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로 재벌 참교육-21화 (21/139)

§021화 두 번째 기업 투자(1)

이민석은 수화기를 든 채 인상을 찡그렸다.

"이렇게 일방적으로 거래 중지를 통보하는 게 어딨습니까!"

이번 주만 벌써 다섯 통째 같은 용건의 전화가 걸려왔다.

- 이 차장 심정은 나도 알겠는데…. 우리도 어쩔 수 없어요. 마침 공급 계약도 이번 주로 끝나는 마당이니.

보통 계약 만료 전 석 달, 아무리 늦어도 한 달 전에는 연장 의사가 없다는 걸 통보해주는 게 관례였다.

쌍방 간에 따로 그에 대한 말이 없으면 자동으로 계약은 연장되는 거고.

근데, 계약 만료 임박에 통보하는 다섯 번째 고객사 담당자의 말에 이민석은 분통이 터졌다.

"네, 잘 알겠습니다. 이만 끊죠."

이민석은 끓어오르는 화를 누르며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타악!

그러나 채 억누르지 못한 분기가 밖으로 조금 표출되었다.

"후우!"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이민석의 모습에 진성전자(주) 영업관리팀 직원들은 숨소리마저 죽였다.

질식할 것 같은 공기가 사무실 안에 짙게 내려앉는다.

삼정전자와의 계약이 지난달 부로 종료되었다.

그와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 중소 거래처들이 계약 종료를 알려오고 있다.

아직 계약 기간이 남은 거래처는 평상시 발주하던 물량을 50% 이상 줄이기까지.

아마도 계약 만료가 다가오면 앞선 다섯 업체처럼 연장 의사가 없음을 통보할 것 같았다.

1월 예상 매출량은 전년도 월평균 대비 십분의 일도 안 될 전망이다.

전체 매출의 70%를 차지하던 삼정전자의 이탈이 불러온 결과였다.

"……."

이민석도 잘 알았다.

진성전자에 반도체를 납품받아 가던 중소업체들이 이렇듯 일방적으로 거래를 끊은 데에 삼정전자의 입김이 있었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몹시 분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고품질의 자사 제품을 조금이라도 더 받아 가려 했던 업체들이었으니까.

삼정전자와 직접적인 거래 관계가 없음에도 거래처들은 진성전자에 등을 돌렸다.

그만큼 국내, 아니 세계 반도체 1위인 삼정전자의 영향력이 막대하다는 증거겠지.

띠리리-

마침 울리는 사무실 전화를 선배들의 뜨거운 눈길에 팀의 막내인 신입사원이 재빨리 받았다.

"네, 진성전자 영업관리팀입…. 아, 네! 네, 네.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신입사원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는 생쥐의 심정으로 이민석에게 조심스레 다가갔다.

"저어…. 차장님."

"…네. 무슨 일이죠?"

"사장님께서 찾으십니다. 지금 바로 대표이사실로 오라고 하시는데요."

"…알겠습니다."

이민석은 정장 상의를 챙겨입고는 곧장 대표이사실로 향했다.

똑똑-

- 들어와요.

문을 열고 들어간 이민석은 소파에 앉은, 노년의 신사에게 고개를 숙였다.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이쪽에 앉으렴."

진성전자의 사장인 이학만은 손으로 옆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나란히 앉은 두 사람.

얼굴이 무척이나 닮았다.

"민석아."

"…네, 아버지."

공사 구분이 확실한 이학만이 평소와 달리 회사에서 자신을 이름으로 불렀다.

사적인 용건인가 싶어 이민석 역시 그것에 맞게 응답했다.

하지만, 그건 이민석의 착각이었다.

줄줄이 고객들의 거래 중지 통보가 이어지는 악조건 상황 속이다.

근데 거기에 설상가상으로 악재가 더해졌고, 이학만은 거기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박 팀장이 잠적했다는구나."

"네에?!"

작년 9월 말경, 삼정전자의 일방적인 계약 해지 통보 이후로 전부터 조금씩 시도해보던 해외 판로 개척이 무엇보다 시급해졌다.

그 막중한 임무를 맡은 게 진성전자 창립멤버이기도 했던 해외 영업팀의 박 팀장이었다.

그가 독일 디스플레이 제조업체와의 미팅 스케줄로 한국을 떠난 게 고작 사흘 전의 일이었다.

이학만의 신뢰와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그였는데…, 잠적을?

"서, 설마…?"

불현듯 떠오른 나쁜 추측.

이학만은 아들의 그런 예상이 맞는다는 듯 힘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해외 활동비 계좌에서 모든 돈을 인출해서 사라졌어."

"!!"

해외 출장 도중 계약 혹은 영업과 관련해 긴박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를 대비해 해외계좌에 넣어뒀던 50만 달러.

당장 그 돈이 없다고 진성전자가 무너지지는 않는다.

다만, 박 팀장이 그 돈을 인출해 사라졌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그의 행동에 악의가 담겼다는 말이니까.

이로써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 판로 개척에도 적신호가 켜졌다.

'설마 박 팀장 일도 삼정전자에서?'

현재 닥친 모든 불행의 시발점이 삼정이다 보니 이 일마저 그곳의 수작처럼 느껴진다.

삼정전자가 이토록 진성전자를 괴롭히는 이유….

바로 진성전자가 다년간의 연구 끝에 지난 7월에 개발한 반도체 신기술에 있었다.

기존 방식보다 우수한 반도체 생산이 가능해졌다.

소모되는 전력을 30% 줄이고 효율은 60%로 향상시킨다.

이미 특허까지 취득한 상황.

아직 라인 증설에는 들어가지 못했지만, 조만간 대량 생산 시스템이 갖춰지면 반도체 시장에 적지 않은 파란을 몰고 올 예정이다.

- 백억 드리겠습니다. 향후 10년간 매년 이천억의 발주도 약속하죠. 그러니 특허권, 저희한테 넘기세요.

연 매출 천억에 자본금 150억인 진성전자에 나쁘지 않은 제안이다.

하지만 이학만은 이를 거절했다.

향후 생산될 자사 반도체의 부가가치가 그보다 훨씬 높을 거란 이유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자신과 진성전자의 오늘을 있게 한 임원들이 삼정전자 출신이라는 게 가장 컸다.

파벌 싸움에서 밀려서 혹은 희생양으로 삼정전자를 퇴사한 이들이 뭉쳐서 만든 게 바로 진성전자다.

삼정전자가 반도체 업계에서 가장 큰 거래처라서 여태껏 거래는 이어왔지만, 제품을 인정받고 납품하는 데까지 얼마나 많은 설움과 차별을 받았는지 모른다.

근데 돈이 될만한 기술을 개발하니 자신들에게 팔아라?

이학만도 그렇고 과반수의 임원이 이에 반대했다.

그에 대한 보복으로 지금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거고.

"신고는요? 경찰에 신고해야죠, 당장."

"관리부장이 변호사 통해서 고소 진행하고 있다."

작정하고 숨은 박 팀장이다.

쉽게 잡히지는 않겠지.

"그럼 해외 판로 개척은…."

이민석의 말에 이학만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지."

해외 영업팀의 다른 팀원들은 백업 정도의 역할만 했지, 해외를 돌며 바이어를 직접 만난 건 박 팀장이었다.

자금이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어서 여태껏 해외시장 개척에 적극적이지 못했었다.

그에 따른 여파를 지금 뼈아프게 실감하고 있다.

띠리리~

테이블 위에 놓인 전화가 울렸다.

이학만은 불이 들어온 내선 램프 등을 보곤 수화기를 들었다.

관리부에서 걸려온 전화다.

아마도 박 팀장에 대한 고소 건의 진행 상황을 보고하려는 거겠지.

"네, 뭔가요?"

- 사장님, 방금 외부에서 문의 전화가 왔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본사를 방문하여 사장님을 뵙고 드릴 제안이 있다고 합니다.

"방문? 어디서요?"

- 그게….

관리부 직원은 잠시 망설이다 말을 이었다.

- 미래투자신탁이라는 투자 전문회사입니다.

"미래투자신탁?"

처음 들어보는 회사명에 이학만은 의아해했고, 옆에서 이를 들은 이민석의 표정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 * *

경기도 평택에 있는 진성전자 본사에 도착한 현시운은 방문객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처음 방문하는 입장인데 B사 차량은 너무 눈에 띌까 싶어 회사 차량을 몰고 왔다.

서류 가방을 챙긴 시운은 곧장 사무동을 향했다.

"음…."

벌써 1월 중순.

삼정전자와의 거래 중지에 따른 여파가 한눈에 보이는 듯했다.

평소라면 생산라인에 붙어 쉼 없이 일하고 있었을 현장 직원들이 삼삼오오 모여 얘기를 나눈다.

하나같이 어두운 표정에서 그들도 현재 일이 없는 것에 몹시 불안해하고 있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삐이-

사무동 입구에 도착한 시운이 호출 벨을 눌렀다.

곧 외부 스피커를 통해 음성이 들려왔다.

- 어떤 용무로 오셨습니까?

"미래투자신탁에서 왔습니다. 오전에 사장님과의 면담을 요청했었습니다만."

- …아! 3층으로 오시면 됩니다.

그 말과 함께 닫혔던 입구가 열렸다.

안내받은 대로 시운은 3층으로 향했고, 복도에서 30대 중반의 남자가 그를 맞이했다.

"진성전자 영업관리팀 이민석 차장입니다."

"미래투자신탁 투자운용 2팀을 맡고 있는 현시운입니다."

"음, 이쪽으로 오시죠. 사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민석은 대표이사실로 안내하면서 힐끗 시운을 훔쳐봤다.

'너무 젊은데?'

기껏해야 20대 초중반?

대학생으로 봐도 위화감이 없을 얼굴이다.

그런 사람이 투자회사를 대표해서 왔다?

미래투자신탁이란 생소한 회사에 대해 작은 불신이 생긴다.

대표이사실에 도착한 이민석은 문을 두드려 용건을 알리고 들어갔다.

"어서 와요, 진성전자 사장 이학만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미래투자신탁 현시운 부장입니다. 이렇듯 요청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학만 역시 이민석 못지않게 젊은 시운의 모습에 놀랐고, 직급이 부장이라는 데에 한 번 더 놀랐다.

아까 시운의 직급을 듣지 못했던 이민석 역시 두 눈이 커졌다.

"음. 우선 여기 앉으세요."

"네, 감사합니다."

소파 상석에 이학만, 왼쪽에 시운 그리고 그 맞은편에 이민석이 자리했다.

잠시 서로의 명함을 주고 받는 시간을 가졌다.

"차라도 한잔해야죠? 어떤 걸 좋아하나요. 커피? 녹차?"

"전 아무거나 다 좋습니다."

"그래요, 그럼."

이학만이 내선 전화로 관리부를 연결해 커피 석 잔을 부탁했다.

"서울에서 오셨다고요? 내려오는 데 고생했겠군요."

"아닙니다. 고속도로를 타니 금방이던데요."

소소한 담소로 시작한 대화는 관리부 직원이 커피를 내려놓고 가면서 끝을 맺었다.

"그럼 본론을 듣고 싶은데…. 미래투자신탁에서 여기까지 찾아와서 할 제안이란 게 뭔가요?"

이학만의 물음에 시운은 마시던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마주 앉은 이민석의 눈빛 역시 좀 전과는 달라졌다.

시운은 둘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지금 진성전자의 사정이 많이 어렵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요?"

"저희 미래투자신탁에서 진성전자에 투자를 하겠습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곳을 인수하고 싶습니다."

"?!"

이학만과 이민석의 표정이 단번에 굳어졌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우리 회사를 인수하고 싶다니."

잔뜩 날이 선 이민석의 반문에 시운은 진지한 낯빛으로 입을 열었다.

"말 그대로입니다. 진성전자 주식의 과반수를 매입했으면 합니다."

난데없이 찾아와 인수니, 뭐니 하는 말에 이민석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당신 뭡니까! 삼정에서 보내서 온 겁니까? 이런 식으로 남의 회사를 훔쳐가겠다는 겁니까!"

그렇게 오해할 만도 했다.

지금 진성전자의 입장에서는.

상장기업이었다면 굳이 이럴 필요없이 주식 시장에서 지분을 매집했으면 되겠지만, 아쉽게도 진성전자는 비상장기업이다.

아니, 오히려 다행인가?

상장되어 있었다면 삼정에서 막대한 자금을 들여 경영권을 뺏었을 지도 모르니까.

"저희 미래투자신탁은 삼정 그룹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그걸 믿으라고 하는 소린가요. 하필이면 이 시점에 찾아와선!"

불신 어린 이민석의 말.

한발 물러서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이학만의 얼굴에도 경계의 빛이 잔뜩 서렸다.

시운은 이들을 설득하기 위해 준비해온 자료를 서류 가방에서 꺼냈다.

"?"

한 부씩 자신의 앞에 놓인 종이 뭉치에 이학만과 이민석은 의아함을 드러냈다.

첫 장의 표지에 적힌 제목은 이랬다.

[미래 그룹 설립안]

그것은 시운의 장기적인 계획을 간략히 요약한 문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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