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7화 정보 유출(2)
"누가 제 컴퓨터를 만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그래서 삼주 전부터 제가 퇴근할 때마다 마우스와 키보드에 아무도 모르게 저만의 표식을 해두었거든요."
근데 매주 화요일 아침에만 오면 그 표식이 흐트러져 있었다고 전민아가 설명했다.
"…그럼 월요일 퇴근 후에 누군가가 전민아 씨 컴퓨터를 만졌다는 거군요."
"네,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그녀의 착각이라 치부하기엔 근 두 달간의 실적 보고서 수치가 현시운이 의도한 것과 다르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게다가 여자의 촉은 무시할 만한 게 아니란 말도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일단은 돌아가서 일 보세요."
"네, 부장님."
시운은 실적 보고서를 한 번 더 살펴보곤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 밖으로 나왔다.
옥상에 올라온 시운은 자신 말고는 아무도 없는걸 확인한 뒤에야 포크레인 흥신소에 전화를 걸었다.
- 지금까지 이런 조사는 없었다. 파고 파고 또 파고.
이젠 익숙해진 안내 멘트 뒤로 삐 소리와 함께 정민철이 전화를 받았다.
밑의 직원들이 대부분 외근을 나가기 때문에 사무실에 주로 사장인 그가 남아있는 편이다.
- 네, 포크레인 흥신소입니다.
"사장님, 접니다. 현시운."
- 아, 네. 고객님. 무슨 일로 이 시간에…?
정해진 건 아니지만 보통 시운이 일을 맡길 때 연락하는 시간대는 대부분 오전 10시에서 11시경에 치중되어 있었다.
"급하게 도움이 필요합니다."
- 네, 말씀하세요. 어떤 도움이 필요하신지?
시운은 입안으로 혀를 한번 굴리며 말을 꺼냈다.
"지난번 HR 엔터테인먼트 영상 증거물 확보할 때 썼던 초소형 카메라 있죠. 그게 필요할 것 같습니다."
- 음…. 하나면 되나요?
어떤 용도로 쓸 건지 정민철은 묻지 않았다.
지금까지 겪어봤던 현시운이 허튼 데 그런 걸 사용할 사람은 아니라는 정민철의 확고한 믿음 덕분이다.
"세 개. 세 개가 필요합니다."
- 오늘 중 퀵으로 보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나중에 경비 내역서 보낼 때, 같이 청구하세요."
통화를 마친 시운은 사무실로 내려와 평소처럼 업무를 보다가 자신 앞으로 퀵 배송된 물건을 챙겼다.
'월요일이라….'
시운은 다가오는 일요일에 회사에 잠깐 나와 세 개 팀 전부에 카메라를 설치하기로 했다.
* * *
6일 뒤, 월요일 오후 여섯시 반.
미래투자신탁 투자운용 3팀의 팀장 김문성은 자신의 자리를 정리하며 외투를 챙겨 들었다.
"다들 이만 퇴근합시다."
여섯 시가 지났을 때부터 팀장의 눈치를 봐가며 시계만 들여다보던 몇몇 팀원들의 얼굴이 금세 밝아졌다.
"오늘 한잔 한 사람?"
"아, 저는 오늘 집에 제사가 있어놔서…."
"그래? 한 대리는 어쩔 수 없고."
"저요, 저! 전 시간 됩니다!"
신입사원 황성일의 우렁찬 어필에 김문성은 허허 웃었다.
누구는 집으로, 또 누구는 술자리로 그렇게 뿔뿔이 흩어지려는 상황.
"……."
투자운용 3팀 대리 최우성은 천천히 자리를 정리하는 척하며 회사 동료들이 빨리 사무실을 나가주길 원했다.
"최 대리는? 같이 한잔 안 할 거야?"
"아, 전…. 속이 좀 안 좋아서요."
어깨를 두드리는 갑작스런 손길에 최우성은 화들짝 놀랐다.
김문성 과장이었다.
"그래? 그럼 뭐하고 있어. 얼른 들어가 쉬어."
"하하. 지금 보던 것만 마저 보고 가려고요."
"몸도 안 좋은데 일은 무슨. 우린 몸이 재산이야. 챙겨가면서 일해."
"물론입니다. 너무 걱정 마십시오."
적당히 하고 들어가라고 말한 뒤, 김문성은 함께 술을 마시기로 한 황성일을 데리고 사무실을 나갔다.
몇 분이 더 흘렀을 때, 3팀 사무실에 남은 사람은 최우성 혼자였다.
다른 부서 직원들도 퇴근했는지 회사 안 불이 거진 다 꺼진 상태.
일주일에 한 번씩 돌아오는 최우성의 시간이다.
그는 준비해온 USB 메모리와 개인 노트북, 하드디스크 연결선을 챙겨들고는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은 같은 팀인 황성일의 컴퓨터부터.
각 팀장과 대표의 결재를 득한 투자 계획은 팀의 막내들이 실제로 투자를 진행하고 있었다.
"쯧쯧, 안일하기는."
지난주처럼 황성일의 컴퓨터에 로그인 잠금이 되어있지 않았다.
최우성은 능숙한 손놀림으로 부팅을 마친 황성일의 컴퓨터를 뒤져 트레이딩 프로그램의 매수매도 관련 로그 파일들을 USB에 담았다.
회사의 투자 정보를 빼내는 행위.
기밀 유출이며, 불법이다.
그래도 어쩔 도리가 없다.
자신에겐 도박빚을 갚을 돈이 필요했고, 이 로그 파일들은 충분히 돈이 되었다.
3팀의 로그 파일을 모두 복사한 최우성은 은밀하게 몸을 움직여 바로 옆의 1팀으로 향했다.
1팀 막내의 컴퓨터도 비밀번호가 걸려있지 않은 상태.
똑같이 로그 파일을 USB로 옮긴 그는 경영지원팀과 마주 보고 있는 2팀 사무실로 숨어들었다.
두 달 가까이 여기서 일해오며 들은 바에 따르면, 미래투자신탁의 실적 중 절반 이상을 2팀에서 창출해내고 있었다.
전원 20대의 경험도 많이 부족한 셋이 모여 이룬 성과라고는 믿어지지 않았지만, 실상은 그러했다.
"여기가 알짜배기라는 말이지."
최우성은 전민아의 책상으로 가 일단 전원을 넣었다.
다른 팀들과는 달리 로그인 보안이 제대로 걸려있다.
매번 혹시나 하는 마음에 부팅해보지만, 잠금을 확인할 때마다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번거로운 과정을 거쳐야만 했으니 말이다.
최우성은 컴퓨터를 종료시키고, 본체의 커버를 열었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 항상 가지고 다니는 개인 노트북과 하드디스크 연결선으로 어렵지 않게 전민아의 컴퓨터 하드디스크에서 로그 파일을 뽑아낼 수 있었다.
"……."
솔직히 많이 아쉽다.
로그 파일로 복구된 투자 정보를 자신도 알 수만 있다면 도박빚 따윈 예전에 청산했을 텐데.
아니, 지금 미래투자신탁이 달성하는 수익률만큼 재산을 불릴 수도 있을 거다.
하지만 자신에게 이런 은밀한 일을 지시한 안후석은 그런 정보를 남과 나누지 않았다.
몰래 로그파일을 따로 복사해서 전문가를 찾아가 보기도 했지만, 어마어마한 비용을 요구하든가 나중에 문제가 될 수 있다며 거절하기 일쑤였다.
당장 도박빚을 해결할 돈도 없던 최우성은 눈물을 삼키는 심정으로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최우성은 훗날 돈이 모였을 때를 기약하며 오늘도 맡은 임무를 수행했다.
위이잉-
쉽사리 발견할 수 없는 위치에 부착된 초소형 카메라가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를 빠짐없이 촬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때의 최우성은 전혀 알지 못했다.
* * *
언제나처럼 접선 장소인 강남의 한 룸식 이자카야에 들른 최우성은 문자로 전달받은 호실을 찾아들어갔다.
"어, 왔어?"
"……."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최우성의 시선에 전 직장 상사가 들어왔다.
해산물로 구성된 비싼 안주를 시키고 혼자서 사케를 홀짝이는 안후석.
그의 모습에 최우성은 인상을 굳히며 반대쪽 자리로 가서 앉았다.
"물건은?"
"…여기 있습니다."
최우성이 테이블 위로 USB 메모리를 올리자마자 안후석은 매가 사냥감을 발톱으로 채가듯 확 집었다.
"좋아. 흐흐흐."
메모리를 바라보며 안후석은 기분 좋은 듯 연신 웃어댔다.
최우성은 낮은 한숨과 함께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얼른 셈을 치르시죠. 오늘은 제가 좀 많이 바빠서요."
자축하는 분위기를 흐리는 그의 말에 순간 안후석의 이맛살이 찌푸려졌지만, 이내 다시 펴지면 원래의 웃는 낯으로 돌아왔다.
"그래야지. 요즘 우리 최 대리 덕분에 내가 아주 호강하는걸. 허허허."
안후석은 서류 가방에서 여태껏 받아갔었던 USB 메모리들과 함께 준비해온 봉투를 꺼내어 최우성 앞으로 내밀었다.
우선 USB 메모리를 챙긴 최우성은 안후석의 눈치를 살피며 봉투를 집어들었다.
제법 두툼한 두께.
슬쩍 입구를 열어 액수를 가늠해본다.
신사임당이 그려진 지폐 뭉치의 값어치는 천만 원에 해당되었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용건이 끝나자마자 최우성은 몸을 일으켰다.
"최 대리. 오래간만에 만났는데 술이라도 한잔하고 가지 그래?"
오래간만은 무슨.
겨우 일주일 만인데.
"…다음에 하겠습니다. 오늘은 정말 급한 일이 있어놔서요."
"그래?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뭐."
최우성은 안후석에게 작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룸을 떠났다.
그가 나간 문을 바라보며 안후석은 따라놓은 술잔을 들어 입안으로 털어넘겼다.
"도박 중독자 새끼."
혐오스러운 족속이지만, 그렇기에 아직은 쓸만한 패다.
지난 7월 말.
이화증권 이재민 사장에게 불려간 안후석은 그의 은밀한 지시를 행동으로 옮겼다.
운이 좋게도 그 즈음 미래투자신탁에서 직원 채용 공고가 떴었고, 침투시킬 스파이로 그는 도박중독으로 빚에 허덕이는 최우성을 선택했다.
행실과 상관없이 지금까지의 경력으로 최우성은 미래투자신탁에 무난하게 입사했고, 그를 통해 안후석은 지금처럼 로그 파일을 전달받아왔다.
거래한 로그 파일은 다음날 미리 매수해놓은 전산 개발팀 대리를 통해 유용한 투자 정보로 변환된다.
이화증권에서 서비스하는 트레이딩 프로그램과 비슷한 방식이라 정보를 추출하는 데 시간도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나온 투자 정보는 증권분석팀의 투자계획서로 둔갑되어 실제 투자가 이루어졌다.
요즘 업계에서 심심치 않게 들려오는 미래투자신탁답게 가져온 정보는 유용했다.
두 달간의 실적이 전년 동월 대비 껑충 뛰었다.
이재민 사장으로부터 별도의 추가 지시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껏 아무런 소식도 없다.
성과만 좋으면 간섭을 않겠다는 건지 어떤지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안후석으로선 잘 된 일이다.
덕분에 그 정보로 개인자금도 불리고 있으니까.
초반 몇 번의 검증으로 로그 파일이 쓸만하다고 확신한 안후석은 자신의 증권계좌 돈으로 투자를 진행해 벌써 2억 원이 넘는 돈을 벌었다.
자신의 사비를 들여 최우성과 전산 개발팀 대리에게 대가를 치르고 있지만, 그럼에도 무척 남는 장사다.
"흐흐흐."
안후석은 USB 메모리를 애지중지했다.
지금까지는 혹시 몰라 있는 돈으로만 투자를 진행했었지만, 검증이 다 된 마당에 더는 몸을 사릴 필요가 없었다.
내일 출근하는 길에 은행에 들러 신용 한도만큼 대출을 받아 증권계좌에 다 쏟아부을 생각이다.
이번에 최우성이 건넨 정보에 미수 거래가 가능한 종목이 있다면 그것도 한도까지 이용해볼 생각이다.
그렇게 해서 최대의 수익을 끌어내야지!
언제 또 이런 황금같은 기회가 올지 모르니 말이다.
메모리를 자신의 서류 가방 깊숙이 집어넣은 안후석은 사케를 잔에 다시 채워 기분 좋게 들이켰다.
돈벼락 한번 맞아보자!
* * *
다음날 남들보다 훨씬 일찍 출근한 현시운은 아무도 없는 세 팀의 사무실에서 설치해뒀던 카메라를 수거해왔다.
컴퓨터 연결 잭에 카메라를 번갈아 끼워가며 영상 파일을 모두 옮긴 시운은 시간순으로 하나씩 파일을 실행시켰다.
"……."
3팀에 설치했었던 카메라의 영상 파일을 시작으로 시운은 최우성 대리의 동선을 파악했다.
1팀을 거쳐 2팀의 컴퓨터에서도 뭔가를 조작하는 그의 모습.
짐작이긴 하지만, 아마도 트레이딩 프로그램의 파일들을 복사해가는 게 아닐까?
이로써 의심은 확신으로 이어졌다.
그동안 미래투자신탁의 투자 정보가 외부로 새어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로 인해 유레카가 알려준 투자 수익률보다 약간 저조한 수익을 벌어들일 수밖에 없었고.
"후우…."
시운은 일단 이 사태에 대해 강하민과 의논해보기로 하였다.
두 시간쯤 지나, 시운은 강하민의 집무실을 찾아갔다.
출근하자마자 찾아온 것에 의아해하던 강하민은 시운의 용건을 듣고는 인상을 굳혔다.
시운은 최우성의 동선이 고스란히 담긴 영상 파일을 강하민의 컴퓨터를 통해서 보여줬다.
"……."
강하민은 한껏 미간을 좁혔다.
그가 무척 화났을 때 나오는 표정이다.
"다른 팀장들에게도 알려야겠어."
"그래도 괜찮을까요?"
창립 멤버이기도 한 장한진 부장과 김문성 과장이지만, 이런 일을 겪고 보니 선뜻 믿음이 가지 않았다.
"괜찮아. 그 둘은 내가 수호증권에 있을 때부터 데리고 있던 사람들이야. 만약 내 신뢰와 반대되는 행동을 한다면…."
강하민은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참에 도려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
운용자금 절반을 자신의 뜻대로 투자해나가듯이 미래투자신탁의 운영에 관해서는 강하민의 영역이다.
시운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삐익-
- 네, 대표님?
내선으로 장한진 부장과 전화를 연결한 강하민은 곧바로 용건을 꺼냈다.
"김문성 과장과 함께 제 방으로 오세요. 긴급회의입니다."
- 아…, 네. 알겠습니다. 바로 가겠습니다.
강하민의 말투가 평소 같지 않음을 느꼈는지, 장한진은 김문성과 함께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찾아왔다.
"우리 회사에 쥐새끼 한 마리가 숨어들었습니다."
비릿하게 웃으며 하는 강하민의 말에 둘은 어리둥절해하다 시운이 컴퓨터로 보여준 최우성 대리의 영상에 할 말을 잃었다.
특히, 그를 팀원으로 데리고 있는 김문성의 표정은 말이 아니게 일그러졌다.
"아직은 정황뿐입니다. 실제로 최 대리가 세 팀의 컴퓨터에서 무얼 했는지 알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시운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최우성 대리의 목적이 미래투자신탁의 투자 정보였을 거라고 확신했다.
세 팀의 투자가 이뤄지는 컴퓨터만 정확히 노렸으니까.
"어쩌실 생각입니까?"
장한진의 물음에 강하민은 말없이 시운을 바라봤다.
둘이 오기 전에 이미 나눈 얘기가 있었다.
"이것만으로 뭘 어떻게 할 수는 없습니다. 최우성 대리야 그냥 여길 관두고 나가버리면 그만이니까요."
시운의 말에 장한진과 김문성도 수긍하는 표정이다.
"저희 곳간을 노린 쥐새끼와 혹시 있을지도 모를 배후를 이대로 멀쩡히 보낼 수는 없죠. 그래서 함정을 하나 파 두었습니다."
"함정이오?"
김문성의 물음에 시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유레카 정보이용권 한 장을 사용해 안배한 함정의 발동 시각까지 앞으로 며칠 남지 않았다.
"최우성 대리의 혐의가 명명백백히 밝혀질 때까지는 다들 이 일을 비밀로 부쳤으면 합니다."
그렇게 당부하는 시운의 입가에 강하민이 아까 지었던 것과 똑같은 비릿한 웃음이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