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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로 재벌 참교육-33화 (33/139)

§033화 Join Us(1)

오늘을 위해 미리 일정을 비워뒀던 시운은 빈손으로 방문하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케이터링 서비스 업체를 통해 커피와 간식차를 촬영지인 파주 드라마 세트장까지 배달시켰다.

"이러려고 제가 촬영일을 알려드린 게 아닌데…."

미안해하는 말과는 달리 백진섭의 표정은 무척 밝아 보였다.

커피차와 간식차에 달린 드라마 대박 기원 현수막을 바라보는 그의 눈이 웃고 있다.

오전 일찍부터 촬영은 시작됐었다.

드라마 '사랑은 낙하산을 타고'는 판타지 로맨스다.

특수부대원인 남자 주인공이 공수 훈련 도중 돌풍에 휘말려 낯선 산기슭에 불시착하게 되는데, 알고 보니 고려 시대로 타임슬립한 것.

대몽 항쟁 말 무렵인 고려 후기의 강화도에 떨어진 남자 주인공은 그곳에서 귀족 가의 여식인 여자 주인공을 만나 여러 사건에 휘말리면서 사랑을 키워나간다.

그게 드라마의 주요 내용이다.

퓨전 사극답게 보조 출연자들은 옛 고려 시대의 복식으로 돌아다녔다.

"첫 촬영 때 날씨가 좋으면 드라마가 성공한다고 들었습니다. 오늘 날이 무척 맑네요. 꼭 대박이 날 겁니다."

"그럼요. 현 부장님 회사에서 이렇게 전폭적으로 지원해주는데 그렇게 돼야죠!"

자신 있는 얼굴로 대답한 백진섭은 조연출과 촬영감독을 불러 시운에게 소개했다.

시운이 누군지도 몰랐던 그들은 이번 드라마에 제작비를 지원한 투자회사의 부장이라는 말에 화들짝 놀란 얼굴을 했다.

백진섭이 그랬던 것처럼 시운의 외모가 무척 젊어 보였던 탓이다.

"조연출, 30분 더 쉬었다가 촬영 재개한다고 배우분들께 알려줘. 커피와 간식도 드시라고 전하고."

"네, 감독님."

백진섭과 몇 마디 더 담소를 나눈 시운은 촬영장을 구경하겠다며 그와 헤어진 후 세트장을 돌아다녔다.

실감 나는 분장으로 고려 시대의 민초들과 귀족, 군인이 된 단역 배우들과 보조 출연자들.

시운은 고증을 거쳐 만들어진 드라마 세트장을 신기한 듯 쳐다봤다.

"스탠바이- 액션!"

40여 분 후에 다시 촬영은 재개되었다.

백진섭의 배려로 가까이에서 촬영 현장을 지켜본 시운은 속으로 확신했다.

'이 드라마는 분명히 성공한다.'

주·조연 할 것 없이 배우들의 연기력이 그만큼 훌륭했다.

문외한인 시운이 보기에도 말이다.

* * *

화사한 봄에 어울리는 밝은 색상의 블라우스와 스커트 차림으로 레스토랑에 나타난 장세연은 안을 둘러보다 오늘 만나기로 한 사진 속 남성을 찾아냈다.

"……."

상대방 역시 장세연을 발견했는지 여유로운 미소와 함께 일어서며 손을 위로 살짝 들었다.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걸어간 장세연은 고개를 숙이며 남성과 인사를 나눴다.

"처음 뵙겠습니다. 장세연이에요."

"김민재입니다. 앉으시죠."

남성이 손을 뻗으며 맞은편 의자를 가리켰다.

장세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와 마주 앉았다.

"듣던 대로 아주 미인이십니다."

그의 칭찬에 장세연은 작게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눈은 전혀 웃지 않는, 아무런 감정도 비치지 않는 억지로 만들어낸 미소였다.

장세연은 이달 들어서 벌써 여덟 번째인.

맞선 자리에 또 나왔다.

"장강유통의 부사장이라면 백화점과 마트를 관리하시겠군요."

"네."

한 차례 외모를 칭찬한 후 맞선남의 주요 관심사는 역시 장강그룹과 장세연이 향후 물려받게 될 지도 모를 계열사에 대한 것들이었다.

어차피 서로의 조건을 전제로 만난 자리다.

거기에 감성적인 부분이 끼어들 틈은 없었다.

맞선남이 그러하듯 장세연 역시 그를 인생의 동반자가 아닌 사업 파트너의 포지션에 놓고 속으로 평가를 하고 있었으니까.

'김민재. 메이저 언론 4사 중 하나인 한반도일보 오너 가의 장남.'

다른 언론 3사와는 달리 한반도일보는 종편방송국을 개국하지 않았다.

감점.

장남이지만, 차남보다 능력 면에서 많이 부족하며 사내에서의 인망 역시 동생에게 밀리는 추세다.

이 역시 감점.

마지막으로…, 소문에 손버릇이 아주 나쁘다고 들었다.

일반 대중들 사이에 돌아다니는 루머 따위가 아니다.

장세연이 말하는 소문이란 객관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작성된 연이용료 10억 원의 정보지를 말함이다.

흔히 찌라시라는 단어로도 잘 알려진, 바로 그것이었다.

최종 평가.

탈락.

이 자리에 나오기도 전에 눈앞의 맞선남, 김민재에 대한 결론은 내려져 있었다.

그런데도 여기에 나온 건, 아버지인 장철구 회장과 장기우를 조금이나마 안심시키려는 의도였다.

봐라.

너희들이 원하는 대로 고분고분하지 않는가.

물론 장세연의 성격을 아는 그들이 곧이곧대로 믿을 리는 없었지만.

어차피 상관없다.

알면서도 속아주고, 속는 척하며 기회를 노리는 게 그들과 자신의 관계이니까.

그 사이에 혈연의 정 따윈 더는 존재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장례가 끝날 때까지 장세연은 오피스텔에 감금당한 채 물 한 모금, 밥 한술 넘기지 않고 뜬눈으로 그 시간을 지새웠다.

일종의 의식이었다.

자신을 이토록 비참하게 만든 인간들에 대한 복수심을 마음 깊이 한 땀 한 땀 새기는 처절한 몸부림.

절대 이 원한을 잊지 말라는 뜻의 발로였다.

결국 장례식 마지막 날 아침.

장세연은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전속비서인 김신영이 서둘러 구급차를 불러 그녀는 곧바로 서울 장강병원 VIP실로 옮겨졌다.

반나절 뒤에 병실에서 눈을 떴을 때, 자신이 누운 곳이 어디인지 알게 된 장세연은 가장 먼저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례식 동안 오려고 해도 올 수 없었던 곳을 쓰러지고 나서야 올 수 있다니.

이미 어머니의 상여는 장지로 떠난 지 한창 지났을 때였다.

그녀의 입원에 대해 기사는 이렇게 났다.

모친을 여읜 충격에 몸져누운 상태에서도 밤낮으로 그리워하다 의식을 잃기까지 한 재벌가 효녀.

김신영 비서가 가져다준 태블릿PC로 그런 내용의 기사들을 확인했을 때, 장세연은 화 대신 웃음만 나왔다.

그룹 비서실에서는 전략을 바꿨다.

이미 낸 기사를 기정사실로 하기 위해 이번엔 VIP실에 나흘간 감금되었다.

그녀는 별 저항 없이 비서실의 뜻을 따랐다.

이 역시 장철구 회장의 지시일 테지.

이미 오피스텔의 일로 자신이 거부한다고 해도 뜻대로 되지 않음을 알았다.

동시에 부친이 그룹을 위해 어떤 짓까지 할 수 있는지를 깨닫게 된 값진 시간이었다.

"다음에 또 만날 수 있을까요?"

장세연을 향해 애프터 신청을 하는 맞선남의 눈빛에 열망이 가득하다.

그녀처럼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려보고는 절대 놓쳐선 안 될 배필이라 여긴 거겠지.

자신과 결혼함으로써 얻게 될 가문 내에서의 입지와 여러 이점을 생각하고 있을 거다.

장세연은 그를 향해 처음 보였던 거짓 미소를 다시 드러내며 대답했다.

"비서실을 통해 연락드리겠습니다."

"아… 네."

맞선남의 얼굴에 실망감이 가득 찼다.

에둘러 말하는 거절의 뜻임을 그 역시 잘 알고 있음이다.

"오늘 만나서 즐거웠어요."

"네, 뭐…. 저도 즐거웠습니다."

각 가문의 대표로 이 자리까지 나온 둘이다.

아무리 상대방의 결정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도 체면상 감정을 대놓고 드러낼 수 없었다.

한 시간 남짓의 맞선은 그렇게 끝났다.

서로의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식사가 아닌 차를 간단히 마시는 자리였다.

레스토랑을 나선 장세연은 주차장으로 걸어가 자신의 차에 올라타서 시동을 걸었다.

대시보드 아래 센터패시아에 조명이 들어왔다.

동시에 액정 위로 현재 시각이 찍혔다.

오후 4시 30분.

시각을 확인한 장세연은 차를 출발시켰다.

목적지는 이곳에서 15분 정도 떨어진 호텔 스카이라운지였다.

이달의 아홉 번째 맞선남이 그곳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 * *

블루스풍의 느린 재즈 음악이 '디오니소스'에 울려 퍼졌다.

오늘도 이곳을 찾은 장세연은 바 테이블 위에 놓인 온더록스 잔을 들어 살며시 흔들었다.

두 덩이의 바위 같은 얼음 조각이 호박빛 액체 위에서 서로의 몸을 부딪쳤다.

하염없이 그 장면을 바라보던 그녀는 어느 순간 잔에 입술을 가져다 대며 반 모금가량의 술을 넘겼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그녀는 평소에 마시던 술의 양을 대폭 줄였다.

대충 맛과 향만 느낄 정도로.

더는 취하면 안 된다.

항상 맑은 정신으로 깨어있어야만 한다.

어떻게 하면 장철구와 장기우를 파멸시킬 수 있을지 궁리하고 또 궁리해야만 한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장세연은 아직 그 방법을 찾아내지 못했다.

가장 손쉬운 것은 유력한 집안에 시집을 가 시댁의 힘을 등에 업고 친정을 무너뜨리는 거지만, 장철구가 주선하는 맞선남의 가문은 하나같이 장강보다는 서너 수 아래였다.

그만큼 자신의 부친이 치밀하다는 거겠지.

그룹에 위협이 될 자그마한 꼬투리도 놓치지 않겠다는 거다.

오늘 만난 한반도일보의 장남만 해도 그랬다.

메이저급 언론사라는 것 말고는 하등 그룹에 이득이 없는 상대였다.

지금 주고 있는 광고를 끊어버리겠다는 협박만 해도 납작 엎드릴 곳이다.

재벌 가의 결혼에 서로의 이해득실을 따지는 게 당연한 관례.

그런 점에서 장철구가 주선한 맞선 상대는 하나같이 영세하다.

장강 그룹에 비하면.

'실낱같은 희망마저도 주지 않겠다는 건가.'

장기우를 명실상부한 후계자로 낙점하고, 최대의 방해꾼이 될 그녀의 손발톱을 뽑아버릴 심산이겠지.

"……."

한편, 바 테이블 맞은편에 선 박우석은 마른 천으로 컵을 닦는 척 하며 연신 장세연을 힐끔거렸다.

뭔가 묻고 싶은 게 있는 모양이지만,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뭐야?"

"어? 뭐, 뭐가?"

그런 박우석의 행동을 눈치챈 장세연이 직설적으로 묻자, 그는 당황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그녀는 고운 미간을 살짝 좁히며 박우석을 노려봤다.

"아, 아니. 그냥…. 요새 별일은 없는 건가 해서."

"그것뿐?"

"으, 으응."

"흐응…."

집요하게 바라보는 장세연의 시선을 피해 그는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렸다.

이미 물기조차 남지 않은 컵을 연신 닦고 있을 때, 박우석의 손을 멈추게 하는 말이 들려왔다.

"오늘 내가 본 여덟 번째, 아홉 번째 맞선 결과가 궁금해서는 아니고?"

"……."

바짝 굳은 친구의 모습에 장세연은 작게 웃으며 잔을 기울였다.

"아저씨랑 싸우고 이렇게 집만 나오지 않았으면, 다음 맞선 상대가 너였을지도 몰랐겠네."

"!!"

좀 전과는 다른 의미로 박우석의 안색이 굳어졌다.

술잔을 내려놓던 장세연은 뒤늦게 이를 알아보고 아차 싶은지 서둘러 말을 꺼냈다.

"미안…. 내가 실언했어."

그녀의 사과에 박우석은 억지로 표정을 풀었다.

"아무래도 너 오늘은 술 그만 마셔야겠다."

그러면서 장세연의 술잔을 가져가 버렸다.

아쉽다는 듯 비어버린 바 테이블을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에 박우석은 살짝 한숨을 내쉬며 덧붙였다.

"대신 논알콜 칵테일 한 잔 만들어줄게."

"…고마워. 부탁해."

장세연은 박우석이 셰이커에 갖가지 음료를 섞는 모습을 멀뚱히 바라봤다.

마지막으로 탄산수를 적당량 넣고 뚜껑을 닫은 채 셰이커를 흔들 때, 그녀가 앉은 바 테이블로 한 남성이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옆자리에 앉은 채 자신을 향해서 하는 인사에 장세연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장기우가 장례식장에서 상주로 선 이후, 그룹 내에서 그녀의 입지는 좁아졌다.

장기우를 후계자로 결정했다는 장철구 회장의 뜻으로 받아들인 임원들.

장세연 곁에 남았던 몇 안 되는 임원들도 그 일 이후로 모두 라인을 갈아 타버렸다.

현재 그녀는 낙동강 오리알 신세다.

이곳 '디오니소스'에서의 그녀의 위상도 예전만 못했다.

어떻게 내막을 알게 된 이들이 술기운에 용기를 내어 장세연에게 다가오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그녀의 차가운 반응과 박우석의 견제에 불에 덴 것처럼 금방 달아나기는 했지만, 지금과 같이 도전해오는 발길 역시 끊이지가 않았다.

"마스터. 항상 마시는 거로 한 잔 부탁합니다."

셰이커를 흔들던 박우석은 조금 냉랭한 표정으로 그에 답했다.

"앞선 주문이 있어서요. 잠시 기다리십시오."

"물론이죠."

이를 못 느꼈는지 대답하는 남성의 목소리는 제법 밝다.

문득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진 장세연이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렸다.

눈을 마주친 남성은 그녀를 향해 환하게 웃으며 다시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강하민이라고 합니다."

"아, 네…."

자신보다 서너 살은 많아 보이는 남자.

웃는 낯인데도 눈빛만은 어딘지 모르게 서늘했다.

장세연은 어색하게 인사를 받아주고는 시선을 다시 원래대로 했다.

셰이커를 흔드는 박우석의 손길이 순간 거칠게 변했다.

잠시 후, 완성된 칵테일을 잔에 곱게 담아 장세연의 앞에 놓은 박우석은 위스키 한 병을 꺼내어 마개를 땄다.

탁!

"음?"

강하민이 앉은 바 테이블 위에 스트레이트 잔을 소리 나게 올려놓은 박우석은 위스키를 가득 따라 부었다.

"고마워요, 마스터."

"…네."

평소에도 자주 오는 단골이라 얼굴은 알지만, 장세연의 옆자리에 앉는 모습에 절로 경계가 됐다.

그 마음을 알 리 없는 강하민은 단숨에 잔을 비우고는 술값으로 십만 원권 수표 다섯 장을 바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오늘은 한 잔만 하고 말 생각인 듯 보였다.

막 자리에서 일어나던 강하민은 품에서 명함 케이스를 꺼내 들며 말했다.

"작게 투자회사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자산을 불릴 생각이 있으시면 연락주십시오."

그러면서 자신의 명함 한 장을 장세연의 앞에 내려놓았다.

"……."

따로 대답까지 원한 건 아닌지 강하민은 곧바로 '디오니소스'를 나갔다.

'영업이었나?'

장세연은 명함에 관심도 주지 않은 채 앞에 놓인 칵테일을 한 모금 들이켰다.

"내가 버려줄까?"

강하민이 건네고 간 명함을 눈짓하며 묻는 박우석의 말에 그녀는 작게 웃음짓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손을 뻗는 박우석에게 명함을 집어서 전달하려는 순간, 장세연의 행동이 도중에 멈췄다.

"왜 그래?"

"……."

그녀는 박우석의 의아해하는 물음에도 답하지 못하고 매서운 시선으로 명함 뒷면만 노려봤다.

거기엔 손글씨로 쓰인 한 줄의 문구가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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