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4화 치사한 짓(2)
야심한 시각.
불 꺼진 연구실에 하나의 불빛만이 주위를 밝혔다.
"……."
더그 베이커는 자신이 옳은 선택을 한 걸까 다시 한번 고민했다.
- 간단합니다. 넥스트에서 개발한 기술의 자료와 데이터를 가지고 나오세요. 그걸 고글에 넘기면 베이커 씨에게 10억 달러와 함께 고글 기술개발팀장의 자리를 약속드리겠습니다.
며칠 전, 이태원의 한 술집에서 마주친…, 아니 의도적으로 자신에게 접근했던 박성원의 제안이었다.
"10억 달러…."
눈이 번쩍 뜨일 금액이다.
실제로 당시 취기가 단숨에 날아가 버리는 경험을 했었지.
초일류 기업인 고글의 기술개발팀장.
이 역시 더할 나위 없는 조건이다.
고글의 준 임원이라고 불릴 정도로 대우가 좋았으며, 명예도 얻을 수 있는 자리다.
하지만, 떳떳하지 못한 일을 하고도 이 바닥에 계속 발을 붙인다는 건 더그로서도 꺼려지는 일이다.
"그래…. 이번 기회에 억만장자가 되는 거야."
그리고 미련 없이 IT 업계를 떠나는 거다.
이미 그렇게 결심을 내렸고, 오늘 행동으로 옮길 작정이다.
"……."
그런데도 마음 한구석이 시려온다.
지금부터 자신이 할 일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는 결코 아니었다.
다만…, 고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함께 했던 절친이 조금은 걱정되어서다.
자신과 한 세트처럼 여겨졌던 녀석이다.
회사 기밀을 들고 사라진다면…, 자신을 향한 원망이 마이클에게로 대신 옮아가겠지.
그래서 그렇게 권유를 했건만.
- 마이클, 둘도 없는 기회야. 너도 나와 함께 하자.
- 미쳤어? 그동안 미스터 현과 한 대표, 넥스트의 직원들이 우리에게 얼마나 잘해줬는지 몰라서 그래?
- 그거야 우리한테 뽑아먹을 게 있으니 그런 거지. 대학교 다닐 때 겪었던 중국계 루이 기억 안 나? 녀석도 너와 나한테 빌붙더니 마지막에 논문 빼돌려서 뒤통수를 쳤잖아.
- 루이 때와는 달라.
- 다르긴 뭐가! 노란 원숭이들 생각이 다 거기서 거기지.
- …아무튼 난 싫어. 또한 네가 그런 일을 하게 둘 순 없어.
- 날 말리려고? 그러려면 현시운이나 한진형에게 가서 내 계획을 전부 알려야만 할 거야.
- 더그, 제발….
- 싫다는데 강요할 생각은 없어. 다만, 비밀은 지켜줘. 우리…, 친구잖아.
- …….
그 뒤로도 자신의 권유와 마이클의 만류가 이어졌었다.
서로의 의견은 팽팽히 맞섰고, 어느 순간부터는 의식적으로 상대를 피했다.
"쯧!"
15년 지기인 마이클과 불편한 관계가 되어버렸다.
'이게 다 현시운 그놈 때문이야.'
고글의 제안만 받아들였다면 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그렇게 더그는 남 탓을 하며,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했다.
타닥- 타다닥!
기밀 유출 방지를 위해 넥스트의 전산망은 이원화되어 운영되어 왔다.
개방적인 인터넷과 폐쇄적인 인트라넷.
그중 리얼 월드와 다이버 개발 관련 자료와 데이터는 몽땅 사내에서만 운용되는 인트라넷 안에 저장되어 있다.
직원들 개인의 아이디마다 기밀 접근 권한도 달랐는데, 더그는 최고경영자인 한진형과 임원 정혜련 다음의 권한을 가진 A급 아이디 소유자다.
리얼 월드와 다이버의 웬만한 정보들은 열람이 가능했다.
인트라넷에 접속한 더그는 이윽고 핵심적인 자료와 데이터가 담긴 폴더로 들어갔다.
거기서 리얼 월드와 다이버에 관련된 파일을 모두 드래그한 더그는 준비해온 USB를 컴퓨터에 꽂아 옮기기 시작했다.
자신의 접속 기록과 행적 모두 로그로 시스템에 남겠지만, 더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이미 두 시간 뒤, 캘리포니아 행 비행기표를 예매해둔 상황이다.
파일을 옮겨 담는 대로 곧장 인천국제공항으로 향할 예정이다.
그런 뒤, 이곳과 영원히 바이바이다.
넥스트가 뒤늦게 사실을 알고, 경찰에 신고한다 해도 이미 자신은 다른 신분을 획득해 휴양지에서 놀고먹고 있을 거다.
고글에서 모든 준비까지 해주기로 사전에 협의가 되어 있었다.
올해 겨울이 지날 때까지 따듯한 남미의 휴양지에서 보내야지.
아니, 그냥 작은 섬을 하나 사버릴까?
유명하지 않은 무인도 정도라면 보수로 받는 돈의 일부로도 충분히 소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장밋빛 미래를 꿈꾸며 모니터를 보고 있는데, 갑자기 이변이 일어났다.
틱! 티딕- 틱틱!
불길한 기계음과 함께 아까 내렸던 복사 명령에 제동이 걸리더니 USB에 옮겨진 파일까지 자동 삭제되었다.
"뭐, 뭐야?!"
해킹일 리는 없다.
그렇다면?
남는 건 하나뿐이다.
인트라넷 최고 보안 등급을 가진 누군가의 원격 조작.
팟!
"윽!"
갑자기 연구실의 불이 환하게 켜졌다.
밝은 불빛에 반사적으로 눈을 감으며 인상을 찌푸릴 때, 문이 열리더니 여러 발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던 더그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버렸다.
제일 먼저 눈에 띈 건, 절친인 마이클이었다.
원망과 미안함을 표정에 드러낸 녀석의 얼굴에 더그는 일이 틀어졌음을 직감했다.
"더그 베이커 씨."
냉랭한 음성.
마이클과 함께 들어온 사람은 넷이었다.
한진형 대표와 정혜련 전무, 처음 보는 건장한 남성.
그리고…, 현시운.
극도의 분노를 담은 현시운의 시선에 더그는 고개를 돌려 절친을 마주했다.
"마이클…. 네가 어떻게 날?"
"……."
배신당했다는 더그의 표정에 마이클은 눈을 피하며 얼굴을 찡그렸다.
"널 범죄자로 만들 수는 없었어."
"그걸 말이라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더그는 마이클을 향해 분기를 표출하며 달려들었다.
하지만, 목적한 바를 이루지는 못했다.
초면의 남성이 앞으로 빠르게 나오더니, 달려오는 더그의 무릎을 차 넘어뜨린 후 팔을 뒤로 꺾으며 단번에 제압해버린 것이다.
"으, 으윽!"
바닥에 엎드려 발버둥을 치는 더그를 향해 시운이 다가갔다.
"더그 베이커."
"……."
시운은 차갑게 다음 말을 내뱉었다.
"당신, 해고야."
* * *
상황은 정리되었다.
워낙 정황과 증거가 뚜렷한 상황이라 더그 베이커 역시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다.
처음엔 격렬히 반항하던 그는 현시운의 수행비서인 강철완의 완벽한 제압에 결국 모든 걸 포기한 표정을 지었다.
"법적인 책임은 묻지 않겠습니다."
"…뭐?"
이제 쇠고랑을 차겠구나 싶었던 더그는 의외의 말에 반문했다.
시운은 슬쩍 마이클을 바라보고는 말을 이었다.
"당신의 친구와 그렇게 약속을 했으니까."
"……."
"지금 당장 이곳을 떠나요."
시운의 눈짓에 강철완은 더그의 손을 풀어줬다.
행여 허튼 짓이라도 할까 경계를 늦추지 않았지만, 다행히 그런 시도는 없었다.
"…더그."
"……."
15년 지기 절친을 잠시 바라보던 더그는 입을 다문 채 지나갔다.
시야에서 사라지기 전까지 더그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마이클은 이내 한숨을 내쉬며 돌아섰다.
그의 시선에 굳은 인상으로 더그의 책상 위를 바라보는 시운이 비쳤다.
마이클은 작게 고개를 숙이며 관대한 처우에 감사를 표했다.
"제 부탁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미스터 현."
"…약속은 약속이니까요."
시운의 화는 전혀 풀리지 않았다.
그는 더그의 책상 앞으로 걸어가 USB를 거칠게 뽑아냈다.
"음?"
시운은 책상 모퉁이에서 눈에 띄는 뭔가를 발견했다.
한 장의 명함.
고글의 로고가 큼지막하게 그려진, 박성원이 더그에게 건넸던 명함이었다.
"……."
마이클에게 듣기는 했지만, 막상 배후의 실체와 마주하니 속에서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그래, 한때는 그런 생각도 했었다.
넥스트의 전신인 드림비전에 첫 투자를 할 때만 해도 기술 개발이 완료된다면, 고글에 비싸게 팔아 투자금을 불리겠다고.
하지만, 그것도 유레카 임시 이용자였을 때의 얘기.
정식 이용자로 승급하면서 시운은 계획을 달리했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미래의 1위 기업을 만들어보자고.
그 원대한 꿈이 하마터면 중간에 어그러질 뻔했다.
국내뿐만이 아니라 국제 특허권을 취득했으니, 아무리 기술을 빼간다고 하더라도 문제는 없는 거 아니냐고?
천만에.
천하의 고글이다.
세계 IT 시장을 선도하는 초일류 기업.
거기에 수많은 IT 천재들이 즐비해 있을 테니 넥스트에서 빼간 자료와 데이터를 베이스로 특허권에 위배되지 않는 아류작을 교묘히 만들어내는 것도 어렵지 않으리라.
고글이 작정하고 대규모 투자를 한다면 선두였던 넥스트를 단숨에 앞지를 수도 있다.
핵심 기술까지 모방은 불가능할 테니, 넥스트 측에서 이 점을 가지고 소송을 걸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런다고 결론이 금방 나겠는가?
수년? 아니, 수십 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법정 공방은 이어질 거다.
법정에 불출석한다든지, 상관도 없는 증거를 제시하는 방법 등으로 재판을 질질 끌지도 모른다.
막대한 자금력으로 최고의 법률가들을 동원한다면 전혀 어렵지 않은 방법일 터.
그렇게 얻은 유예 시간 동안 고글은 시장을 석권하겠지.
모방한 제품과 콘텐츠로 말이다.
그런 뒤에 재판 결과가 나와봤자 소는 이미 도축되었고, 외양간도 불탄 뒤다.
시운은 신경질적으로 핸드폰을 꺼내 명함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
몇 번의 발신음 이후, 상대가 받았다.
- …누구시죠?
약간의 경계심이 엿보이는 음성.
그에 시운은 대답했다.
"박성원 대표님입니까?"
- 그렇습니다만….
"미래 그룹 현시운입니다."
- …….
단번에 조용해졌다.
"제가 뭐 때문에 전화를 했을지 짐작할 거로 생각합니다만."
- 글쎄요….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군요.
"이번 일. 박 대표님이 계획하신 건 아니겠죠. 누가 시켰는지 모르지만, 그 사람에게 전해주십시오."
- 무슨….
"이딴 개 같은 짓거리를 언제까지 할 수 있는지, 어디 한번 두고 보자고."
- …….
대답이 돌아올 리 없다.
"제대로 전달해주시리라 믿고 끊겠습니다."
뚝-
통화를 마친 시운은 한차례 길게 숨을 내쉬었다.
박성원에게는 누가 시켰는지 모른다는 표현을 썼지만, 대충 짐작은 간다.
고글 코리아의 대표이사를 이런 일에 동원할 수 있는 사람.
미국 본사의 수장 외에는 답이 나오지 않았다.
'해리 페이퍼….'
뭇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IT 업계 거물의 진실한 모습이 고작 이따위라니!
원래 역사와 틀어진 현실에 고글이 이렇게까지 나올 줄은 몰랐다.
이번 일로 고글이 얼마나 넥스트에 눈독을 들이고 있는지 깨닫게 되었다.
생각 같아서는 고글의 추악한 민낯을 세상에 알리고 싶지만, 그러면 더그의 처벌은 불가피하다.
지시를 받아 움직였다고 해도 기밀을 유출해가려고 직접 움직인 사람이 그였으니 말이다.
마이클과의 약속을 이제 와서 깰 수는 없다.
그렇다고 뚜렷한 증거와 증인 없이 고글을 매도했다가는 되레 그쪽에서 명예훼손을 이유로 소송을 걸어오겠지.
아직 넥스트는 대중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회사.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공룡 기업에 무기도 없이 맞설 수는 없었다.
'아마도 이게 끝은 아니겠지.'
다음엔 어떤 수단으로 접근해올지 알 수 없다.
그렇다고 방비를 늦출 수도 없는 노릇이다.
고글을 사들일만한 돈이 없는 이상, 쥐고 있는 패를 최대한 이용하는 수밖에.
정보 이용권은….
아직 아껴둘 때다.
그건 최후의 보루니까.
한진형과 정혜련, 마이클과 강철완은 평소와 다른 시운의 모습에 숨을 죽인 채 대기했다.
시운은 생각 정리를 마친 뒤에 몸을 돌렸다.
"그만 퇴근들 하시죠. 오늘 야근은 참 길었네요."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하는 시운.
그에 대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 *
- 실패했습니다. 해리.
"흐음…."
박성원의 보고에 해리 페이퍼는 미간을 찌푸렸다.
비록 불법적인 행위이지만, 상대를 압박하기엔 좋은 수였는데.
현시운의 짐작과는 달리 해리는 확보한 기밀로 아류작을 만들 생각이 없었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그게 가능하다는 걸 상대에게 주지시키고, 원하는 대로 원천 기술을 사 오면 되니까.
넥스트처럼 고글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 영세 업체들에 가끔 써먹는 방법이기도 했다.
그만큼 효과는 탁월했고.
아쉬움에 해리는 입맛을 쩍 다셨다.
"뭐, 어쩔 수 없지."
-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여 죄송합니다.
"원, 별말을. 미스터 박이 죄송할 게 뭐야. 그나마 고르고 고른 말에 하자가 있었던 것뿐인데."
- …….
해리가 표현한 말에 자신 역시 포함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박성원은 무겁게 침묵했다.
"암튼 고생했어. 다음에 캘리포니아로 올 일 있으면 한번 보자고."
- 네, 보스.
통화를 종료하고 핸드폰을 책상에 내려놓았다.
"쯧! 역시 힘든 일이었나?"
넥스트의 경영진도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자사의 핵심 기술 보안에 심혈을 기울였겠지.
그래도 이제 스타트업에서 벗어난 지 얼마 안 된 회사라 일말의 기대를 걸었건만.
여지없이 실망하게 되었다.
"뭐, 그게 아니더라도 따로 준비하는 게 있지만."
치사한 짓이 안 먹히면, 다음으로 치졸한 짓을 하면 된다.
여전히 해리는 넥스트의 기술을 포기할 마음이 없었다.
세계 IT 시장을 선도한다고 자타가 공인하는 고글이다.
아무리 비밀 단체 우로보로스의 지원이 있었다 해도, 지금의 명성과 부를 얻기까지 수많은 난관을 자신의 힘으로 헤쳐왔다.
앞으로도 명실상부한 IT 리더로 남으려면, 경쟁자는 무릎 꿇리고 앞서가는 기술은 가로채 와야만 한다.
"보자…. 임원 회의 일정이 다음 주 수요일이었던가?"
거기에 올린 자신의 안건이 통과되면 넥스트를 향한 치졸한 짓이 포문을 열 것이다.
내심 그 순간을 기대하며 웃음 짓는데, 갑자기 밖이 소란스러워진다.
잠시 후, 문이 벌컥 열렸다.
"해리!"
해리를 보며 인상을 잔뜩 쓰는 비슷한 연배의 남성.
그는 해리와 마찬가지로 고글의 공동창업주이자, 자회사 위튜브의 CEO로 있는 미하일 르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