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0화 대륙의 기상(1)
덜컥-
문이 열리자, 비서실 직원들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현시운은 보름 가까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익숙지 않은 그들의 존재에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회장님, 무슨 일이십니까?"
비서실장으로 채용된 권재환이 물었다.
화장실이 급해서 나온 거로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미래 그룹 회장 집무실에는 전용 화장실이 딸려 있었으니까.
시운은 볼을 슬쩍 긁으며 대답했다.
"바깥에 좀…."
"행선지가 어디인지 알려주시겠습니까?"
"…블루드래곤 픽처스입니다."
"바로 출발 준비하겠습니다. 강 비서?"
권재환의 부름에 삼십 대 초반의 건장한 남성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네! 지금 바로 내려가서 1층 로비 앞에 차량을 준비해놓겠습니다."
"아니, 그냥 지하주차장이면…."
강 비서는 시운이 채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이미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
의욕적인 모습은 좋으나, 그 정도가 지나치다.
시운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미래 그룹이 설립되면서 취임식과 언론 보도는 시운의 바람대로 되었지만, 강하민이 양보할 수 없는 두 가지가 있었다.
바로 그룹 비서실과 경호원.
예전 미래투자신탁 시절처럼 부장이었다면 모를까, 이젠 명실상부 한 그룹의 회장이다.
그런 만큼 비서실도 제대로 갖춰서 정상 가동해야 하고, 지근거리에서 몸을 보호해줄 경호원도 있어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시운은 그럴 필요 없이 비서 직원 한둘만 있으면 된다고 했지만, 강하민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래서 둘이 합의한 게 그룹 비서실은 만들되, 경호원은 두지 않는 거로.
유레카의 위기 알림권으로 일신상의 위험을 일주일 전에 미리 알 수 있는 시운은 경호가 무의미하다고 여겼었다.
그러기는 했었는데….
시운의 운전기사 겸 수행비서로 채용한 강철완은 특수부대 출신으로 격투기 선수로 활동한 전적까지 있는 화려한 이력의 소유자였다.
강하민이 시운과 합의한 내용을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최선의 수를 쓴 것이다.
시운의 눈총을 한동안 받았지만, 강하민은 뻔뻔하게 행동했다.
- 강철완 씨가 비서지, 경호원은 아니잖아?
틀린 말이 아니지만, 속았다는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예전이 더 편했어.'
서는 자리가 바뀌면 보이는 풍경도, 주위 환경도 달라지는 게 당연하지만, 실제로 겪어보니 생각했던 것과 많이 달랐다.
다른 재벌들은 이를 당연하다고 여기겠지?
지시하고 보호받는 삶.
시운은 현재 그 초입에 들어섰다.
비서들의 배웅을 받으며 집무실을 나온 시운은 작은 한숨을 내쉬며 전용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긴급한 일이 아니고선 시운과 수행원만 탈 수 있는 엘리베이터.
덕분에 중간에 멈춰서지 않고 1층까지 한 번에 내려왔다.
띵-
안내데스크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한 전용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내려서 로비를 막 지나려는데, 안내데스크에서 일하던 직원들이 일제히 일어나 시운을 향해 공손한 자세로 고개를 숙였다.
시운이 누구인지를 아는 몇몇 직원들도 지나가다 얼른 인사를 했고, 시운은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들어 화답했다.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직원이나 업무차 방문한 거래처 사람들은 왜 저러나 의아해하는 표정이다.
많아 봐야 이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시운이 미래 그룹의 총수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하는 눈치다.
취임식과 언론 보도의 부재가 낳은 결과였다.
지난주 만들어진 그룹 홈페이지에도 회장인 시운의 사진은 걸려있지 않았다.
"네, 일들 보세요."
시운은 자신에게 반응하는 모두에게 마주 인사하며 서둘러 입구로 향했다.
TV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면 그룹 회장이 비서진과 임원들을 뒤로 잔뜩 이끌고 로비를 가로지르는 장면이 나오던데….
시운은 죽었다가 깨어나도 엄두가 나지 않는다.
빌딩 입구 앞에는 검정 세단이 멈추어 서 있었다.
먼저 차를 가지러 내려갔었던 강철완이 뒷좌석 문을 열고 시운을 기다렸다.
뒷좌석에 올라탄 시운은 출발하기에 앞서 강철완에게 당부했다.
"강 비서님."
"네! 회장님."
"다음부턴 그냥 지하주차장에서 기다려주세요."
"네? 아…, 네.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부탁할게요."
시운의 거듭 강조하는 말에 강철완은 알겠다고 답한 뒤에 차를 출발시켰다.
* * *
블루드래곤 픽처스의 사무실은 신사동 가로수길의 미래빌딩 5층에 있다.
미래증권이 본사로 옮겨오면서 비어버린 곳을 제작사가 차지한 것이다.
빅스텝 엔터테인먼트 역시 임대하고 있는 역삼동 사무실의 계약 기간이 끝나는 대로 미래빌딩으로 합류할 예정이다.
이 두 곳을 산하에 거느리고 있는 미래E&M 역시 업무 연관성과 협업을 위해 미래빌딩을 사옥으로 삼을 계획.
아직은 미래빌딩에 입주해있는 회사들의 계약 기간이 남아 현재는 그룹 본사에 임시로 둥지를 틀고 있지만 말이다.
미래 그룹 본사에서 미래빌딩까지의 거리는 4km 남짓으로, 아무리 신호등에 자주 걸린다 해도 20분이면 도착한다.
지하주차장에 주차를 마친 강철완은 서둘러 내리더니 뒷좌석 문을 열어젖혔다.
"…제가 해도 됩니다만."
"아, 네…. 불편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이 사람에게는 지금의 행동이 당연한 거겠지?
시운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불편한 건 아닙니다. 다만, 제가 할 수 있는 건 제가 하겠습니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회장님."
우렁차게 대답하는 강철완 덕분에 시운은 주차장에 다른 사람은 없나 얼른 살펴야 했다.
며칠간 겪어본 강철완은 의욕도 넘치고 우직하기는 한데…, 눈치가 많이 부족했다.
남몰래 한숨을 내쉰 시운은 엘리베이터 입구로 향했다.
시운은 5층으로 향하기 전, 먼저 1층에 들렀다.
예전 여기서 근무했을 때처럼, 미래빌딩을 방문하면 항상 한신철의 카페부터 먼저 찾는다.
그리고 방문할 제작사 사무실 직원들이 먹고 마실 간단한 간식거리와 커피를 주문하는 것이다.
"아이고, 일주일만이네요."
"네, 안녕하셨죠?"
"그럼요!"
한신철에게 시운은 오랜 단골손님이다.
하지만, 그 진실한 정체에 대해선 그는 알지 못했다.
아직도 한신철은 시운을 투자회사의 직원인 줄로만 알았다.
어느 순간부터 같이 방문하는 강철완도 그저 새로 들어온 직원이겠거니 여겼다.
그는 5층의 투자회사가 어디론가 이사를 하고, 회사명을 미래증권으로 바꾼 것까지만 알았다.
아무래도 세입자인 한신철에게는 매달 월세를 송금해야 할 건물주다.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알게 됐을 뿐이다.
"오늘도 거래처 들르신 모양입니다?"
"맞습니다. 전과 같은 양으로 커피와 조각 케이크, 마카롱 부탁드릴께요."
비어있던 5층에 새로 들어온 드라마 제작사 역시 미래증권의 거래처 정도로만 그는 알았다.
영화나 드라마에 제작 지원을 하는 투자사나 증권사가 많다고 들어서 그렇게 여기는 것이다.
시운이 딱히 부정하지 않아 이는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졌다.
"그럼…, 30분쯤 뒤에 올려드리겠습니다. 먼저 가 계십시오."
"네. 부탁드립니다."
자신의 개인 카드로 계산을 마친 시운은 강철완을 대동한 채 카페를 나섰다.
"회장님, 다음부턴 카페 주문, 계산은 제가 맡아서 하겠습니다."
시운이 손수 주문하고 계산하는 것에 강철완은 안절부절못했다.
한두 번이면 모를까 매번 이러니, 자신을 미더워하지 못해서 그런 게 아닐까 걱정되었다.
"괜찮습니다. 이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하지만…."
"주차장에서도 말했었죠? 제가 할 수 있는 건 제가 하겠다고."
"…네. 알겠습니다, 회장님."
강철완이 어떤 마음일지 알 리 없는 시운은 별 생각없이 5층으로 향했다.
이곳에 새로 둥지를 튼 블루드래곤 픽처스는 예전 사무실에서 본 인테리어를 그대로 옮겨왔다.
입구에 걸린 회사 간판부터 해서 들어서자마자 나오는 안내데스크까지.
"어, 어서 오십시오. 회장님."
안내데스크 직원마저 그때와 같은 사람이었다.
물론 태도는 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깍듯해지기는 했지만 말이다.
"오랜만입니다. 백 대표님 안에 계시죠?"
"네, 지금 대표이사실에 계십니다."
직원은 안내데스크를 나와 시운과 강철완을 백진섭에게 안내했다.
안내를 받아 도착한 대표이사실은 예전에 강하민이 쓰던 집무실이기도 했다.
"어서 오십시오."
"오셨습니까, 회장님."
문을 열고 들어서자 백진섭이 반겼고, 그와 마주 보고 앉아있던 중년의 남성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네. 전상기 대표님도 여기 와 계셨군요."
그는 미래E&M의 대표이사 전상기였다.
"네. 아무래도 남의 일이 아니다 보니…."
시운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백진섭은 자신과 달리 시운을 깍듯하게 맞이하는 전상기의 모습에 쭈뼛대며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다들 앉으시죠. 강 비서는 바깥에서 대기하세요."
"네, 회장님!"
역시나 우렁찬 대답이다.
시운은 비어있는 상석에 앉자마자 아까 전화상으로 들었던 얘기를 언급했다.
"근데 정말로 그렇게 똑같은 겁니까? 표절이 의심될 정도로?"
연이은 드라마 흥행에 기뻐하는 게 당연할 텐데도, 백진섭과 블루드래곤 픽처스의 사무실 분위기는 어두웠다.
모두 중국에서 들려온 하나의 소식 때문이다.
"백번 듣는 것보다는 직접 보시는 게 이해가 빠를 겁니다. 이것 좀 보십시오."
백진섭은 저작권 소송을 위해 준비한 자료 파일을 실행하여 태블릿 채로 시운에게 건넸다.
"음…."
1화부터의 줄거리와 장면, 등장인물들 간의 대사까지 요목조목 비교되어 있었다.
한 달 전에 중국에서 방영을 시작한 드라마 하나가 큰 인기를 끌고 있는데, 줄거리와 장면 등이 블루드래곤 픽처스에서 앞서 제작한 드라마들과 비슷했던 것이다.
그랬다.
드라마들.
중국의 드라마 제작사에서 블루드래곤 픽처스의 드라마를 하나도 아닌 두 개를 그대로 베껴 섞어버렸다.
"제목이 참…, 기가 막히는군요."
백진섭과 전상기 역시 시운의 말에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낙하산 타고 내린 베이징 클라쓰.
제목만 들어봐도 '사랑은 낙하산을 타고'와 '홍대 클라쓰'를 짜깁기했다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거기에 내용까지….
이건 문외한이 봐도 엄연한 표절이다.
"제작사 이름이…, 신진미디어?"
이름까지 외울 정도로 타국의 제작사에 관심이 있는 건 아니지만, 왠지 신진이란 사명이 굉장히 귀에 익다는 기분이 들었다.
중국 5대 대기업 중 하나인 신진 그룹을 바로 떠올렸지만, 설마하니 그런 대기업에서 이런 표절 드라마까지 제작했을까 싶다.
그것과는 다른 이유로 이 회사 이름이 익숙하게 느껴졌다.
"네. 작년 8월에 만들어진 중국 제작사인데, 그때부터 노골적으로 우리 드라마들을 베껴 제작에 들어간 거로 보입니다."
이미 중국 베이징TV를 통해 10화까지 방송된 짝퉁 드라마다.
지금이 4월 말이니, 아무리 빠르게 대본을 쓰고 촬영에 들어갔다 하더라도 후반 작업까지 생각하면….
작년 8월에 세워진 신생 제작사가 만들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어 보였다.
게다가….
"최근화 드라마 배경이 가을이군요."
장소는 드라마 제목처럼 베이징 인근의 청나라 세트장에서 촬영되었다.
10화를 찍은 시기가 못해도 작년 8~11월 사이라는 말.
사전 제작이 아니고선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상황이다.
"신진미디어…. 여기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중국어로 된 자료도 있는 걸 보니 이미 항의를 했을 것 같은데요."
시운의 질문에 둘의 표정이 더욱더 어두워졌다.
잠시 후, 어렵사리 전상기가 입을 뗐다.
"자신들은 절대 표절하지 않았다며, 극구 부인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적나라한데도요?"
"네. 어차피 창작에 새로운 것은 없다면서…. 그런 논리라면 우리 드라마도 다 예전에 만들어진 드라마와 영화를 베낀 것 아니냐며 적반하장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
지금껏 중국이 한국 예능과 드라마의 판권을 사간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남들이 보기에, 정식 판권을 사들여 만든 것처럼 판박이인 경우가 매우 허다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던 중국의 한국 드라마와 예능 표절.
2016년 7월 한반도 사드 배치와 함께 중국 내 한한령 조치가 취해진 이후 더욱 심해졌었다.
수년간이나 이어진 아이디어 수탈.
방송국과 제작사에서 여러 번 따지고 들어도 그들에게서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자국의 네티즌들이 부끄러운 짓 그만하라고 소리칠 때도 아랑곳하지 않던 멘탈의 소유자들이다.
되레 자신들의 콘텐츠가 오리지널인 것처럼 포장하는 데 더욱 신경을 쓸 뿐이다.
중국 국민 중 상당수는 자국의 것과 내용이 비슷한 한국의 드라마와 예능을 도리어 표절작이라고 생각한다.
대국의 자존심에 결코 자신들이 무단으로 도용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작년 7월, 한국관광공사와 중국 최대 여행기업이 공동으로 한국 관광상품을 광고하기 시작하면서 한한령은 점차 해제의 움직임을 보였었다.
그리고 올해에 와선 공식적으로 공표하지는 않았지만, 완전히 해제된 거로 다들 여겼다.
그 뒤, 무단 도용의 사례가 크게 줄어든 추세였는데….
이번 신진미디어의 경우는 오히려 전보다 정도가 심했다.
"광전총국에서도 이걸 그냥 묵인해줬다고요?"
중국의 미디어 감시 기구인 광전총국은 그 검열의 기준이 엄격하다.
한한령 발효 때에는 알면서도 모르는 척, 표절을 문제 삼지 않았었지만….
정상적으로 문화 교류가 이루어지는 지금도 이런다는 게 시운으로선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게…."
천천히 운을 떼는 백진섭을 돌아본 시운은 그가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생각에 재촉했다.
"아는 게 있으시면 말씀해 보세요."
"…드라마 제작사인 신진미디어의 총경리가 왕룽이라는 사람입니다. 근데 이 자가 중국 5대 대기업 중 하나인 신진 그룹 왕 회장의 넷째 아들입니다. 아무래도 신진 그룹이 중국 공산당과 끈이 닿아있으니 그 라인을 이용해 검열을 대충 넘긴 게 아닌가 하는…."
"잠깐만요!"
이어지려는 백진섭의 말을 시운이 끊었다.
"네?"
시운의 격한 반응에 왜 그러는지 알 리 없는 백진섭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시운은 인상을 쓰며 다시 물었다.
"방금 누구라고 하셨죠?"
"아…, 신진 그룹 왕 회장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니요. 그 전에 신진미디어 대표 이름이…."
"왕룽, 왕룽입니다."
전상기가 대신 대답을 했다.
"…왕룽이라고요?"
시운은 신진미디어란 회사명이 왜 익숙하게 들렸는지 그제야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