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5화 중대발표
해리 페이퍼의 미간이 좁혀졌다.
예상치 못한 일에 당황해하는 비서들과 문을 막고 선 미하일 르빈.
해리는 미하일을 탐탁지 않게 노려보며 말했다.
"이게 무슨 경우 없는 행동이야?"
"경우? 그게 없는 건 오히려 너겠지!"
미하일은 문을 쾅 닫고는 책상 앞까지 한달음에 걸어왔다.
잔뜩 화난 얼굴의 그는 해리 눈앞에 서류 하나를 패대기치듯 던졌다.
"도대체 뭐 하자는 거야!"
"……."
미하일이 집어던진 서류의 표지를 확인한 해리는 픽 웃었다.
"웃어?"
"왜, 웃으면 안 되나? 그리고 이게 뭐. 무슨 문제가 있다고 그러지?"
임원회의 전에 참석자 전원에게 전달되는 문서였다.
이번 회의에서 다룰 안건과 참고자료가 담겨있는.
넥스트를 겨냥한 해리의 치졸한 짓도 여기에 포함되었다.
한때는 절친, 그리고 강력한 라이벌에서 지금은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어버린 미하일을 바라보는 해리의 표정엔 별 감흥이 없어 보였다.
그에 반해, 미하일은 이를 잔뜩 갈았다.
"여기 이거 뭐야. 한국에서의 인앱 결제 수수료율을 왜 말도 안 되게 올리는 거냐고!"
이미 2020년 하반기 고글의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플랫폼인, 모바일샵의 결제 수수료 적용을 기존의 게임에서 전 분야로 확대한 바 있다.
인앱 결제 시 고글은 앱 제작사에 30%의 수수료를 제한 금액을 정산해주고 있었다.
와플과 함께 양대 모바일 앱 플랫폼을 운영하는, 실질적인 독과점이라 이런 강제 조치도 가능했다.
"왜 한국만 40%까지 또 올리겠다는 거야! 내가 지금 거기서 기획하고 있는 프로젝트를 망치겠다는 생각이 아니면 뭐냔 말이야!"
미하일은 자신이 맡은 위튜브의 오리지널 콘텐츠 제작을 위해 한국의 영화, 드라마 제작사들과 사전 접촉 중이다.
한국 문화의 위상과 영향력이 유례없이 높은 만큼 그들과의 협업으로 위튜브의 가치를 올리고 동시에 자신의 입지를 다질 생각이었다.
당연히 그렇게 만들어진 콘텐츠들은 위튜브와 자사의 모바일 플랫폼인 고글 모바일앱을 통해 출시된다.
그런 와중에 한국에서만 수수료율이 올라간다?
한국 제작사들이 꺼려할 거다.
자신의 비즈니스에 적신호다.
해리는 순간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넥스트를 겨냥한 한 수에 자신의 라이벌인 미하일한테도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인앱 결제 수수료 인상.
사실 넥스트가 이 조치로 피해를 볼 일은 없다.
만들고 있는 리얼 월드란 콘텐츠 역시 자사의 플랫폼을 통해 출시될 성질의 것이 아니기도 했으니까.
다만, 해리는 박성원을 움직여 인앱 결제 수수료 인상 소식과 함께 헛소문을 퍼트릴 계획이다.
고글에서 기술력에 감탄해 협업을 요청하고 있는 기업이 있는데, 이곳에서 터무니없는 대가를 요구하며 갑질을 하고 있다고.
여기에 분노한 고글이 한국의 인앱 결제 수수료를 인상한 것으로 말이다.
무척 어설프고 일견 황당하기 짝이 없는 내용이다.
믿는 이보단 그렇지 않은 이들이 많겠지.
하지만, 이렇듯 명료하고 직관적이어야 효과가 뛰어난 법이다.
당장 인앱 결제 수수료 인상으로 발등에 불이 떨어질 앱 제작사들 입장에서는 분노를 표출할 대상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자신들의 밥줄을 쥔 고글에 삿대질은 못 할 테니, 소문에 기대 넥스트에게 화살을 돌리겠지.
명확한 증거가 없고 논리에 어긋나더라도 이런 식의 선동은 역사적으로도 꽤 잘 먹혔다.
그렇게 여론을 조작하여 넥스트를 궁지에 몰고, 협상 테이블로 끌어들일 심산이다.
그런 뒤, 수단으로 써먹은 수수료 인상은 철회하면 그만이다.
당사자가 꼼짝도 하지 않으면 그 주변을 뒤흔들면 된다.
고글에서 이미 여러 번 사용한 방법이기도 했다.
이마저도 안 먹힌다면….
모기업인 미래증권을 박살 내버려야겠지.
상장된 업체라고 들었으니, 고글의 자금력으로 인수해버리면 된다.
"내 말 안 들려? 뭐 하자는 거냐니까!"
미하일의 외침에 해리는 상념에서 벗어났다.
"아, 미안. 생각할 게 좀 있어서."
"……."
자신은 안중에도 없다는 해리의 태도에 미하일은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무심코 그의 눈길이 명패를 향한다.
공동 창업주였지만, 지금은 사내 서열이 나뉘었다.
해리와 미하일은 고글의 함께 만든 만큼 개인 자산도 엇비슷하고, 지분 역시 16%로 동일하다.
근데도 해리가 고글의 CEO이고, 미하일은 자회사인 위튜브의 대표인 이유는?
"설마 삼 장로님의 의중이신 거야?"
미하일 역시 해리와 마찬가지로 비밀 단체 우로보로스에 소속되어 있다.
다만, 각자 파벌이 달랐고, 해리가 추종하는 삼 장로의 위세가 미하일이 속한 칠 장로보다 높았을 뿐이다.
우로보로스에서의 위세란 곧 자금.
해리는 삼 장로 파벌의 지원에 미하일을 제치고 고글의 주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미하일보다 앞섰던 해리의 우호 지분은 2.9%.
CEO 자리를 그에게서 뺏으려면 미하일은 3%의 지분이 더 필요했다.
전체 중 3%라고 하니, 일견 별 차이 없게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고글의 시장 가치를 보면 그 같은 말이 쏙 들어간다.
1조 2천억 달러.
한화로 1,335조 6천억 원.
여기서 3%면 40조 원도 넘는다.
그만한 자금을 투자하여 지분을 확보해 미하일을 지지해줄 이는 현재 없었다.
"이런 자질구레한 일로 삼 장로님께서 나설 리가 있나."
"그럼 도대체 뭐 때문인데!"
"내 사업에 필요한 일이라서."
"…뭐?"
넥스트와 얽힌 일까지 알려줄 의무는 없다.
괜히 미하일이 알게 되면 훼방이나 놓을 테니까.
"안건으로 올라간다고 해서 다 진행되는 건 아니잖아. 임원회의 때 보자고."
내뱉는 말과는 달리 해리가 올리는 안건은 임원들의 큰 반대 없이 통과되곤 했다.
해리도, 미하일도 그 사실을 잘 알았다.
염장을 지르는 말을 끝으로 해리는 약속이 있다며 집무실을 나가버렸다.
실제 약속이 있었던 건 아니다.
속한 파벌에 따라 걷는 길이 나뉘기는 했지만, 옛 친구와 사사건건 날을 세우는 게 피곤해서 자리를 피한 것이다.
혼자 남은 미하일은 해리의 책상 앞에 놓인 명패를 한참 노려보다가 몸을 돌렸다.
* * *
"지루하군."
저도 모르게 나와버린 본심에 강하민은 놀라며 입을 막았다.
다행히 근처에 아무도 없다.
자칫 건방져 보이는 말로 미래증권에 대한 나쁜 인상을 심을 뻔했다.
[제7회 대한민국 증권회사 임원 간담회]
연회장 입구에 놓인 안내판을 쳐다보는 그의 시선은 심드렁하기만 하다.
"……."
도대체 이런 모임을 하는 이유가 뭘까?
같은 업종이니 서로의 고충을 털어놓으며 위안을 삼는 거?
그것도 아니면, 서로가 쥔 고급 정보를 몰래 주고받는 거?
꼭 참석해야 하는 자리는 아니지만, 신생 증권사로서 어느 정도 타사의 비위를 맞추는 시늉은 해야 했다.
만약 미래증권에 다른 임원이 있었다면 이 자리를 그 사람에게 양보했겠지.
미래투자신탁에서 미래증권으로 발돋움한 지 아직 석 달도 채 지나지 않았다.
회사의 임원이라고 해봤자 자신뿐이다.
예전 투자운용1팀을 맡았다가 현재는 국내주식 전담팀을 총괄하는 장한진 부장을 상무이사로 승진시킬 계획이지만, 그것도 하반기 인사 발령이라 아직 한 달도 넘게 남았다.
상대적으로 젊은 자신을 경계하는 타 증권사의 임원들 눈초리가 성가셔 구석자리로 옮겨왔다.
적당한 도수의 샴페인 잔을 들고 주위를 둘러본다.
개중 수호증권에 몸담았을 당시의 임원들도 눈에 띄었지만, 그다지 교류가 없어 강하민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그들 역시 몇 해 전까지는 자신의 부하직원이었다가 이젠 더 높은 사장직에 있는 강하민이 껄끄러운지 보고도 못 본 체다.
'그래. 이렇게 시간이나 때우다 나가자. 대충 삼십 분쯤 더 채우면 되겠지?'
이런 고리타분한 자리보다는 연인과 가지는 일분일초가 더 소중하다.
"후후."
어쩌다 그녀와 이런 관계까지 발전하게 되었는지….
절로 웃음이 나왔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신가 봅니다?"
"?!"
별안간 지척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강하민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마흔 초반의 인상 좋은 남성이 웃는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
하지만, 강하민은 마주 웃을 수 없었다.
그의 정체를 알고 있었기에 그랬다.
"미래증권 강하민 대표님이시죠? 반갑습니다. 이재민입니다."
그는 이화 그룹 오너가 차남이자, 이화증권의 대표이사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강하민입니다."
내미는 손을 마다할 순 없었다.
가볍게 그와 악수를 한 강하민은 억지로 웃는 표정을 지으려 했지만 그게 잘되지 않았다.
이화증권.
벌써 2년도 다 되어가는 일이지만, 아직도 강하민의 뇌리에는 선명히 박힌 사건이 하나 있다.
경력직으로 채용한 투자운용 3팀 최우성 대리가 타 증권사 팀장과 짜고 내부 투자 정보를 빼돌린 일.
최우성 대리가 미래투자신탁에 입사하기 전 다녔던 곳과 공모한 안후석의 직장은 같았다.
바로 이화증권.
"……."
물론, 재벌 가의 일원이면서 대표이사이기까지 한 이재민이 그런 추잡한 일에 관여되었을 거로 여기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화증권이란 이름에서 오는 거부감은 어쩔 수가 없었다.
만약 그 사건의 배후에 이재민이 있었다는 걸 알았더라면 거부감이 아닌 적대감에 불타올랐을 거다.
"요즘 증권가에 미래증권 소문이 자자합니다. 증권사로 업종을 변경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업계 수위권을 다툰다지요?"
"아, 네…. 운이 좋았죠."
사실 운 따위가 아닌 실력이다.
미래투자신탁 시절부터 탄탄히 쌓아온 실적도 한몫했고.
그룹 회장으로 취임하면서 현시운은 미래증권에서 손을 떼다시피 했지만, 과거 투자의 귀재라고 불렸던 강하민의 수완이 어딜 가진 않는다.
현재 미래증권은 업계 1위인 수호증권의 턱 밑까지 바짝 쫓는 추세다.
"그게 어디 운만으로 가능한 일인가요. 무척 부럽습니다. 제가 이끄는 이화증권은…, 말석이 아닌 것만도 다행이다 싶은데 말이죠. 하하하."
자기반성 비슷한 말을 하며 객쩍게 웃는 이재민의 모습에 강하민의 눈빛이 남모르게 번뜩였다.
'소문과는 다른데?'
욕심이 없다는 세간의 평과는 달리 강하민은 이재민의 말과 행동, 표정에서 다른 걸 읽었다.
자신이 맡은 회사의 성장을 바라는 마음?
아니, 강하민이 접한 이재민의 감정은 시기와 질투, 탐욕이었다.
무척 짧았지만, 강하민은 그걸 드러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동시에 경계가 되었다.
겉과 다른 속을 지닌 자는 멀리해야 하는 게 정론이기에.
"언제 한번 식사나 같이하시죠. 증권사를 운영해온 시간이 아무래도 강 대표님보다는 제가 더 오래되었으니, 업계 사정에 대해 도움이 될만한 것들도…."
그의 속내를 짐작하며 어떻게 거절해야 하나 고심하던 그때, 타이밍 좋게도 강하민의 핸드폰이 울렸다.
"아,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급한 일인 것 같아서…."
"…네, 받아보세요."
순간, 일그러지는 이재민의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강하민의 자신의 예상이 맞을 거로 확신하며 슬그머니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어쩐 일이야. 이 시각에?"
- 아직 모임입니까?
전화를 건 이는 현시운이다.
"맞아. 근데 무슨 일이라도 있어?"
- 긴히 의논할 게 있어서요.
"급해?"
- 뭐, 그렇게까지 급한 건 아니지만….
"흠…."
말투를 들어보니 전화상으로 나눌 얘기가 아닌 건 분명해 보였다.
지금 연회장을 나가는 거야 상관이 없지만….
'이미 약속을 해버렸는데….'
그녀와 말이다.
망설임은 잠깐이었다.
"내일 저녁에 만나는 건 어때?"
- …토요일인데 괜찮겠어요?
"토요일인 게 뭐 어때서."
- 바쁘실 것 같아서.
"어?"
- …아무 것도 아닙니다.
얼버무리는 현시운의 낌새가 왠지 수상하다.
"안 그래도 내일 현석이가 서울에 올라온다고 했었잖아. 모처럼만에 셋이 뭉치자고."
- 흐음….
"왜, 현석이 있는 데서 할 얘기는 아냐?"
- 그런 건 아니고…. 회사일이기는 한데. 뭐, 상관없겠죠. 현석이 형도 우리와 자문 계약 맺은 변호사니까요. 그래요, 그럼.
"그래. 내일 보자."
- 네. 들어가세요.
그렇게 통화를 끝낸 강하민은 다시 발걸음을 안으로 돌리려다가 멈춰 섰다.
"굳이 다시 들어갈 필요는 없겠지?"
이 정도면 충분히 성의를 보일 만큼 머물렀다.
그렇게 생각한 강하민은 몸을 돌려 주차장으로 향했다.
다음 약속장소로 가기 위해서.
순간, 이재민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떠올랐지만….
따로 약속을 한 것도 아니고.
그렇게 강하민은 처음 참석했던 증권사 임원 간담회 자리를 빠져나왔다
강하민이 연회장을 떠난 걸 알 리 없는 이재민은 입구를 바라보며 한참을 그 자리에서 서성였다.
* * *
무척 오랜만에 셋이 현시운의 집에 모였다.
최근에 이렇게 다 같이 만난 게 2019년 크리스마스이브였으니, 벌써 1년 반도 더 지났다.
배달시킨 음식과 술로 조촐한 연회를 시작한 셋은 서로의 근황에 관해 묻고 답하며 오랜 회포를 풀었다.
그리고 적당히 술과 음식이 들어갔을 때쯤.
"뭔지 말해봐. 너 중요하게 할 말이 있다고 했었잖아."
강하민의 말에 김현석은 콧잔등을 문지르더니 자신 앞에 놓인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중요하게 할 말이요?"
처음 듣는다는 듯 시운이 반문했고, 강하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 이 녀석 중대발표 할 게 있다고 하더라고."
"설마? 이번엔 변호사를 때려치운다는 말은 아니겠죠?"
"에이…, 설마 그러겠어."
예전 검사를 관둔다고 했던 술자리의 여파가 아직도 남아 있었다.
그때를 떠올린 강하민은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어깨를 부르르 떨며 자신의 잔을 집어 들었다.
"그런 거 아냐."
김현석을 픽 웃더니 빈 잔을 내려놓았다.
"사실, 나…."
서두를 꺼낸 김현석에게 둘의 시선이 모였다.
이어지는 그의 말.
"결혼한다."
"네에?!"
"푸훕!"
중대발표답게 시운은 경악했고, 강하민은 입에 머금은 술을 뿜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