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8화 2차전(2)
"……."
정민철은 오랜만에 방문한 VIP의 의뢰 내용에 놀랐고, 그가 건넨 자료에 한 번 더 놀랐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그 기자분을 통해 기사화했으면 합니다."
정민철은 현시운이 하는 말이 귀로는 들렸지만, 머리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그만큼 정민철이 방금 시운으로부터 받은 문서 파일의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삼정 그룹 신정문 회장 해외 비자금 계좌 내역]
리암 브라운이라는 차명으로 개설된, 파나마에 소재한 은행의 한 계좌.
문서 내용을 읽어내리는 정민철의 눈동자가 급격히 떨렸다.
평소답지 않은 그의 모습에 시운도 이상함을 느꼈다.
"왜 그러세요?"
"…이, 이거. 어떻게 구한 겁니까?"
"네?"
숫제 손까지 떨던 그는 핸드폰을 내려놓은 채 두 손을 다잡았다.
"무슨 연유로 물으시는 건지 모르나…, 출처는 밝힐 수 없습니다."
크게 동요하는 정민철에게 의아함을 느끼면서도 시운은 사실을 숨겼다.
아무리 그가 유레카가 알려준, 가장 믿을만한 흥신소의 사장일지라도 자신의 비밀을 공유할 만큼의 친밀한 사이는 아니다.
아니, 아무리 친밀하다 해도.
설사 가족이라고 해도.
유레카에 관한 건 평생토록 묻어야 할 비밀이다.
"……."
실망감이 표정으로 드러났지만, 정민철은 이내 감정을 추스르고는 시운을 향해 고개 숙여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추태를 보였군요."
"…아닙니다."
시운은 선선히 사과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동시에 궁금해졌다.
무엇 때문에 그가 평소에 하지도 않던 행동을 보였는지.
'삼정과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시운의 눈빛에서 그걸 알아챘는지 정민철은 씁쓸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제가 왜 이러는지 궁금하시죠?"
당사자가 먼저 그렇게 말해버리니, 시운으로서도 솔직해질 수밖에 없었다.
"네. 평소 모습과는 많이 달라 보였으니까요."
정민철은 한숨을 길게 내쉬며, 탁자 위에 놓인 담배와 라이터를 집어 들었다.
"아…. 혹시 담배 연기 싫어하십니까?"
물론 그렇지만, 분위기상 사실대로 말할 수 없어 시운은 괜찮다고 답했다.
칙-
담배에 불을 붙인 정민철은 길게 연기를 빨아들이고는 도로 뱉어냈다.
뿌연 연기가 아지랑이처럼 솟았다가 흩어진다.
"제게 와이프가 있었습니다."
"……."
있었다?
그럼 현재는 아니라는 소리다.
정민철의 나이와 항상 왼손 약지에 끼고 다니는 반지로 결혼은 했을 거라고 시운도 짐작하고 있었다.
정민철은 다시 한번 담배 연기를 들이마시고 내뱉더니, 입을 열어 가슴 속에 묻어둔 옛이야기를 끄집어냈다.
"와이프는 기자였습니다. 고려일보 사회부에서 일했었죠. 전에 HR 엔터 건으로 기사를 썼던 녀석이 와이프 직속 후배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과거.
재벌 총수와 거물 정치인 사이의 커넥션을 우연히 포착한 정민철의 아내는 이를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근 석 달간의 집중 취재.
결국 재벌 총수의 해외 비자금 계좌에까지 선이 닿았고, 실체를 밝히기 위해 파나마로 출국.
하지만 그녀는 며칠 후, 파나마의 한 낡은 모텔에서 차디찬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
선뜻 믿기 힘든 사연에 시운은 놀란 얼굴을 하였다.
그가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왜 꺼내놓았겠는가.
그것도 신정문의 해외 비자금 계좌 정보를 확인한 직후에 말이다.
정민철은 시운의 짐작을 확인시키듯 말을 이었다.
"그 재벌 총수가 바로 삼정 그룹의 신정문 회장이었습니다."
"…그랬군요."
그제야 앞선 그의 행동들이 모두 이해되었다.
둘 사이에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정민철은 꽁초만 남을 때까지 묵묵히 담배를 태우고선 남은 불씨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말문을 다시 열었다.
"이번 일, 제게 맡겨주십시오."
"…네?"
마주한 정민철의 두 눈 속엔 거친 불길이 일었다.
"이대로 기사를 낸다고 해도, 신수겸 측에서 혼수상태인 신정문 회장에게 모두 뒤집어씌운 뒤, 나 몰라라 해버리면 그만입니다. 삼정의 초대 회장이었던 신학주도 당시 정계와의 비리로 조사를 받기도 전에 사망하면서 유야무야 없던 일이 된 전적이 있으니까요. 만약, 검찰에서 제대로 조사를 진행하여 비자금 계좌와 신수겸의 연관성을 밝힌다 해도, 사재 출연해서 공익재단 세우는 것 정도로 무마될지도 모릅니다. 그런 걸 바라시진 않겠죠?"
여태까지 재벌들이 드러난 비리를 덮는 데 쓰는 방법의 하나기도 했다.
"음…, 그렇죠."
시운도 정민철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여겼다.
지금 자료만으로도 신수겸을 옭아맬 수는 있겠지만, 그것도 검찰이 제대로 역할을 다했을 때의 이야기다.
"제대로 엮고 싶습니다. 나중에 어떤 식으로도 빠져나갈 수 없게끔 말입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정민철은 과거 형사였을 적의 경험을 살려 생각해낸 계획을 털어놓았다.
그걸 다 들은 시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감상을 말했다.
"나쁘진 않네요. 계획대로만 된다면…, 신수겸도 쉽게 빠져나갈 수는 없겠군요."
"그럼 이대로 진행하겠습니다."
"잠깐만요."
"네?"
"그 계획에 보완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어떤…?"
정민철이 세운 계획에 시운이 디테일을 잡았다.
잠시 후, 완성된 하나의 극본에 둘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정민철은 곧바로 수화기를 들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이번 연극에 없어선 안 될 주요 배역에게 말이다.
* * *
현시운이 떠나고 홀로 사무실에 남은 정민철.
사무실 식구들 모두 외근을 나가 오늘도 그 혼자 남았다.
정민철은 시운에게서 전달받은 문서 파일을 컴퓨터로 옮긴 뒤, 종이로 인쇄했다.
어림잡아 오십 페이지에 가까운 분량의 증거.
그걸 한데 묶어 다시 읽어내리는 정민철의 손길이 아까처럼 떨려왔다.
"……."
5년 전, 아내의 죽음에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었다.
신명훈과 함께 파나마에 직접 날아가 현지 경찰을 닦달해보기도 했지만, 되레 무력함만을 짙게 맛봤다.
귀국하고서 어떻게든 아내의 사건을 파헤치려 했지만, 윗선에서 내려온 강압에 뜻을 이루지 못했고 좌천되듯 지방으로 발령까지 받았다.
정민철은 그때, 천직이라 여겼던 경찰을 미련 없이 관뒀다.
대한민국에서 힘을 가진 자들.
재벌과 정치인들은 자신같은 서민이 쉬이 건드릴 수 없는, 하늘의 별과도 같은 존재처럼 느껴졌었다.
근데 이번엔….
상황이 달라졌다.
"…끌어내릴 수가 있게 됐어."
손도 뻗칠 수 없었던 하늘 위에서 자신이 딛고 선 바닥 아래까지.
그것도 진창에 내동댕이치듯 말이다.
벌컥-
사무실 문이 열리고, 정민철이 기다리던 이가 도착했다.
"형님, 무슨 일입니까? 급하다면서요."
"……."
방문한 이는 신명훈이다.
정민철만큼이나 5년 전의 사건에 좌절했던 아내의 지인.
"여기 앉아봐."
"아, 네…."
전화로 통화할 때부터 느꼈던 거지만, 모처럼 만난 정민철은 겉으로 풍기는 분위기가 평소와 사뭇 달랐다.
"자."
"뭡니까, 이건?"
정민철과 마주 보는 자리에 앉은 신명훈은 그가 건네는 종이 뭉치에 의아해하면서도 받아들었다.
"한 번 읽어봐."
"……."
대관절 이게 무엇이길래 그의 표정이 저리도 어둡고 무거운지….
신명훈은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은 첫 장을 뒤로 넘겼다.
"!!"
그리고, 처음 문서 파일을 확인했을 때의 정민철과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이, 이게…."
종이를 넘기는 손이 점차 빨라졌다.
사라락- 사락! 사락!
신명훈의 심경을 대변하듯 종이는 급하게 넘어갔다.
대략 3분여의 시간이 흘렀고, 신명훈은 종이 뭉치를 내려놓았다.
"이거, 이거 진짜입니까?"
정민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어, 어떻게…."
5년 전, 그렇게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었던 자료다.
HR 엔터테인먼트 스캔들 기사를 낸 이후로, 스타 체이서에선 시사 문제만을 다루는 '고발IN'이라는 주간 매거진을 창간했고 신명훈은 거기에 수석 기자로 있다.
언젠가 5년 전 해내지 못한 재벌 총수의 해외 비자금 건을 다시 들추어볼 생각이었는데….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결정적인 증거가 나와버렸다.
"혀, 형님! 이거…, 이거 어떻게 얻으신 겁니까?!"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정민철은 말없이 쓴웃음만 지어 보일 뿐이다.
그 무언의 대답에서 신명훈은 지난번 HR 엔터 때처럼 밝힐 수 없는 정보원의 솜씨일 거란 짐작만 했다.
"당장 다음 주 기사에 싣겠습니다!"
문서에 적힌 비자금 내역에 수많은 계좌정보가 찍혔다.
이를 따라 추적하다 보면, 정·재계 및 공무원과 언론계 인사들에게까지 끈이 닿을지도 몰랐다.
가히 핵폭탄급 파급력이 예상되는 비리가 들춰지는 것이다.
"아니."
"네?"
"이대로 기사를 실어봤자 삼정 측에선 날조된 거라고 부인하겠지."
"하지만 이렇듯 상세하고 명료한데요…."
"잊었어? 5년 전을."
"……."
그럴 리가.
그때를 떠올린 신명훈의 미간이 급격히 좁아졌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우리 편에 서줄 이는 별로 없어. 걸고넘어지더라도 발뺌하지 못하게 제대로 넘어뜨려야만 해."
"어떻게요?"
무슨 생각이 있어 이런 말을 꺼내는 거로 여긴 신명훈은 정민철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잠시 머뭇대던 정민철은 어렵게 입술을 떼며 말했다.
"함정을 팔 생각이야."
"함정?"
"어. 그리고…, 네가 미끼가 되어줘야만 해."
"……."
정민철은 신명훈에게 연락을 넣기 전, 시운과 함께 짠 계획을 설명했다.
신정문 회장의 해외 비자금에 대한 기획 기사를 낸다는 소문을 퍼트려 삼정 오너 가의 이목을 끄는 것으로 계획은 시작된다.
그 소식을 접한 삼정의 신 씨들은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불법적이고 폭력적인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고발자의 입을 막으려 들 것이다.
통상적인 방법으로 협상 또는 제안을 하기엔 사안이 중차대하다.
그리고, 그걸 터트리려 하는 인물이 과거에도 같은 건에 대해 취재했던 기자라면 더더욱 가차 없이 움직일 거다.
"너한테 접근하는 인물을 통해 정보를 얻고, 아울러 경찰을 동원해 현장을 덮칠 거야."
그 과정에서 미끼의 역할을 할 신명훈의 신변에 위험이 닥칠 가능성이 높다.
크게 다치거나 잘못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그걸 알면서도 부탁해야 하는 정민철의 마음은 몹시도 무거웠다.
"그러죠."
"……!"
차마 얼굴을 볼 수 없어 바닥에 시선을 두던 정민철은 신명훈의 말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신명훈은 뭐가 그리 좋은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제가 그 미끼 역할 하겠습니다."
5년 전의 일로 죽은 선배와 정민철에게 부채감이 있었던 신명훈은 자신에게 그런 역할이 주어지는 게 무척 달가웠다.
"…고맙다."
또한 미안하고….
그렇게 주요 배역의 캐스팅이 완성되면서 연극은 무대에 오를 준비를 마쳤다.
이젠 무대 세팅만이 남았다.
그리고 일주일의 시간이 흘렀다.
* * *
신수겸이 부회장직에 올랐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그룹 전체를 손에 넣은 것은 아니다.
중공업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한 신수근과 그의 파벌이 아직도 임시주주총회의 결과를 부정하고 있으며, 자신이 진행하려는 일에 사사건건 토를 달며 훼방을 놓았다.
예전에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중공업, 조선, 화학을 중심으로 계열 분리까지 고려하는 움직임이다.
하루에도 계열사들의 종속 지분이 이리저리 움직이고, 서로의 약점을 찾아내려는 사내 정보전이 치열하다.
"괜한 헛수고를 하는군."
권력의 축이 다시 짜일 때마다 따라오는 혼란이지만, 신수겸은 느긋했다.
아버지, 신정문 회장의 비자금 계좌가 손에 들어온 이상 삼정 그룹은 이미 자신의 것이나 다름없다.
파나마 계좌의 총액이 자그마치 340조 원.
2019년 말 기준으로 삼정 그룹의 시가총액이 520조 원가량이다.
주식시장에 상장된 삼정 계열사의 지분 절반 이상을 사들일 수 있는 이상, 신수근의 발악은 신수겸에겐 어린아이의 발버둥 정도로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신경은 회사 내 문제가 아닌 외부에 쏠려있었다.
"쯧!"
미래투자신탁을 접수하려던 게 다시 막혀버렸다.
"강하민 대표나 대주주라는 놈, 둘 다! 건방지기 짝이 없군."
사실 삼정도 손에 넣은 마당이니, 인제 와서 미래투자신탁과 그 아래 놓인 회사들을 탐낼 이유는 없다.
진성전자, 우송, 디젠, 블루드래곤 픽처스 등.
앞으로가 기대되는, 전망 있는 회사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삼정 그룹의 계열사에 비한다면 초라할 뿐이다.
그런데도 신수겸은 미래투자신탁과 산하 업체들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그건 고집이다.
이제껏 삼정의 왕자로 태어나 자라오면서 원하던 걸 얻지 못한 경우는 거의 없었으니까.
나중에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일단은 손에 넣고 보는 게 신수겸에겐 당연한 일처럼 여겨졌다.
근데 한 번도 아닌 두 번씩이나 거절을 당했다.
이는 신수겸으로선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어쩔까….'
미래투자신탁이 최대 주주로 있던 회사 세 곳에 세무조사를 받게 한 건 일종의 과시였다.
이 정도로 손쉽게 국세청을 움직일 수 있으니, 알아서 기라는 경고의 의미를 담아서.
근데도 통하지가 않았다.
그럼 이젠….
더 직접적인 경고가 필요할 때다.
"그래. 건물에 불을 한 번 질러야겠어. 제대로 데어봐야 정신을 차리고 자기 분수를 깨닫겠지."
사람 하나 사서 방화를 저지르는 것쯤이야 누워서 떡 먹기다.
그 와중에 누군가 다치거나 목숨을 잃는다 해도 그건 그 사람의 팔자일 뿐이다.
신수겸에게 보편적인 양심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게 혼자서 결론을 내릴 무렵,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요."
그의 허락에 부회장실로 들어선 이는 바로 비서실장 성철우였다.
"부, 부회장님."
급한 일이라도 생긴 듯 그의 표정이 다급해 보였다.
"무슨 일이죠? 중공업 사장이 또 귀찮게 일이라도 꾸미는 겁니까?"
"아닙니다. 그런 게…."
성철우는 말이 밖으로 새어나갈까 봐 서둘러 문을 닫고는 신수겸에게 다가갔다.
"큰일 났습니다!"
본론이 바로 나오지 않음에 신수겸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세운 공이 크다고 근래에 오냐오냐해줬더니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사뭇 가볍다.
언젠가 이에 대해서도 경고를 해야겠지.
하지만, 뒤이어 나온 성철우의 말에 신수겸은 머릿속이 하얘질 정도로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파나마 비자금 계좌에 대한 기사가 곧 나올 예정이랍니다."
"뭐요?!"
비명과도 같은 외마디 외침이 방 안을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