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0화
케이턴 대학 캠퍼스, 수혁은 수업을 듣기 위해 강의실로 향하고 있었다.
“수혁, 괜찮아? 주말부터 널 두고 엄청 시끄럽더라고. 후, 괜히 시끄러운 일에 휘말린 게 아닌가 해서 많이 놀랐어.”
“어차피 언젠가는 터질 일이여서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있어.”
수혁은 루나의 걱정이 무색하게 태연한 반응을 보였다.
“제이슨을 조심해. 화가 나면 앞뒤를 안 가리는 녀석이거든.”
“훗, 그놈이 어떤 심정일지는 직접 봐야 알겠지만, 지금은 아무 짓도 못 할 거야.”
“하긴, 각종 언론부터 SNS까지 제이슨을 주시하는 상황이라 섣불리 행동하기는 어렵긴 하지.”
루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혁의 말에 동의했다. 잠시 후 이들은 강의실에 도착했다.
‘저렇게 의기소침한 꼴은 처음인데?’
제이슨은 강의 시간이 아니면 친구들과 왁자지껄 떠들곤 했다. 그런 그의 행동에 짜증이 난 친구들이 적지 않았지만, 수혁을 제외하면 누구도 제이슨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제이슨, 왜 이렇게 조용히 있는 거야?”
폴 쉘턴은 가만히 앉아 있는 제이슨에게 말을 걸었다.
“생각할 게 좀 있어서 그런 거니까 신경 안 써도 돼.”
“뉴스에서 떠들어 대는 것 때문에 그런 거지? 내가 볼 땐 별거 아니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훗, 걱정은 무슨. 때를 기다리는 것뿐이니 오버하지 마라.”
제이슨은 폴을 말을 가볍게 웃어넘겼다.
“그것보다 의외다? 난 네가 여기 오자마자 강수혁을 찾아갈 줄 알았거든.”
폴은 제이슨의 평소 성격이라면 본인을 궁지로 몰아넣은 수혁에게 시비를 걸 거라고 예상했지만, 의외로 가만히 있자 궁금증이 생겼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다 묻히게 돼 있어. 그리고 선거만 끝나면 아니다. 당분간은 말을 아껴야 하니까 더 이상 묻지 마라.”
제이슨은 아버지인 필 모리가 말조심하라고 신신당부했기에 논란이 될 수 있는 발언은 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은 상태였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그렇게 이야기하니까 안심이 되네.”
“후, 됐고 수업 끝나면 술이나 마시자.”
“괜찮겠어? 지금 네 얼굴이랑 신상이 미국 전역에 쭉 퍼져 있잖아.”
“됐어, 그런 거 일일이 신경 썼으면 애당초 학교에 나오지도 않았어.”
“그러게, 학교에 안 나올 줄 알았는데. 배짱 한번 두둑한데?”
“뭐야, 여긴 뭐 하러 왔어?”
대화를 나누던 제이슨은 수혁이 곁에 온 것을 확인하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냥 도대체 어떤 생각으로 살고 있는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겠더라고.”
“후, 가라 너랑은 할 말 없다.”
“아까 들어 보니까 선거가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것 같던데, 혹시 잭 대통령이 이 상황을 해결해 주기를 기대하는 거야?”
수혁은 제이슨의 속을 은근히 떠보며 물었다.
“어차피 시간만 지나면 순리대로 흘러가게 돼 있어. 잭이 대통령이 된다면 문제 해결이 쉬워지겠지. 하지만 존이 된다고 해서 우리 MK 그룹에 큰 타격이 있는 건 아니야. 넌 모르겠지만, 우리 회사가 쌓아온 토대는 네 세 치 혀에 무너질 만큼 부실하지 않거든.”
제이슨은 언론과 대중들이 자신을 비판하는 상황에서도 평정심 유지에 큰 지장이 없었다. 웬만한 재벌들은 가볍게 뛰어넘는 엄청난 부를 소유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평화당으로 정권이 교체된다 한들 MK 그룹을 함부로 건들지 못할 거라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공감해, 150년이라는 기간 동안 최고의 자리를 지킨 기업이 네 말실수 같은 것으로 무너질 리가 없지. 하지만 앞으로 너를 재계 모임이나 공개 석상에서 보기 어려울 것 같은데?”
수혁은 제이슨이 모리 집안의 그 누구보다 과시욕이 강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세간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일가친척들과 달리 매스컴에도 자주 등장하고, 기자들과 인터뷰도 즐기는 스타일이었다.
“풋, 생각보다 순진하네? 너 우리를 아주 우습게 보는구나? 존과 조금 친해졌다고 뵈는 게 없는 모양인데, 쓸데없는 기대는 안 하는 게 네 정신 건강에 좋을 거다.”
“존? 존을 잠깐 봤긴 했지만, 법에 저촉되는 일은 한 적이 없어. 그리고 나도 너랑 똑같은 심정이야.”
“똑같은 심정? 또 말장난이냐?”
제이슨은 지겹다는 표정을 지으며 수혁을 바라봤다.
“불과 1년 전이었다면, 네 말대로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잊혔겠지. 하지만 네 만행이 기록된 자료들은 인터넷상에 영원히 박제될 거야.”
“아이고 무서워라. 네가 볼 땐 내가 대중들의 시선을 의식할 사람처럼 보이냐?”
대화가 진행될수록 제이슨의 언행은 예전의 모습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제이슨, 흥분하지 말고 침착하게 이야기해. 저 녀석이 또 수작을 부리고 있을 수 있어.”
폴은 수혁을 경계 어린 시선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주말 방송 때 내보낸 거 외에는 공개할 자료도 없어.”
“개수작 부리지 말고 자리로 돌아가.”
‘폴의 말이 맞아. 지금 저놈 주머니에 녹음기가 있을지도 몰라. 아니면, 교실에 카메라가 있을 수도 있어.’
친구의 조언을 들은 제이슨은 수혁과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그는 어디선가 또 자신을 촬영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올라왔다.
“말하기 싫다는 사람이랑 더 있을 필요는 없지. 아,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할게. 난 지금부터 너와 관련된 어떤 행동도 하지 않을 거야.”
“지나가는 개도 그 말은 믿지 않아.”
제이슨은 불신이 가득한 얼굴로 수혁의 말을 되받아쳤다.
“이 말 명심해. MK 그룹은 워낙 큰 회사라 이 일로 망하진 않을 거야. 하지만 적어도 너는 그동안 네가 저지른 악행으로 몰락하게 될 거다.”
말을 마친 수혁은 등을 돌리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갑자기 와서 웬 헛소리야.”
폴은 수혁의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
‘젠장. 폴 말대로 그냥 개소리일 뿐인데, 왜 이렇게 불안하지?’
제이슨은 혼자 떠들어 대는 폴을 뒤로하고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 * *
11월이 지나고 12월이 되었다. 수혁은 연말 정산을 위해 그룹 회의를 열었다. 그는 학교를 마치자마자 사무실에 출근하여 회상 회의에 참석했다.
“사장님, 부품 생산 현황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죠.”
“대표님의 지시대로 테스트 과정을 최소화하여 이번 주 목요일부터 본격적인 생산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권성훈 사장은 부품이 제대로 작동되는지 알아보기 위해 엄격한 테스트 과정을 거치려고 했지만, 수혁이 부품에 대한 확신이 워낙 강했기에 2번의 검증만 거치고 곧바로 생산에 돌입하기로 결정했다.
“SH전자의 주 고객이 WG 전자이긴 하지만, 이 외에도 다른 거래처 확보에 소홀히 하시면 안 됩니다.”
“안 그래도 이틀 후에 일송 전자 관계자와 미팅을 갖기로 했습니다.”
“잘하셨습니다. WG와 일송 외에도 파인즈와도 접촉해 보시길 바랍니다.”
수혁은 SH전자를 다른 계열사에 뒤지지 않게 키울 생각이 있었다.
파인즈는 미국의 전자 회사로 원래대로라면 최초로 스마트폰 제작에 성공한 기업이 됐어야 했지만, 수혁이 미래를 바꾼 바람에 후발 주자로 전락했다.
“저도 최근에 이정찬 부회장을 만났습니다.”
정찬은 일송그룹 회장인 이경욱 회장의 장남으로 사실상 후계자로 거론되는 사람이다.
“그 사람은 잘 지낸답니까?”
최필재 사장의 이야기를 들은 수혁은 정찬에 대한 호기심을 드러냈다.
“하하, 이전의 고압적인 태도는 온데간데없더군요. 대표님과 안 좋은 과거로 얽혀 있어 이런 말씀 드리기 죄송하지만, 이정찬 부회장의 배려 덕분에 우리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계약을 성사시킬 수 있었습니다.”
“우리 회사가 제공하는 소프트웨어가 없으면 기기를 생산해도 무용지물이라 그런 겁니다. 자존심이 무척 강한 사람이 그렇게 저자세로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수혁은 온갖 고고한 척은 다 하던 이정찬 부회장의 모습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만큼, 우리 회사의 위상이 높아졌다는 반증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적어도 국내에서는 WG를 제외하면 우리와 비견될 만한 회사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게 다 대표님이 회사에 헌신해 주신 덕분이지요.”
박유신 사장이 대화에 참여하여 덕담을 건네자 다른 임원들도 이에 호응하며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조성됐다.
“여러분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지금의 SH가 존재할 수 있는 겁니다. 지오스토리 상장 이후 SH 그룹의 자산 규모가 WG 그룹 다음으로 2등을 기록했습니다. 비록 1등은 아니지만, 현재 WG전자의 시가 총액이 250조에 육박하는 것을 고려하면 괜찮은 성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평소라면 손을 내저으며 겸손한 제스처를 취할 수혁이었지만, 이날은 이례적으로 임원들의 의견에 공감하며 자축하는 모습을 보였다.
“저, 대표님 여쭤볼 게 있습니다.”
내내 침묵을 지키고 있던 박찬명 사장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네, 말씀하시죠.”
“즐거운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은 것 같아서 죄송하지만, 현지 상황에 대해 조금 알고 싶습니다.”
“내일 있을 선거를 말씀하시는 거군요.”
수혁은 찬명의 의도를 단숨에 알아챘다.
“그렇습니다. 대표님께서는 정치적 중립을 선언하시고 선거에 개입하지 않으셨다고 하지만, 해외 언론에서는 평화당의 존 의원이 대선에 승리하지 못하면 SH 그룹이 적지 않은 타격을 입을 거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거든요.”
“그건 저와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MK 그룹이 자유당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어서 나온 의견일 뿐, 잭 대통령이 재선되더라도 우리가 피해 볼 일은 없을 겁니다. 아, 경우에 따라서는 주가가 조금 하락할 수는 있겠네요.”
수혁은 회사의 명운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미국 선거가 임박했음에도 태도나 얼굴에서 어떠한 긴장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제가 우려하는 건 미국 정부가 아니라 MK 그룹입니다. 만약 잭이 재선에 성공한다면, 저들은 분명 우리에게 복수하려 들 테니까요.”
“그 부분은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현재 제이슨의 과거 행적에 대한 폭로가 SNS뿐만 아니라 각종 커뮤니티 사이트에서도 쏟아지고 있어서 경거망동하기 어려울 겁니다.”
박유신 사장은 펀 갤러리를 기획한 사람답게 시간이 날 때면 커뮤니티 사이트에 접속해 최신 트렌드나 여론을 살피곤 했다.
“박유신 사장님 말씀이 맞습니다. 제이슨에 관한 뉴스는 MK 그룹의 영향력으로 인해 비중 있게 다뤄지고 있진 않지만, 대다수의 미국 국민 사이에서는 MK와 모리 일가에 대한 공분이 형성된 지 오래입니다.”
“한국에 있다 보니 소식에 어두웠습니다.”
“사안의 중대함에 비해 언론에서 많이 다루지 않으니 충분히 그러실 수 있지요.”
수혁이 개인 방송을 한 이래로 지오스토리와 커뮤니티 사이트에 제이슨의 과거 만행을 폭로하는 사람들이 하나둘 등장하기 시작했다.
‘스스로 적을 만드는 타입이긴 하지만, 이렇게 많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어.’
존과 수혁을 통해 용기를 얻은 피해자들은 다양한 배경을 갖고 있었다. 중학교, 고등학교 동문, MK 이노베이션에서 일했던 사람, 사업 파트너 등 제이슨이 거쳐 왔던 환경에서 적어도 둘 이상의 피해자들이 속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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