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4화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리다(2)
이렇게까지 자극을 하는 데 참을 이유는 없다.
현시운은 대충 증거물이랍시고 컴퓨터와 서류 파일을 주워 담아 가지고 나가는 검찰 수사관들을 쳐다보며 유레카 앱을 실행시켰다.
'주가 조작 혐의?'
터무니없는 덤터기다.
노골적으로 증권거래소의 거래 기록을 조작할 수 있지 않은 이상에야 혐의가 있을 리 없었다.
임의동행의 탈을 쓴 연행으로 검찰에 끌려간 강하민도 협의 없음으로 하루도 지나지 않아 풀려나게 될 거다.
근데 문제는 혐의를 완전히 벗는 시점이 언제냐이다.
아마도 삼정의 신수겸이 바라는 건 실제로 주가 조작 혐의를 덮어씌워 회사 문을 닫게 하고, 강하민을 감옥에 보내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미래투자신탁의 업무를 한동안 마비시키려는 노림수겠지.
자신의 힘이 검찰을 움직일 정도라는 걸 과시함과 동시에 경고하는 셈이다.
까불지 말고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이라는.
투자 전문회사.
시간이 곧 금이라는 말이 어느 산업 분야보다 더 피부로 와닿는 업종이다.
당장 하루 이틀의 업무 정지로 큰 피해를 보지는 않겠지만, 그게 일주일 그리고 한 달을 넘긴다면 제법 큰 타격을 입게 된다.
단순히 팔지 못한 투자 종목에 의한 손실이 아닌, 수익이 날 종목에 투자할 기회마저 박탈당하는 거니까.
공인인증서를 따로 만들어 다른 컴퓨터로 접속해서 거래하면 되는 거 아니냐고?
검찰이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주가 조작 혐의로 압수 수색하는 투자회사의 계좌 정도는 동결시켜놨겠지.
"신수겸…."
이 사태를 빨리 마무리 지으려면 결국 일을 사주한 당사자를 압박하는 방법밖에 없다.
신수겸.
국내 수위의 재벌, 삼정의 2왕자이자 형인 신수근을 꺾고 끝내 왕좌에 오르는 인물.
시운의 회귀 전 기억에 따르면 그랬다.
하지만, 이번 생에선 달라질 거다.
"내 사람과 회사를 건들면 어떻게 되는지 똑똑히 알려주지."
오늘 일에 대한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하고야 말리라.
[외부로 알려져선 안 될 삼정전자 신수겸 전무의 가장 큰 약점 혹은 비밀]
내심 상습마약투여나 도박, 스캔들을 바랬다.
"하, 이건 의외인데?"
나온 결과는 짐작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다.
하지만 그만큼 밝혀졌을 때, 파급력은 더 컸다.
시운은 정보 이용권을 하나 더 사용했다.
액정 화면 가득 생겨난 정보를 읽어내리는 시운의 입가가 차츰 위로 올라갔다.
* * *
치익- 칙!
마른 고목 같은 손가락이 분무기의 레버를 당겼다.
분사된 물안개가 난초 이파리에 내려앉으며 방울졌다.
신정문은 옆에 놓인 새하얀 무명천을 들어 곧게 뻗은 잎을 정성스럽게 닦아냈다.
지병이 도져 그룹 일선에서 잠시 물러난 뒤에 가지게 된 소소한 취미다.
"다 됐다."
4촉짜리 춘란의 고운 자태에 신정문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똑똑-
노크 소리에 신정문은 시선을 돌렸다.
"들어와."
그의 허락에 문이 열리며 비서실장이 안으로 들어섰다.
"으음, 자네가 무슨 일인가?"
한창 그룹을 통솔할 때야 자신의 수족처럼 붙어 다녔지만, 요양하는 지금은 따로 시킬 일이 있지 않고서는 부르지 않는 편이다.
"급히 보고드릴 게 있어서 찾아뵈었습니다."
"……."
비서실장의 굳은 표정에 심상치 않은 일이라 판단한 신정문을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보게. 그룹과 관련된 일인가?"
"그건 아닙니다."
"그럼?"
"우선 이걸 봐주십시오."
비서실장은 들고 온 태블릿을 켜서 한 화면을 신정문에게 보여줬다.
대외적으로 알려진 신정문 회장의 이메일 계정.
평소에는 회장 직속 비서실에서 관리를 도맡아 왔었다.
"……."
비서실장이 보여준 한 통의 편지를 읽어내리던 신정문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져갔다.
잠시 후, 내용을 모두 읽은 신정문은 태블릿을 내려놓으며 불같은 눈으로 비서실장을 봤다.
"여기 적힌 게 사실인가?"
"현재 파나마에 연락해 알아보고 있는데…. 아무래도 사실 같습니다."
비서실장의 확언에 눈이 뒤집힌 신정문은 옆의 춘란 화분을 집어들고 서재 벽에다 던져버렸다.
파삭!
경매 낙찰가 5억 원의, 세계에서 단 하나뿐인 춘란 '가야'의 명운은 그렇게 끝나버렸다.
"비서실장!"
"네, 회장님."
왕성한 시절, 눈빛만으로 그룹 임원들의 오금을 저리게 만들었던 신정문의 기백이 다시금 느껴진다.
그는 안광을 번뜩이며 지시를 내렸다.
"지금 즉시 파나마 쪽에 말해서 관련 자료들을 다 받아와. 그리고 이놈!"
신정문은 태블릿을 들어 보이며 이를 악물었다.
"이 편지를 보낸 놈 누구인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알아내!"
공권력의 힘을 빌려 이미 역추적을 시작했으나, 보낸 계정은 존재하지 않았고 IP 주소는 강남역의 와이파이 존으로 나왔다.
이메일을 발송한 시각이 수백 명이 오고 갈 퇴근 시간대라 CCTV 화면을 확보해 일일이 용의자를 특정하는 것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네, 그러겠습니다. 회장님."
나중에 따끔한 질책을 받을지언정 지금, 이 순간에 사실을 그대로 알려 그의 심기를 어지럽힐 순 없었다.
"수겸이, 수겸이 이놈! 지금 어디 있나?"
"청담동에서 친구들과 모임을 하고 있습니다."
"모임은 무슨! 계집 끼고 술이나 퍼마시고 있는 걸 테지."
"……."
그렇다고 답할 수 없어 가만히 있자, 신정문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마지막 지시를 내렸다.
"수겸이 그놈 당장 내 앞에 끌어다 앉혀!"
"네, 회장님."
잠잠하던 성북동의 저택에 폭풍이 불어닥치기 전의 긴장감이 서렸다.
* * *
"아이고, 우리 신 전무님 잔이 비었네? 야! 이년아, 뭐 하고 있어. 빨랑 잔 채워드리지 않고!"
"…네."
연예기획사를 하는 친구 녀석의 다그침에 오늘 술자리에 불려와 신수겸의 시중을 드는 연습생이 손을 떨며 양주병을 들었다.
한 병에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빈티지 브랜디.
고운 호박색의 액체가 자신의 잔에 차오르는 걸 보던 신수겸은 시선을 들어 연습생을 쳐다봤다.
"이름이 뭐야?"
"…하, 함수아입니다."
이런 자리가 처음인지 바짝 긴장한 모습.
'얼굴 반반하고 몸매도 좋고.'
파트너가 마음에 들었는지 신수겸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기획사를 하는 친구에게 농담을 던졌다.
"야, 너 소속사 애들 군대식으로 굴리냐? 우리 수아 말투가 왜 이리 딱딱해."
"에이. 그럴 리 있겠냐. 야, 함수아. 평소처럼 편하게 해. 여기 신수겸 전무님을 친한 오빠라 생각하고."
나이 차이만 스물을 넘는다.
삼촌뻘인 사람에게 오빠라고 부르라니.
몸서리쳐지지만, 연습생은 이를 내색할 수 없어 억지 미소만 지었다.
"잘 모셔. 너 하기에 따라 데뷔가 앞당겨질 수도 있다고."
"애 불편하게 무슨 그런 말을 하고 그러냐. 자, 술이나 한잔 하자고."
좀 더 투자금을 끌어오려고 술자리를 마련한 기획사 친구.
신수겸은 그 속내를 뻔히 알지만, 그냥 넘어가 주기로 했다.
옆의 파트너도 마음에 들고, 술맛도 좋고.
무엇보다 오늘 자신의 지시대로 그 건방진 투자회사 대표 놈이 검찰에 끌려갔다는 데에 속이 몹시도 후련했다.
신수겸은 삼정 장학생 출신의 검사를 움직였다.
별다른 혐의점이 없으니 곧 풀려나기야 하겠지만, 어떤 식으로든 시간을 질질 끌어 회사 영업을 오래도록 방해하라고 요구한 상태다.
'건방진 새끼. 감히 내 제안을 거절해?'
아직도 구 비서가 결과를 보고하던 순간만 떠올리면 화가 솟구친다.
'다음번엔 국세청이나 금감원을 동원해서 괴롭혀주지.'
자신의 발 앞에 찾아와 엎드려 빌며 용서를 구하기 전까진 멈추지 않을 생각이다.
"와, 우리 신 전무님 화통하셔. 그걸 단번에 들이키고. 하하하. 수아야, 너 뭐하냐? 얼른 안주 하나 넣어드리지 않고!"
신수겸은 통쾌함을 만끽하며 즐겁게 웃고 떠들며 마셨다.
하지만, 신수겸의 기분 좋은 술자리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신수겸 전무님."
"…뭐야, 너희들?"
룸으로 건장한 체격의 남자들이 들이닥쳤다.
취기에 정신이 반쯤 몽롱한 신수겸은 검정 정장 차림의 덩치 큰 사내를 올려다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기획사 친구 녀석과 오늘 술자리에 동원된 연습생들 모두 당황하고 놀란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삼정 그룹 전속 경호부서 1팀 차장 안석훈입니다."
"그래서 뭐? 꺼져, 꺼지라고! 술만 떨어지게."
그룹의 경호부서에서 자신을 찾아왔다는 데 위화감이 들 만도 하지만, 이미 많이 취한 신수겸은 판단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안석훈과 경호부서 직원들을 무시한 채 술잔을 다시 드는 신수겸.
그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안석훈은 마치 선고라도 내리듯 다시 말했다.
"회장님 호출입니다."
"푸훕!"
신수겸은 들이키려던 한 모금의 술을 내뿜었다.
번쩍 정신이 드는 기분이다.
놀란 눈으로 안석훈을 쳐다보자, 그는 나직이 다음 말을 이었다.
"지금 당장 성북동 본가로 모셔오라고 전달받았습니다."
"…뭐, 왜?"
"이유까진 저희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럼 모시겠습니다."
안석훈의 손짓에 뒤에 서 있던 경호부서 직원 둘이 신수겸의 양팔을 지지하며 조심스레 몸을 일으켜 세웠다.
평소라면 자신의 몸에 함부로 손을 댔다고 난리를 쳤을 테지만,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부름에 신수겸은 정신이 없었다.
'왜 부르시는 거지? 딱히 실수하거나 잘못한 건 없을 텐데?'
명절이나 기념일도 아닌데 이미 출가해서 따로 가정이 있는 자식을 본가로 불러들인다?
결코 좋은 일은 아니었다.
* * *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한 채 세단에 실린 신수겸은 얼마 지나지 않아 성북동 본가 서재에 비틀대며 섰다.
"잘하는 짓이다. 저녁부터 술에 절어서는!"
휠체어에 몸을 실은 신정문의 다그침에 신수겸은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자신이 불려 온 이유는 모르지만, 저렇게 역정을 낸다는 건 좋은 징후가 아니다.
이럴 때는 무조건 납작 엎드리는 게 능사다.
그러면 화가 누그러지곤 했으니까.
오랜 경험으로 그걸 체득한 신수겸이다.
하지만 오늘의 신정문은 평소와 달랐다.
마뜩잖다는 얼굴로 한참 둘째 아들을 바라본 그는 마음속에서 내린 결정을 입 밖으로 꺼냈다.
"다음 달 부로 유럽지사에 발령을 낼 테니 주변 정리하고 떠나거라."
"?!"
순간 신수겸은 자신의 두 귀를 의심했다.
"아, 아버지? 그게 무슨…."
"다시 부를 때까지 유럽지사로 가 있어."
"아버지!"
비명과도 같은 아들의 고성에도 신정문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용무가 끝났다는 듯 등을 돌렸다.
그런 아버지의 등을 매섭게 노려보던 신수겸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제가 뭘 잘못했는지 알려만 주시면 앞으로 고치겠습니다. 그러니…, 유럽지사로 나가라는 말은 거두어주세요. 네? 아버지."
단순한 해외 파견 근무?
그럴 리가!
이미 핵심 계열사 삼정전자의 전무이사로 재직 중인 신수겸이다.
이건 말만 파견이지 모든 권리를 빼앗긴 채 쫓겨나는 것과 다름없었다.
절절히 호소하는 신수겸에게 신정문은 책상 위에 놓인 서류 뭉치를 던졌다.
둘째 아들이 오기 전까지 뒤적였던, 파나마에서 보내온 문서였다.
"이게 뭡니까?"
겉표지에 아무런 글귀도 쓰여있지 않은 종이 묶음.
신수겸의 물음에 신정문은 이를 드러내며 짓씹듯 말을 내뱉었다.
"보면 알 것 아니냐. 꽤 많이 익숙한 내용일 거다."
"……."
심상치 않은 신정문의 반응에 신수겸은 문서를 들어 첫 장을 넘겼다.
"?!"
그리고 비로소 나온 문서의 제목에 그는 경악했다.
[파나마 페이퍼스 리암 브라운 소유 개인계좌 변동명세]
신정문 회장의 해외 비밀계좌 내역이었다.
게다가, 신수겸이 아버지 몰래 그룹 재무이사와 짜고 상당한 금액의 달러를 빼돌린 정황이 담긴 증거물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