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0화 스캔들(2)
"뮤직가든 방 PD에게서 확답을 받아냈습니다. 앞으로도 대표님께서 허락하시지 않는 한은 블루비쥬가 그 무대를 오를 일은 없을 겁니다. 지상파 3사의 음악방송 PD들에게도 약을 쳐놨으니, 빅스텝의 이승진도 한동안 방송 스케줄을 잡기 힘들 겁니다."
그만큼 이승진이 자신의 제안을 수락할 가능성이 커졌다.
"그래, 아주 잘했어. 하면 잘하는 녀석이 말이야."
블루드래곤 픽쳐스 일의 실패로 도민식은 오래도록 고희준 앞에서 설설 기어야 했었다.
만족해하는 그의 반응에 도민식은 오랜만에 이를 보이며 웃었다.
"그렇다고 방심하지는 마. 빅스텝이 어떤 움직임을 보이는지 한시도 눈을 떼지 말라고."
"네! 그러겠습니다, 대표님."
처음에는 HR 엔터에서 쫓겨난 연습생, 이지아의 데뷔를 눈 뜨고 봐줄 수 없어 시작한 일이다.
'감히 내 말을 거역해!'
자신의 처지가 난처해지게 문을 박차고 나갔던 소녀의 뒷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 자리를 무마하려고 얼마나 진땀을 뺐는지.
그런 치욕을 안겨준 녀석이 연예계에 다시 발을 디디려는 걸 고희준은 참고 넘길 수 없었다.
근데 웬걸?
뮤직가든 방 PD를 통해 입수한 블루비쥬의 데뷔곡과 퍼포먼스는 매우 훌륭했다.
두 달 전, HR 엔터에서 데뷔시킨 걸그룹보다 훨씬 더.
'이거 홍보만 잘하면 제대로 성공하겠는데?'
그때부터 욕심을 내기 시작했다.
블루비쥬란 아이돌 그룹을.
그리고 손에 거의 잡힐 정도까지 가까워졌다.
물론 블루비쥬를 빅스텝 엔터에서 넘겨받는다고 해도, 그 건방진 이지아는 팀에서 방출시킬 생각이다.
HR 엔터 연습생 중 말 잘 듣고 고분고분한 애 한 명 발탁해서 넣으면 그만이지.
"아, 참!"
"네, 대표님."
"오늘 저녁에 있을 만찬 준비는 잘 되어가고 있는 거지?"
만찬.
HR 엔터 내에서 은어처럼 쓰이는 단어다.
접대성 술자리를 일컫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차질없이 준비해 놓겠습니다."
"왜, 지난번 같은 일로 날 곤란하게 만들지 말고."
"…네, 대표님."
"그래, 나가 봐."
도민식이 나가고 혼자 남은 고희준은 의자에 몸을 깊이 뉘며 히죽 웃었다.
곧 자신의 손에 들어올 블루비쥬를 생각하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 * *
"음…."
포크레인 흥신소 사장인 정민철은 방금 현시운이 말한 의뢰 내용에 침음성을 흘렸다.
"가능할까요?"
"……."
시운은 일거리가 없어 생활고에 허덕이던 포크레인 흥신소 직원들의 삶을 윤택하게 해준 은인과도 같은 고객이다.
그의 의뢰 덕분에 밀린 월세도 해결했고, 이렇듯 사장실까지 따로 있는 사무실로 옮겨올 수 있었다.
정민철과 흥신소 직원들에게 시운은 VIP다.
근데 오늘 그 VIP께서 평소와는 성격이 많이 다른 의뢰를 들고 찾아왔다.
특정 인물의 뒷조사나 동선 파악이 아닌.
"증거 수집이라…."
그것도 재벌 3세가 운영하는 연예기획사의 접대 현장을.
뭔가를 알아내야 한다는 점에선 전과 동일하지만, 방식은 전혀 달라진다.
대상의 주변을 훑던 이전과는 달리 이번에는 직접 현장에 잠입해야만 한다.
난이도와 위험도가 배 이상으로 느는 건 당연했다.
"조사하는 데 드는 비용은 전부 제가 부담하겠습니다. 수고비도 평소 내던 요금의 세 배를 약속하죠."
"으음…."
세 배의 대가라.
분명 혹하는 조건이긴 하지만, 선뜻 수락하기는 힘들었다.
"당장 답변드리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우선 사무실 인력만으로 가능한지도 알아봐야 하고…. 오늘 중으로 결정해서 연락을 드리죠."
시운은 살짝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가 금세 얼굴을 폈다.
그도 이번 일이 쉽지 않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루머처럼 떠도는 소문의 진상을 파헤치는 일인 만큼.
"알겠습니다.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시운을 문 앞까지 배웅한 정민철은 사무실 소파에 반쯤 드러누운 채 핸드폰 게임에 열중하고 있는 이십 대 초반의 사내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주로 현장 조사를 담당하는 전우진이다.
다른 직원들은 외근 중이고, 사무실에 남은 건 정민철과 전우진 둘뿐이었다.
"우진아, 잠깐 나 좀 보자."
"네?"
전우진은 살짝 이맛살을 찌푸렸다.
조금만 더하면 이번 스테이지를 깰 수 있는데.
"어서."
정민철의 재촉에 전우진은 하는 수 없이 게임을 중도에 포기하고 나왔다.
"무슨 일인데 그러세요?"
정민철의 뒤를 따라 사장실로 들어가며 전우진이 물었다.
"일단 거기 앉아봐."
"…네."
평소 일을 맡길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전우진은 방금 나간 현시운을 떠올리며 자리에 앉았다.
'대체 무슨 의뢰를 맡겼길래?'
전우진은 정민철을 마주 보며 그의 말을 기다렸다.
"우리 VIP께서 꽤 까다로운 의뢰를 맡겼어. 어떤 거냐 하면은…."
이어지는 정민철의 설명에 전우진의 표정이 다양하게 변했다.
이마를 찌푸렸다가 실소를 흘리고, 종국엔 인상을 굳히기까지.
"아무래도 이 의뢰를 완수하려면 현장에서 움직일 네 역할이 가장 클 것 같은데…. 어때, 할 수 있겠어?"
정민철의 물음에 전우진의 입꼬리가 조금씩 말려 올라갔다.
"재밌겠는데요."
전우진의 그런 반응을 어느 정도 예상했던 정민철은 옅게 미소를 지었다.
"알겠다. 그럼 클라이언트에게 의뢰를 수락한다고 전할게. 넌 바로…."
"현장으로 위장 잠입. 맞죠?"
"그래, 이젠 잘 아네."
전우진은 과장된 손동작으로 정민철에게 경례하고는 털레털레 사장실을 나왔다.
"……."
들켰다간 어떤 봉변을 당할지 모를 위험천만한 일이다.
그런데도 반기는 녀석의 모습에 정민철은 만감이 교차했다.
정민철에게 흥신소 식구들은 가족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더욱더 그렇게 느껴지는지도 몰랐다.
"조금 이르지만, 뭐."
정민철은 핸드폰으로 현시운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발신음이 울린 뒤에야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 여보세요.
"포크레인 흥신소 정민철입니다."
- 음, 벌써 결정하신 건가요?
"네."
- 어떤?
"이번 의뢰 맡겠습니다."
그렇게 HR 엔터와 고희준의 몰락을 알리는 신호탄이 날아올랐다.
* * *
"처음 뵙겠습니다. 오늘부터 여기서 일하게 된 이건우라고 합니다."
청담동 고급 룸살롱 '에튀드'에서 4년을 일한 고참 웨이터 함진석은 처음 본 신입의 모습에 함박웃음을 지었다.
바짝 긴장한 모습에서 자신의 과거를 떠올린 까닭이다.
"신입."
"네."
"이런 일 처음이야?"
함진석의 물음에 이건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나이는?"
"스물넷입니다."
"그럼 군대는 다녀왔겠네."
"올해 초에 전역했습니다."
휴게실 겸 탈의실인 좁은 공간에 모여앉은 다른 웨이터들도 흥미로운 시선으로 둘의 대화를 지켜봤다.
"근데 너 얼굴이…?"
"저, 왜, 왜 그러시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에게 가까이 얼굴을 들이미는 함진석의 행동에 이건우는 바짝 긴장하며 뒷걸음질 쳤다.
"좀 생겼다, 너."
"아, 가, 감사합니다."
"이 바닥에 들어왔다는 건 돈은 궁한데 별로 재주가 없다는 소리잖아. 근데 넌 얼굴이 그 정도로 잘 생겼으면 웨이터가 아니라 호스트바 같은 데를 갔어야지. 여기 박봉이야. 그쪽이 훨씬 더 돈을 많이 벌걸?"
물론 이곳 '에튀드'를 방문하는 손님들의 면면이 화려해 간혹 그들이 던져주고 가는 팁만으로도 월 이백만 원 이상은 거뜬히 벌 수 있다.
함진석의 조언에 이건우는 이마에 맺힌 땀을 쓱 훔치면 어색하게 웃었다.
"그게…. 제가 술을 전혀 못 해서요. 하하…."
"이런! 그런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니. 내가 너 같은 얼굴이었으면 벌써 여러 누님 후리고 다녔을 건데."
실제 호스트바에 면접을 보러 갔다 대차게 까인 적이 있던 함진석은 이건우의 얼굴을 부러운 듯 바라봤다.
"어쨌든 한 식구가 되었으니, 앞으로 잘해보자."
함진석이 호쾌하게 내미는 손을 이건우는 조심스럽게 맞잡으며 고개를 숙였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소심해 보이지만 마스크 괜찮고, 인사성까지 바른 그의 모습에 함진석은 기분 좋게 웃었다.
한편, 고개를 숙인 이건우는 조금 전 보였던 어리숙한 얼굴과는 달리 눈빛을 반짝 빛내고 있었다.
그는 이건우라는 가짜 신분으로 '에튀드'에 위장 잠입한 전우진이었다.
* * *
"1번 룸 양주 B 세트."
"3번 룸에서 고객이 진상 부린다. 어서 가서 수습해."
"12번, 12번 룸 안주. 아직도 준비 안 된 거야?"
전우진이 '에튀드'에 위장 취업한 지 일주일이 지났다.
처음부터 자신을 좋게 본 함진석의 도움으로 빨리 적응할 수 있었다.
오픈 전후, 두 번의 청소를 도맡으며 룸살롱의 구조를 훤하게 익힌 전우진.
그는 모아놓은 쓰레기를 버리러 뒷문으로 향하다가 룸으로 이어지는 복도 입구를 슬쩍 쳐다봤다.
"……."
생각보다 쉽게 일이 진행되려나 했더니 예상치도 못한 복병이 있었다.
가로 75cm에 세로 220cm인 사각의 틀.
공항 검사대에서나 볼 법한 금속탐지기와 유사한 모양의 기계가 그곳에 서 있었다.
저 물건의 쓰임새는 바로.
삐익- 삑! 삑!
막 양주를 들고 복도를 지나던 웨이터의 발걸음에 탐지기가 요란히 울리고 양옆의 조명등이 붉은색으로 바뀌었다.
그에 웨이터가 당황했고, 카운터에 있던 마담이 앙칼진 목소리로 소리쳤다.
"뭐야, 이 새끼야!"
"아, 저. 저…. 아까 휴게실에서 쉬다가 깜빡하고 핸드폰을 들고나온…."
애써 변명해보지만, 마담의 대처는 단호했다.
"저 새끼, 당장 끌어내! 핸드폰에 무슨 사진이 있는지 낱낱이 확인하고!"
웨이터와는 결이 다른, 건장한 어깨를 자랑하는 문지기들이 마담의 지시에 실수한 웨이터의 양팔을 끌고 뒷문으로 향했다.
"아, 시, 실수에요! 실수라고요!"
그 웨이터는 금세 뒷문 밖으로 치워졌다.
"뭣들 해? 구경났어? 얼른얼른 움직이지 않고 뭐해!"
멀뚱히 서서 지켜보던 종업원들이 그제야 각자 맡은 일을 하러 움직였다.
저 금속탐지기와 비슷하게 생긴 물건의 용도는 바로 촬영과 녹음이 가능한 기계를 탐지하는 것.
도촬과 도청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안전장치였다.
손님은 물론 '에튀드'에서 일하는 모든 종업원도 저 기계를 통과해야만 했다.
아니, 애초에 다른 길도 없는 복도 입구에 저걸 세워놨을 때부터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유별난 듯 보이지만, 저 기계 덕분에 가게에 대한 손님의 신뢰도는 높았다.
은밀한 사생활 혹은 어두운 뒷거래를 하기 위한 유명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덕분에 마담은 돈을 많이 벌고.
다른 사람들처럼 전우진도 들고 있던 쓰레기봉투를 버리러 다시 걸음을 떼어놓는데….
툭-
"?!"
엉덩이를 토닥이는 누군가의 손길에 그 자리에서 그만 얼어붙었다.
"흐응, 우리 건우. 이젠 일도 잘하네."
"아, 하하. 네, 사장님."
조금 전, 앙칼졌던 모습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마담은 전우진을 올려다보며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딱딱하게 사장님은 무슨. 편하게 누나라고 불러."
"…네."
짙은 화장으로 마흔 중반의 나이를 감춘 마담은 전우진의 귓가로 입을 가져다 댔다.
훅 풍겨오는 진한 향수 냄새에 전우진은 인상을 찌푸렸다.
"힘든 일 있으면 누나한테 바로 말해. 건우 부탁이라면 얼마든지 들어줄 테니까."
그러면서 뜨거운 바람을 불어넣는데, 전우진에겐 정말 고역이었다.
"하, 하하. 저 지금 쓰레기를 버리고 와야 해서요."
"음, 그래. 고생해. 우리 건우."
다시 엉덩이를 스쳐 가는 그녀의 손길에 전우진은 치를 떨며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젠장! 용건이 끝나는 대로 당장 여길 그만두고 만다!'
그리고 다음 날, 전우진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손님들도 다 나가고 뒷정리에 한창인 새벽 5시 무렵.
별안간 가게 전체의 불이 나가버린 것이다.
"어, 뭐야? 정전이야?"
전우진으로선 기회였다.
안 그래도 탐지 기계의 전원 연결선이 어떤 건지 미리 파악하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
알아서 전기가 나가준다면 전우진으로선 더할 나위가 없었다.
마침 마담도 퇴근해서 없고, 어깨들은 담배 피우러 밖으로 나갔다.
다른 종업원들도 피곤함에 신경이 느슨해진 상황.
핸드폰 불빛으로 주변을 비추는 사람들 사이를 빠른 몸놀림으로 빠져나온 전우진은 자신의 라커룸 안쪽에 숨겨둔 단추 형태의 소형 카메라를 들고선 바삐 특실로 향했다.
스무 개의 룸 중에서 유일하게 특실로 명명된 곳.
VIP들에게만 허락된 장소다.
현시운의 이번 의뢰 대상이 이곳을 찾을 때마다 이용하는 곳이기도 하고.
룸의 전경이 가장 잘 보이는, 미리 봐둔 위치에 소형 카메라를 부착했다.
특별히 벽면과 같은 색상으로 주문했던 거라 맨눈으로 대충 훑어서는 식별이 거의 불가능했다.
주변의 배선들로 적당히 위장한 전우진은 얼른 특실을 나왔다.
타이밍이 절묘하게도 전우진이 카운터 근처에 도착할 때쯤 전기가 다시 들어왔다.
"아, 이제 불 들어왔다."
전우진은 정전 전에 그랬던 것처럼 태연하게 쓰레기봉투를 들고 뒷문으로 향했다.
그날 새벽에 있었던 정전은 마담의 귀에까지 들어가지 않았다.
괜히 말해서 마담의 히스테리를 받고 싶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정전된 시간이 1분 30초 남짓으로 짧아 다들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긴 덕분이다.
이를 알 리 없는 마담은 그날 밤도 평소처럼 영업을 재개했다.
"어머! 어서 오세요. 고 대표님."
특실 예약 손님이 도착했다.
HR 엔터테인먼트의 고희준과 네 명의 소속사 연습생들.
오늘도 여느 때처럼 접대를 위해 '에튀드'를 찾아온 것이다.
하루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던 전우진에게는 하늘이 돕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