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로 재벌 참교육-26화 (26/139)

§026화 재회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면서 현시운은 녀석의 방문 이유가 무엇일지 계속 생각했다.

그리고, 1층에 도착하는 순간 여러 추측 중 가장 유력한 한 가지를 손꼽을 수 있었다.

'진성전자 일로 미래투자신탁을 샅샅이 조사했겠군.'

그 와중에 대주주인 자신이 노출됐을 테고.

아직 설립된 지 두 달도 안 된, 신생 기업의 주주명부까지 쉽게 손에 넣을 정도라니.

관경유착의 정도가 너무 심하지 않은가!

출입구로 나왔을 때, 건물을 올려다보는 녀석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

녀석이 그랬던 것처럼 시운도 장기우의 뒷조사를 진행했다.

재벌 3세를 조사하는 것이니 만큼, 업체를 신중하게 선택해야 했었다.

능력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우선시되는 건 신뢰다.

돈에 혹해 되레 상대에게 붙어먹는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흥신소 업계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던 시운은 이 일로 정보 이용권을 한 장 소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과정을 거쳐 선정한 곳이 '포크레인 심부름센터'.

네이밍 센스는 엉망이지만 이름처럼 잘 파기는 한다.

덕분에 회귀 전까지 장기우에 대해 몰랐던 사실을 여럿 알게 되었다.

불과 5년 전까지만 해도 장철구 회장의 호적에도 못 올라갔던 혼외자라는 것과 친모가 은퇴한 여배우라는 것.

본처의 등쌀에 태어나자마자 호주에 이민을 갔고, 그곳에서 15년을 살았다는 것까지.

"오랜만이네. 작년 동창회 이후로 처음인가?"

인기척에 돌아본 장기우가 시운을 발견하고는 인사를 건넸다.

"여기는 무슨 일로 온 거냐?"

"전화로 말했잖아. 근처를 지나가다 네가 일하는 곳이 생각나서 잠깐 들렀다니까."

선해 보이는 얼굴로 환하게 웃는 녀석.

옆을 지나가던 몇몇 여성들이 장기우의 잘생긴 얼굴에 볼을 붉히며 돌아본다.

"뒷조사를 제대로 했었나 보네. 어디서 일한다고 말한 기억이 전혀 없는데, 나는."

냉소적인 시운의 말에도 장기우는 웃는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내가 알고 싶다면 얼마든지 알아낼 수 있으니까."

장기우의 눈에서 짙은 멸시가 읽혔다.

불우한 녀석의 어린 시절을 듣고 자칫 동정심이라도 생길까, 그래서 다짐했었던 마음이 약해질까 염려했었는데….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는 문제였다.

"그래서? 용건이 뭐야."

"여기 길바닥에서? 손님 대접이 뭐 이래."

"손님이 아니라 불청객이니까."

날이 선 시운의 말에도 장기우는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따라와."

나직이 한숨을 내쉰 시운은 앞서 걸음을 옮겼다.

전 건물주가 운영하던 1층의 카페는 문을 닫은 상태다.

임대할 사람은 구했지만, 아직 오픈 준비 중이다.

그렇다고 녀석을 회사 미팅룸에 들이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해서 시운은 장기우를 편의점 앞에 놓인 간이탁자 앞으로 안내했다.

"……."

만난 후 처음으로 장기우의 표정이 굳어진다.

시운은 파란 플라스틱 의자에 앉으며 턱으로 맞은편을 가리켰다.

"뭐해? 거기 앉아."

전 이용자가 먹다가 흘린 듯한 라면 국물과 김 부스러기가 탁자 위에 흩어져 있다.

"왜? 재벌 가 사람들은 이런 의자는 불편해서 앉지도 못하나?"

시운의 비아냥거림에 장기우는 작게 웃더니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건물 외관을 살피며 녀석이 입을 열었다.

"네 거라며? 이 건물."

"미래투자신탁 소유의 빌딩이야."

"그 미래투자신탁의 주인이 바로 너고 말이야."

"……."

그 말을 내뱉을 때 장기우의 눈빛이 번뜩였다.

마치 먹잇감을 노리는 듯한 맹수처럼 날카로운 눈이다.

"뜻밖이었어. 내가 알던 네가 아닌 것 같아서. 낯설다고 해야 하나.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고시원에 살며 공장을 다니던 너였는데 말이야. 이런 재주가 있는 줄은 또 몰랐네?"

"다 알고 왔을 테니 입 아프게 설명할 필요는 없겠군. 그래서, 본론이 뭐야? 이젠 말할 때도 된 것 같은데."

시운의 말에 다리를 꼬고 팔짱을 끼며 녀석이 답했다.

"진성전자."

"……."

"나한테 넘겨."

목적은 그거였나?

일고의 가치도 없는 말이었다.

"싫은데."

"값은 네 배로 쳐주지."

"방금 싫다고 말한 것 같은데."

"어차피 너희 회사에서 제대로 키워낼 수도 없잖아. 고작 돈 놀음이나 하는 투자회사 주제에."

조롱을 한껏 담은 장기우의 말에 시운은 차갑게 웃으며 응수했다.

"글쎄? 궁금하면 지켜봐. 앞으로 어떻게 되는지."

"…후회할 텐데?"

장기우의 의미심장한 말.

그에 시운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왜? 5년 전 학교에서 날 쫓아냈을 때처럼 뒷공작이라도 하게?"

"역시 알고 있었네?"

"아니면 작년처럼 사람 써서 강도질이라도 시키려고?"

그 말에 장기우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금세 원래대로 돌아왔지만, 시운은 그 짧은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그래? 모른다면 어쩔 수 없지. 용건은 다 끝난 것 같으니 난 이만 일어날게. 하던 일이 바빠서 말이야."

몸을 일으키는 시운을 향해 장기우가 말을 던졌다.

"근데, 너…."

"?"

"학교 그만두게 한 거. 왜 그랬는지 궁금하지도 않냐?"

"……."

그걸 말이라고.

시운도 당연히 궁금하다.

대체 무슨 이유로 그토록 집요하게 자신을 괴롭혔던 건지.

하지만….

- 이유? 글쎄, 까먹었는데.

회귀 전, 40대의 녀석과 지금의 얼굴이 겹쳐 보인다.

시운은 순간 깨달았다.

그때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했던 것 역시 자신을 조롱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말하지 않은 거다.

또한 알았다.

여기서 궁금하다고 말해봤자 녀석이 곱게 대답해줄 성격이 아니라는 것도.

"딱히. 별 시답잖은 이유일 테지."

"……."

시운은 그 말을 끝으로 더는 용무가 없다는 듯 발길을 돌렸다.

홀로 남은 장기우는 삐그덕거리는 의자에 몸을 기대며 현시운이 사라진 빌딩 입구를 무표정한 눈으로 한동안 바라봤다.

"별 시답잖은 이유라…."

현시운이 한 말을 되뇌듯 중얼거리는 장기우.

순간, 5년 전의 기억이 떠오른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의 한 장면.

"그럴지도."

그래, 사실 이제 와서 이유 따위야 상관없어졌다.

단순히 마음에 들지 않았던 놈이 지금 자신의 앞길을 막아선 껄끄러운 존재가 되어버렸다.

어쩐다? 간단하다.

비키지 않으면 그대로 밀어버리면 그뿐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당장은 무리다.

"운이 좋군. 현시운."

그룹 내부의 움직임이 심상치가 않다.

배다른 누이인 장세연을 중심으로 과거 장남과 차남을 지지하던 임원들이 모여들고 있다.

장철구 회장은 아직도 자신을 후계자라고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않았다.

어쩌면 지금 상황을 뻔히 알면서도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어떤 식으로 해결하는지 시험해보겠다는 듯이.

우선은 그룹 일을 해결하는 게 먼저다.

게다가.

"작년의 일을 알고 있다니…."

김학수는 그 일과 자신의 연결고리를 철저하게 끊었다고 장담했었다.

근데 현시운이 알고 있다?

아마도 둘 중 하나겠지.

김학수의 일 처리가 미숙했거나, 현시운이 넘겨짚어 말해본 거거나.

"……."

무엇이 맞는지 확실해질 때까지는 건드리지 않을 생각이다.

괜히 여흥 거리 하나로 발목을 잡힐 수는 없으니 말이다.

한차례 미래 빌딩을 올려다본 장기우는 몸을 돌려 그 자리를 떠났다.

* * *

삐빅!

리모트 컨트롤 키에 반응하여 사이드미러가 접히며 차 문이 모두 잠겼다.

주차를 마친 현시운은 서류 가방을 챙겨들고 주차장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어느덧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3월 초다.

그동안 드림비전의 연구는 별 탈 없이 진행되었고, 진성전자는 1월부터 자사 반도체를 공급받은 해외 바이어들의 만족도 높은 입소문에 조금씩 거래처 수를 늘려가고 있었다.

신기술이 도입된 반도체 생산 라인도 지난달 말부터 시험가동 중이며, 이상이 없으면 이달 중순부터 정상 가동 예정이다.

거기에 유럽의 핸드폰 업체 인수도 완료되었다.

지금 평택에 새로운 부지를 사들여 공장을 짓고 있으며, 올해 9월쯤 핸드폰 제조의 전문 인력들이 입국하기로 결정됐다.

그 사이, 미래투자신탁의 자산은 삼천억 원으로 창립 당시보다 세 배 이상으로 규모가 늘었다.

여기에 시운이 이끈 투자운용 2팀의 기여도가 적지 않음은 당연지사다.

아울러 따로 불리던 개인 자금 역시 652억 원으로 다섯 배 이상 늘어났다.

모든 게 순조롭게 흘러가는 상황이다.

"아직 한참 멀었어."

하지만 시운은 현 상황에 만족할 수 없었다.

장강 그룹을 어떻게 해보기에는 아직 터무니없을 정도로 자금이 부족하다.

시작이 반이라고 했지만, 아직도 갈 길은 멀어 보였다.

본격적으로 회사를 만들고 키우기 시작한 지도 이제 두 달 남짓 되었다.

숟가락이 어지간히 크지 않고선 첫술에 배부를 리 없음이 당연하지만, 시운은 조금 초조했다.

자신의 정체가 너무나도 빨리 탄로 나버린 까닭이다.

'의외야. 금방이라도 무슨 짓을 할 줄 알았더니?'

장기우가 잠잠하다.

흥신소를 통해 들키지 않게 녀석의 동태를 계속 주시하고 있다.

평소의 행동과 다를 바 없다는 보고를 어젯밤 이메일로 전달받았다.

삼정의 신수겸처럼 허튼수작이라도 부리지 않을까 했었는데….

여태껏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띵-

"응?"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올라 탄 시운은 옅은 커피 향을 맡았다.

"1층 카페 오픈하는 날이 오늘이었나?"

5층 대신 1층을 누르는 시운.

사무실에도 커피머신이 있지만, 커피 전문점에서 사 마시는 것과는 맛을 비교할 수가 없다.

1층에서 내린 시운은 곧장 카페로 들어갔다.

확 풍겨오는 커피 향과 새로이 단장된 실내 인테리어를 먼저 마주했다.

평소 마시던 아이스 바닐라라떼를 주문하러 카운터로 향하던 시운은 카페 주인을 보자마자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어서 오세요. 뭐로 주문하시겠습니까?"

"……."

"저기, 손님?"

"…아, 네. 저… 아이스 바닐라라떼 큰 잔으로 하나 주세요. 여기 카드."

"테이크 아웃이죠?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계산을 마친 카페 주인은 주문받은 음료를 만들려 기계를 조작했다.

카운터 근처의 자리에 앉은 시운은 주인을 멀뚱히 쳐다봤다.

밝은 인상과 여유로운 표정.

회귀 전에 보았던 모습과는 많이 달라 보였다.

"주문하신 아이스 바닐라라떼 나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빌딩에서 일하시나 봅니다?"

"…네. 5층에서."

"드시고 맛있으면 자주 찾아주십시오."

"그러겠습니다."

계산을 마친 시운은 잔을 들고 카페를 나왔다.

유리창으로 카페 주인을 다시 본 시운은 입가에 미소를 가득 지었다.

"이번에는 주식을 제때 파셨군요. 한 씨 아저씨."

시운은 그날의 아침을 기분 좋게 출발했다.

* * *

출근하자마자 커피 한잔을 마시고 본격적인 업무에 돌입한 강하민은 밀린 결재를 처리하던 중 손을 멈추었다.

투자운용 2팀에서 올라온 하나의 결재 건에 그는 미간을 좁혔다.

지난번의 진성전자처럼 어느 한 회사에 지분투자를 하겠다는 투자계획서이다.

"굳이 여기에 투자할 필요가 있나?"

상장기업도 아니고, 취급하는 제품 역시 단일 품목으로 발전 가능성이 커 보이지 않았다.

안정적인 공급으로 현상 유지만 되는 회사.

강하민이 판단하기로는 그랬다.

한참을 생각하던 강하민은 결국 수화기를 들어 투자운용 2팀으로 내선 전화를 걸었다.

- 네, 투자운용 2팀 현시운입니다.

"현 부장, 강하민입니다."

- 네, 대표님. 말씀하십시오.

다시 한번 결재판을 바라보던 강하민은 시운에게 자신의 방으로 좀 와달라고 말하고는 통화를 끊었다.

그리고 몇 분 뒤.

똑똑-

"들어오세요."

강하민의 허락에 문이 열리고 시운이 안으로 들어왔다.

"찾으셨습니까, 대표님."

"네, 거기 잠시 앉아보세요."

시운은 그가 가리키는 응접용 소파로 가서 앉았다.

강하민은 방금까지 계속 들여다보던 결재판을 들고 일어나 시운을 향해 걸어갔다.

"이번에 올린 이 결재 건에 관해 물어보려고 불렀어요."

"네, 물어보십시오."

"…향후 크게 수익이 날 것 같지 않아 보이는데, 투자를 진행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까?"

강하민이 펼쳐 보인 결재판을 들여다본 시운은 빙긋 웃으며 자신 있게 대답했다.

"네. 꼭 투자해야만 합니다."

우송.

시운이 상신한 투자계획서에 올라있는 업체명이다.

이 회사의 상품은 고순도 불화수소 하나뿐이다.

반도체 생산 공정에 들어가는 소재로 흔히 에칭가스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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