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로 재벌 참교육-25화 (25/139)

§025화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리다(3)

"네놈이 한 짓을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구나!"

신정문의 호통이 서재 안을 크게 울렸다.

하지만 그 큰소리도 신수겸의 귀에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손에 든 문서에 못 박힌 듯 고정되었다.

'이, 이게 왜?!'

남은 취기마저 확 달아났다.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오한과 함께 정신이 번쩍 든다.

신수겸은 잘게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넘겼다.

한 장.

그리고 또 한 장.

"……."

문서의 내용은 진짜였다.

아버지인 신정문을 속이기 위해 가짜로 위조한 내역이 아니라.

"아들이란 놈이 아비 등에 칼을 꽂으려고 해? 그동안 키워준 은혜도 모르고 감히 내 돈에 손을 대!"

"아, 아버지…."

명색이 국내에서 제일가는 기업, 삼정 그룹 총수의 비밀계좌다.

소유주인 신정문 회장의 눈을 속이기가 쉬울 리는 없었다.

해외의 이름난 위조 전문가에게 수억 원의 거금을 들여 계좌 내역의 위조를 의뢰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위조된 계좌 내역을 가지고 재무이사는 매월 정기보고 때 신정문 회장에게 거짓 보고를 했었고, 지금까지 신정문을 감쪽같이 속일 수 있었다.

그렇게 빼돌린 자금으로 신수겸은 차명 계좌를 여러 개 만들었다.

바로 신수겸이 삼정전자 주식을 사 모으는 데 쓴 계좌들이다.

신수겸은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눈앞에 파나마 계좌의 실제 내역이 있다는 사실이.

재무이사가 배신을 하지 않는 한은 들킬 일이 없었다.

신정문을 속이는 데 합세한 그가 이제 와서 양심고백을 했을 리 만무하다.

아버지는 한번 자신에게 등을 돌린 사람에게 절대 자비를 베푸는 성격이 아니니까.

"아, 아버지! 용서해주세요. 제가, 제가! 정말 잘못했습니다. 아버지!"

신수겸은 그 자리에서 엎드려 빌었다.

이대로 유럽으로 쫓겨나면 회장 자리는 물 건너가 버린다.

아니, 회장직이 아니라 지금의 위치마저 삽시간에 허물어진다.

후계 싸움에서 밀려나 한량처럼 잊힌 채 살다가는 재벌 가의 수많은 패배자 중 한 명이 될 뿐이다.

어떻게든 신정문의 마음을 돌려야만 했다.

"안 차장!"

하지만 재벌가에서 나고 자란 신정문은 혈육의 정보다는 실리와 권위를 더 중요시했다.

아무리 자식이라도 한번 눈 밖에 나면 그것으로 끝이다.

덜컹-

신정문의 부름에 신수겸을 여기까지 데려온 안석훈 차장이 서재로 들어왔다.

"네, 회장님. 부르셨습니까?"

"이 녀석 당장 끌어내!"

"네! 회장님."

안석훈의 손짓에 서재 문 바깥에 대기하던 경호부서 직원 둘이 신수겸의 양팔을 잡아 거칠게 일으켰다.

공교롭게도 아까 룸살롱에서 그를 공손히 모시던 이들이다.

"아버지!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발, 제발! 아버지이이!!"

원래의 역사대로라면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면서까지 친형을 그룹에서 몰아내고 스스로 삼정 그룹 회장직에 앉았던 신수겸이다.

그랬던 그의 미래는 현시운이 일으킨 돌풍에 휩쓸려 모든 걸 잃고 한지로 내쫓기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비서실장."

신수겸이 서재로 불려올 때부터 한쪽에 병풍처럼 서 있던 비서실장이 신정문의 부름에 앞으로 나섰다.

"네, 말씀하십시오. 회장님."

"아까 시킨 일 어떻게 되어가나?"

"……."

신정문 회장의 공식 이메일 계정으로 아들 신수겸의 농간을 알려온 이.

그를 찾으라는 게 신정문의 지시였다.

비서실장의 침묵에 신정문은 눈을 부라렸다.

"어허, 이 사람이! 왜 답이 없어?"

"그게…. 지금 백방으로 알아보고는 있습니다만, 아직 밝혀내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허리 숙여 사죄하는 비서실장을 짜증스럽게 쳐다본 신정문은 혀를 차며 돌아섰다.

'대체 누구길래?'

해외 비밀 계좌의 존재는 절대 드러나선 안 된다.

형성 과정이 전혀 깨끗하지 않았기에 밖으로 드러나는 순간, 삼정 오너 가를 헤집는 폭탄으로 변모한다.

그래서 평소 보안에 무던히도 많은 신경을 썼었다.

근데 파나마의 계좌에 대해 외부인이 알고 있다?

신정문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최대 약점을 누군지도 모르는 이가 손에 쥐고 있다는 말이다.

"무슨 수를 쓰든 찾아내! 자네의 목숨이 달려있다고 생각하라고."

"…네, 회장님."

"쯧! 나가봐."

비서실장은 허리 숙여 예를 다한 뒤, 서재를 빠져나갔다.

"어느 놈이…, 감히 날 가지고!"

어떻게든 알아내서 그 입을 막아야만 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일주일이 지나도록 비서실장이 알아낼 수 있는 건 거의 없었다.

강남역 와이파이 존 인근의 모든 CCTV를 확보해 한 명씩 추적을 시도해봤지만, 모자나 목도리로 얼굴을 가린 사람이 많아 밝혀낸 신분은 십분의 일도 채 되지 않았다.

그 사실을 신정문에게 보고하던 날.

비서실장은 그가 던지는 물건과 욕설을 온몸으로 묵묵히 받아내야만 했다.

* * *

[신수겸은 그룹 재무이사와 짜고 신정문 회장의 해외 비밀 계좌에서 자금을 몰래 빼돌리고 있습니다.]

신수겸의 약점을 알아내려고 유레카를 이용했을 때 나온 결과였다.

현시운은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 신정문의 해외 비밀 계좌에 관한 내용을 이용권을 소모하여 자세히 알아봤다.

삼정을 상대로 휘두를 수 있는 무기를 하나라도 확보해 놓으려는 심산이었다.

그렇게 나온 결과가 조세 회피처로 유명한 파나마의 한 금융 계좌 내역.

리암 브라운이라는 차명으로 된 계좌에는 무려 3,022억 달러가 들어있었다.

오늘 일자 기준환율인 1,125원으로 환산하면 거의 340조 원에 달하는 돈이다.

2018년 기준 신정문 회장의 개인 재산 규모는 11조 원으로 알려져 있다.

근데 해외 비자금이 알려진 재산의 서른 배가 넘는다는 소리다.

"…장강의 장철구 회장도 비자금이 이 정도 되려나?"

장철구 회장의 재산은 10조 원으로 전년 대비 1조가 올랐다.

거기에 삼정의 비자금 비율을 대입시키면 장강에도 300조가량의 해외 비자금이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인데….

물론 단순한 추측이니 실제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알 수 없다.

정 필요할 때 이번처럼 정보 이용권을 사용해 알아낼 수 있으니 급한 건 없겠지.

아무튼, 장강에도 상당한 금액의 비자금이 있을 게 분명하다.

새삼 대한민국 재벌 가의 숨겨진 저력에 감탄하게 된다.

시운은 유레카로 알게 된 사실들을 잘 조합하여 신정문 회장의 공식 이메일 계정으로 전자편지를 써서 보냈다.

해킹툴로 생성한 임의 계정이고, 이메일을 보낸 직후 바로 삭제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는 추적의 위험을 막고자 2호선 지하철을 타고 가다 강남역 플랫폼에 섰을 때, 전송 버튼을 눌렀다.

핸드폰 공기계로 지하철 와이파이를 이용했으며, 가장 붐비는 퇴근 시간대를 택하기까지 했다.

목도리와 모자로 얼굴도 가렸기에 자신을 특정할 수 없을 거다.

그런데도 용케 자신을 찾아낸다?

좋은 의도는 아닐 것이 분명하기에 그 전에 유레카의 위기 알림권이 먼저 발동하겠지.

그런 경우가 생긴다면, 이번에 얻은 무기로 신정문 회장을 직접 압박할 생각이다.

협박이든 협상이든 자신과 주위 사람을 건들 수 없게끔.

덜컹-

조수석 문이 열리며 김현석이 올라탔다.

"자, 마셔."

잠깐 통화하러 나갔다가 온다더니 두 손에 캔커피가 들렸다.

"잘 마실게요."

온장고에서 막 꺼내온 듯 따듯했다.

일산에서 한창 연수 중이었던 김현석은 절친의 소식에 한달음에 달려왔다.

"하민이가 붙들려 갔던 시각이 오후 3시 넘어서랬지?"

"네, 오늘 장 마감되고 한… 일, 이십 분쯤 지났을 때니까요."

김현석은 차량 시계를 들여다봤다.

오후 9시 5분.

"그럼 나올 때가 됐을 텐데?"

임의동행 요구에 응하고 검찰에 출석했다면 조사 가능 시간은 최대 6시간이라고 김현석이 시운과 만났을 때 설명했었다.

지금 시운과 김현석은 서울중앙지검의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강하민이 나오길 기다리는 중이다.

아무 말 없이 커피를 마시며 기다리길 십여 분.

"어? 저기 나와요."

시운이 건물 입구에서 걸어 나오는 익숙한 실루엣을 가리켰다.

강하민임을 확신한 둘은 차에서 내려 그에게 다가갔다.

"뭐야, 너희들? 여태껏 나 기다린 거야?"

낮에 봤을 때보다 많이 초췌해진 모습이다.

그걸 드러내고 싶지 않은지 강하민은 평소보다 과장되게 웃으며 둘을 맞이했다.

"…사업 시작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검찰을 들락거려."

말과는 달리 걱정이 가득 묻어나는 김현석의 타박에 강하민은 장난스럽게 응수했다.

"재벌 총수들이 휠체어 타고 들어가는 모습에 무척 궁금했었는데, 오늘 제대로 견학 해본 거지."

"자식, 말을 해도…."

"두 분 여기서 이러실 게 아닙니다. 날도 추운데 얼른 자리를 옮기죠."

중간에 시운이 끼어들며 말하자, 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안 그래도 배고파 죽겠어. 뭐 좀 먹으러 가자."

"저녁도 못 얻어먹은 거야?"

김현석의 물음에 강하민은 검찰 건물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그러니까! 오자마자 험악한 분위기만 조성하더라니까."

그 뒤로도 강하민의 푸념이 이어졌다.

내심 신정문에게 이메일을 보낸 결과가 어땠을지 궁금한 시운은 넌지시 물었다.

"검사는 뭐랍니까? 언제 또 출석하래요?"

"아니. 그냥 끝났어."

"그냥 끝나다뇨?"

시운의 반문에 강하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너도 낮에 봤었지? 그 젊은 검사. 조사실에 앉혀놓고 나랑 눈싸움만 실컷 하더니 30분 전쯤에 문자 하나를 받고 다급히 나가더라고."

그 뒤, 돌아온 검사는 자신들이 크게 실수를 했다며 사과를 했다.

조사 도중 착오가 있었다는 게 그의 변명이었다.

압수해간 물건들도 내일 오전 일찍 원래대로 돌려놓을 예정이라고 강하민은 덧붙였다.

"도대체 무슨 착각을 해야 압수수색영장이 발부되는 겁니까?"

비꼬는 시운의 말에 강하민은 작게 웃었다.

반면, 김현석의 표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검찰이 존재 이유처럼 마냥 정의롭지만은 않다는 걸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자신과 가까운 이가 이런 일을 당하고나니 마음이 더욱더 심란해졌다.

강하민도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내심 의아했다.

임의동행을 요구할 때만 해도 득의양양하던 검사가 불과 6시간 만에 태도가 돌변했으니까.

'삼정 내부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자신들에게 신경도 쓰지 못할 만큼의.

시운이 오늘 신정문 회장의 해외 비자금 계좌를 이용하여 신수겸을 유럽으로 날려버렸다는 걸 알 리 없는 강하민으로서는 끝내 풀리지 않을 의문이다.

"어디로 갈까요?"

차에 올라탄 셋.

시운의 물음에 강하민은 주린 배를 붙잡으며 답했다.

"뜨끈한 게 먹고 싶네. 순대국밥 어때?"

"좋죠. 현석이 형은요"

"뭐든 상관없어."

주차장을 출발한 차는 서울중앙지검을 빠져나와 도로를 달렸다.

아무 혐의도 없이 압수수색과 여섯 시간의 억류를 겪은 강하민은 5대 로펌 중 하나인 리&장을 통해 검찰에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정의 보상금을 뜯어냈다.

미래투자신탁을 설립하고 난 뒤 겪은 최대의 사건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 * *

"장구영 씨, 어제 부탁했던 종목들 분석은 언제 끝납니까?"

"아…, 네. 오전 중으로는 마무리됩니다. 최대한 빨리 정리해서 올리겠습니다."

"알겠어요. 그리고…, 전민아 씨?"

"네, 부장님."

"해외 선물 지수 모니터링 하다가 크게 변동을 보이는 종목들만 따로 빼내서 추려줘요."

"알겠습니다!"

검찰 압수수색 이후로 일주일이 흘렀다.

초반의 어수선함은 어느새 가시고, 다시 일상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1월 한 달간 투자운용 1팀에서 강도 높은 교육을 받고 온 2팀의 신입사원들은 현시운의 지시에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며 한 사람 이상의 몫을 다했다.

[잔여 정보 이용권 : 2장]

"…흠."

항상 예비용으로 3장의 이용권을 남겨뒀었다.

이번엔 급하게 2장을 써서 남은 게 얼마 되지 않았지만….

'오늘이 27일. 이틀만 지나면 구매 한도는 다시 복구되니까.'

이번처럼 이례적인 경우가 아니었다면, 이용권이 부족하게 느껴졌을 리도 없었다.

미래투자신탁이 설립되고 시운은 매월 보충되는 3장의 정보 이용권을 모두 투자 정보를 알아내는 데 쓰고 있다.

한 달 내 가장 수익이 높은 종목으로 검색하되, 10일간의 텀을 두어 3장을 사용하는 중이다.

그렇게 나온 정보로 투자운용 2팀의 투자 계획을 세워 진행하고, 동시에 개인 자금도 불리고 있다.

다만, 다음 달은 3장을 보충한다고 하더라도 예비용을 빼면 쓸 수 있는 건 2장.

'3월만 특별히 15일 간격으로 정보 이용권을 쓰지, 뭐.'

그렇게 다음 달 정보 이용권 사용 계획을 확정 짓고 있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

"누구지?"

모르는 번호였다.

070이나 지역 번호로 떴으면 과감히 수신 거절을 했겠지만, 010으로 시작되는 핸드폰 번호라 고민이 된다.

잠시 망설이던 시운은 핸드폰을 들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이 번호가 맞구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시운은 상대방이 누구인지 알았다.

"…네가 웬일이냐?"

- 웬일은. 새해도 지난 지 오래인데, 아직 안부 인사도 못 나눴잖아.

"우리가 그런 걸 나눌 정도로 정다운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 용건을 말해."

- …….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곧 녀석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 근처를 지나가다 얼굴이나 볼까 해서.

"근처?"

- 나 지금 신사동 미래 빌딩 앞이다.

"뭐?!"

- 잠깐 나와라. 얘기나 좀 하자.

시운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창밖을 바라봤다.

차도 맞은편의 인도 위.

그곳에 장기우가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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