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9화 거래
"앉으시죠."
장기우의 권유에 강하민은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는 그와 마주 보며 앉았다.
"우선 이렇게 나와주셔서 감사합니다."
"……."
자신을 향해 환하게 웃는 장기우.
강하민은 그를 지그시 바라보다 입술을 떼었다.
"무슨 용건으로 이렇게 절 보자고 하신 겁니까?"
"흠…."
장기우는 강하민의 물음에 뚜렷한 대답 없이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21층 스카이라운지에서 내려다보는 서울의 야경은, 밤하늘의 별들이 지상에 내려앉은 듯 장관을 이뤘다.
"저 아래 불빛들 보이시죠?"
"……."
뜬금없는 장기우의 말에 강하민은 무슨 소리인가 싶으면서도 그를 따라 시선을 창밖으로 옮겼다.
그런 강하민의 귀로 장기우의 말이 이어졌다.
"정말 수가 많습니다. 셀 수 없을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일일이 숫자를 확인하려면 꽤 시간을 들여야 할 겁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군요."
강하민의 대꾸에 장기우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저 불빛들 아래엔 그보다 더 많은 수의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그들 중 저와 아는 사람이, 대표님처럼 이렇게 마주할 이가 과연 몇이나 될까요? 음…, 아무리 많아봤자 서넛 정도가 아닐까 싶은데요."
"……."
"그만큼 세상은 넓고, 사람도 많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또한…."
장기우는 강하민을 똑바로 마주하며 말했다.
"생각보다 좁기도 하다는 것을요."
이를 드러내 보이며 장기우는 웃었다.
"강지벽. 그분의 손자이신 강하민 대표님.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
강하민은 말없이 장기우를 노려봤다.
그의 입이 벌어진 건 1분여쯤의 시간이 흘렀을 때였다.
"의외군요."
"무엇이 말입니까?"
장기우의 반문에 강하민은 쓴웃음과 함께 대답했다.
"워낙 오래전 일이라 장기우 본부장님 세대는 모를 줄 알았는데 말입니다."
피해자 입장이었던 자신의 집안과는 달리 말이다.
"설마요. 초대 회장이셨던 제 조부님과 함께 장강 그룹의 초석을 쌓아올리셨던 분인데요."
"그런 것치곤 많이 묻혀버린 것 같습니다? 제 할아버지의 존함이 말입니다."
날 선 강하민의 응수에 장기우는 유감스럽다는 표정으로 양해를 구했다.
"그건 장강 그룹을 대표해서 사과드리겠습니다."
"……."
"하나의 산에 두 마리의 호랑이가 있을 순 없지 않겠습니까. 구심점이 흔들리는 걸 바라지 않으셨던 조부님의 안배였습니다. 물론 강 대표님 입장에선 불쾌하실 수 있다는 점, 저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안배라…."
죽마고우를 배신하고 회사의 역사에서 이름과 업적을 지웠다는 사실을 그따위로 포장할 수도 있구나.
강하민은 장기우의 말뿐인 사과에 차가운 조소로 응수했다.
"무슨 바람이 불어 여태껏 신경도 쓰지 않던 저희 집안을 조사하고 이렇듯 만나자고 했는지는 알만 합니다."
장기우는 강하민이 내렸을 답을 궁금해하며 가볍게 고개를 까닥였다.
계속 말해보라는 그의 제스처에 강하민은 냉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다름 아닌 현시운 때문이겠죠."
"……."
장기우는 그저 작게 웃음 지었다.
50년도 더 전에 미국으로 쫓아내다시피 한 동업자의 집안을 지금껏 감시해왔을 리 없다.
물론 마음만 먹는다면 할 수야 있었겠지.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으리라.
연이은 사업 실패로 작은 농장이나 운영했었던 강하민의 할아버지.
그리고 그걸 물려받은 아버지는 더 이상 장 씨 집안을 위협할 존재가 아니었을 테니까.
그런데 갑자기 자신의 뒷조사를 하고, 이렇듯 만남을 청해왔다?
그것도 현 장강 그룹의 회장인 장철구가 아닌, 2대 전 일을 알 리 없다고 생각한 장기우가?
둘 사이의 악연을 알고 있는 강하민은 현시운 때문에 관심을 보였다가 뒷조사를 하는 도중에 자신의 내력이 밝혀졌을 거라 추론했다.
그게 훨씬 더 설득력 있었으니까.
잠시 후, 장기우가 입술을 떼며 강하민이 내린 답을 채점했다.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저와 녀석 사이의 관계도 이미 알고 계신 듯하니 그에 대한 설명도 굳이 필요없어 보이고요."
강하민은 고개를 끄덕임으로써 그의 말에 긍정했다.
"궁금했습니다. 제가 아는 현시운은 결코 지금의 부를 쌓을 만큼 뛰어난 인물이 아니니까요. 운 좋게 복권에 당첨되는 것까지야 그럴 수 있다 치겠지만…."
장기우는 김학수를 통해 알아온 사실을 통해 작년 3월 무렵 현시운이 복권에 당첨되었을 거라고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그 돈을 불려 투자회사를 차리고, 어느덧 자산 규모 2조 원에 가까운 회사로까지 발전시킨다? 그것도 1년도 채 되지 않는 짧은 기간만에? 현시운에게 절대 가능할 리 없는 일입니다."
"……."
"하지만, 강하민 대표님의 능력이라면 가능할 수도 있겠다 여겼습니다. 서울대 경영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국내 1위 증권사인 수호증권에서 역대 최연소로 팀장에 올랐고, 투자 업계에선 귀재로까지 불리시는 분이니까요. 호기심에 대표님에 대해 더 알아보다가 저와도 깊은 인연이 있다는 걸 알게 됐을 뿐입니다."
강하민은 장기우가 아까 그랬던 거처럼 대답 없이 그저 웃었다.
지금 들은 얘기로 미루어봤을 때, 장기우는 지금 터무니없는 오해를 하고 있었다.
미래투자신탁의 오늘이 있게 한 장본인이 강하민, 자신이라고.
장기우의 추측과는 달리 미래투자신탁을 지금처럼 키운 데에는 현시운의 공이 가장 컸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본인의 열 배 이상쯤?
그렇지만….
'굳이 오해를 풀어줄 필요는 없지.'
장기우가 착각하고 있을수록 상황은 자신에게 유리할 테니까.
"그럼 이젠 진짜 용건을 들어볼 수 있겠습니까?"
강하민의 물음에 장기우는 단도직입적으로 제안했다.
"저와 손을 잡으시죠."
"…무슨 의미입니까?
"말 그대로입니다. 제 사람이 되어주십시오."
"……."
강하민은 대답 없이 장기우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현시운에게 무엇을 약속받았는지는 모르지만, 제가 그 이상의 보상을 드리겠습니다."
"…그 이상이라."
"단, 조건은 있습니다."
"뭡니까?"
장기우는 빙긋 웃으며 답했다.
"지금 자리에 남아서 저를 도우세요."
어떤 도움을 바라는지는 장기우의 눈빛 속에서 읽을 수 있었다.
적진 깊숙이에서 정보를 제공해라.
그런 말일 테지.
"……."
그동안 동고동락해왔던 현시운을 구렁텅이로 떠미는 대가로, 보다 힘 있는 조력자를 얻을 수 있다?
강하민은 턱을 쓰다듬으며 오랫동안 고민을 하다가 툭 내뱉듯 말했다.
"그 보상이라는 거, 제가 정할 수도 있습니까?"
"일단 말씀을 해보시죠."
강하민은 입가에 호선을 그리며 짧게 답했다.
"장강건설."
"……."
"그걸 제게 주시죠. 그것만 약속하신다면 기꺼이 본부장님과 손을 잡겠습니다."
지금의 장강 그룹을 있게 한, 모태이자 상징과도 같은 회사다.
그걸 남의 손에 넘길 수 있을 리가.
장기우의 얼굴에서 미소가 옅어져갔다.
"무리한 걸 요구하시는군요."
"그 정도는 요구할 자격이 있다고 봅니다만. 아까 본부장님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전…. 장강 그룹의 초석을 쌓은, 강지벽 공동대표의 핏줄이니까요."
장기우는 강하민을 똑바로 마주 보며 그의 의중을 살피고자 했다.
흔들리지 않는 강하민의 눈빛에서 진심일 거로 짐작한 장기우는 쓰게 웃으며 답했다.
"대표님께서 저의 기대에 부응해 주신다면…, 좋습니다. 그 조건 들어주겠습니다. 장강건설을 넘겨드리죠."
장기우의 답변에 강하민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럼 거래 성립이군요."
만족해하는 강하민을 보며 장기우는 속으로 웃었다.
말로만 이루어진 약속에 무게가 있을 리가.
상황에 따라 언제든 뒤엎을 수 있다.
오히려 지금의 대담으로 강하민이 무엇을 노리는지 알게 된 장기우는 현시운을 치워버린 후, 그 역시 끌어내리기로 마음먹었다.
넘봐선 안될 걸 욕심낸 대가는 톡톡히 치러야지.
장기우는 그런 자신의 속마음을 숨긴 채 웃는 얼굴로 손을 들어 지배인을 불렀다.
"이런 날에 술이 빠져선 안 되겠죠."
지배인을 통해 브랜디 두 잔을 주문한 장기우는 그중 한 잔을 강하민에게 건넸다.
이를 받아든 강하민은 장기우가 내미는 잔에 가볍게 부딪혔다.
"저희 둘 다 원하는 걸 얻길 바랍니다."
"저 역시 같은 마음입니다."
강하민과 장기우.
둘은 서로 다른 속내를 감춘 채 독한 술을 들이켰다.
* * *
"장 씨 아주머니, 안녕하세요!"
"오, 그래. 리제. 오늘도 일찍 나왔구나."
"하하. 젊을 때 부지런히 움직여야죠."
자전거로 가게에 출근하던 리제는 맞은편 채소가게 주인아주머니와 아침 인사를 나눴다.
리제는 수산시장 입구에 있는 자신의 가게에서 완탕면을 만들어 팔고 있다.
주요 고객은 같은 시장 내에서 장사하는 상인들이지만, 이따금씩 장을 보러 온 손님들도 찾아주는 곳이다.
이곳에 가게를 연 지도 어언 2년.
날이 갈수록 조금씩 늘어나는 손님의 수에 리제는 보람찼다.
손수 만든 음식을 맛있게 먹어주는 손님들에게 고마움을 느낌과 동시에 자신의 요리에 대한 자부심도 생겨났다.
오늘도 최고의 완탕면을 만드리라 다짐하며, 리제는 제일 먼저 육수를 만들기 위해 큰 냄비를 불 위에 올리고 물을 채웠다.
우족과 닭고기를 시작으로 무, 대파 등 갖은 채소와 함께 손수 만든 비법 조미료를 쏟아 넣는다.
이제 물이 끊기 시작하면 30여 분을 더 팔팔 끓인 뒤, 불의 세기를 낮춰 한 시간가량 더 열을 가해야만 했다.
육수가 완성되는 동안 리제는 완탕면의 주재료인 완탄을 빚어내기 시작했다.
갈아놓은 돼지고기와 소고기를 2 대 1의 비율로 섞고, 거기에 새우도 다져 넣은 뒤 함께 치댔다.
육수와 마찬가지로 비법 조미료를 잘게 썬 각종 채소들과 함께 섞어 소를 완성한 리제는 어젯밤 미리 만들어둔 얇은 만두피를 꺼내 속을 채워가며 완탄을 하나씩 완성해갔다.
쟁반 위에 빼곡히 쌓이는 완탄.
다섯 개의 쟁반을 모두 채우자, 소가 다 떨어졌다.
쟁반 위를 적신 천과 비닐 랩으로 덮은 뒤, 모두 냉장고 안으로 옮겼다.
그런 후에 육수가 완성되었는지 확인해보러 국자를 들고 냄비 앞에 선 리제.
"후룹!"
육수 맛을 확인하는 리제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오늘도 어제와 다름없는 맛으로 육수를 완성해냈다.
얼마나 지났나 고개를 돌려 벽 시계를 확인해본다.
오전 11시 5분.
평소와 비슷한 시각이다.
이제 조금만 더 지나면 손님들이 찾아올 것이다.
막간의 여유 시간에 리제는 주방 앞 간이의자에 앉아 숨도 돌릴 겸, 핸드폰으로 인터넷 기사들을 쭉 훑어봤다.
국내에서 일어난 여러 사건·사고 소식도 많았지만, 근래 리제의 관심사는 단연 이웃나라 대한민국과 일본의 무역 분쟁이었다.
"허, 참! 아직도 이해가 안 되네?"
무역 흑자국이 무역 적자국을 상대로 수출 규제를 건 웃지 못할 상황.
서로가 서로를 백색 국가에서 제외하고 수 년간 이어온 군사협정마저 파기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결과는 정작 싸움을 건 일본의 열세.
무역 제재에 자국의 기업들이 더 피해를 입고 있었고, 한국에서 일어난 NO 재팬 운동에 관광으로 먹고살던 지역은 경제적인 타격이 몹시도 컸다.
그런 국내의 상황을 모를 리 없는 일본 젊은 층들은 되레 K-Culture에 열광하고 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어차피 바다 건너 불구경이지만, 재미는 있었다.
자고로, 구경 중에 으뜸은 불구경과 싸움 구경이니까.
드르륵-
가게 문을 열고 오늘의 첫 손님이 들어섰다.
리제는 얼른 핸드폰을 내려놓고 일어났다.
"어서 오십시오!"
첫 손님을 시작으로 오늘도 리제의 가게는 붐볐다.
"콜록! 콜록콜록!"
"감기 걸리셨나 봐요?"
단골손님인 왕 씨 앞에 완탕면을 내려놓으며 리제가 묻자, 그는 씩 웃으며 답했다.
"감기는 무슨. 내 나이 육십 넘도록 잔병 치레 한 번 없었어. 그냥 사레들린 거야."
"나이도 있으니 조심하세요. 요즘 겨울 감기 무서워요."
"흥! 별 걱정을 다하네."
나이답지 않은 우람한 상체를 주먹으로 두들기며 왕 씨는 건재함을 과시했다.
밀린 주문이 많았던 탓에 리제는 대충 몸 잘 챙기라고 염려를 전하고는 서둘러 주방으로 향했다.
"콜록! 콜록!"
"큼! 크흠! 콜록!"
왕 씨뿐만이 아니었다.
오늘따라 기침을 하는 손님이 제법 되었다.
"올해 겨울 감기가 유행하려나?"
리제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다 이내 주문받은 음식 준비에 신경을 집중했다.
"콜록! 콜록콜록!"
2019년 12월 11일.
중국 후베이성 우한의 화난 수산시장에서 있었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