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2화
‘우리 아버지께서 보답은 확실히 하라고 하셨어. 괜히 어중간하게 입을 닦았다가는 어떤 식으로 화가 돌아올지 모르는 일이야.’
존은 수혁에게 호의를 베풀 것처럼 말했지만, 실상은 훗날 나올 수 있는 잡음을 방지하기 위함이 더 컸다.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는데,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니겠군요. 저 그렇다면 의원님께서 대통령이 되신다면 저에게 해 줄 수 있는 건 무엇입니까? 그리고 들어줄 수 없는 부탁도 간단히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수혁은 이제까지 고위 인사를 많이 만났지만, 존처럼 노골적으로 질문하는 사람은 없었기에 적당 선에 대한 감각이 없었다.
“보아하니 이런 경우가 처음이신 것 같군요.”
“한국에서 많은 정치인을 만났지만, 이런 식의 대화를 한 적이 없어서 조금 낯설기는 합니다.”
존의 질문에 수혁은 솔직하게 답변했다.
“리더의 자리에 있는 사람은 공을 세운 자에게 적절한 보상을 줘야 많은 인력을 통솔할 수 있는 법입니다. 대표님은 실리를 추구하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신뢰와 인정을 바탕에 깔고 계셔서 제 말이 어색하게 들리는 겁니다.”
“흠, 공에 맞는 보상을 제시해야 사람들이 대표님을 따른다는 말씀이군요.”
“맞습니다. 우리 평화당은 깨끗한 정치를 표방하지만, 친한 정치인이나 후원자들과 적나라한 대화를 나누는 경우가 제법 있습니다. 정치 생리상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니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네요.”
존은 다소 멋쩍은 듯한 투로 상황을 설명했다.
“저도 회사를 경영하는 사람이라 의원님의 입장이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그럼 이야기가 쉬워지겠네요. 원하시는 게 뭔지 말씀해 주세요. 아, 참고로 대표님께서는 미국 국적을 갖고 계시지 않아서 공직 임명이 불가합니다. 대신 한국의 미래 비전 연구소처럼 저희도 씽크탱크를 운영할 계획인데, 그 기관의 요직에는 넣어 드릴 수 있습니다.”
“어차피 공직에는 관심이 없어서 괜찮습니다. 씽크탱크는 제안은 감사하나 SH 그룹에 정치색이 강하게 덧입혀질 것 같아 내키지 않네요.”
‘어차피 들어가 봤자 내가 주도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얼마 없을 거야.’
수혁은 씽크탱크에 들어간다 한들 존을 제외하고 정치권에 인맥이 없는 상황이라 경제 정책 수립에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막상 도와드리고 싶어도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게 없는 것 같아 자괴감이 드네요.”
존 그레엄은 꺼내는 말마다 막히는 기분이 들자 괜히 씁쓸해졌다.
“세계 최고의 권력을 갖게 되실 분에게 드리는 청이라 조금 신중해지는 것 같습니다. 의원님, 죄송하지만 잠시 뒤에 다시 통화하는 건 어떻습니까? 머릿속이 정리되지 않다 보니 시원스럽게 말이 안 나오는 것 같습니다.”
수혁은 심사숙고한 뒤 존과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좋습니다, 내일까지는 자택에서 가족들과 쉴 예정이니 편하실 때 연락하세요.”
“감사합니다, 그럼 편안한 밤 되세요.”
용건을 마친 수혁은 통화를 종료하고 존에게 어떤 것을 청할지에 대한 고민에 빠졌다.
‘만약 재선까지 된다고 생각하면 적어도 2012년까지 대통령에 있다는 이야긴데…… 평화당과 유착은 안 하되 관계를 계속 유지할 수 있는 적절한 방안을 모색하면 우리 회사에 큰 도움이 될 거야.’
방에 들어온 수혁은 책상에 앉아 종이를 끄적대며 최선의 요구안을 만들기 시작했다.
* * *
쾅!
‘젠장, 내가 이런 비참한 꼴이 될 줄이야…….’
잭 웰링턴은 주먹으로 책상을 있는 힘껏 내려쳤다. 사실상 선거에서 진 잭은 휴가를 내고 뉴욕 외곽에 있는 별장에서 울분을 삭이는 중이었다.
“대통령님, 아래 필 모리 회장이 도착했습니다.”
집사로 보이는 남자는 화가 잔뜩 난 잭의 눈치를 보며 필이 도착했음을 알렸다.
“후, 들어오라고 하세요.”
“아, 알겠습니다.”
잭이 살기 어린 눈빛을 보내며 말하자 집사는 황급히 방을 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필은 노크도 없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선거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 여기서 뭘 하는 거야?”
“생각보다 침착하군, 나 정도는 아니어도 스트레스를 받을 줄 알았는데 말이야.”
잭은 필의 무덤덤한 얼굴을 보며 말했다.
“애당초 내 본업은 정치가 아니라 사업이야. 네가 선거에서 떨어진 건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우리 회사가 흔들릴 일은 없어. 알잖아? 갖은 핍박과 어려움 속에서도 150년 이상을 버텨 왔다는 걸 말이야.”
“훗, 맞는 말이긴 한데, 왠지 씁쓸하군. 난 4년 후를 바라보고 재기에 힘을 써야겠어.”
필의 냉담한 말에 잭은 자조적인 한마디를 꺼냈다.
“4년 후라면 다음 대선에 다시 도전하겠다는 거야?”
“주변에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이대로는 포기하기가 그렇더라고.”
“내가 충고 하나만 해도 될까?”
“뭔데, 말해 봐.”
잭은 충고라는 말에 궁금해하며 물었다.
“이 세상에 돈을 제외하면 영원한 건 없어. 네가 존처럼 처음 대선에 도전하는 입장이나 정치 신인이었으면 후일을 도모해도 되지만, 대중들이 볼 때 넌 이미 신선함을 잃은 소모품에 불과해.”
“날 보자고 해서 대책 상의를 하러 온 줄 알았는데, 개소리나 지껄이러 온 거였어?”
필의 신랄한 비판에 잭의 얼굴은 순식간에 굳어졌다.
“이게 다 널 생각해서 하는 거니까 서운해하지 말라고. 이전에 네가 그랬잖아? 듣기 힘들더라도 친구의 조언은 받아들여야 하는 법이라고 말이야.”
“난 너같이 생각했으면 MK 그룹에 대한 대대적인 압수 수색을 벌였을 거다. 내 임기가 아직 2달가량 남은 걸 벌써 잊었어?”
잭은 필을 뚫어져라 노려보며 말했다.
“하하, 진정하라고. 지금 자네는 너무 흥분했어.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란 말이야.”
필 모리는 당직과 후원 회장직을 내려놓으면서 잭에게 크게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그는 큰 그림을 위해 잭의 말을 따랐지만, 긍정적인 성과를 하나도 거두지 못하자 모든 분노를 친구에게 쏟아 내고 있는 중이었다.
“MK 그룹 고문 자리를 하나 마련해 줄 테니까 임기 끝나면 연락해. 연봉도 제법 있는 편이라 노후를 즐기기에는 무리가 없을 거야.”
“건방진 새끼, 나랑 한번 해 보자는 거냐? 두 달이면 그룹 해체까지는 아니어도 타격을 주는 건 가능하다는 걸 모르지는 않을 텐데?”
“풋, 이거 무서운데? 어디 마음대로 해봐.”
필은 잭의 협박에도 태연한 반응을 보였다.
“상황 판단이 그렇게 안 되나? 내가 알던 넌 이 정도로 미련하지 않았는데 말이야.”
“정세 판단을 못 하는 건 내가 아니라 너야. FBI도 그렇고 어느 관료가 임기 2달 남은 대통령에게 충성을 다하겠어? 그리고 몇십 년에 걸쳐 제공했던 뇌물과 향응 자료가 내 손에 있는데, 괜찮겠어?”
“그, 그건…….”
“지금 넌 끈 떨어진 연 신세라는 걸 잊지 마. 앞으로는 후원금 명목으로 제공하던 것도 모두 없을 예정이니, 그렇게 알라고.”
“…….”
폐부를 찌르는 듯한 발언에 잭은 눈을 질끈 감은 채 입을 다물었다.
“MK 그룹 고문직은 제이슨을 보호해 준 대가로 주는 거니까 부담 갖지 않아도 돼.”
매스컴에서 제이슨의 만행이 다뤄졌음에도 무사할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잭의 영향력 덕분이었다.
“내가 너무 순진했어. 넌 나와의 동행을 마치려고 여길 찾아온 거였어.”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친하게 지내 온 사이긴 하지만, 일에 관해서는 어쩔 수 없잖아. 사정 좀 봐달라고. 현실적으로 네가 정계에 재기하기도 어려운데, 거액의 자금을 계속 제공할 수는 없는 거잖아.”
“휴, 알겠네. 이야기 끝났으면 이만 가지.”
잭은 한숨을 내쉬며 힘없이 말했다. 그는 마음 한편에서 올라오는 우울감 때문에 혼자 있고 싶은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고민하고 연락 줘. 그리고 너무 상심하지 마.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자네도 알았잖아? 먼저 갈 테니까 잘 쉬라고.”
필은 좌절감에 빠진 잭의 모습에 아랑곳하지 않고 차갑게 돌아섰다. 순수했던 어린 시절을 공유한 이들은 소싯적부터 서로를 도우며 의지했지만, 권력과 자본이 주는 쾌락에 물들면서 친구를 바라보는 관점이 크게 달라져 있었다.
‘속이 쓰리긴 하지만, 저 녀석 말이 맞아. MK 그룹이 망했다면 나도 필을 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지. 후, 어쩌다가 여기까지 온 거지? 옛날에 생각 없이 맥주 마시던 시절이 그리워지는군…….’
홀로 남은 잭은 술잔에 양주를 부으며 감상에 잠겼다.
* * *
다음날이 되었다. 존과 의논할 사안을 모두 정한 수혁은 책상 위에 올려놓은 핸드폰을 집어 전화를 걸었다.
“네, 존 그레엄입니다.”
“의원님, 강수혁입니다.”
“하하,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은 좀 해 보셨나요?”
존은 안부 인사는 생략하고 바로 본론에 들어갔다.
“말씀에 앞서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캠프에서 저와 함께 논의했던 정책을 그대로 시행하실 건가요?”
“음, 세부적인 사안은 각료들과 조율을 해 봐야겠지만, 큰 틀은 변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시다시피 시청자들과 함께 만든 공약들이 적지 않아 방향을 틀기가 무척 어려운 상황이라서요.”
‘역시, 내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구나.’
수혁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대화를 이어 갔다.
“그럼, 환경 정책 관련하여 부탁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래도 명색이 글로벌 기업의 오너이신데, 환경보다는 경제 정책을 살펴보시는 게 더 낫지 않습니까?”
존은 수혁의 뜻밖의 말에 의아해하며 물었다.
“오랫동안 생각해 봤는데, 경제 정책을 건드려 혜택을 보게 되면 대중들의 시선이 곱지 않을 것 같아서요.”
“일리 있는 말씀이십니다. 경제 정책 하나에 움직이는 돈이 적어도 수십억 달러에 달하는데, 이를 외국기업에 몰아 준다면 정부가 크게 흔들리게 될 테니까요.”
“그래서 제가 복안을 마련해 왔습니다. 혹시 대표님께서 발표한 환경 공약 중 에너지에 관련된 내용을 기억하십니까?”
“물론입니다. 석유, 석탄 에너지 사용의 비중을 줄이고, 친환경 에너지의 비율을 점진적으로 늘린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수혁의 질문에 존은 당연하다는 투로 대답했다.
“맞습니다. 그럼, 이제 요구 사항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네, 편하게 말씀하세요.”
존은 침을 꿀꺽 삼키며 수혁의 말을 기다렸다.
“첫째는 해당 공약을 대중들에게 약속하신 것보다 빠르게 진행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흠, 그러려면 석유 에너지를 대체할 만한 친환경 에너지가 개발되어야 합니다. 현재 시중에 나와 있는 수력 발전소나 태양광 패널은 물리적인 한계가 있거나 효율이 떨어지거든요. 게다가 석유, 석탄 산업에 종사하는 근로자들과 오너들과 협의 과정도 필요하고요. 후, 흔쾌한 답변을 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대통령이 되시면 당연히 고려해야 할 요소를 말씀하신 것 아닙니까? 그리고 방금 말씀에 대한 대안도 있으니 제 이야기를 조금 더 들어 보시죠.”
수혁은 존이 난색을 표함에도 당황한 기색 없이 대화를 이어 갔다.
- 313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