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9화 얼마나 줄 수 있는데?
1조 2천억 달러?!
조셉 테이슨은 당황스러운 심정을 얼른 추슬렀다.
이내 그의 얼굴에서 다른 표정이 떠오른다.
그건 바로 분노였다.
"장난의 정도가 지나치신 것 같습니다."
"장난이라니요?"
전혀 그렇지 않다는 현시운의 표정에 조셉은 인상을 구겼다.
시운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우리가 개발한 기술과 콘텐츠에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서 객관적으로 내린 가격일 뿐입니다."
"……."
물론 상당한 가치가 있음은 조셉 역시 공감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1조 2천억 달러…. 고글의 작년 말 시장가치가 그 금액이란 걸 몰라서 하신 말씀은 아닌 것 같은데요?"
의도한 게 아니냐는 그의 물음에 시운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그 말은 이곳에서 개발한 기술의 가치가 고글과 맞먹는다는 말이군요? 허, 참나!"
어이없다는 그의 반응에 시운은 픽 웃었다.
'고글과 맞먹어? 아니, 나중엔 고글 두 개쯤은 있어야 살 수 있는 기술과 콘텐츠야.'
실제로 회귀 전, 고글의 자회사로 설립됐던 넥스트의 시장가치는 모기업의 두 배 이상으로 올랐었다.
시운의 입장에선 덤핑가를 제시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기술을 팔 생각이 전혀 없었기에 그런 가격을 말한 것도 사실이었지만.
"몹시 불쾌합니다. 이런 작은 기업의 기술을 세계 5위 기업인 고글과 비교하다뇨."
"테이슨 씨의 심정은 이해가 갑니다만…. 작은 기업이라뇨? 고글도 시작부터 지금의 대기업은 아니었던 거로 압니다만."
지금의 고글 신화는 작은 차고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비단 고글뿐만 아니라 지금 세계 시장에 이름을 떨치는 미국의 IT 기업 여럿이 그렇게 출발했다.
- 나의 경쟁자는 지금 차고에서 무언가를 발명하고 있는 젊은이들이다.
세계 1위 기업, 와플의 창업주 티모시 그레이크가 신문사의 인터뷰에서 한 유명한 말이다.
젊은이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격언.
조셉은 시운의 말에 자신의 실수를 알아차렸다.
"말이 헛나왔습니다. 사과드립니다."
"네, 받아들이죠."
"……."
대화가 끝났다는 듯 시운은 몸을 돌렸다.
이제 급해진 건 조셉이다.
이제껏 여러 IT 기술을 찾아다녔지만, 이토록 혁신적인 건 접하지 못했었다.
이렇게 허무하게 기회를 날릴 순 없다.
"미스터 현!"
"네?"
시운은 조셉의 부름에 다시 고개를 돌렸다.
"이미 답변을 드린 것 같은데, 왜 그러시죠?"
"……."
조셉은 인상까지 써가며 자신이 제시할 수 있는 최대의 조건을 계산하느라 바빴다.
고글의 시가총액을 대가로 요구하는 거로 봐선 애초에 기술을 팔 마음이 없다고 생각되지만, 그래도 시도는 해봐야 했다.
"200억 달러."
"……."
"200억 달러를 제시하겠습니다."
한화로 20조를 넘기는 천문학적인 금액.
덤덤한 표정의 시운과는 달리 옆에서 이를 들은 한진형과 정혜련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둘의 표정에 용기를 얻은 조셉은 그게 끝이 아니라는 듯 말을 이었다.
"거기에 넥스트 임직원 중 희망하는 이는 전원 고글에 채용하겠습니다. 원한다면 넥스트를 자회사로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스톡옵션도 걸겠습니다."
조셉이 생각했을 때, 고글에서 최대한 양보할 수 있는 걸 다 끌어왔다.
하지만, 시운은 그에 혹하지 않았다.
"1조 2천억 달러. 그 외의 조건은 없습니다."
그러면서 돌아서다가 갑자기 멈칫하는 시운.
"아…, 깜빡할 뻔했군요. 방금 말한 금액도 올해에 한정해서입니다."
"네?"
"나중엔 가격이 더 오를 거라는 말입니다."
"……."
그 말을 끝으로 시운은 부스를 떠나갔다.
한진형이 그의 뒤를 따랐고, 정혜련은 한동안 아무 말도 못 하고 서 있는 조셉을 살피다 다시 박람회 진행을 위해 자리를 옮겼다.
"Shit!"
자신의 심정을 짤막하게 표현한 조셉은 핸드폰을 꺼내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이대로 놓치기엔 아까운 기술이고, 아이템이다.
시운이 제시한 1조 2천억 달러가 아주 허황한 것만은 아니다.
조셉이 예측하기로는…, 10년?
그래, 10년!
아마도 그때쯤이면 그 정도 가치로 성장하지 않을까?
상용화가 이루어져 세계인의 대다수가 리얼 월드를 이용하는 미래를 상상하니 절로 소름이 돋아났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
천만에.
이건 다이아몬드 알을 낳는 거위다!
그만한 성장 가능성을 가졌다.
리얼 월드는.
"절대 포기 못 해!"
신호음이 한참을 가고 나서야 상대방에서 전화를 받았다.
- 조셉? 이 시각에 무슨 일이야?
시차 때문에 상대가 있는 캘리포니아는 막 저녁으로 접어들었을 무렵이다.
조셉은 넥스트 부스에서 멀어지며 입을 열었다.
"해리. 저 좀 도와주십시오."
절박해 보이는 그의 음성에 상대는 잠시 침묵하다 대답했다.
- 중국에서 굉장한 걸 발견했나 보군. 뭔지 말해봐.
"네, 이번 국제 IT 박람회에 시연된 콘텐츠인데 이게 어떤 거냐 하면…."
조셉의 설명이 길게 이어졌다.
지금 그와 통화하고 있는 지구 반대편의 해리란 남성의 정체는 바로.
고글의 공동 창업주이자 현 CEO인 해리 페이퍼였다.
조셉의 전화 한 통은 머지않아, 파란을 몰고 온다.
하지만, 현재의 그 누구도 이를 알지 못 했다.
지금 통화를 하는 조셉과 해리마저도 말이다.
* * *
"…거로 예상됩니다."
여느 때처럼 평창동을 찾은 문지환은 말끝을 맺으며 정례 보고를 모두 마쳤다.
"……."
눈을 감은 채 그룹의 사업 진행 상황과 이슈를 듣던 장철구는 무언가를 생각하는지 한참 동안 말이 없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생각보다는 잘하고 있군. 전자도 이제 계열사답게 바뀌었고 말이야."
장기우가 추진한 반도전자 인수는 마무리되었다.
예정보다 높은 인수 가격이 책정되었지만, 미래증권에서 언제 또 수작을 부릴지 모르기에 서둘러서 진행된 사안이다.
그래도 들인 가격만큼 장강전자의 기술력은 한층 진보했고, 중저가 메모리 사업에서 탈피해 고품질의 반도체 제조를 준비 중이다.
짧게 감상을 말하는 장철구의 표정은 평소처럼 아무런 감정을 비치지 않았지만, 오랜 시간 그를 곁에서 보필한 문지환은 알 수 있었다.
꽤 흡족해하는 표정이란 것을.
문지환은 문득 궁금해졌다.
분명 장기우를 그룹의 차기 총수로 내정하고 부회장직을 내렸을 건데….
왜일까?
어찌하여 리조트와 유통, 푸드가 장세연에게 넘어갈 때 장기우에게 아무런 힘도 실어주지 않은 것일까?
"회장님, 외람되오나 한 말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뭔데 그러나?"
그의 허락에 문지환은 숨을 한 차례 고르고는 품고 있던 의문을 꺼냈다.
"왜 유통과 푸드까지 장세연 사장에게 주신 겁니까? 리조트야 어쩔 수 없었다지만, 그 두 곳은 막으려고 했다면 얼마든지 가능했을 텐데 말입니다."
장철구는 눈을 뜨고 잠시 문지환을 쳐다봤다.
그 시선에서 질책을 느낀 문지환은 얼른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주제 넘은 질문을…."
"그 역시 필요한 일이니까."
"…네?"
언뜻 이해되지 않는 장철구의 말에 문지환은 반문했다.
문지환이 느낀 것처럼 장철구의 시선에 질책의 빛이 담겼지만, 그건 질문에 대한 게 아니었다.
자신의 의도를 읽지 못한 것에 대한 꾸지람이었다.
장철구는 시선을 멀리 두며 말을 이었다.
"장 부회장의 나이가 올해 고작 스물일곱이지. 수천억과 수조 원이 오고 갈지 모르는 결정을 제대로 내리기엔 아직 어려. 경험이 부족하고 시간도 많지 않아. 아무리 밑에 유능한 사람이 널렸다고 해도 결정권자가 무능하면 그게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 말씀은…."
"경험이 부족하고 시간도 얼마 없다면, 짧은 시간에라도 부단히 노력하게 만들어야지. 그러려면 경각심을 가질 만한 상대가 있으면 더할 나위 없는 것이고. 적당한 자극제를 말일세."
"장세연 사장이 그 자극제인 겁니까?"
장철구는 고개를 끄덕였다.
"쉽게 들어온 건 쉽게 나가기 마련이야. 세연이 덕분에 뼈아픈 실패를 맛봤어. 좋은 교훈이 됐을 테니 다음에 비슷한 일이 생기면 더욱 잘 처신하겠지."
"……."
자식까지 이용해 그런 구도를 짰다는 것에 문지환은 오싹함마저 느꼈다.
문지환이 보기엔 장철구는 염두에 둔 그룹 승계의 완성을 위해서라면 천륜마저 저버릴 인물처럼 느껴졌다.
한때, 동경하고 존경했던 이의 민낯에 문지환은 씁쓸한 실망감만 맛봤다.
"근데…."
"네?"
장철구가 픽 웃으며 입을 열었다.
"세연이 그 아이가 건네기도 전에 홀라당 가져가 버릴 줄은 나도 몰랐군. 허허."
그게 못내 기쁜 모양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그의 안색은 진중해졌다.
"문 실장."
"네, 회장님."
"세연이 그 아일, 다시 주시하게. 일거수일투족 하나 빠트리지 말고."
"그러겠습니다. 회…."
"또한."
"…네."
장철구의 눈빛이 일흔 넘은 노인답지 않게 형형하게 빛났다.
"이번에 세연이를 도왔던 세력에 대해서도 철저히 파악해놔."
"알겠습니다."
갑자기 나타난 해외 투자법인 세 곳.
장철구는 왠지 께름칙했다.
아무리 자신의 자식이라지만, 그의 평가는 언제나 냉정했다.
장세연에게 해외의 투자법인을, 그것도 리조트 지분의 3분의 1을 매집할 정도로 자금력이 좋은 기업들을 회유할만한 능력은 없다고 판단했다.
"……."
장철구에게 남은 시간은 그리 길지 않을 거다.
선대부터 이어온 가업을 후대에 무사히 넘겨주는 게 자신의 마지막 사명이다.
이를 방해하는 자는 그 누구라도 용서하지 않을 작정이다.
아무리 친자식이라 하더라도.
* * *
지난 상하이 국제 IT 박람회에서의 리얼 월드 시연은 예상대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외국, 특히 대한민국의 기사를 다루는 데 예민한 중국의 관영매체들에서 이번 박람회에서 단연 돋보였던 넥스트와 리얼 월드를 집중 조명하였고, 중국 대기업들의 숱한 러브콜도 받았다.
넥스트는 설립 이후, 처음으로 투자 문의 전화 때문에 전 직원이 업무도 제대로 볼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결국 한진형은 회사 홈페이지에 투자를 받거나 회사를 팔 의향이 없음을 공지했다.
그런데도 여전히 전화는 빗발쳤다.
국내는 물론 국제 특허까지 출원하고 등록까지 마쳤으니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기술을 유출해가려고 다들 득달같이 달려들었을지도 몰랐다.
물론, 특허가 있든 없든 일단 기술을 빼가고 보려는 족속들도 분명 존재하겠지.
이런 위험성을 초창기부터 현시운이 거듭 경고했었기에, 콘텐츠 리얼 월드와 접속기기 다이버와 관련된 데이터와 자료는 회사 내에서도 특급 기밀로 취급되었다.
"일단 넥스트의 진행 상황은 순조로운 것 같고…."
대단위 데이터 센터와 서버, 사옥을 지을 부지가 드디어 선정되었다.
서울과도 그리 멀지 않은 호반의 도시, 춘천.
다음 달 5월 중순에 착공 예정이다.
미래증권도 강하민의 지휘 아래 잘 굴러가고 있었다.
전자, 화학, 제약, 의료기기 역시 마찬가지다.
굳이 자신이 손을 댈 필요가 없었다.
시운은 해외 투자법인에 집중하기로 했다.
스피어, 블레스, 티엔유와 새로 설립될 세 개의 신규 해외 투자법인에만 신경 쓰기에도 시간이 넉넉지 않은 실정이다.
새로운 해외 법인은 싱가포르와 스위스의 베른, 독일의 베를린에 세워진다.
아직 회사명을 정하지는 않았다.
미리 충원된 현지 직원들에게 포상금까지 내걸고 어울리는 이름을 공모 중이다.
현지 법인장으로 기존의 세 투자 법인에서 각각 두 명씩 후보를 올렸고, 시운은 유레카의 검증을 통해 세 명의 내정자를 발탁했다.
다음 달 초에 각자 지금의 근무지를 정리하고, 새 보금자리로 향할 예정이다.
이번 법인 설립 과정에도 전처럼 하와이의 G&H Property가 이용되었다.
"초기 세팅까지 걸리는 시간도 무시 못 하니…. 정상 영업은 6월 이후부터인가?"
그때까지는 비교적 한가할 거라는 얘기다.
물론, 그렇다고 여유 부릴 생각은 없었다.
미래 그룹의 계열사 중 아직 정상 궤도에 오르지 못한 곳이 하나 남아 있으니 말이다.
"미래E&M."
산하에 블루드래곤 픽처스와 빅스텝 엔터테인먼트를 거느리고 있는, 방송통신업을 목적으로 세운 회사다.
관련 종사자를 대거 영입했지만, 이제 걸음마 수준이다.
시운이 추구하는 사업 방향을 위한 인프라 구축은 전문가인 그들이 대신해줄 거다.
"내가 할 일은…."
만들어질 채널을 풍성하게 채울 콘텐츠 육성.
이 역시 전문가들이 있지만, 앞으로 어떤 영화와 드라마, 음악이 유행을 선도하는지 시운이 보다 더 잘 알았다.
그 부분만큼은 자신이 나서서 의견을 낼 작정이다.
그룹 회장씩이나 돼서 채신머리 없이 움직인다고 흉을 보는 사람도 있겠지만, 알고 있는 정보를 가만히 썩힐 수는 없잖은가.
"오랜만에 백진섭 대표나 만나러 가볼까?"
안 그래도 지난주에 블루드래곤 픽처스에서 제작한 세 번째 드라마 '엠파이어'가 성공리에 웹플렉스에 런칭되었다.
좀비물의 특성상 선정성과 폭력성이 지상파와 케이블 채널 방영 기준을 상회하여 웹플렉스에만 서비스된다.
1부 격인 10편의 에피소드가 한꺼번에 올라갔는데, 좀비물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호평을 받으며 순조롭게 출발했다.
런칭된 지 이제 5일째.
앞선 두 드라마와는 달리 좀비 코드가 서양권에도 제대로 먹혔는지, 지역이 아닌 종합 순위에서 상위권으로 빠르게 올라오고 있다.
위튜브에도 '엠파이어'와 관련한 리뷰 방송이 하루에도 수백 개씩 양산되며, 인기 검색어 순위를 관련 단어들이 점령했다.
'사랑은 낙하산을 타고'의 김금희 작가가 썼다기에 로맨스물을 기대했던 다수의 시청자에게 '엠파이어'는 역대급 반전의 장르였다.
그렇다고 싫어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되레 기분 좋은 비명을 지르고 있다는 후문이다.
시청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상황.
세 번째 드라마까지 대박이 났으니, 응당 찾아가 축하를 해줘야겠지?
또한, 이제 곧 제작에 들어갈 첫 영화의 성공을 기원하는 의미에서도 말이다.
시운은 방문하기 전에 미리 전화를 걸었다.
- 아, 네. 현시운 부…. 아니, 회장님. 죄송합니다. 제가 아직 익숙하질 않아서.
백진섭의 실수에 시운은 웃으며 괜찮다고 답했다.
"지금 어디세요?"
- 네? 아…. 사무실에 있습니다. 근데 무슨 일로?
"한번 뵙고 이번에 런칭한 드라마 대박을 축하해주려고 그러죠. 따로 약속 없으시면 오늘 점심이나 함께하시죠."
- 네…. 약속은 없습니다. 그러시죠.
근데 백진섭답지 않게 힘이 없는 말투다.
"혹시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습니까? 아니면…, 제 방문이 싫어서 그런 건가요?"
- 아닙니다! 싫다뇨. 그럴 리가요. 그게, 사실은….
백진섭이 사정을 설명했고, 그걸 듣는 시운의 표정은 점점 일그러졌다.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만나서 얘기 마저 나누시죠."
- 네, 회장님.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시운은 바로 외투를 집어 들고 방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