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2화 두 번째 기업 투자(2)
어느 날 시운이 강하민에게 물은 적이 있다.
- 형. 재벌을 좌지우지하고 싶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요?
그 질문에 강하민이 지은 표정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 …그건 왜? 재벌에게 무슨 원한이라도 있어?
- 아니, 그건 아니고…. 그냥 궁금해서요.
- …간단해.
- ?
- 더 힘 있는 재벌이 되면 돼.
- …….
장강 그룹보다 더 힘 있는 재벌이라….
말과는 달리 간단한 해결책은 아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시운은 해답을 얻은 것만 같았다.
시운에게는 남들에게 없는 것이 있다.
대략이나마 아는 미래의 흐름과 유레카.
시간이 다소 걸리더라도 재벌이 되는 건 시운에게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재벌이라….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44년을 버티다시피 살았었던 시운에게 꿈과 같이 들리는, 달콤한 말이다.
장기우에 대한 복수심으로 지금껏 일을 벌여왔지만 최근 들어 이런 생각이 자주 든다.
녀석에 대한 복수를 목표로 자신의 인생 전부를 거는 것 또한 회귀 전처럼 장기우에게 휘둘리는 삶은 아닐까, 하는.
장기우에게 그렇게까지 의미를 크게 부여할 이유가 있나?
해서 시운은 인생의 목표를 다시 정립했다.
재벌.
그까짓 것 한 번 되어보지, 뭐.
장기우의 가치는 자신이 재벌이라는 진정한 목표를 세울 수 있게 작게나마 동기를 부여했다는 것.
그 정도 의미로 생각하려 한다.
물론 그렇다고 회귀 전의 원한을 잊겠다는 건 아니다.
목표 설정에 지대한 도움을 준 만큼, 계획한 복수는 예정대로 철저히 진행할 생각이다.
다만, 지나가다 발에 채이는 돌을 가볍게 치우는 정도의 일로 여길 뿐.
시운은 회귀 전, 장기우가 성공시킨 장강전자의 토대를 뺏는 것에서부터 그 긴 여정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비록 저희가 투자 전문회사로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지만, 최종 목표는 그보다 더 높은 곳에 있습니다. 그곳에 닿기 위해선 진성전자가 꼭 필요합니다."
미래투자신탁을 지주회사로 삼아 진성전자를 계열사로 묶고, 드림비전이 연구하는 기술이 완성되면 두 곳의 협업을 통해 넥스트를 설립한다.
그게 시운의 우선 과제였다.
실제 회귀 전, 드림비전의 기술을 사들인 고글은 하드웨어를 제작할 기업을 물색했다.
마침 새로운 기술이 도입된 반도체를 시장에 내놓아 점유율을 넓히던 장강전자가 고글의 선택을 받게 되었고, 향후 넥스트 설립 이후 핵심 협력업체가 된다.
넥스트가 런칭한 가상현실 서비스 '리얼 월드'에 접속할 단말기기 '다이버'의 제조를 장강전자가 도맡다시피 하게 된 것이다.
덕분에 장강전자는 크게 성장했고, 장강 그룹의 핵심 계열사로까지 발돋움할 수 있었다.
"으음…."
"……."
시운의 설명을 들으며 서류를 넘겨보는 이학만과 이민석의 표정이 침중하다.
'가상현실 서비스? 미래 그룹?'
이들의 입장에서는 허황된 이야기다.
하지만 뒤에 나온 향후 사업 계획에 둘의 표정은 달라졌다.
"…홀로그램 폰?"
"네, 드림비전에서 개발하는 기술이 완성되더라도 상용화 단계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리죠. 그 전에 시장에 먼저 내놓을 제품입니다."
"이게 가능합니까? 핸드폰 업계 1위인 삼정에서도 아직 완성하지 못한 건데요."
물론 지금은 그렇다.
하지만, 3년 뒤면 삼정전자에서 홀로그램 기술을 도입한 시제품을 출시한다.
회귀 직전까지 시운이 썼던 것에 비해 아주 조악한 형태지만, 분명 시장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넥스트와 협업한 장강전자의 도약에도 삼정전자가 굳건히 업계 1위를 지킬 수 있었던 것도 홀로그램 폰 덕분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시운은 이것을 가져와 넥스트 설립 전에 써먹을 생각이다.
지금도 삼정전자 연구소에서는 홀로그램 기술을 도입한 핸드폰 개발에 한창이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빛을 조사하여 디스플레이를 구현하는 것과 이를 조작할 유저 인터페이스 기술의 부재로 난항을 겪는 중이기는 하지만.
"저희가 가능하게 만들 겁니다. 삼정에 못지않은 반도체 기술력을 가진 진성전자가 합류하기만 한다면 못해도 3년 안에는 완성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삼정전자가 가졌던 시장 선도기업이라는 이미지와 함께 점유율도 뺏어올 수 있는 거죠."
핸드폰 제조에 문외한인 진성전자가 하루아침에 그걸 해낼 수 있을 리는 없다.
여기서 시운은 재벌들이 흔히들 하는 방식을 차용하기로 했다.
기술력을 가진 업체를 인수한다는.
자금난으로 문을 닫기 일보 직전인 유럽의 회사를 하나 미리 봐두었다.
이메일로 시운의 의사를 타진했고, 긍정적인 반응을 끌어냈다.
그곳이 가진 핸드폰 제조 기술, 특허, 인재들을 진성전자와 한데 묶을 예정이다.
돈이 많이 필요하겠지만, 유레카가 있는 이상 크게 걱정은 없다.
'그리고 그가 합류하기만 한다면.'
내년에 대학원을 졸업하자마자 삼정전자 연구소에 입사하여 2년도 되지 않아 홀로그램 폰 개발에 혁혁한 공을 세우는 사람.
그와 동문인 드림비전 대표 한진형에게 영입을 부탁해놓은 상태다.
"……."
삼정에게 더는 휘둘리지 않을 수 있다?
시운의 말에 순간 혹한 이민석은 속으로 혀를 차며 서류를 내려놓았다.
"너무 먼 훗날만 바라보는 희망적이기만 한 얘기입니다. 알고 오신 듯 한데, 지금 저희 상황이 아주 좋지 못합니다. 3년 뒤까지 손만 빨면서 홀로그램 폰 하나에 목을 맨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요."
다시 한번 찬찬히 서류를 들여다보던 이학만은 아들의 지적에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시운은 작게 웃었다.
"손을 빨다뇨? 지금처럼 반도체를 생산해서 팔면 됩니다."
"제대로 모르고 오셨군요. 지금 국내에 저희 반도체를 구매할 업체는…."
"해외 시장이 있지 않습니까."
시운의 말에 또다시 박 팀장의 일이 떠오른다.
이민석은 불편한 심기를 그대로 드러냈다.
"…해외 판로 개척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무래도 젊으신 만큼 경험이 많이 부족하신 것 같네요."
"만약 제가 그에 대한 해답을 드린다면 어떻겠습니까?"
"뭐요?"
시운은 서류 가방에서 다른 서류 두 부를 꺼내놓았다.
그건 바로 진성전자 지분투자에 대한 계약서였다.
"진성전자의 지분 51%를 미래투자신탁에 매도한다는 계약서입니다. 가격은 현재 진성전자 순자산 가치로 계산한 금액에 프리미엄으로 더 얹었습니다. 여기에 도장을 찍으시면 알려드리겠습니다. 해외로 진성전자의 반도체를 파는 방법을."
시운의 말 한마디에 이뤄질 정도로 해외 판로 개척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 회사 지분을 차지하려는 수작질인가?'
그런 생각에 이민석의 얼굴로 불쾌하다는 빛이 어렸다.
막 뭐라고 나서려는 때에 이학만이 그런 아들을 말리며 입을 열었다.
"그게 뭔지 계약을 맺어야 알려준다는 말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음…. 만약 그 방법이 소용없다면 우리 입장에선 사기 계약을 당하는 거라오."
시운은 이학만의 합리적 의심에 계약서 한쪽 면을 펼쳐 보였다.
거기엔 미래투자신탁에 제시한 방법이 소용없을 때, 계약은 원천 무효가 된다는 조항이 적혀있었다.
"으음…."
그걸 확인한 이학만은 깊이 고민하기 시작했다.
지금 당장은 자금 압박에 시달리지 않겠지만, 그것도 시간문제다.
지금처럼 매출이 저조한 상태로 3개월만 흘러도 회사를 유지하기 힘들 정도가 될 것이다.
판로가 모두 막힌 마당이니 제품을 생산할 여력도, 지금의 직원들 고용을 계속 유지할 수도 없다.
수년간 함께 고생해온 직원들이 일자리를 잃는다?
이학만으로선 생각하기도 싫은 상상이다.
그렇다고 삼정이 애초에 제안한 조건을 받아들인다는 것도 힘들다.
이번 일의 원흉인 그들을 어떻게 신뢰할 수 있겠는가.
'삼정과 달리 이곳은 믿을만 할까?'
계약서의 내용을 자세히 훑어 본 이학만은 고개를 들어 시운을 바라봤다.
나이답지 않게 행동이 진중하며 눈빛도 살아있다.
사람보는 눈이 제법 트였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이학만은 시운이 자신들을 속일 인물은 아니라고 직감했다.
"좋습니다. 계약하지요."
회사의 앞날을 가름할 중차대한 결정이다.
임원들을 모아놓고 회의를 거쳐 결론을 내려야 하겠지만, 이학만은 오랜 동료였던 그들도 자신과 한마음일 거로 굳게 믿었다.
"아버지!"
이민석이 반대하는 심정으로 소리쳤지만, 이학만의 결정이 바뀌는 일은 없었다.
법인 인감으로 계약서 두 부에 모두 날인을 마친 이학만은 시운을 보며 말했다.
"그럼 그 방법이란 걸 좀 들어볼까요?"
시운은 한 부의 계약서를 챙겨 서류 가방에 넣으며 말했다.
"오늘 오전에 긴급 뉴스가 하나 떴습니다."
"어떤?"
무슨 소리인가 의아해하는 둘에게 시운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중국 충칭에 있는 SC하이퍼닉스의 반도체 생산 공장에서 큰 화재가 났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이학만과 이민석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알고 있었냐는 눈빛.
며칠간 고객사의 이탈에 시달린 둘은 뉴스에 집중할 시간마저도 없었다.
가방에서 한 장의 종이를 꺼낸 시운은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SC하이퍼닉스의 국내 공장만으로는 기존의 해외 거래처 몫까지의 물량 생산이 힘들어졌습니다. 수급에 차질이 생긴 해외 거래처들은 긴급히 다른 공급처를 찾겠죠. 하지만 세계 반도체 2위 SC하이퍼닉스에서 공급하던 제품만큼의 퀄리티를 자랑하는 곳은 삼정전자 뿐입니다. 근데 삼정전자는 오랜 협력업체인 진성전자를 버렸기에 재고가 여유롭지 못하겠죠."
시운이 건넨 종이는 바로 SC하이퍼닉스의 해외 거래처 리스트였다.
"SC하이퍼닉스의 공급 정상화에 못 해도 석 달은 소요될 겁니다. 그사이 보다 저렴한 가격에 고품질인 진성전자의 제품으로 거래처를 뺏어오십시오. 리스트에 있는 업체 중 적어도 다섯 군데는 진성전자의 제안을 받아들일 겁니다."
이는 유레카의 정보 이용권 한 장을 써서 시운이 확인한 사항이다.
[향후 진성전자의 반도체가 필요할 거래처는?]
키워드와 일치하는 해외의 다섯 전자제품 제조업체가 결과로 나왔고, 모두 SC하이퍼닉스의 고객사임을 확인한 시운은 곧 무슨 일이 터질 걸 직감했다.
그리고 오늘 아침, 뉴스로 중국 충칭 공장의 화재를 확인하자마자 진성전자로 연락해 방문 약속을 잡은 것이다.
"나중에 진성전자의 사명이 미래전자로 바뀐다고 해도 기존의 고용은 그대로 승계하겠습니다. 이학만 사장님의 경영권 역시 보장합니다."
계약서상에도 명시된 사항이다.
물론 드림비전처럼 아예 간섭을 안 할 생각은 아니다.
시운이 구상한 방향성 내에서의 재량권만 인정할 예정이다.
"…고맙군요."
이학만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오래도록 키워온 회사를 남의 손에 넘겨야 하는 현실에 마냥 기쁠 수는 없으니 말이다.
그나마 삼정전자에 신기술을 뺏기지 않고, 직원들의 고용도 유지할 수 있는 걸 위안으로 삼았다.
이날, 미래투자신탁은 300억 원으로 진성전자 지분의 51%를 확보했다.
* * *
시운이 준 리스트에 적힌 해외 업체의 수는 총 열두 개였다.
이학만의 지시로 이민석과 해외 영업팀 직원 전원 리스트의 업체에 연락을 돌렸고, 절반인 여섯 곳에서 미팅 제안을 받았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공급 계약을 맺은 곳은 시운이 유레카로 알아본 것과 같이 다섯 곳이었다.
물론 반년의 짧은 기간을 조건으로 맺은 한시적인 계약이었지만, 이학만과 진성전자 임직원들은 자신들이 만드는 반도체에 자신이 있었다.
진성전자가 보유한 반도체 기술이 삼정전자에 못지않음을 알기에.
동시에 미래투자신탁이 투자한 자본으로 차세대 반도체를 생산할 라인 증설에 들어갔다.
부족한 금액은 우선 은행에서 빌려보기로 했다.
그게 여의치 않을 경우에는 지분을 추가로 미래투자신탁에 넘기며 투자를 더 받을 계획이다.
한 달 뒤, 진성전자는 전년 평균보다 2배나 많은 매출량을 기록했다.
그리고 이 소식은 장기우의 귀로 얼마 지나지 않아 들어갔다.
"어떻게 된 거죠?"
날이 선 그의 시선에 김학수는 진땀을 뺐다.
"그, 그게…. 갑자기 다른 곳에서 먼저…."
빠각!
장기우의 손에 쥐어진 펜대가 두 동강이 나버렸다.
마치 자신의 미래를 암시하는 것만 같아 김학수는 침을 꼴깍 삼켰다.
"거기가 어딥니까?"
"미래투자신탁이라는…, 투자 전문회사입니다."
"돈 놀음이나 하던 놈들이 비상장 업체에 돈을 썼다?"
"…자세한 사항은 즉시 알아보고 보고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해요."
고개 숙여 인사한 후 빠른 걸음으로 본부장실에서 나가려는 김학수.
막 그가 문손잡이에 손을 올리는 순간 장기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김 비서."
"네, 네! 본부장님."
잘생긴 얼굴 위로 아무런 감정의 편린조차 보이지 않는다.
"절 실망시키지 마세요."
"…네, 본부장님."
김학수는 그게 장기우의 마지막 경고임을 알 수 있었다.
한편, 진성전자의 외부 투자 유치와 해외 판로 개척 성공에 장기우보다 더 분노한 이가 있었다.
2018년 국내 재계 서열 1위를 수성한 삼정 그룹 본사.
11층의 삼정전자 전무이사실에서 난데없는 파열음이 들렸다.
마흔 초반으로 보이는 남성이 골프채를 들고 사무집기를 깨부수고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 모여 있는 삼정전자 반도체 파트 구매팀장과 직원들은 몸을 바르르 떨었다.
"이런 씨발! 당신들 다 뭘 하고 있었길래 그것 하나 못 막아!"
부서진 집기 비품의 파편 위에 선 남성은 골프채로 구매팀장과 팀원들을 가리키며 한바탕 욕설을 퍼부었다.
그는 삼정전자 전무이자, 그룹 총수인 신정문 회장의 둘째 아들 신수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