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8화
11월 중순의 뉴욕은 가을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쌀쌀한 날씨였지만, 아직 산책하지 못할 정도로 춥지는 않았다. 케이턴 대학 캠퍼스에 심어진 나무들은 단풍이 완연히 들어 가을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고, 수혁과 카일은 경영대학원 근처를 걸으며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학기 내내 대화를 나눈 적도 없는데, 왜 갑자기 나한테 관심을 보이는 거야?”
카일 그레엄은 아무리 고민해도 수혁이 자신에게 접근할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12월 선거 때문에 걱정이 많아 보이던데? 어느 뉴스를 봐도 잭 대통령의 재선이 거의 확실시한다는 이야기뿐이고, 너희 아버지에 관한 건 거의 나오지도 않잖아?”
존 그레엄은 잭 웰링턴과 토론도 하고 미국 전역에 유세도 돌았지만, 화제성 측면에서 크게 밀리고 있었다. 평소 사람 좋고 매너가 좋기로 유명한 존이었지만, 오히려 그런 성격 탓에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이 부족하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로 상황이 좋지 못했다.
“그래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뭔데? 사람 약 올리려고 나오라고 한 건 아닐 거 아니야.”
“문제 제기만 하고 해결책을 제시해 주지 않는 사람처럼 무책임한 사람은 없지. 걱정하지 마. 너와 나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방안을 알려 줄 참이니까.”
“설마, 전세를 뒤집을 방책이라도 있는 거야?”
카일은 놀라운 사업 수완과 수업에서 보여 준 퍼포먼스로 인해 처음 이야기를 나눔에도 수혁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이틀 전 뉴스를 봤는데, 주지사 선거와 의원 선거는 박빙이지만 대통령 선거의 경우 지지율 차이가 25% 정도 되더라고.”
“분하지만, 우리 아버지는 잭 웰링턴에 적수는 못 돼. 그 사람은 타고난 선동가라서 우리 아버지같이 차분하신 분하고는 상성 상 안 맞아.”
“확실히 판을 뒤집기는 쉽지 않아. 하지만 이대로 선거에서 참패한다면 존의 정치적 입지는 크게 흔들리게 될 거라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지.”
“후, 아무리 너라도 별수 없는 모양이네. 하긴 이 상황에서 어떤 누구라도 승산이 있다고 이야기하기는 어려울 테니까.”
수혁이 팔짱을 낀 채 신중한 모습을 보이자 카일은 한숨을 쉬며 자조 섞인 반응을 보였다.
“질 땐 지더라도 가능성 정도는 보여 줘야 현재의 입지를 지키실 수 있을 거야. 어차피 당내에서 유력 후보가 없어서 총대를 대신 메신 거잖아.”
“선거에서 지면 다 똑같은 거 아닌가?”
“승부를 예측할 수 없거나 승산이 있을 때 진다면 비난을 피하기 어렵겠지만, 이슈를 선점하고 마지막에 선전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면 이번 대선은 아니더라도 다음 대선을 노릴 수 있는 정치인이라는 이미지를 구축할 수 있게 돼.”
“음, 듣고 보니 네 말이 맞는 것 같아. 우리 아버지는 좋은 평판과 안정감이 강점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그 점 때문에 리더로서는 부족하다는 평가가 적지 않았거든.”
카일은 수혁의 말에 공감했다.
“잭 웰링턴이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둔 게 없어도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천부적인 이슈메이커이기 때문이야. 만약 존이 대선에서 지더라도 의원 선거와 지방 선거에서 유의미한 성적을 끌어낼 수 있다면, 지금처럼 패전 투수 취급을 받는 게 아니라 정계를 이끄는 거물로 발돋움할 수 있어.”
“나도 말에 동의해. 그럼, 우리를 어떻게 도와줄 건지 이야기해 줄 수 있어?”
“대책은 이미 다 세워 둔 상태라 당장 말해 줄 수 있긴 하지만, 그전에 내가 존과 대면할 수 있는지를 알아야 해.”
“물론이지, 마침 뉴욕에 캠프 본부가 있어서 당장 내일이라도 소개해 줄 수 있어.”
카일은 주말이면 종종 아버지의 유세를 도와주러 다녔기에 선거 캠프에 아는 사람이 적지 않아 수혁의 부탁을 손쉽게 들어줄 수 있었다.
“잘됐네. 그럼 자세한 사안은 존과 함께 논의하는 것으로 하고, 일단 강의실로 돌아가자. 곧 수업이 시작되겠어.”
“알겠어. 오늘 중으로 아버지한테 말씀드리고 약속 시간과 장소를 바로 알려 줄게.”
대화를 마친 수혁과 카일은 강의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다음날이 되었다. 수혁은 수업이 끝나자마자 평화당 선거 캠프로 향하고 있었다. 캠프 사무실은 허드슨 타워에서 도보로 20분 거리여서 오가는 데 불편함이 없었다.
“누구십니까?”
경호원으로 보이는 남성이 사무실에 들어가려는 수혁을 팔로 막아서며 물었다.
“저는 강수혁이라고 합니다. 오후 5시에 존 그레엄 의원을 만나기로 했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남자는 수혁의 입에서 존의 이름이 거론되자 곧바로 확인에 들어갔다.
“아, 네. 바로 들여보내겠습니다. 수혁 씨, 안으로 들어가면 후보님이 계신 곳으로 안내할 직원이 나올 겁니다. 그분을 따라서 가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수혁은 가볍게 목례를 한 뒤 사무실에 입장했다.
‘역시, 대국이다 보니 선거를 해도 스케일이 엄청나네.’
평화당 선거 캠프는 큰 면적의 부지를 통째로 빌려 선거기간에만 쓸 가건물을 세웠다. 캠프는 전략, 홍보, 정책 등 여러 파트를 정한 뒤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을 고용하여 총력전을 펼치고 있었다. 캠프 본부는 기자 회견을 할 수 있는 공간부터 설문 조사가 이루어지는 전화실까지 다양한 기능을 소화할 수 있었고, 족히 수 백명은 돼 보이는 직원들로 인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강수혁 대표님이시죠?”
금테 안경을 쓴 중년의 남성이 수혁을 알아보곤 다가와 인사했다.
“네, 그렇습니다.”
“어서 오세요. 전 메디슨 전략실장입니다.”
“감사합니다, 후보님은 어디에 계신가요?”
“방금 기자와 인터뷰를 마치고 대표님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따라오시죠.”
메디슨은 수혁을 데리고 캠프 깊숙한 곳에 위치한 방으로 데려갔다.
똑-똑
“들어오세요.”
노크와 동시에 방 안에서 존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메디슨은 문을 열고 수혁과 함께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바쁜 와중에 걸음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만남을 제의한 사람이 찾아뵙는 건 당연한 일이지요.”
존 그레엄이 반갑게 맞이하자 수혁도 미소를 지으며 점잖게 대응했다.
“수혁, 계속 서 있지 말고 여기 와서 앉아.”
“알겠어, 카일.”
카일은 금일 미팅에 동석하기로 했는데, 이는 수혁이 따로 요청해서였다.
‘존은 인성이 바르지만, 최신 트렌드와 세상의 흐름에는 조금 무관심해 보여. 내가 설명을 할 때 카일이 옆에 있다면 크게 도움이 될 거야.’
수혁은 카일을 보며 생각했다.
“저는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을 테니 필요한 자료 같은 게 있으면 편하게 호출해 주십쇼.”
“의원님, 괜찮으면 실장님께서도 제 이야기를 함께 들어주셨으면 하는데요.”
“아, 그렇습니까? 실장님, 급한 용무가 없다면 이쪽으로 오세요. 대표님께서 중요하게 논의할 게 있다고 하니 같이 들어 봅시다.”
존은 수혁의 부탁에 나가려는 메디슨을 붙잡았다.
‘캠프 전략실장이면 사실상 캠프의 전반적 운영을 맡고 있다고 봐도 돼. 지원을 끌어낼 수만 있다면 우리에게 엄청난 도움이 될 거야.’
수혁이 메디슨을 동석시킨 데에는 나름의 포석이 있었다.
“카일에게 들어 보니, 기울어진 판세에 변화를 줄 수 있는 묘안이 있으시다면서요?”
존은 인사치레는 생략하고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네. 선거 승리를 보장하진 못 하지만, 자유당을 흔들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 왔습니다.”
“흠, 제가 세운 선거의 기조가 네거티브를 지양하자입니다. 혹시, 상대 당을 비난하는 행위나 모략을 꾸미는 거라면 정중히 거절하겠습니다.”
“초면에 이런 말씀을 드려서 죄송하지만, 참 이기적이시네요.”
“말씀이 과하십니다.”
수혁의 발언을 들은 메디슨은 낯빛을 붉히며 불편한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기분이 상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상대의 흠을 잡지 않고 매너 있는 승부를 펼치려는 존 의원님께 존경심이 듭니다. 하지만, 선거 하나만 바라보고 있는 당원들과 수많은 지지자를 떠올리면 조금 안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으신 모양이군요.”
“의원으로서는 훌륭한 방식이지만, 리더로서는 부족하다고 판단됩니다. 리더라면 무릇 지지 세력이 한 곳으로 규합할 수 있게 비전과 방향을 제시하고, 언론에서 평화당이 자주 거론될 수 있게 메시지를 던져야 하는데. 의원님께서는 인격적 고결함을 유지하고 싶은 마음에 소극적인 행보를 걸어오신 것처럼 보입니다.”
수혁은 존의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했다.
“제가 여태껏 수차례 상원으로 뽑힐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정직함과 도덕성에 있었습니다. 젊은 분이 보실 때는 이 방식이 고루해 보이겠지만, 네거티브를 하지 않겠다는 원칙이 저의 고집에서 비롯된 건 아님을 알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존은 차분하게 이야기하려고 했지만, 목소리 끝이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후보님과 평화당이 안정적인 지지율을 확보하고 있다면 옳은 말씀이시겠지만, 판을 흔들어야 하는 지금 같은 시기에는 아쉬운 감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수혁은 직언으로 인해 존의 자존심이 상했음을 눈치챘지만, 끝까지 주관을 굽히지 않았다.
“아버지 제가 누구 편을 들려는 건 아니지만, 현재 상황에서는 수혁의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여론의 흐름이 자유당 쪽으로 치우쳐져 있는 바람에 당내 후보들 사이에서도 아버지의 리더십에 불만을 제기하는 자들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불편하신 건 알겠지만, 일단 이야기를 들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여요.”
카일은 수혁이 기대했던 대로 적절한 타이밍에 대화에 참여했다.
“실장님 생각은 어떻습니까?”
“대표님이 비록 거칠게 말하기는 하지만, 현실에 대한 직시는 확실하다고 여겨집니다.”
“음, 알겠습니다. 모두의 의견이 이렇다면 대표님의 방책이 무엇인지 한번 들어 봐야겠네요.”
존은 내심 수혁과 대화를 피하고 싶었지만, 아들과 메디슨의 조언에 마음을 누그러뜨렸다.
“이야기를 듣기 전에 하나 궁금한 게 있습니다.”
“네, 뭐든 편하게 물어보세요.”
그는 본격적인 대화에 앞서 만남 제의가 들어왔을 때부터 갖고 있던 궁금증을 해소하기로 했다.
“대표님은 엄밀히 말하면 자국민도 아니고 전 세계를 대상으로 기업을 운영하고 계시는데, 왜 굳이 정치판에 뛰어들려고 하시는 겁니까?”
미국은 표현의 자유가 강력히 보장되어 사기업이 특정 정당을 지지하는 행위가 이상한 것은 아니었으나, 보통의 외국 기업 오너들은 중립을 지키곤 했다. 왜냐하면 지금 당장 대세로 보이는 집단에 섣불리 줄을 섰다가 다음 선거 때 역풍을 맞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나중에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질문이 나왔으니 바로 답변을 드려야겠네요.”
수혁은 머릿속으로 해야 할 말을 신중히 고른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후보님을 도와드리기로 나선 배경에는 정치적 신념이나 사회 문제에 대한 깊은 관심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뭣 때문에 우리를 돕겠다는 겁니까?”
존은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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