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1화
“피해자들이 쓴 내용을 보니 대중들의 따가운 시선을 신경 쓸 인물로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박찬명 사장은 온갖 악행을 저지른 제이슨이 위축될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본인이야 신경을 쓰지 않겠지요. 하지만 규모 있는 컨퍼런스나 박람회 같은 공식 석상에 얼굴을 비추기는 매우 어려울 겁니다.”
“주최 측이 생각이 있다면 제이슨 모리를 부를 리가 없지요.”
박유신 사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혁의 의견에 동의했다.
“대표님, 제이슨에 관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네, 말씀하세요.”
‘권 사장이 어쩐 일이지?’
좀처럼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권성훈 사장이 입을 열자 수혁은 흥미를 느꼈다.
“부품 공급을 위해 현명길 회장님과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회장님께서 제이슨에 대해 한 번 품은 원한을 좀처럼 풀지 않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이번 일로 제이슨의 행동 폭이 줄긴 하겠지만, 확실히 제압하지 못하면 나중에 어떤 식으로든 피곤해질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일전에 일송그룹과 만평일보와의 신경전에서 우위를 점했기에 이들이 섣불리 건들지 못하는 거지, 만약 애매모호하게 끝났으면 지금도 골치 꽤 나 썩였을 겁니다.”
수혁은 권성훈 사장의 말에 공감을 표했다.
“우리를 만만히 보지 못하게 기를 꺾어 놔야 하는 것은 동의합니다. 그러나 MK 그룹은 일송 그룹과는 비교가 안 되는 엄청난 회사입니다. 대표 계열사인 MK 코퍼레이션은 매출만 380조에 달하고 시가 총액은 500조를 넘는 초거대 기업인데, 무슨 수로 이들을 제압한단 말입니까?”
박찬명 사장은 제이슨 일가가 기존의 상대들과는 궤를 달리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MK 그룹은 1년 만에 뚝딱 무너뜨릴 수 있는 회사가 아닙니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서서히 타격을 입혀야겠지요.”
“역시, 대표님께서는 이미 계획이 다 있으시군요.”
지오쇼핑의 박유신 사장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직 구체적인 방안을 세운 건 아니지만, 대충의 방향은 잡아 두었습니다. 일단 우리를 무시하지 못하게 회사의 규모를 키우고 저들의 숨통을 서서히 조여야겠지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연구를 한 뒤 나중에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대표님뿐만 아니라 저희도 좋은 대책이 있는지 나름대로 찾아보겠습니다.”
최필재 팀장은 모든 부담을 수혁이 지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감사합니다, MK 건에 대한 논의는 충분히 이루어진 것 같으니 이제 회사 현안을 다루도록 하죠. 지오쇼핑은 상황이 어떻습니까?”
“전국에 지은 물류 창고가 쉴새 없이 돌아갈 정도로 엄청난 호황을 맞았습니다. 지난달에는 드디어 월 매출 천억을 넘겼고, 매달 10~20% 이상 증가하는 상황이라 앞으로의 전망도 무척 밝습니다.”
“국내 시장을 완전히 평정하면 해외 진출을 고려해 보시는 것도 좋겠습니다.”
수혁은 지오쇼핑의 잠재력이면 외국에서도 통할 거라고 판단했다.
“지난 상반기에 이미 국내 온라인 쇼핑 부문에서 1등을 찍었고, 우리의 경쟁 상대로는 일송백화점과 엘마트 정도만 남은 상태입니다.”
“엘마트와 우리는 우호적인 관계이니 사업 중에 불필요한 마찰이 생기지 않게 조심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대표님.”
엘마트의 이병섭 회장은 지오쇼핑이 초반에 어려움을 겪을 때 큰 도움을 주었기에 수혁은 병섭과 불편해질 수 있는 상황은 미연에 방지하고자 했다.
“아, 대표님. 그리고 3일 전에 제일물류 정석호 회장님께서 연락이 왔는데…….”
이후에도 유신은 현안 보고를 이어 갔고, 계열사 사장들은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며 차분히 이야기를 경청했다. 오랜만에 연 그룹 회의는 늦은 밤까지 계속됐고, 사안을 모두 처리한 수혁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잠이 들었다.
* * *
12월 2일 화요일, 드디어 기다리던 선거 날이 되었다. 수업을 마친 수혁은 사무실로 가지 않고 곧장 집으로 왔다.
“수혁아 왔어?”
“응, 오면서 뉴스를 보니까 분위기가 나쁘지 않던데?”
수혁은 아파트에 들어오자마자 찬식에게 선거 이야기를 꺼냈다. 미국은 선거인단을 먼저 선출한 뒤, 일정 시간이 지난 후 선거인단의 투표가 이루어지는 방식으로 대통령을 선출했다.
“분위기가 나쁜 정도가 아니야, 현재 존 그레엄 후보를 지지하는 선거인단이 잭 대통령 선거인단을 앞지를 거라는 보도가 계속 나오고 있어.”
“존의 지지율이 점진적으로 상승해서 선전할 줄은 알았지만, 잭 대통령을 이 정도의 차이로 누를 줄은 상상도 못 했어.”
수혁은 공식적으로 정치적 중립을 선언했지만, 내심에선 평화당의 승리를 바라고 있었기 때문에 얼굴은 화색을 띠고 있었다.
“조금 전에 올라온 기사에 따르면 20대와 30대 유권자들의 투표율이 지난 선거에 비해 많이 올랐데.”
“그들 중 상당수는 존의 개인 방송에 영향을 받았을 거야. 후, 어쨌든 우리로서는 한시름 덜게 돼서 다행이야.”
“하하, 맞아. 아까 TV에서 선거 판세를 두고 패널들이 이야기를 나눴는데, 대선 예측을 잘한다고 정평이 난 한 패널이 너랑 똑같이 말했던 것 같아.”
수혁의 말에 찬식도 덩달아 기분이 좋은지 활짝 웃어 보였다.
“게다가 평화당에서 발표한 주요 공약 중 일부는 존과 시청자들이 함께 상의하며 만들었던 것도 크게 작용했어. 대중들은 보통 정치인이라고 하면 섣불리 다가설 수 없고 왠지 어렵다고 느끼는 게 보통이지만, 존은 시민과 적극적으로 소통함으로써 젊은 층의 호감을 얻는 데 성공한 거야.”
“케이턴 대학에서 공부는 안 하고 대선 방송을 본 거 아니야? 내가 말한 패널도 점잖으면서 엘리트의 이미지를 갖고 있던 존이 친근감과 소통의 대명사로 거듭난 데에는 지오스토리에서의 개인 방송이 큰 영향을 미쳤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거든.”
“훗, 굳이 방송을 보지 않더라도 선거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쉽게 예상할 수 있는 부분이야.”
수혁은 자신을 미심쩍은 얼굴로 바라보는 찬식의 모습에 헛웃음이 나왔다.
“자유당과 평화당에서는 따로 입장 발표는 없어?”
“자유당은 개표까지 묵묵히 기다리겠다는 것 외에는 어떤 말도 나오지 않고 있어. 반면에 평화당은 선거 승리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하나둘 나오는 걸 보면 분위기가 나쁘지 않은 것 같아.”
찬식은 방송에서 들었던 내용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예상 선거인단 수가 50명 이상 차이가 나니 평화당 입장에선 쾌재를 부를 수밖에 없겠어.”
수혁은 손가락으로 TV를 가리키며 말했다. 방송에는 각 당의 예상 선거인단 규모를 적은 뉴스 자막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와, 사실상 평화당이 이긴 싸움이잖아?”
“정확한 결과는 개표가 끝나야 알겠지만, 그렇게 봐도 큰 무리는 없어 보이네.”
찬식이 TV를 보며 감탄사를 내뱉자 수혁은 작은 목소리로 그의 말에 동의했다.
위잉-위잉-위잉
“수혁아, 지금 전화 오는 거 아니야?”
“어, 잠깐만.”
수혁은 대화를 멈추고 품속에서 핸드폰을 꺼낸 다음 발신인을 확인했다.
‘존 의원이잖아? 무슨 일로 연락한 걸까?’
뜻밖의 전화에 여러 생각이 올라왔지만, 이내 전화를 받았다.
“네, 의원님. 강수혁입니다.”
“대표님, 많이 바쁘신가요?”
“아닙니다. 방금 집에 도착해서 선거 방송을 보던 중이었습니다. 뉴스를 보니 의원님의 당선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더군요.”
수혁은 원활한 통화를 위해 자신의 방으로 들어왔다.
“당선 여부는 공식적인 집계가 끝나야 알겠지만, 당내에서는 저의 당선이 유력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결과를 미리 알 수 있는 루트라도 있습니까?”
존의 이야기에 수혁은 궁금증이 생겼다.
“오늘 아침부터 방금까지 캠프에 있는 전 직원을 동원해서 유권자들이 누구를 찍었는지 알아내는 작업을 했습니다.”
“방송국에서 하는 출구 조사를 자체적으로 실시했군요.”
“그렇습니다. 캠프 내에 통계 쪽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인력들이 있는데, 방금 그들로부터 제가 잭을 누를 수 있다는 보고를 듣고 오는 길입니다.”
“원래 결과가 나오기 전에 예단하는 것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이변이 없는 이상 의원님의 당선되실 것 같군요. 축하드립니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수혁은 열세를 뒤집고 반전을 일궈 낸 존 그레엄에게 진심 어린 축하 인사를 건넸다.
“고생은 제가 아니라 대표님께서 하셨죠. 저는 그저 알려 주신 대로 했을 뿐입니다.”
“제가 몇 가지 가이드라인을 드리긴 했지만, 그걸 소화하신 건 어디까지나 의원님의 역량입니다. 대통령으로 취임하시게 되면 평소 생각해 두었던 좋은 정책들을 원 없이 펼치시길 고대하겠습니다.”
존이 당선의 공을 자신에게 돌리자 수혁은 덕담으로 화답했다.
“감사합니다,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리고 대표님의 공이 지대하다는 건 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닙니다. 당 지도부와 핵심 참모들 사이에서 대표님의 헌신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거든요.”
“참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우리 회사가 평화당과 유착 관계로 보일까 걱정입니다.”
수혁은 존과 메디슨 실장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행적을 아는 것에 대해 큰 부담감이 들었다.
“걱정하지 마십쇼. 대표님께서 저를 어떻게 도와줬는지 아는 인사는 저와 메디슨 실장 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당 지도부와 핵심 참모들에게는 신원을 밝히지 않은 후원자가 저를 지원해 줬다는 식으로 묘사했습니다.”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후, 다행이다.’
수혁은 겉으로는 담담하게 대꾸했지만, 속으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SH 그룹과 밀착해 보인다는 인상은 저로서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제 임기가 끝난 이후에도 어디에 발설하지 않을 테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도 의원님께 누가 되지 않게 보안에 신경 쓰겠습니다.”
존은 임기를 언급하며 당선에 대한 자신감을 은연중에 드러냈다.
“대표님, 혹시 저에게 바라시는 건 없으십니까?”
“네? 바라는 점이요?”
수혁은 존의 갑작스러운 발언에 당황했다.
“원래는 선거인단이 정해지고 대통령에 당선되면 여쭤보려고 했지만, 기왕 이야기하는 김에 대표님의 의중을 들어 볼까 해서요.”
“아, 그게 음…… 개인적으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터라 의원님께 부탁할 내용을 따로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애당초 존에게 접근했던 목적이 제이슨과 MK 그룹을 견제하는 것이었기에 수혁으로서는 그에게 딱히 바라는 점이 없는 상태였다.
“허허, 이거 욕심이 없으셔도 너무 없으십니다. 보통, 대표님처럼 공이 큰 분이라면 무리한 청탁도 서슴없이 말할 텐데 말이죠.”
“청탁이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전 지금 이대로도 충분합니다.”
“흠, 이거 참 난감하네요. 제가 살면서 지켜 오는 원칙 중 하나가 도움을 받았으면 반드시 보답하라거든요.”
존은 수혁의 예상치 못한 답변에 곤란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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