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1화 블루드래곤 픽처스(2)
얍삽한 얼굴로 히죽대는 그는 도민식 실장이었다.
연예기획사 HR엔터테인먼트 소속의.
도민식은 자신을 반기지 않는 게 역력해 보이는 백진섭의 표정에도 능청스럽게 소파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인제 그만 결정하시죠?"
"…제 입장은 전과 다름이 없습니다."
도민식은 혀를 쯧쯧 차고는 몸을 백진섭을 향해 돌렸다.
그러고는 이죽대듯 입을 열었다.
"아무리 대본만 붙들고 있어 봐야, 그 드라마 우리 회사 도움이 없으면 못 만들어요. 아무도 관심 없잖아. 안 그래요? 이젠 현실을 알 때도 됐을 텐데 말입니다. 우리 백진섭 대표님, 너무 꿈속에서만 사시는 거 아닙니까?"
모든 방송국과 투자사들이 백진섭이 기획한 드라마를 외면했을 때 HR엔터는 쌍수를 들고 찾아와 기꺼이 투자하겠다고 의사를 밝혀왔었다.
물론 연예기획사이니만큼 소속 연예인들의 출연을 조건으로 한 딜이었지만 말이다.
만약 HR엔터가 배우 소속사라도 되었다면, 백진섭도 그 제안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제작비와 배역을 손쉽게 해결할 수 있는 거니까.
하지만….
HR엔터에는 배우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곳은 전형적으로 아이돌 그룹만 기획·육성·데뷔시키는 아이돌 기획사였다.
처음 이곳을 찾아온 날, 도민식은 이번에 런칭할 그룹이라며 여섯 명의 연습생을 데려와 막무가내로 백진섭 앞에서 대본 리딩을 시켰다.
결과는?
책을 읽는 듯한 연기와 새는 발음들.
드라마 PD로 13년 이상을 활동한 백진섭으로서는 아주 고역인 순간이었다.
아이돌 연습생들답게 외모는 다들 수준급이지만, 드라마의 배역과 전혀 어울리지도 않았다.
연기에 대한 욕심보다는 드라마 촬영에 들어가면 들어올 협찬 의상들과 같은 떡고물에만 다들 관심이 많았다.
드라마의 이야기 배경이 고려 후기라는 것도 모르고 왔다는 말이다.
사전에 약속도 없이 찾아와 제멋대로 구는 도민식에 백진섭은 그 자리에서 거절의 뜻을 내비쳤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이렇듯 매번 찾아와 자신을 귀찮게 굴고 있었다.
"신생 제작사에 신인 작가. 우리 HR엔터나 되니까 백진섭 대표님 능력 보고 투자하겠다는 것 아닙니까. 인제 그만 결정합시다. 백 대표님은 돈 벌어서 좋고, 우린 애들 얼굴 알려서 좋고."
백진섭은 도민식의 입을 좌우로 쫙 찢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았다.
그로서는 더 기가 막힌 건 HR에서 제작비라고 지원하겠다고 한 금액이었다.
7, 80분 길이의 내용을 한 화로, 총 16부작으로 기획된 드라마다.
작품의 완성도를 위해 해외 로케이션과 연기가 되는 주연급 배우들의 섭외는 필수 조건이다.
근데 HR엔터에서 제시한 편당 제작비는 겨우 오천만 원.
10분 길이 웹드라마 한 편을 찍는데도 오백만 원 정도가 드는 추세였다.
근데 정통 드라마에 오천만 원?
이걸 무슨 웹드라마로 착각을 하나!
거기에 지금 대본의 내용을 하나씩 지적하며 훈수를 두기까지.
"4화 보니까 여주인공이 국경을 넘는 씬이 있던데…. 이 부분 멀리 해외 로케이션을 할 필요가 있나요. 그냥 저기, 어디더라? 그래, 철원 같은 곳! 대충 나무 많고 숲 우거진 데서 찍으면 됐지, 뭘."
부아가 서서히 치밀었다.
그래, 한 마디만 더 해봐라.
헛소리만 지껄이는 그 입을 날려줄 테니!
백진섭의 인내심이 바닥나 폭행 사고를 치기 직전의 순간이다.
다행히 그가 폭발하기 전에 전화벨이 울렸다.
띠리리~
"…여보세요?"
백진섭은 혼자서 계속 나불대는 도민식의 얼굴이 꼴도 보기 싫은지 고개를 홱 돌린 채 수화기를 들었다.
- 미래투자신탁 현시운입니다.
"?!"
기다리던 연락이 드디어 왔다!
- 여보세요? 백진섭 대표님?
"아, 네! 듣고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 네. 주신 대본으로 회사 내부적으로 검토해본바….
긴장되는 순간이다.
백진섭은 상대방의 다음 말을 기다리며 침을 꿀꺽 삼켰다.
- 백진섭 대표님이 기획하시는 '사랑은 낙하산을 타고'에 제작비를 투자하기로 최종 결정을 내렸습니다.
"!!"
백진섭은 기쁨에 주먹을 움켜쥐었다.
- 지난번에 방문했을 때, 백 대표님께서 말씀하셨던 회당 8억 원 선에서 자금이 집행될 예정입니다. 내일 오전에 그리로 방문하겠습니다. 자세한 얘기는 계약서를 작성하며 나누도록 하죠.
"네, 네. 그래야죠.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네! 정말 감사합니다."
통화가 끝났다.
백진섭은 환희로 잘게 떨리는 손을 움직여 수화기를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뭐,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나 봅니다?"
"……."
백진섭은 도민식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
도민식은 조금 전과 달라진 듯한 백진섭의 분위기에 눈매를 좁혔다.
"도민식 실장님."
"네?"
"드디어 결정을 내렸습니다."
"무슨…. 아! 저희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한 겁니까."
방금 백진섭이 통화하면서 보여준 모습을 잊기라도 했는지 도민식은 그가 HR엔터의 제안에 응하기로 했다고 착각하며 또다시 주절거렸다.
"잘 선택하셨습니다. 분명 백 대표님도 후회하지 않을…."
그를 향해 백진섭은 후련하게 소리쳤다.
"당장 내 사무실에서 꺼져, 이 자식아!!"
* * *
'블루드래곤 픽처스' 사무실에서 돌아온 도민식은 곧바로 대표이사실을 찾아가 경과를 보고했다.
"뭐? 제안을 거절해?"
"네. 그게…. 백진섭이 전화를 받으면서 했던 말들로 추측건대, 제작비를 투자받은 게 아닌가 싶습니다."
"누가? 누가 투자를 한 건데?"
대표의 다그침에 도민식은 고개를 푹 숙이며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거기까지는 듣지를 못해…."
"빌어먹을!"
"……."
가뜩이나 삼정 그룹의 신수겸이 유럽으로 추방당하면서, 물주가 되어줄 투자자를 잃어 짜증이 나던 마당이었다.
그동안 녀석을 접대한다고 들인 돈이 얼마며, 동원한 연습생이 몇 명이었는데….
거기에 이번에 런칭하는 여자 아이돌 그룹의 얼굴을 알릴 홍보 수단마저 빠그라져 버렸다.
HR엔터테인먼트 대표인 고희준은 뻗치는 화를 욕설로 풀어냈다.
대본도 신인 작가답지 않게 뛰어났었다.
퀄리티는 다소 떨어지겠지만, 자신이 제시한 돈으로 잘만 만들면 홍보 수단 이상의 수익도 벌어들일 수 있었는데….
"그래서 넌, 백진섭이 꺼지라고 하니깐 그 말대로 그냥 꺼진 거냐!"
화살은 그 일을 맡았던 도민식에게 향했다.
"딱히 제가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왜 없어, 이 새끼야! 편당 제작비를 올려주겠다고 그 자리에서 딜을 쳐보든가!"
분기탱천한 고희준은 손에 잡히는 대로 물건을 마구 던졌다.
"나가, 이 새끼야! 쓸모도 없는 등신 같으니라고. 당장 꺼져버려!"
도민식은 날아오는 물건들을 피하며 서둘러 대표이사실을 빠져나왔다.
"씩- 씨익-"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은 고희준의 눈에 '사랑은 낙하산을 타고'의 1화 대본이 비쳤다.
"에이, 씨!"
그는 그 자리에서 대본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그나마 분이 조금 풀렸지만, 고희준은 이대로 넘어갈 마음이 없었다.
자리에 앉은 그는 어떻게든 드라마 제작을 훼방 놓을 수를 생각했다.
"편성 채널이 TVM이랬지?"
그 사실을 떠올린 고희준의 입가로 비열한 미소가 지어졌다.
삼정의 신수겸만큼은 못해도 자신 역시 재벌 3세다.
미디어 재벌로도 불리는 GJ그룹이 고희준의 출신 가문이다.
비록 젊은 시절에 망나니짓을 하도 많이 저질러 일찍 유산을 배분받고 본가에서 쫓겨나다시피 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어려서부터 많은 귀염을 받으며 자랐던 막내였다.
자신의 작은 부탁쯤이야 들어줄 거로 굳게 믿은 고희준은 곧바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현재 GJ그룹의 회장이자 자신의 큰형이기도 한 고희성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러 번의 신호음이 울린 뒤에야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형. 나야. 희준이."
- …갑자기 무슨 일이냐?
"무슨 일은. 형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전화했지."
- 그냥 용건을 말해.
자신의 전화를 달가워 하지 않는 혈육의 목소리에 고희준은 코끝을 찡그렸다가 이내 다시 풀었다.
일단은 부탁하는 처지니 숙이고 들어가야겠지.
"다른 게 아니라, 조금 건방진 제작사 대표가 있어서 말이야. 혼을 좀 내고 싶거든. 그룹 미디어 부문에 TVM이라고 드라마 채널 있잖아? 거기에 좀 언질을 줬으면 하는데. 그 제작사에서 만들어오는 작품은 편성해주지 말라고."
오랜만에 연락해 전하는 용건이 무언지 다 들은 고희성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 희준아.
"어, 형."
- 지난주 금요일이 무슨 날이었는 줄은 아냐?
"지난주 금요일? 글쎄, 누구 생일이었어?"
- 어머니 기일이었어. 이 철부지 같은 녀석아!
"……."
- 이런 일로 다신 전화하지 마라. 끊는다.
"아, 혀, 형! 혀엉!"
고희준의 부르짖음에도 이미 전화는 끊겨있었다.
그에 다시 분노한 고희준은 사무실 집기들을 때려부쉈다.
"젠장! 바쁘게 일하다 보면 어머니 기일 정도야 까먹을 수도 있는 거지. 그게 뭐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난리야!"
한번 망나니는 영원한 망나니였다.
* * *
2019년 4월.
대한민국의 일본 후쿠시마 농수산물 수입 규제 조치에 대한 세계무역기구(WTO)의 최종 판정이 13일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작년 2월 1심의 결정을 뒤집고, 일본 패소!]
이에 격분한 일본 정치권과 우익단체들이 광분하는 4월 14일.
현시운은 강하민과 함께 하와이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잠 좀 자둬. 거의 9시간은 걸릴 테니까."
그렇게 말한 강하민은 승무원에게 수면용 안대를 부탁해 쓰고는 금세 곯아떨어졌다.
최근 한 달간 이런저런 업무로 많이 피곤했을 테니 일견 이해되는 부분이기는 했다.
퍼스트 클래스의 안락함을 만끽하며 시운은 창밖을 바라봤다.
높이 오른 비행기는 어느덧 구름을 뚫고 올라갔다.
조금 전까지 보이던 공항과 도시의 모습이 하얀 솜뭉치에 가려지며 희미해져 갔다.
"……."
우송과의 협의는 순조롭게 진행되어 지난달 중순, 지분 50%에 200억 원을 투자하기로 계약을 확정 지었다.
현재 새로운 생산시설이 들어설 부지와 시공사를 선정하는 단계.
이르면 이번 달 말부터 공사에 들어갈 예정이다.
지난달 중순부터 정상 가동된 진성전자의 새로운 반도체 생산 라인도 무탈하게 돌아가고 있다.
삼정전자의 압력에 돌아섰던 중소업체들이 다시 물건을 부탁하며 매일 진성전자의 문을 두드리고 있었고, 삼정 역시 빳빳이 들었던 고개를 접으며 기술 제휴를 제안하는 상황이다.
해외의 거래처도 기존의 다섯 개에서 열 개로 늘어난 상황이라 국내 수요에 전혀 아쉬울 게 없는 영업관리부의 이민석은 그들을 상대로 상당히 고자세의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물론 국내에서도 사업을 영위해야 하는 바, 너무 막 나가지 말라는 이학만 사장의 지시에 이민석도 정도 이상의 선을 넘지는 않았다.
'핸드폰 제조 공장도 반쯤은 완성된 상황이고….'
미래투자신탁의 제작비 투자로 원하는 배우들을 섭외한 '블루드래곤 픽처스'의 백진섭은 다음 주 수요일에 첫 촬영에 들어간다고 소식을 전해왔다.
은근히 첫 촬영장에 찾아와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라 시운도 따로 일정이 없으면 방문할 예정이다.
원래대로라면 TVM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제작될 드라마였다.
GJ그룹 고희성 회장이 우연한 기회로 드라마 대본을 보게 되고, TVM 사장에게 제직비를 충분히 지원하라고 지시내린 것은 기사로도 날만큼 유명한 일화였다.
해외 판권 수출로 TVM에 상당한 이익을 안겼었지.
하지만, 이번에는 드라마로 얻게될 수익의 대부분이 미래투자신탁의 몫이 될 것이다.
미래투자신탁의 총자산은 어느덧 사천억을 넘어 오천억 달성을 목전에 두고 있다.
유례가 없을 정도로 빠른 성장에 업계의 시선이 자신들을 향했다.
'모든 게 순조로워. 이제….'
단추 하나만 더 잘 채우면 된다.
해외 투자법인 설립.
미래투자신탁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독립된 법인을 말이다.
이를 위해 시운은 강하민과 함께 하와이로 향하고 있었다.
어느덧 바다밖에 보이지 않는 바깥 풍경에 시운은 시선을 돌렸다.
"제2의 도약인가."
시운의 작은 중얼거림에 잠든 강하민이 몸을 뒤척였다.
그 모습에 시운은 작게 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8시간 35분을 더 날아간 비행기는 하와이 오아후섬에 내려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