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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 없는 회귀-315화 (315/316)

315화

뜨거웠던 8월이 지나고 9월이 되었다. 수혁은 유리를 데리고 미국 보스턴에 와서 새 학기 준비에 한창이었다. 이들은 MIT 대학 근방의 고급 주택에서 짐을 정리하고 잠깐 쉬고 있었다.

“아무리 재택 근무가 가능해도 뉴욕 사무실에 한 번씩은 가 줘야 될 것 같아.”

유리는 재단 업무를 부이사장에게 모두 이관했고, 지오스토리의 비상임 이사로 선임되어 주요 안건 처리할 때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는 역할을 부여받은 상태였다.

“내가 회사 갈 일이 있을 때 같이 가면 되니까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아, 뉴욕에 매입한 아파트가 있는데, 거기서 가끔 기분전환도 하고 그러자.”

수혁은 회사 대표였기 때문에 의사 결정 모임이 있으면 둘이 함께 움직여도 무방했다.

“맨해튼에 있는 아파트 말하는 거지? 네가 예전에 사진 보내 줘서 봤는데, 엄청 예쁘더라.”

유리는 뉴욕 야경이 훤히 보이는 허드슨 타워에 대한 기대감을 드러냈다.

“말로 듣는 것보다 가서 직접 보면 더 멋질 거야. 조금 있다가 가구랑 더 들어오기로 했으니까 일단 좀 쉬고 있을래?”

“응, 할 것도 없는데, 거실에서 TV나 보고 있어야겠다.”

“아니면, 잠깐 산책이라도 할까?”

“아니야, 어제부터 계속 청소하고 그랬더니 좀 피곤해서 쉬는 게 나을 것 같아.”

“알겠어, 그럼 좀 이따 보자. 난 잠시 방에 들어가 있을게.”

그녀는 수혁이 할 일이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방해되지 않게 혼자 시간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지점장님, 잘 지내셨습니까?”

수혁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노트북을 꺼낸 뒤 민호와 화상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저야 항상 똑같죠. 대표님은 보스턴에서 지내기로 되셨다고 들었습니다. 어떻게 보스턴은 살기 괜찮으십니까?”

“맨해튼과 분위기가 많이 다르기는 하지만, 일단 인근에 붙어 있어서 그런가, 뉴욕을 떠났다는 느낌은 없습니다. 안부 인사는 이쯤으로 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죠. 제가 없는 동안 제이슨의 동향은 알아보셨습니까?”

“지난 1년간 MK 이노베이션에서 특별한 활동을 하지 않은 건 알고 계실 겁니다.”

“그 녀석의 성격을 고려했을 땐, 좀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죠.”

수혁은 은둔자처럼 지내는 제이슨의 행보를 의아하게 생각했다.

“네, 그런데 지난달부터 MK 이노베이션에서 다시 활동을 재개하면서 경제계에 지각 변동이 조금씩 일어나고 있습니다.”

“음, 제이슨이 전면에 나서기는 어려울 텐데…… 자세히 말씀해 주세요.”

MK 이노베이션은 수혁의 폭로로 인해 국제 사회의 비난에 직면했고, 이를 만회하기 위해 특허권과 종자 사업에서 파생되는 수수료를 모두 동결시켰다. 이에 더하여 제이슨은 대표직을 사임하고 재계를 당분간 떠날 것을 선언하여 오너들 사이에서 파격 행보라는 평을 듣고 있었다.

“최근에 MK 그룹의 자본이 부동산 시장에 쏠리고 있습니다. LA의 실리콘 밸리와 뉴욕에 있는 빌딩들뿐만 아니라 매물로 나오는 고가의 부동산 중 대부분을 매입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됩니다.”

“거대한 부를 바탕으로 무분별하게 매입하는 것을 보면 배후에 제이슨이 있는 게 분명합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잠재력이 있다고 여겨지는 기업이 있으면 주식을 대량으로 사들이거나 인수 합병을 하여 회사의 규모가 급속도로 커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행태에 대해 언론사들이 잘 다루지 않다니 이상하네요. 부동산이라는 건 국민의 삶과 직결되어있어 거대 자본이 들어오면 집주들은 쾌재를 부르지만, 그 외의 사람들은 값비싼 주거 비용으로 큰 피해를 보기 마련이거든요. 게다가 시장 교란 행위로 비판을 받은 지 1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또다시 공격적인 사업 방식을 재개한 건 논란이 될 여지가 충분합니다.”

수혁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야기했다.

“사실, 2달 전쯤에 우리 회사의 주식을 사들이려는 움직임이 포착되지 않았습니까? 물론 대표님의 기민한 대처 덕분에 피해를 보진 않았지만, 그때 언론에 제보하거나 대책을 세워 강력하게 대응했으면 더 좋을 뻔했습니다.”

제이슨이 SH 계열사의 주식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는 걸 알았기에 신주 발행을 자제하고, 과반의 지분율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의도가 불순하더라도 보여지는 겉모습은 합법적인 주식 매수에 불과해서 언론에 제보할 만한 거리가 아닙니다. 그리고 MK 그룹에 대한 대책은 이미 세워 놓지 않았습니까?”

수혁은 김민호 지점장을 주변 측근들 못지않게 아꼈기에 향후 계획과 관련된 사안들을 모두 공유한 상태였다.

“그렇긴 하지만,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몰라서 드리는 말씀이었습니다.”

“시가 총액 500조를 넘어가는 회사를 짧은 시간에 무너뜨리려는 것은 만용과 오만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MK 그룹의 영향력 약화에 초점을 둬야지 모리 일가를 몰락시키는 것과 같은 현실성이 없는 목표는 지양해야 합니다.”

민호가 조급한 모습을 보이자 수혁은 MK 그룹이 여타의 기업들과는 차원이 다른 회사임을 상기시켜 주었다.

“후, 대표님 말씀이 맞습니다. 급하게 일을 처리하면 탈이 생기기 마련이지요. 그나저나 존 대통령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게 너무 서운합니다.”

“모리 집안이 쌓아 놓은 토대가 워낙 견고해서 아무리 대통령이라도 섣불리 건드릴 수 없을 겁니다. 설사 본인이 마음을 먹고 공권력을 움직이고 싶어도 MK 그룹과 친분이 있는 정치인들이 많아 제약이 적지 않을 거고요. 다른 사람에게 해결책을 찾지 말고 우리 힘으로 차근차근 계획을 실행하다 보면 언젠간 저들이 쌓아 놓은 철옹성에 흠집을 낼 수 있는 날이 올 겁니다.”

민호의 푸념을 들은 수혁은 타인에게 기대지 말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야 함을 강조했다.

“알겠습니다, 그날을 하루라도 앞당기기 위해 옆에서 대표님을 잘 보좌하겠습니다.”

“하하, 말씀만 들어도 참 든든하네요. 자, 이젠 뉴욕에 세울 지사 건물과 지오스토리 현안에 대해서 이야기하도록 하죠.”

“네, 대표님의 지시에 따라 2년 뒤에 완공될 뉴욕 지사 건물에는 지오스토리뿐만 아니라 다른 계열사에서 파견 나온 직원들이 근무할 수 있도록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MK그룹에 관한 논의를 끝낸 수혁은 민호와 함께 여러 가지 주제를 놓고 대화를 이어 갔다.

* * *

세월은 빠르게 흘러 2008년이 되었다. 제이슨 모리는 아버지인 필 모리와 TV를 보고 있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많은 국민이 큰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대출금을 환수하지 못해 고통을 겪고 있는 은행과 금융 기업들에 재정 지원을 할 것을 선언합니다. 그리고 부동산 시장에 투기 목적의 자본 유입을 자제시키기 위해 적절한 페널티를 부과하여 적정 시장가를 되찾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연단에 선 존 그레엄 대통령은 1930년대 대공황 이후로 처음 맞는 국가 경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대책을 이야기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는 신용 등급이 낮은 사람에게 주택 담보 대출을 해 주는 금융 상품으로 주로 저소득층에서 집을 사는 데 이용하는 서비스였다. 그러나 정부의 급격한 금리 인상으로 사람들은 원리금을 갚지 못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세계는 금융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젠장, 대통령이라는 작자가 기업 활동을 장려하지는 못할망정 페널티를 준다니…….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연설을 듣던 제이슨은 분을 이기지 못하고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네가 산 부동산들은 주택보다는 빌딩이나 컨벤션 홀 같이 규모 있는 것들이잖아. 페널티라고 해 봤자 피해가 크게 갈 것 같진 않은데, 왜 그렇게 흥분하는 거냐?”

필 모리 회장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건 잘 모르시니까 하는 말이에요. 대통령이 부동산 대책이라며 내놓은 정책을 보니까 최근 5년간 부동산을 사들인 기업 중 시장 교란 행위를 한 회사에 천문학적인 벌금을 매긴다고 그랬어요. 하, 다달이 나가는 이자만 해도 엄청난데, 벌금까지 내게 되면 타격이 작지 않을 것 같은데 어떡하죠?”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내가 그래서 말했잖아? 헛짓거리 그만하고 하던 거나 잘하라고 말이야.”

필은 제이슨을 한심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아버지도 본업에 집중하신 것치고는 상황이 좋지 않은 것으로 아는데요? 대통령께서 2년 전에 새로운 에너지 정책을 들고나온 이후로 우리 그룹 매출이 조금씩 줄어들고 있지 않나요?”

“그룹 내 다양한 사업부서가 존재하지만 결국 우리는 석유 판매로 먹고사는 회사야. 그런데 갑자기 정부에서 에너지 자립 정책을 들고나오는 바람에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지.”

필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아들의 말에 동의했다.

“평화당에 우리 집안과 친한 정치인들이 제법 있지 않나요?”

“이야기해 봤지만, 자국의 외교력 강화와 탄소 배출 문제가 국제적인 이슈로 떠올라서 친환경 정책을 추진할 수밖에 없다는 답변만 들었다.”

제이슨의 질문에 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2000년대 들어 아프리카나 아시아 국가와 같은 개발 도상국을 중심으로 기후 변화와 환경 오염 문제가 거론됐는데, 기존 선진국들이 경제 발전 과정에서 배출한 탄소와 오염 물질이 주요 원인으로 지적되어 미국뿐만 아니라 일본, 독일과 같은 선진국들도 친환경 에너지 개발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존이 대통령이 되고 나서 우리 회사가 점점 기울어진다는 느낌은 제 착각일까요?”

“우리 회사가 어려움을 겪는 데에는 존이 아니라 강수혁 그놈의 영향이 크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필의 입에서 수혁의 이름이 거론되자 제이슨은 깜짝 놀랐다.

“친한 의원에게 들었는데, 존이 최근에 발표한 부동산 대책이랑 환경 정책 같은 것들이 모두 강 대표 머리에서 나왔다는구나.”

“어쩐지, 1년 전 입찰 과정에서도 SH전자를 뽑을 때부터 수상했어요.”

존 그레엄 대통령은 2007년, 석유 소비를 줄이고 친환경 에너지 공급을 늘리기 위해 발전소를 비롯한 에너지 인프라에 대한 대대적인 점검에 들어갔고 기술력이 있는 기업을 선정하려 했는데, 이는 석유, 석탄에 비해 낮은 효율성을 가진 자연 에너지 분야에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여 석유 소비를 줄이려는 의도가 있었다.

“나도 처음에는 존이 특혜를 준 게 아닌가 의심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강 대표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

“그건 또 무슨 말씀이세요? 자국 기업도 아닌 SH에 수십억 달러 규모의 수주를 맡긴 건 개인적인 친분이 없으면 불가능하다는 건 바보가 아니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잖아요.”

제이슨은 답답하다는 제스처를 취하며 반문했다.

“난 지난 2년간 새로운 정책에 적응하기 위해 재생 에너지 개발팀을 꾸렸고, 막대한 자본을 투입했다. 그 결과 시중에 나온 것보다 효율이 좋은 제품 개발에 성공했지만, SH전자의 기술력을 능가할 수는 없었어.”

필은 미간을 찌푸리며 회사가 처한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 316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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