데, 그게 아니고서는 설명이 안 되잖아?’
수혁은 생각에 빠진 채 뉴욕의 한 클럽으로 가고 있었다. 그는 스콧이 운영하는 클럽에서 유명 가수들과 할리우드 스타들을 만나기로 약속을 한 상태였다.
“어딜 그렇게 바쁘게 가길래 몇 번을 불러도 대답을 안 하냐?”
“제이슨, 여긴 웬일이야?”
제이슨은 건널목을 건너려는 수혁을 발견하고 수차례 불렀지만, 생각에 빠져 있던 탓에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애들이랑 팝에서 술 마시다가 네가 있길래 나와 봤다. 그것보다 SH전자에서 계약 연장을 거부했다고 들었어.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냐?”
“그건 네가 알 바가 아닌 것 같은데? 친구들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조용히 돌아가라.”
수혁은 제이슨의 질문에 답변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넌 감정을 다스리는 법부터 배워야겠어. 당장의 수익 창출원을 포기하고 자존심을 지킨 다라. 멋있긴 하지만, 밑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죽을 맛이겠어.”
“생각해 줘서 고맙긴 한데, 너랑 노닥거릴 시간이 없다. 술 곱게 마시고 잘 들어가라.”
“하여간, 보면 볼수록 건방진 놈이야. 너 뉴욕에 건물을 지으려고 한다면서?”
“너 그거 누구한테 들었어?”
“푸하핫, 이제야 반응이 오네? 왜 궁금해?”
제이슨은 무섭게 노려보는 수혁의 눈빛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비아냥거렸다.
“넌, 아직 우리의 힘을 잘 모르는 것 같아. 그러니까 지금도 꼿꼿이 서서 나한테 대들고 있는 거 아니겠어?”
“그런 건 잘 모르겠고 이야기해 줘서 고맙다. 어떤 버러지 같은 놈일까 한참을 고민했는데, 덕분에 궁금증이 해결됐어.”
“고맙긴, 앞으로도 재밌게 해 줄 테니까 기대하라고.”
수혁과 제이슨의 신경전은 끝날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이러다가 늦겠어. 수고해라.”
“그래, 잘 가라. 밤길 조심하고.”
약속 시간이 임박한 것을 확인한 수혁은 신호가 떨어지자 지체없이 건널목을 건넜다.
‘더 이상 지체하면 안 되겠어. 어떤 식으로든 한 방 먹여 주지 않으면 분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아. 후, 애들을 봐야 하니까 일단 흥분을 좀 가라앉히자.’
수혁은 주먹을 부서질 듯이 쥔 채 평정심을 되찾으려 노력했다.
* * *
맨해튼 끝자락에 위치한 클럽, 수혁은 북적이는 음악 소리를 들으며 스콧을 만나러 가고 있었다.
“수혁, 여기야.”
“응, 금방 갈게.”
수혁은 룸 앞에서 손을 흔드는 스콧을 발견했다.
“빨리 들어가자. 세레나랑 저스틴이 널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어.”
“다들 생각보다 빨리 왔네?”
스콧은 수혁을 데리고 룸 안으로 들어갔다.
“헤이, 수혁. 왜 이렇게 늦었어?”
“오는 길에 아는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를 하다 보니까 그렇게 됐어.”
“어쨌든 다 모였으니까, 이젠 마시자. 이쪽으로 앉아.”
세레나와 저스틴은 수혁을 반갑게 맞아 주었다. 이들은 미국에서 떠오르는 하이틴 스타로 각각 연기와 음악으로 큰 인기를 끌고 있었다. 스콧 주변에는 연예인들이 많았는데, 대부분 사람은 돈이 많고 잘생긴 수혁에게 호감을 가졌다.
“우리에게 따로 할 말이 있다면서?”
저스틴은 독한 위스키를 목구멍에 털어 넣으며 물었다.
“뭔데? 설마, 나랑 데이트라도 하고 싶다는 건 아니겠지? 너라면 당장 오늘 밤도 괜찮은데, 넌 어때?”
“야, 그러면 너만 부르지 나까지 왜 불렀겠냐?”
세레나가 고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유혹하자 저스틴은 가볍게 핀잔을 줬다. 이날 모임은 수혁이 스콧에게 부탁하여 이루어진 자리였다.
“바쁜 와중에도 이렇게 와 줘서 고마워. 내가 너희들을 부른 건 우리 회사에서 새로 오픈하는 사이트를 소개하기 위해서야.”
“아, 맞다. 너희 회사에서 포털도 운영한다고 했지?”
“이번에는 포털 쪽은 아니고 전 세계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해 봤어. 너희들처럼 대중의 인기로 먹고사는 사람들에게는 딱 좋은 사이트니까 한번 들어 봐.”
수혁은 서류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낸 다음, 지오스토리에 접속했다.
“네가 다녔던 학교 이름이 선민고등학교랑 한국대학교구나.”
“풋, 저스틴 방금 네 발음 엄청 웃겼던 거 알지?”
“참네, 그럼 네 발음은 괜찮은 줄 알아?”
“애들아, 잠시만 집중 좀 해 줄래? 지금부터 지오스토리에 대해서 짧게 이야기해 줄게.”
수혁은 설명을 위해 부산스러운 분위기를 가라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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