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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 없는 회귀-313화 (313/316)

313화

“저 대표님을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방금 제가 말씀드린 것들은 이해 관계자가 한둘이 아니기에 그 과정이 엄청나게 복잡합니다. 즉, 선거 때처럼 기발한 아이디어로 해결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존 그레엄 의원은 대안이 있다는 수혁의 말에도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만약, 석유 소비를 줄일 수 있는 획기적인 방안이 있어도 말입니까? 어차피 중동 국가와의 알력 싸움에서 이기려면 석유 의존도를 줄여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리고 석유가 아닌 자연 에너지로 전기를 공급하게 되면 국민의 부담을 덜 수 있어서 여론도 나쁘지 않게 형성될 겁니다.”

“획기적인 방안이라고 하시면 무엇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확신에 차 있는 수혁의 모습에 존은 궁금증이 일었다.

“짧으면 1년, 길면 2년 내로 석유, 석탄 의존도를 줄일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할 예정입니다.”

“무슨 말씀을 하고 싶은지 이제야 이해가 가네요. 대표님께서 신기술에 기반한 혁신적인 제품을 출시하면 우리 정부에서 이를 구매하라는 말씀이군요. 그러나 말처럼 쉽지는 않습니다. 전기 공급은 국가 기반 산업이라 자국 기업이 아닌 외국 기업의 것을 썼다가는 비난에 직면할 수도 있거든요.”

“석유 수입을 줄여 전기세 부담을 덜어 줘도 싫어할까요? 솔직히 대표님의 말씀에 공감이 잘 안 됩니다. 철도 건립과 같은 대규모 기반 시설의 건립에 외국 회사가 입찰하는 경우가 적지 제법 있지 않습니까?”

“그게, 대표님이 잘못해서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이미지가 아직 선진국에 도달하지 못한 탓이 큽니다.”

존은 수혁의 기분이 상하지 않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우리나라가 독일이나 일본과 같이 기술 선진국의 이미지를 갖지 못했다는 말씀이군요.”

“그렇습니다. 대표님 말씀처럼 에너지 인프라에 대대적인 교체가 이루어지려면 천문학적인 세금이 소요될 텐데, 이를 한국에 맡기면 국민의 시선이 곱지는 않을 겁니다.”

“의원님께서는 여전히 저를 믿지 못하고 계시군요.”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수혁이 낮은 목소리로 나지막이 말하자 존은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대체 에너지 제품을 입찰하는 과정에서 어떤 특혜도 주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무슨 수로 낙찰되신단 말입니까?”

“의원님 마음속에는 이미 저에 대한 선입견이 존재하는 것 같네요.”

“음…… 솔직히 말씀드리면 SH그룹이 제조업 기반의 회사가 아니지 않습니까? 제가 에너지 공학과 전기 공학에 대한 지식은 없지만, 대표님의 말은 현실성이 떨어져 보입니다.”

‘풋, 이거 어째 권성훈 사장님과 나눴던 첫 대화랑 흐름이 비슷하잖아?.’

수혁은 존의 모습에서 부품 공정도를 준다는 말을 의심하던 성훈이 떠올랐다.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수력, 풍력, 조력 에너지와 같은 재생 에너지의 비중을 늘리는 건 물론 여러 가지 다른 방안이 제 머릿속에 있습니다. 준비가 완료되면 알려 드릴 테니 적절한 때에 공약을 이행해 주시면 됩니다.”

“어차피 재선까지 생각하면 시간이 많으니 천천히 연락 주셔도 됩니다. 혹시 하실 말씀이 아직 더 있으십니까?”

존은 수혁의 부탁을 행여나 잊을까 메모를 하며 질문했다.

“원래는 저희가 기술과 제품을 제공하면 받아 주시는 조건을 말씀드리려 했지만, 의원님 이야기를 듣고 어렵다는 걸 알았습니다. 만약 우리 회사 제품이 낙찰되면 계약 기간을 최소 10년으로 잡아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미국이 공증한 제품이라면 세계 어디에서도 인정받을 거라는 것을 겨냥한 부탁이었다.

“그 정도는 충분히 들어드릴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의원님.”

대화는 점점 무르익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고, 수혁과 존은 세부적인 사안에 대해서 짤막하게 논의하다가 통화를 마쳤다.

선거가 끝난 지 3주가 지났다. 수혁은 1학기 마지막 수업을 듣기 위해 케이턴 대학 강의실에 와 있었다.

“수혁, 내일부터 방학인데, 뭐 할 거야?”

“음, 잘 모르겠네…….”

루나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물었지만, 수혁은 방학에 해야 할 일이 꽉 차 있는 상황이라 말끝을 흐렸다.

“방학 때, 찬식이랑 해서 여행 가기로 했잖아. 벌써 잊었어?”

“최근에 여러 사건이 터지면서 업무에 조금 소홀했었거든. 밀린 업무가 제법 쌓여 있어서 방학 때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 미안해, 루나.”

수혁은 약속을 어긴 것에 대해 미안해하며 말했다.

“아니야, 나였으면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했을 일들이야. 몇 주간 좋지 않은 일로 매스컴에 언급이 많이 됐었잖아. 난 그럼 방학 때 LA에서 좀 쉬었다 와야겠어. 그곳에 나랑 친한 친구들이 몇 명 살고 있거든. 그건 그렇고 제이슨은 요즘 왜 안 보이는 거지?”

제이슨은 며칠 전부터 학교에 나오지 않고 있었다.

“학장님한테 들었는데, 학교를 그만뒀다고 하더라고.”

“엥? 갑자기?”

갑작스러운 소식에 루나는 깜작 놀랐다.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는 경영에 전념하겠다며 한마디 상의 없이 자퇴서를 제출했데.”

수혁은 스미스 학장과의 정기 면담 때 제이슨에 관해 물은 적이 있었다.

“안 좋은 일로 얼굴이 팔려서 스트레스가 심했던 거 아닐까? 당장 길거리만 나가도 손가락질하는 사람이 종종 있을 테니 말이야.”

“음, 정확한 건 모르겠지만, 뭔가 이유가 있겠지?”

‘일전에 대화를 떠올리면 선거 이후에 반전의 기회를 노렸던 것 같아. 하지만 잭이 대선에서 떨어진 바람에 모든 희망이 없어진 거겠지.’

수혁은 제이슨이 왜 사라졌는지 대충 짐작이 갔지만, 이를 굳이 루나에게 말하지는 않았다.

“오늘은 그래도 1학기 마지막 수업이니까 근사한 데 가서 함께 식사라도 하는 건 어때?”

“좋아, 그동안 너한테 신세도 졌는데, 하루쯤은 상관없을 것 같아. 내가 찬식한테 연락할 테니까 수업 마치면 같이 놀자.”

“오케이, 시간 아까우니까 집에 들르지 말고 바로 나가자.”

루나는 들뜬 얼굴로 말했다.

“훗, 그래. 밥도 먹고 근처 팝에서 술도 마시자. 아, 괜찮으면 스콧이 운영하는 클럽에 놀러 갈까?”

“오, 진짜? 너한테 이야기로만 들었지 한 번도 못 가 본 곳이라 항상 아쉬웠거든.”

이야기를 들은 루나는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거기 가면 나랑 친한 연예인들도 있으니까 룸 잡고 술이나 마시자. 이번 기회에 스콧이랑도 친해지면 너한테도 나쁘지 않을 거야.”

수혁은 설렌 감정을 감추지 못하는 그녀를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수업은 방학을 의식한 교수들 덕분에 예정된 시간보다 빨리 끝났고, 수혁과 일행들은 새벽이 다 되도록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 * *

방학 후 3일이 지났다. 수혁은 대표실에서 어플을 켠 채 도움말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니까 정리하면 어플 안에는 내가 살았던 2020년까지의 정보밖에 없다는 말이지?’

<그렇습니다, 사용자께서 정보 검색을 할 수 있는 범위는 먼 과거부터 사용자가 경험한 미래 시점까지입니다.>

‘그럼, 2020년 기준으로 가장 최신의 기술을 나에게 알려 줘.’

MK 그룹을 상대하느라 3일간 일에 매진했던 수혁은 밀린 업무를 모두 처리하자 신기술 개발 작업에 돌입했다.

‘후, 이건 그냥 백과사전이나 카탈로그에 나올 법한 정보잖아?’

<죄송하지만, 미래에 사용되는 기계에 대한 설계도는 제 능력 밖의 요청이라 제공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수혁은 어플을 통해 공정도와 설계도를 입수하고 기계 분석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빠르게 작업을 진행하려고 했지만, 초반부터 난관에 직면하고 말았다.

‘내가 생각해도 무리한 요구긴 해. 정보를 검색했을 때, 나온 것들은 인물 정보나 제품 사양처럼 단편적인 정보였으니까. 이젠 어떻게 하면 좋지?’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닙니다.>

‘그래?’

<기술 개발과 제품 설계에 필요한 상세한 정보는 제공하지 못해도 단서 정도는 제공할 수 있으니까요.>

‘일리 있는 이야기야. 태양광 패널을 검색했을 때 에너지 집적도와 효율을 어떻게 높이는지 대략적으로는 나와 있었어.’

화면에 뜬 문구를 본 수혁은 희망이 생기기 시작했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스탯에는 지능, 지혜, 통찰력이 있는데, 현재 사용자의 스탯은 일반인을 훨씬 상회하는 수준입니다.>

보통 사람은 스탯 평균은 15인 반면, 수혁의 스탯은 지혜를 제외하면 40을 초과하고 있었다.

‘어플이 제공하는 단서를 토대로 내가 직접 신기술을 개발하라는 이야기야?’

<그렇습니다. 스탯 퀘스트를 통해 능력치를 엄청나게 높여 놓으면 원하는 바를 충분히 이룰 수 있을 겁니다.>

도움말은 수혁의 의견에 동조하는 반응을 보였다.

‘그럼, 스탯 퀘스트를 진행해줘.’

<퀘스트야 만들 수는 있지만, 현재 사용자께서는 기계 분석 프로그램을 다운받으면서 생긴 페널티로 인해 스탯 향상은 내년 9월부터 가능한 실정입니다.>

‘아, 맞다. 페널티가 있었지…….’

수혁은 프로그램을 다운받은 대가로 당분간 능력치 상승이 불가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지.’

계획 실행에 차질이 생겼지만, 이대로 물러설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수혁은 컴퓨터를 켜고 인터넷 서핑을 시작했다.

* * *

시간은 빠르게 흘러 2004년 8월이 되었다. 수혁은 졸업식을 하기 위해 케이턴 대학 대강당에 와 있었다.

“벌써 졸업이라니, 실감이 안 난다. 너랑 허드슨 타워에서 만난 게 엊그제 같은데 말이야.”

석사모를 쓴 루나는 활짝 웃으며 수혁에게 말을 건넸다.

“나도 시간이 이렇게 빨리 갈 줄 몰랐어. 졸업 후 계획은 따로 있어?”

“아빠가 일단 회사에서 일하면서 천천히 진로를 찾아보라고 그러네? 아, 맞다. 찬식한테 들었는데, MIT에 진학한다면서?”

“응,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일단은 개학 전까지는 한국에 머물면서 가족들과 시간을 좀 보내려고.”

루나의 질문에 수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는 원활한 스탯 향상과 군대 연기를 위해 공과 대학원에 진학하기로 결정했다.

“한국에 두고 온 애인이라도 있는 거 같은데?”

“풋, 너무 뜬금없는 거 아니야?”

“그게 아니고서야 나처럼 매력적인 여자를 네가 가만 둘리가 없잖아.”

그녀는 아쉬워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루나는 허드슨 타워에 입주했을 때부터 수혁을 좋아했지만, 도무지 빈틈이 보이지 않아 마음을 표현할 수가 없었다.

“어, 저기 찬식이 왔다. 찬식아, 여기야.”

수혁은 그녀가 자신에게 호감이 있다는 걸 알았지만, 짐짓 모른 척하며 화제를 바꿨다.

“둘 다 졸업 축하해.”

찬식은 다가와 이들에게 꽃다발을 건넸다.

“찬식, 이번에 한국으로 돌아간다며?”

“응, 마음 같아서는 수혁이랑 미국에 더 있고 싶은데, 조금 어려울 것 같아.”

외근이란 명목으로 회사를 오랫동안 비운 찬식은 본업에 충실하기 위해 귀국을 결정했다.

“네가 아니었으면 뉴욕 생활이 참 무료했을 거야, 고마웠어, 찬식.”

“내가 더 고맙지 뭐.”

루나의 따뜻한 말에 멋쩍어진 찬식은 머리를 긁으며 대답했다.

- 314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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