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9화
“제가 후보자님을 지원하기로 결정한 이유는 MK그룹에서 지속적으로 우리를 방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혁은 평소와 달리 돌려 말하지 않고, 바로 속내를 드러냈다.
“MK그룹이면 필 모리가 회장으로 있는 기업 아닙니까?”
필은 제이슨의 아버지로 정계와 재계를 막론하고 거대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정확히 말씀드리면 아들인 제이슨 모리가 시시때때로 저를 괴롭히는 바람에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선거판에 뛰어든 겁니다.”
“음, 제이슨은 의원들 사이에서도 골칫덩어리로 유명하지요. 필의 역할을 물려받아 의원들과 직접 소통을 하는데, 방식이 거칠고 돈으로 뭐든 해결하려고 하는 못된 버릇이 있습니다.”
존은 제이슨의 성격을 떠올리며 수혁이 왜 골치 아파하는지 대충 짐작이 되었다.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MK그룹을 견제하면서 저와 평화당을 도와주시겠다는 겁니까?”
“조금 전에 제이슨이 돈으로 해결한다고 하셨는데, 정확히 어떤 의미이신가요?”
“의원들과 사이가 깊어지면 은근슬쩍 돈으로 매수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심증만 있고 물증이 없어서 딴지를 걸기는 애매하고요.”
“주려는 뉘앙스를 취했을 때 받지 않겠다는 분들에게는 안 주고 받을 것 같은 사람에게는 주는 방식으로 사람을 포섭할 겁니다.”
“우리가 모르는 무언가를 아시는 겁니까?”
수혁의 묘사가 그 상황에 있었던 것처럼 구체적이자 존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뭐, 추측이긴 하지만, 마냥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걸 한번 들어 보시죠.”
“이건 녹음기 아닙니까?”
“녹음 파일 외에도 핸드폰으로 촬영한 영상도 있습니다.”
그는 스마트폰으로 제이슨이 친구들과 나눈 대화 중 일부를 공개했다.
“돈도 없는 놈이 자존심만 엄청 세더라고. 내가 슬쩍 떠보니까 정색을 하면서 선을 긋더라니까?”
“와, 그건 좀 의외인데? 자유당에 있는 제레미 의원은 돈 준다고 하니까 환장했잖아.”
“돈이 자유당 평화당 가리는 줄 알아? 내가 말을 안 해서 그렇지, 평화당에도…….”
영상 속에서 제이슨이 평화당을 언급하며 불편한 이야기를 꺼내려고 하자 수혁은 급히 정지 버튼을 눌렀다.
“그냥 끝까지 듣도록 하죠. 이거 보아하니 보통 문제가 아닌 것 같군요.”
존은 굳은 얼굴로 영상을 다시 켤 것을 권했다.
“그전에 잠시만요. 이런 자료들은 어디서 구하신 겁니까? 우리 측에서 사용하기에는 파장이 너무 클 컷 같아서요.”
메디슨 전략실장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질문했다.
“그냥 주변 지인들이 제이슨이 자주 다니는 술집에서 들은 대화를 저에게 전달해 준 겁니다. 물론 이 중 몇 개는 케이턴 대학에서 제가 직접 촬영한 것도 있고요.”
수혁은 제이슨의 약점을 잡기 위해 찬식과 믿을 만한 측근을 동원하여 제이슨이 자주 출몰하는 장소에서 이들이 나누는 대화를 녹음 혹은 촬영을 부탁했다. 술이 들어가면 조심성이 없어진다는 것을 노린 계획이었지만, 제이슨은 술집이 아니라 그 어디든 누구의 눈치를 보면서 이야기하는 스타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학교에서도 쓸 만한 것들을 제법 건질 수 있었다.
“죄송하지만, 이거 불법인 거 아시죠? 내용이야 어쨌든 이런 것들을 우리가 쓸 수 없습니다.”
“법조인의 관점에서 봤을 땐 수집 과정에서 정당성을 상실했기에 증거 목록에 채택될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법원에 제소하려는 게 아니라 선거를 치르고 있는 거 아닙니까?”
“흠……. 진실 여부를 떠나서 자유당과 잭 대통령의 이미지에 흠집을 낼 수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메디슨은 수혁이 말하는 바를 금세 이해했다.
“네, 제가 경험한 바에 따르면 언론사가 원하는 건 진실보다는 판매 부수를 올릴 수 있는 자극적인 사건이거든요.”
“대표님 말씀에 일리가 있다는 건 인정합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습니다. 200년 가까운 역사를 지닌 평화당에서 몰래 촬영한 영상으로 상대 당을 공격하는 건 격에 안 맞는 것 같아서요.”
“아버지, 지금 격을 따지기에는 우리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체면은 잠시 미뤄 두고, 실리적인 방향을 모색하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요?”
존의 말을 들은 카일은 주변의 이목을 지나치게 신경 쓰는 아버지의 행보가 답답하게 느껴졌다.
“네가 아직 어려서 잘 모르는구나. 정치인은 실리를 추구하더라도 적합한 형식과 명분을 갖춰야 한다. 그냥 무턱대고 일을 진행한다면 그건 공인이 아니라 기회를 잡으면 물어뜯으려는 사람처럼 보일 뿐이야.”
“만약 수혁이 평화당에 불리한 증거들을 자유당에 가져다줬으면 어땠을까요? 저쪽에서는 자료를 적절히 가공한 다음 엄청난 공세를 펼쳤을 거예요. 아버지께서는 그동안 절제된 언행으로 품격 있는 정치인이라는 평을 들으셨지만, 한편으로는 그게 행동을 제약하고 있다고요.”
카일은 평소 화끈한 발언을 서슴없이 하는 잭이 증거를 손에 쥐고 평화당을 흔들면 위화감이 없지만, 점잖은 이미지가 구축된 존이 한다면 어색해 보인다는 것을 지적했다.
“그래서, 나도 잭이나 다른 정치인들처럼 쇼라도 하란 말이냐?”
“전 단지 현실이 그렇다는 걸 짚었을 뿐입니다. 현재 어머니를 비롯한 집안 식구들이 아버지 하나만 바라보고 헌신하고 계신 건 알고 계시죠? 아무리 당과 지지자들로부터 선거비를 지원받고 있다고는 하지만, 우리가 지출하는 비용도 만만치 않다고요.”
“그렇게 감정을 못 다스릴 거면 그만 집으로 돌아가.”
처음엔 건설적으로 보이던 대화는 점점 소모적인 양상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카일, 조금만 진정하는 게 어때? 가족, 친지들이 본인을 위해서 고생하는 걸 모르실 분이 아니잖아. 흥분을 좀 가라앉히고 상황을 냉정하게 바라보자고.”
“…….”
수혁이 어깨를 두드리며 나지막하게 이야기하자 카일은 자신의 발언이 지나쳤다는 것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의원님이 어떤 의미로 말씀하셨는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그래서 저도 대중들이 거부감을 덜 느낄 만한 방식을 생각해 왔습니다. 그전에 확답을 받고 싶은 게 있습니다.”
“네, 뭐든 편하게 말씀하세요.”
존도 대화가 진행됨에 따라 이전보다 과감한 액션을 취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기에 웬만한 것은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었다.
“제가 제시하는 안을 그대로 따라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당의 무게감을 최대한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대책을 마련했긴 했지만, 의원님으로서는 거부감이 좀 들을 수 있거든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대표님께서 보여 주신 영상을 보고 이 사건을 확실히 처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확실한 처리요?”
“만약, 우리 당에서 제이슨에게 뇌물을 수수한 자들이 있다면 법적인 처벌은 차지하더라도 당 차원에서 조사를 진행하여 죄가 있는 자들에게 강력한 징계를 내릴 겁니다.”
존은 선거보다는 당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비리를 근절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의원님, 선거가 얼마 안 남은 상황에서 내부 문제를 터뜨려 버리면 다른 후보들이 피해를 볼 수도 있습니다. 부디, 숙고하시고 결정해 주시길 바랍니다.”
메디슨은 우려 섞인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잠시만요. 저에게 좋은 아이디어가 있습니다.”
“좋은 아이디어요?”
“네, 원래는 제가 가진 자료 중 평화당에 유리한 부분만 활용하여 자유당과 제이슨을 궁지에 빠뜨리려고 했지만, 의원님 말씀을 들어 보니 그렇게 할 필요가 없을 거 같아서요.”
“어차피 우리 당도 이 문제를 피할 수는 없었을 겁니다. 제이슨이 혼자 죽을 놈은 아니거든요.”
존은 제이슨이 뇌물 명단을 오픈할 것을 염두에 두고 이야기했다.
“제이슨이라면 그럴 수 있겠지만, 필 모리 회장께서 이성이 있다면 정치권을 적으로 두는 멍청한 선택은 안 할 겁니다. 제가 수집한 자료에 의하면 자유당 의원이 2명 평화당 의원이 1명이었지만, 이보다 더 많은 숫자가 뇌물을 받았을 거 같거든요.”
“사건이 수면 위로 올라오면 대표님이 언급한 세 사람만 처벌을 받지 수사가 확대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대통령은 지금 승리가 목전에 있다고 생각할 거니까요.”
대화를 잠자코 듣던 메디슨은 첨언했다.
“정리하면, 자유당 측 2명만 선택적으로 공격해도 우리 당은 피해를 볼 일은 없다는 이야기군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아까 말씀드렸듯이 더 좋은 방법이 떠올랐습니다.”
수혁의 말을 들은 존과 일행들은 숨을 죽인 채 그의 입에서 어떤 아이디어가 나올지 기다렸다.
“일단, 익명의 제보자로부터 제이슨 모리가 평화당 의원과 모종의 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을 스스로 공개하시고, 당을 제대로 운영하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 사과 성명을 내세요. 그 후에 관련 제보를 추가적으로 받을 거라는 것도 언급하시고요.”
“우리의 흠을 먼저 공개하면 추후에 자유당과 관련된 증거들을 공개해도 자연스러워 보이겠군요.”
존은 수혁의 어떤 것을 의도하는지 금방 알아챘다.
“맞습니다. 그 후에 제가 주는 자료들을 익명의 제보자가 준 것으로 포장하면 자유당에서도 문제 삼기 어려울 겁니다. 뇌물 사건에 이의를 제기하면 민심에 위반하는 행위일 테니까요.”
수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당내 반발은 어떻게 무마하실 겁니까?”
“어차피 장기적으로 볼 때 우리에게 국면을 유리하게 끌어갈 수 있지 않습니까? 예민한 시기에 공개했다고 비판에 들어오면 제가 다 감수할 테니 여러분들은 절 믿고 따라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의원님.”
후보의 의지가 예상보다 강한 것을 확인한 메디슨은 말을 아끼기로 했다.
“내일 당장 사과 성명을 발표할 테니, 홍보실장에게 준비해 달라고 전해 주세요.”
“저, 의원님. 언론사를 통해 사실을 공개하는 것도 좋지만, 지오스토리를 활용해 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지오스토리면 대표님이 운영하시는 SNS 사이트 아닙니까?”
뜻밖의 제안에 놀란 존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문했다.
“네, 지오스토리의 주 이용 고객층은 10대부터 30대까지인데, MK그룹 사건을 터뜨리면 상대적으로 투표율이 저조한 젊은 층의 투표 참여를 끌어낼 수 있을 겁니다.”
“좋은 생각이십니다. 평화당은 자유당에 비하면 지지자의 평균 연령이 어리기 때문에 선거에도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메디슨은 수혁의 의견에 적극적으로 동조했다.
“평화당의 주요 공약들을 살펴보면 건강 보험 개선과 친환경 에너지의 개발처럼 대중들이 공감할 만한 정책들이 많이 있습니다. 의원님께서 지오스토리를 통해 이런 정책들을 친절하게 설명하고 유권자들과 실시간으로 소통한다면 선거에 적지 않은 반향을 불러올 것입니다.”
“실시간 소통이요?”
“네, 지오스토리에 실시간 방송 기능이 있거든요. 의원님처럼 고위 인사가 네티즌들과 격 없이 소통하면 대중들은 신선한 충격을 받을 겁니다.”
‘이번 일만 잘 풀리면 MK그룹의 영향력도 많이 약화될 거야.’
수혁은 평화당을 위하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지만, 이면에는 제이슨을 견제하기 위한 의도가 숨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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