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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로 재벌 참교육-76화 (76/139)

§076화 공방전(4)

무엇이 의외이기에 둘의 생각이 일치한 걸까?

그건 바로, 이번 사태에 대한 장강 그룹의 대처를 말함이었다.

리조트는 이미 손을 쓸 수 없다 치더라도 아직 유통과 푸드는 여지가 남았었다.

온전히 장세연과 자신들의 손에 들어온 건 아니었으니까.

반도전자에서 그랬던 것처럼 지분 싸움을 위해 총알을 쟁여두고 있었는데, 그런 준비가 허무하게도 장강 그룹에서는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혹시 몰라 시운은 유통과 푸드의 주식을 조금씩 매집해나갔다.

어느덧 7% 가까운 지분을 확보한 상태다.

"아마도…."

강하민은 자신의 턱을 습관처럼 만지작거리며 생각하는 바를 말했다.

"장철구 회장이 리조트를 비롯한 세 회사를 장세연 사장한테 정말로 넘기려고 했던 것 같은데?"

장세연이 장철구와 나눈 얘기를 전달했지만, 둘 중 이를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없었다.

오죽하면 장세연조차 자신을 안심하게 만들려는 속임수일지도 모른다고 경계했을까.

강하민의 추측에 현시운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 외에는 말이 안 되긴 하죠. 그런데…. 장기우가 그걸 별 말없이 따랐다는 게 선뜻 믿기지 않네요."

시운이 아는 장기우라면 아무리 부친이 그렇게 결정을 내렸다 해도 무슨 수든 썼을 건데 말이다.

실제 시운의 생각대로 장기우는 유통과 푸드가 넘어가는 걸 막으려 갖은 수를 동원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장철구 회장의 의중이 그의 의사보다 앞섰기에 원하는 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았던 까닭이다.

그룹 비서실을 비롯한 구조조정본부 역시 장철구 회장의 뜻에 어긋난다며 한사코 장기우의 지시를 거부했다.

장기우는 자신의 위치를 새삼 실감했다.

세 계열사가 들고 있던 핵심 계열사의 지분이라도 빼내려고 장세연에게 거래를 요청했지만, 그녀는 응하지 않았다.

차명으로 만든 자신의 비자금만으로는 지금의 상황을 역전시킬 묘수도 딱히 없었다.

장기우는 입술만 짓씹으며 리조트에 이어, 유통과 푸드가 장세연의 손아귀로 넘어가는 걸 노려보기만 할 뿐이었다.

"아무리 차기 대권이 결정된 후계자라도 아직 살아있는 권력, 장철구 회장의 그늘은 못 벗어난다는 얘기겠지."

시운은 강하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아, 참! 근데 말이야."

"네?"

문득 떠오른 사실을 강하민은 입 밖으로 꺼냈다.

"반도전자 주식은 왜 계속 들고 있는 거야? 이젠 처분해도 되잖아."

소기의 목적은 이미 달성했다.

장강전자와 미래투자신탁의 매수세가 그치자, 주가는 다시 슬금슬금 내려오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나눠서 팔면 손해는 아니었다.

시운은 피식 웃으며 강하민에게 답했다.

"지금 팔아봤자 별로 많이 남겨 먹지도 못하잖아요. 일단 들고 있어 보려고요."

"흠, 그런 뒤에는?"

눈치 빠른 강하민은 생각해둔 바를 더 얘기해보라는 듯 추임새로 닦달했다.

시운은 그에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말을 이었다.

"이번 일이 어찌 되었든, 장기우로선 반도전자가 필요하잖아요. 장강전자를 위해서는 말입니다. 형도 장강전자가 어떤 회사인지는 잘 알잖아요."

"알지. 들인 돈 값어치도 못 하는 팔푼이 회사."

강하민의 신랄한 표현에 시운은 빙긋 웃었다.

"거기다 장기우가 처음으로 추진한 사업이기도 하죠."

"그렇기는 하지."

이렇다 할 기술도 특허도 없이 중저가 메모리만 주구장창 만들어 파는 전자회사.

대기업의 계열사로 보기에는 사업의 규모나 매출액도 한없이 저조했다.

이쯤 되면 철수가 답이지만, 장기우는 고집을 부리며 계속 붙들고 있었다.

"반도전자를 인수해서 장강전자에 갖다 붙이면, 전보다는 봐줄 만하겠죠."

"아무래도."

"결국 다시 인수 협상을 재개할 수밖에 없을 테고, 주가 상승의 맛을 한번 본 반도전자 측에선 기존의 협상가보다 높은 가격을 제시하겠죠. 그때 팔 겁니다."

지금보다 훨씬 비싼 가격에 말이죠.

시운의 덧말에 강하민은 웃음을 터뜨렸다.

"좋은 생각이야. 너도 이제 제법 영악하게 머리를 쓸 줄 아는구나."

"장강을 상대로는 앞으로도 그럴 생각입니다."

"내 손에 들어온 뒤에는 제발 그러지 마라."

반도전자 주식 처분에 대한 논의는 그렇게 일단락되었다.

이어서 장강리조트를 비롯한 세 곳의 계열 분리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데, 강하민의 핸드폰이 울렸다.

"…장기우네."

"음, 얼른 받아보세요."

"어."

강하민은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는, 통화버튼을 눌렀다.

"네, 강하민입니다."

- …만났으면 합니다.

착 가라앉은 말투에 강하민은 시운과 시선을 한번 마주하고는 말을 이었다.

"언제, 어디서 말입니까?"

- 오늘 저녁 7시. 서울 장강호텔 라운지에서.

그 말을 끝으로 전화는 끊겼다.

"예의 없는 놈일세."

"하하하."

언젠가 느꼈던 자신의 감상과 같은 평에 시운은 웃었다.

"마무리 잘 짓고 오세요."

"그래야지. 이제 드디어 끝이구나. 이 지긋지긋한 스파이 노릇도."

질색이라는 그의 표정에 시운은 그간의 노고를 위로했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래."

그날 오후 업무까지 모두 마친 강하민은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서울 장강호텔로 차를 몰았다.

* * *

"어서 오십시오.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전에 왔을 때처럼 입구에서부터 레스토랑 지배인이 강하민을 맞이했다.

그를 따라 전과 똑같은 창가의 자리까지 안내를 받았다.

"……."

역시나 레스토랑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부회장님, 모셔왔습니다."

재작년 겨울과는 달라진 호칭.

그때는 본부장으로 불렸는데 말이다.

장기우는 막 비워낸 술잔을 내려놓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 오셨군요. 여기 앉으시죠."

"…네."

이미 많이 마셨는지 얼굴이 발갛게 상기된 모습이다.

"한잔하겠습니까?"

양주병을 들어 올리는 장기우에게 강하민은 손을 뻗어 괜찮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차를 가져와서요."

"…대리기사를 부르면 되지 않습니까?"

"두 시간 뒤에도 약속이 있어서 말입니다."

"후후."

장기우는 실소를 흘리며 술병을 앞에 놓인 빈 잔에 가져갔다.

"밤 9시에 약속이라…. 누구와 만나는 건지 몹시도 궁금하군요."

"……."

비아냥조로 말한 장기우는 채운 잔을 다시 입가로 기울였다.

그 모습을 강하민은 살짝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탁-

술잔을 내려놓은 장기우는 강하민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언제부터입니까?"

두서없는 물음에 강하민은 인상부터 찡그렸다.

"뭘 말씀하시는 건지…."

"아니지, 아니야. 처음부터 손을 잡은 척 연기했던 걸지도 모르지. 안 그렇습니까?"

취한 듯 몸은 비틀대지만, 눈빛만은 사납게 강하민을 노려보고 있었다.

강하민은 오늘 여길 오면서 장기우의 예상 행동 패턴을 몇 가지 예상한 바 있었지만, 지금 그가 보이는 모습은 어느 범주에도 들어가지 않았다.

화를 내거나 한없이 차갑게 굴거나.

그도 아니면, 상상은 안 되지만 한껏 의기소침해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 취기에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면서 비아냥대기라니.

어떤 의미에서 신선한 충격이었다.

평소의 그를 생각하면 상상도 못 한 모습이었으니 말이다.

강하민은 장기우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입을 열었다.

"제가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장기우 부회장님께 접근했다?"

"……."

"절 찾아내고 또 불러내서 손을 잡자고 하신 분은 장 부회장님 아니셨습니까?"

장기우의 예상이 맞는다고 해서, 굳이 사실을 드러낼 필요는 없었다.

오늘 만남의 성격을 미리 간파한 강하민은 자신의 컨셉을 미리부터 잡아놨었다.

1년 이상 그를 위해 정보를 날라다 주고 성심성의껏 협력했으나, 한 번의 실수로 그동안의 헌신을 모두 부정당한 비운의 조력자.

현시운은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지만, 이런 식으로 유도함으로써 강하민이 노리는 효과는 있었다.

앞으로 더욱 남을 믿지 못하게 되는 것.

자신의 판단을 계속 의심하게 되는 것.

장기우 역시 언젠간 장강의 주인 자리에 오를 인물이다.

남들 위에 선 자가 일을 맡기는 이를 믿지 못하고 자신의 판단에도 확신을 못 가진다?

옛 왕조 시대에 왕으로 태어났다면, 최소 무능하거나 최대 폭군이 될 재목이라 할 수 있다.

나중에 장강을 손쉽게 접수하기 위한 포석을 까는 셈이다.

물론, 그런 노림수와 달리 정작 받아들이는 장기우의 입장이 어떨지 강하민도 함부로 재단할 수는 없었다.

"저로선 무척 억울한 일이군요. 1년 이상 제가 전해드린 정보로 부회장님은 많은 이득을 보셨었죠. 근데 저한테는 뭐가 돌아왔나요? 빈말인지 아닌지도 모를 훗날의 약속만 믿고 열심히 정보를 나른 저한테 말입니다."

"……."

장기우는 물끄러미 강하민을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간 애 써주신 거 잘 압니다. 충분히 도움도 되었고요. 근데…."

"……."

"이번 장강리조트 강탈은 강 대표님도 몰랐던 사실이다? 반도전자 건 역시 평소처럼 정보를 전한 거다?"

눈매를 좁히며 묻는 장기우의 말에 강하민은 말없이 굳은 얼굴로 고개만 작게 끄덕였다.

때론 백 마디 말보다는 이런 행동이 더 설득력 있으니까.

강하민을 쳐다보던 장기우는 픽 웃으며 말했다.

"그럼 장세연의 오피스텔에 들락거린 데도 사정이 있었겠군요? 설마, 거기가 강 대표님의 자택일 리는 없을 테니까 말입니다."

"……."

강하민의 표정이 사납게 굳어갔다.

"제 뒤를 밟은 겁니까?"

"네."

장기우는 순순히 긍정했다.

"아! 전부터 그랬다는 건 아닙니다. 최근에. 장강리조트 임시주총 이후 도무지 믿음이 가지 않아서 말이죠."

"……."

"진작 강 대표님을 마크했다면 이번 일도 겪지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저의 불찰이죠."

그러면서 다시 독한 양주를 넘긴다.

강하민은 한 차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서로 나눌 대화는 없는 것 같군요. 이만 가보겠습니다."

기껏 준비해온 노림수는 허사가 되어버렸다.

그래도 그 와중에 확인한 건 하나 있었다.

현시운의 표현을 빌려서 말하자면….

장기우, 저 녀석은 원래부터 남을 믿지 못하는 개새끼다.

"잠깐."

"?"

막 뒤돌아서려는데 장기우가 불러세웠다.

강하민은 뭔가 싶어 다시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전까지 보였던 취기가 거짓인 것처럼, 장기우는 평소에 보이던 모습으로 강하민을 마주 봤다.

"여태껏 절 속였든 아니든 그냥 묻어두겠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현시운이 무엇을 약속했는지는 모르지만, 전 그 이상을 약속드리겠습니다."

"……."

장기우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곳을 나와 정식으로 제 사람이 되세요. 우선 장강건설 대표이사직을 약속드리죠."

"…제가 원하는 건 월급쟁이 사장이 아니라 장강건설 그 자체입니다만."

"당장은 힘들다는 걸 강 대표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모든 일에 순서가 있는 법입니다. 일단 거기서부터 시작하시죠. 거기에…, 이번에 장세연이 가져간 리조트와 유통, 푸드까지 얹어드리겠습니다. 어떻습니까?"

"……."

재작년 겨울 첫 만남에서 조건을 걸었을 때와는 달리 오늘은 진실한 눈빛과 표정이다.

여태껏 속은 줄 알면서도 장기우가 자신을 붙들려고 하는 이유가 뭘까?

강하민은 짧게 생각했고 금세 답을 얻었다.

미래투자신탁의 성장.

그게 오롯이 자신의 성과라고 생각해서였겠지.

실상은 현시운에게 자신이 얹혀가는 건 줄도 모르고 말이다.

이 사실 역시 굳이 밝힐 이유는 없었다.

장기우가 착각할수록 자신들은 유리한 패를 하나 더 쥐게 되는 셈이니까.

장기우가 내민 손을 한차례 쳐다본 강하민은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거절하겠습니다."

"…왜죠?"

장기우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를 마주 보며 강하민은 답했다.

"협력을 약속한 상대를 의심해 사람을 붙이는 분과 무슨 일을 함께 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저 역시 부회장님을 속였으니 서로 비긴 셈 치죠. 그리고…."

"……."

"현시운이 약속한 대가가 더 값집니다."

계열사 한두 개가 아닌, 장강 그룹 그 자체를 약속했으니 말이다.

"……."

잔뜩 굳은 장기우에게 강하민이 옅게 미소지으며 고개를 작게 숙였다.

"이로써 저희의 협력관계는 끝이군요. 그럼."

그 말을 끝으로 강하민은 차갑게 뒤돌아서 입구를 향해 걸어 나갔다.

"……."

강하민의 뒷모습을 노려보며 장기우는 앞으로 내민 손을 꽉 쥐었다.

* * *

3월로 접어들었지만, 여전히 추위는 계속 되었다.

찬바람에 옷깃을 여미는 3월 둘째 주 금요일.

현시운은 경기도 화성의 향남 제약산업 단지에 자리한 광진제약 본사를 찾았다.

근 석 달 만의 방문이다.

오늘 이곳을 찾은 용건은 바로, 매년 결산기에 열리는 정기주주총회에 미래투자신탁의 대리인으로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방문객 전용 주차장에 차를 대고 사무동 건물로 향했다.

"아, 안녕하세요."

"네."

전에 자주 들렀던 덕분인지 지나가던 사무직원이 알아보고는 인사를 건넸다.

정기주주총회가 열리는 5층 대강당까지 그렇게 몇 명의 직원과 더 마주쳤고, 그때마다 시운은 웃으며 인사를 건네고 또 받았다.

이제 미래투자신탁을 지주회사로, 지분 관계에 있는 기업들 모두 그룹화가 이뤄지면 이들 모두 자신의 직원들이다.

그에 웃으며 일일이 응답해주는데, 이번엔 반갑지 않은 인물이 앞을 가로막았다.

50대 후반의 남성, 그는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을 훔치며 시운에게 말을 걸었다.

"현 부장님, 저 좀 잠깐 보시죠."

"…총회 시작할 시각이 다 되었습니다만."

"오래 붙잡지 않겠습니다. 5분이면 됩니다."

"……."

잠시 고민하던 시운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상대의 표정이 좀 전보다는 환해졌다.

"이리로."

앞서가는 그를 따라 4층의 빈 회의실에 들어섰다.

시운을 안으로 들이고 직접 문을 닫은 남성은 돌아서자마자 바닥에 무릎을 꿇어앉으며 간곡히 외쳤다.

"현시운 부장님!"

그를 쳐다보는 시운의 눈빛은 한없이 차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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