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0화 미래투자신탁(2)
장구영.
잘못 발음하면 옛 홍콩의 스타가 연상되는 이름.
회귀 전의 유명인을 이런 자리에서 만나게 줄이야.
물론 미래의 대통령 후보인 김현석이나 조 단위의 재산을 모은 투자가 강하민에 비해선 인지도가 낮은 편이기는 했지만, 그는 흔히 소액 주주들을 일컫는 개미들의 우상이었다.
20년 뒤의 슈퍼개미란 칭호를 거머쥐는 남자.
그가 바로 장구영이다.
강하민이 우량주와 저평가된 주식 위주의 중·장기적인 가치 투자로 '대한민국의 워런 버핏'으로 불렸다면, 장구영은 이와는 완전히 상반된 행보를 보였다.
주가 흐름과 거래량 등의 기술적 지표를 통해 자신만의 주식 분석법을 정립한 그는 스켈핑과 데이트레이딩의 투자 방법만을 고집했다.
그리고 마흔의 나이에 수백억 원을 보유한 슈퍼 개미로 등극했다.
전혀 다른 스타일의 두 투자가.
강하민과 장구영.
이 둘이 한자리에 있다는 것만 해도 시운에게는 대사건이었다.
'이름이 똑같아서 설마설마했는데….'
정말 본인일 줄이야.
어쩌면 회귀 전에도 이런 자리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다만, 실력만큼이나 외적인 요소들을 중요시하는 강하민이라면?
"……."
장구영은 체격도 왜소하고 표정도 왠지 자신감이 없어 보였다.
강하민의 성에 차지 않을 모습이다.
정말 오늘과 같은 자리가 있었다 해도 실력과 상관없이 떨어뜨렸을지도 모른다.
슬쩍 훔쳐본 강하민의 표정이 한없이 냉랭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시운은?
'아무 상관이 없지.'
이미 유레카가 있고, 투자의 귀재라 불린 강하민이 있기에 회사의 성장에 대한 걱정은 전혀 없다.
하지만 좋은 게 보이면 가지고 싶은 게 인지상정.
다다익선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아, 안녕하십니까! 미, 미래, 미래투자신탁에 입사 지원을 한 자, 장구영이라고 합니다!"
잔뜩 긴장한 듯한 자기소개로 면접은 시작되었다.
그의 첫인상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강하민의 날카로운 질문이 이어졌고, 그때마다 장구영은 진땀을 흘리며 대답했다.
비교적 각을 덜 세운 시운의 질문에는 다소 자신감을 되찾은 듯 소신껏 답했지만, 면접이 모두 끝났을 때의 장구영은 축 처진 모습으로 퇴장했다.
초지일관 냉랭한 강하민의 표정 때문이다.
장구영이 면접장을 나가자마자 그의 이력서를 한쪽 구석에 밀어놓는 강하민의 행동에 시운은 속으로 웃어버렸다.
자신이 그를 뽑겠다고 하면 강하민은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까?
면접은 계속되었다.
경력자 세 명에 이어 졸업 예정자 두 명의 면접까지 마쳤을 때, 어느덧 3시간이 훌쩍 지났다.
말없이 지원자들의 이력서를 다시 한번 확인하던 둘은 합격자를 가려내기 위해 마주했다.
"우선 마지막에 면접을 봤던 전민아. 난 이 사람이 참 마음에 드는데, 시운이 넌? 어떻게 생각해?"
명문대 출신에다 투자 관련 자격증도 갖춘 인재다.
대기업에 얼마든지 입사할 수 있는 스펙임에도 이제 시작하는 미래투자신탁에 지원했다.
지원 동기를 묻는 강하민의 질문에 그녀는 당차게 대답했었다.
- 용의 꼬리, 그것도 작디작은 비늘 중 하나에 만족하느니, 언제 승천할지는 몰라도 이무기의 이빨이 되고 싶습니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꼿꼿한 자세와 당당해 보이던 표정은 강하민의 호감을 얻기 충분했다.
그에 시운도 이견은 없었다.
"네, 저도 그분 마음에 들었습니다."
"좋아. 그럼 전민아 씨 합격은 확정 짓고…. 나머지 한 명은. 아무래도 경력자에서 뽑는 게…."
"전 이분으로 정했습니다."
강하민의 말을 끊으며 시운은 하나의 이력서를 앞으로 내밀었다.
이력서의 주인이 누군지 확인한 강하민은 얼굴을 찡그렸다.
"시운아, 이 사람은…."
장구영을 선택한 시운의 판단에 그는 우려의 빛을 나타냈다.
"모의 투자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기록했다지만, 모두 스켈핑과 데이트레이딩을 통한 단기 투자야. 중·장기 투자가 주가 될 우리 회사와는 맞지 않아."
"여기 와서 배워나가면 됩니다. 기본적인 감각은 있어 보이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그리고 장구영 씨가 투자 대회 당시 접목했다는 통계 분석법이 궁금하기도 합니다. 그걸 중·장기 투자 모델에도 적용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 아닙니까."
"……."
강하민은 어떻게든 시운을 말려보려 했지만, 단호한 그의 눈을 마주한 순간 포기했다.
"하아…. 아무리 그래도 경력자 하나 없이 신입으로만 팀을 구성한다는 건 정말 아닌 것 같다."
남은 미련에 강하민이 마지막 푸념을 털어놓지만, 되레 시운은 빙긋 웃으며 대꾸했다.
"팀장인 저도 신입이나 마찬가지인데요, 뭘."
"그러니 경력자가 한 명쯤은 있어야지!"
발끈하듯 쏘아 붓는 그의 말에도 시운은 그저 웃었다.
강하민은 포기했다는 듯 두 손을 들어버렸다.
"그래, 네 팀이니 니 마음대로 해라."
"이해해줘서 고맙습니다."
좌 강하민, 우 장구영이라….
당장 결과가 나오기는 힘들겠지만, 추후 어떤 시너지를 내게 될지 자못 기대된다.
투자운용 2팀뿐만 아니라, 미래 빌딩의 임대 수입까지 관리하려면 인력이 더 필요하다는 강하민의 판단에 경영지원팀도 총무와 경리 직원을 한 명씩 충원하였다.
이로써 대표이사, 경영지원팀 세 명, 투자운용 1팀과 2팀 각 세 명으로 모두 열 명의 미래투자신탁 창립 멤버가 구성되었다.
자본금만 956억 원인 투자회사의 시작이었다.
* * *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첫눈이 내렸고, 한파가 닥쳤으며 어느덧 계절은 완연한 겨울로 접어들었다.
현시운은 기존의 역삼동 아파트를 나와 좀 더 보안이 철저한 청담동의 고급 빌라로 터전을 옮겼다.
로얄힐스 A동 501호.
69억 원을 주고 매입한 이 빌라는 공급면적 87평에 전용면적 68평으로, 방 5개, 화장실 3개와 거실, 주방, 발코니로 이루어졌다.
빼어난 한강뷰를 자랑하며, 지하 2층에 5대를 주차할 수 있는 프라이빗 주차장까지 완비되어있다.
시운은 두터운 카디건을 걸치고 발코니로 나왔다.
입을 열어 숨을 토하자 새하얀 입김이 연기처럼 흩어진다.
비록 날씨는 추웠지만, 멀리 보이는 한강의 야경은 눈부셨다.
"인생은 한강 물 아니면 한강뷰라더니…."
회귀 전 마지막을 맞이한 곳은 한강대교 근처의 횡단보도.
다시 주어진 기회로 시운은 한강이 내다보이는 고급 빌라에 입성했다.
이곳을 사서 들어온 가장 큰 이유는 앞서 언급했듯 보안의 중요성 때문이다.
지난번 집에 강도가 든 일과 비슷한 일이 언제 또 일어날지 모르는 마당에 위기 알림권만 소비하며 그곳에 계속 머무를 이유는 없다.
예방할 수 있는 부분은 충분히 대비하여 이용권 구매에 들어가는 돈의 낭비를 막자는 게 시운의 생각이다.
깊이 들이마신 차가운 공기를 용트림처럼 뱉어내고 있을 때, 안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추운데 거기서 뭐 해. 이십 대의 청승이냐?"
와인 셀러에서 와인 한 병을 꺼내오는 강하민의 핀잔이다.
지난번 장구영 채용 건으로 아직도 꽁한 마음이 덜 풀린 듯 보였다.
"시운아, 어서 와. 식기 전에 먹자."
"…네."
앞치마를 두르고 주방에서 만든 음식을 거실 테이블로 부지런히 나르는 김현석.
대통령 후보였던 회귀 전 그의 모습이 전혀 연상 되지가 않는다.
오늘은 12월 31일.
한 해의 마지막을 마땅히 갈 곳 없는 남자들이 한 곳에 뭉쳤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시운과 김현석이 사는 집에 강하민이 외롭다며 술을 사들고 쳐들어온 것이다.
검사 임용에 합격하여 고시원을 나온 김현석.
원래라면 검사 임용시험에 합격해도 변호사 자격시험에 떨어지면 자격이 취소된다.
하지만 김현석은 작년에 미리 변호사 자격을 따놓은 상황.
내년 초에 단기 연수에 들어갈 예정이라 짧게 묵을 만한 곳이 마땅치 않은 걸 알게된 시운이 먼저 권하여 둘은 지금 함께 생활하고 있다.
차려진 음식 앞에 자리를 잡고앉은 셋.
김현석은 각자의 잔에 술을 채우고는 먼저 잔을 들었다.
"올해 마지막 날이니 만큼 건배나 한 번 해볼까?"
시운과 강하민도 그에 동조하듯 앞에 놓인 술잔을 들었다.
김현석이 먼저 미래투자신탁의 무궁한 발전을 빌어줬고, 그에 화답하듯 강하민이 검사의 꿈을 이룬 그를 축하해줬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운은.
"형님들. 서른 되시는 걸 축하합니다."
둘의 표정이 동시에 구겨졌다.
그렇게 우여곡절이 많았던 2018년 무술년의 해가 저물었다.
* * *
2019년.
황금 돼지의 해가 밝았다.
현시운에게 큰 기회로 다가올 의미 깊은 한 해의 시작이다.
새해 첫 행보로 보라산 하늘정원에 부모님을 뵙고 온 시운.
거기서 그는 회귀 직후의 다짐을 다시 되새기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다음날인 1월 2일.
대망의 (주)미래투자신탁 창립일이다.
"별 거창한 말은 않겠습니다. 모두가 뜻한 바가 있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그게 뭐든 다들 이룰 수 있길 바랍니다.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거창한 기념식은 필요없다는 강하민의 판단에 창립기념식은 조촐하니 대회의실에서 다과와 음료수를 차려놓고 이루어졌다.
되레 시운이 돼지머리 올리고 고사를 지내야 하지 않냐고 말해 강하민으로부터 나이를 의심받았다.
첫날이라 분위기가 어수선하다.
들뜬 마음과 동시에 약간의 두려움이 직원들 행동으로 드러났다.
강하민은 직원들이 서로 안면을 익히고 융화되길 바라는 마음에 오후 근무 대신 인근의 고급 일식집을 예약해 점심 식사 겸 회식 자리를 마련했다.
"두 사람 이쪽 일은 처음이라 그랬지? 내일부터 단단히 각오해. 제대로 교육해줄 테니!"
"바라던 바입니다."
"아, 네…."
투자운용 1팀 이철민 대리의 으름장에 전민아는 씩씩하게 되받아쳤고, 장구영은 면접 때처럼 잔뜩 주눅이 들었다.
경력도 없이 들어온 상황에 일을 제대로 쳐내지 못할 거로 강하민은 판단했다.
그의 배려로 투자운용 2팀의 두 신입은 한 달여 간 투자운용 1팀에서 집중 교육을 받기로 정해졌다.
물론 팀원이 없다고 시운이 손 놓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작년 12월과 올해 1월이 되면서 갱신된 정보 이용권을 잊지 않고 구매했고, 도중에 개인 자금을 늘리려고 쓴 2장을 제해도 남은 이용권 수는 7장이다.
그걸 회사를 통해 투자하는 데 제대로 써먹어야겠지.
또한 시운이 올해 처음으로 할 일은 이미 전부터 정해져 있었다.
다음날 출근한 시운은 팀원의 파견으로 텅 빈 투자운용 2팀 사무실에서 혼자서 열심히 뭔가를 작성했다.
오래지 않아 완성된 문서를 출력한 그는 결재판에 넣은 뒤, 곧장 대표실을 찾았다.
"아침부터 뭔가요?"
사적으로는 스스럼없어도 공적인 자리에서만큼은 본분을 지키자고 서로 얘기했기에 둘은 회사 대표와 직원으로 서로를 대했다.
"투자운용 2팀에서 진행하려는 첫 번째 투자에 대한 계획서입니다."
"…벌써요?"
강하민은 결재판을 넘겼다.
초기 셋업 때 정해둔 문서 양식에 맞춰 투자 계획서가 완성되어 있었다.
아무리 운용자금 중 절반을 시운의 의향에 따라 움직이기로 했다고 해도, 회사의 틀을 갖춘 이상 대표인 강하민의 결재는 득하도록 방침을 세웠다.
그 과정에서 그의 생각과 조언을 들을 수 있으니 시운으로서는 많은 것을 배울 기회이기도 하다.
"진성전자 지분투자 건?"
내용을 확인한 강하민의 반문에 시운은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여기…, 삼정전자의 1차 벤더 아닙니까?"
"그것도 작년까지만입니다. 삼정전자 측에서 지난 12월 부로 계약을 종료했습니다."
미처 몰랐던 정보에 강하민은 눈을 번뜩였다.
"그럼 최대의 고객사가 떨어져나갔다는 말인데…. 메리트 없는 곳에 돈을 쓸 필요가 있을까요?"
"물론 있습니다."
"어떤?"
시운은 진성전자의 뛰어난 기술력과 신기술 특허에 대해 따로 준비해온 자료를 보여주며 설명했다.
해외 판로를 개척했을 때, 삼정전자에 정해진 양만 납품하던 과거보다 얼마나 더 많은 매출을 일으킬 수 있는지도 수치화된 도표로 보여줬다.
"으음…."
저평가된 기업에 장기간 투자한다.
강하민의 투자 이념과도 맞아떨어진다.
하지만 그 전에 짚고 넘어가야 할 사항이 하나 있다.
"해외 판로 개척이 손 쉽지 않을 텐데…. 너무 낙관적인 전망 아닙니까?"
그의 우려에 시운은 웃으며 대답했다.
"걱정마십시오. 꼭 성공할 겁니다."
"……."
시운이 내비치는 자신감에 강하민은 가만히 생각하다, 이내 결재란에 사인을 했다.
이토록 자신만만해하는 데는 본인이 모르는 뭔가가 있을 거란 판단에서다.
지난 과거의 투자 성공에 작용한 시운의 감이 발동한 걸지도?
그에 운도 따르겠지.
리스크에 대해 언급한 것만으로도 강하민은 자신의 역할을 다한 거나 마찬가지다.
결재를 득하고 나오는 시운의 입가에 진한 웃음이 걸려있었다.
"많이 바빠지겠군."
이제 본격적으로 움직일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