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6화 삼자대면
운이 나쁘게도 강하민과 마주 보는 자리에 김현석이 있었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술이 김현석의 얼굴과 머리, 목을 축축하게 적셨다.
미처 피할 틈도 없었던, 찰나의 순간이었다.
잘 짜인 한 편의 희극을 보는 것 같은 장면.
그런 현시운의 감상과는 달리 당사자인 김현석의 얼굴은 빠르게 굳어갔다.
"큼, 크흠! …잠시만 기다리세요. 수건 가지고 올게요."
김현석의 결혼 발표에 놀란 것도 잠시.
시운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가까스로 참아가며 욕실로 향했다.
"미안."
한 손을 들어 담백하게 사과하는 강하민.
말과 달리 썩 미안해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이를 본 김현석의 이마 위로 힘줄이 불거져 나왔다.
"말에 진심이 안 담겼다. 친구야."
"내가 감정표현이 서툰 편이잖아. 순전히 너의 오해다. 친구."
"…너와 십 년 이상을 알고 지냈지만, 오늘 처음 들어보는 개소리인데, 친구?"
"이제라도 알게 됐으니 얼마나 다행이니, 친구야."
김현석의 험상궂은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그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표정만 봐도 겁을 집어먹겠지만, 익숙하게 봐온 강하민은 감흥 없는 얼굴로 티슈를 뽑아 입 주위에 묻은 술을 닦아냈다.
자신에게 주려는 줄 착각하고 손을 뻗던 김현석은 눈살을 찌푸리며 도로 팔을 내렸다.
"근데 너도 잘못한 건 알지?"
"뭐?"
"다짜고짜 결혼한다고 말하는데 놀라지 않는 게 더 이상하지. 누굴 사귄다는 말도 없던 녀석이 갑자기 결혼 발표라니? 시운이와 내가 섭섭해할 거란 생각은 안 해봤냐?"
강하민의 말에 김현석은 두 눈을 끔뻑이며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한 차례 끄덕거렸다.
"그건 미안하게 생각해. 나도 바빴고 그룹 설립 때문에 너네도 바빠 보이길래…."
"여자친구 생겼다. 겨우 두 마디다, 이 자식아! 그걸 말하는 데 한 시간이 걸려? 3초도 안 되겠네."
"…미안."
졸지에 전세가 역전되어 버렸다.
넉넉하게 서너 장의 수건을 가지고 온 시운은 예상과는 다른 분위기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원래라면 강하민이 사과하고, 김현석이 눈을 부라리는 게 정상 아닌가?
뒤바뀐 상황에 시운은 어이없어하며 수건을 건넸다.
"여기 수건. 얼른 닦으세요."
"아, 고마워."
얼굴과 목, 머리카락에 튄 술을 닦아내던 김현석은 진하게 남는 알코올 냄새에 인상을 다시 구겼다.
진득한 불쾌감과 함께 화가 올라오는 것이다.
"……."
분명 자신이 피해자다.
"뭐!"
근데 도리어 가해자인 강하민이 눈알을 부라린다.
김현석은 절친의 적반하장에 할 말을 잃었다.
"…아니다."
그래, 져주는 게 이기는 거지.
김현석은 속으로 그렇게 되뇌며 말을 삼켰다.
"그래서요?"
"응?"
"결혼식은 언제인데요?"
"아…."
시운의 물음에 김현석이 답했다.
"당장은 아니고. 내년 봄에."
그 대답에 강하민의 눈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올해가 아니라?"
"응. 지난주에 여자친구 부모님께 인사드리고 허락받았거든."
조금 전 결혼한다고 선언할 때만 해도 당장 내일이라도 식을 올릴 것처럼 말하더니.
"말하는 순서가 틀렸잖아! 여자친구가 있고, 최근에 결혼 허락을 받았다, 이렇게 시작했어야지. 다짜고짜 결혼한다고 하니 우리가 안 놀라냐!"
"뭐…, 결론은 같은데 상관있나."
"곰탱이 같은 자식."
둘의 티격태격에 시운은 웃음 지었다.
"언제가 되었든 축하드려요, 형."
"그래, 고맙다."
"일단은 축하한다."
"…어."
셋은 술잔을 가볍게 부딪쳤다.
시운의 재촉에 김현석은 자신의 피앙세에 관해 이야기를 해줬다.
과거 창원지방검찰청에서 수습으로 일할 때 자신의 사수였었다는 말에 다들 놀랐다.
특히, 시운은 형수가 될 사람의 이름을 듣고 더욱 놀라워했다.
'…똑같잖아?'
회귀 전 김현석의 배필이 되었던 그분과.
분명 자신의 개입으로 김현석의 미래는 많이 바뀌었다.
1년 더 일찍 검사로 임용되었고, 역사와는 달리 얼마 지나지 않아 그만두고 인권변호사로 활동 중이다.
"그녀도 검사를 그만뒀어. 지금은 나와 함께 일해."
"공사변에서?"
"응. 이제 두 달 조금 지났네."
동명이인은 아닌가 의심했지만, 김현석이 이내 보여준 사진으로 동일인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미래가 달라졌음에도 회귀 전과 마찬가지로 서로의 배필이 된 두 사람이라….
이런 게 소위 말하는 운명이고 필연이라는 건가?
시운은 술잔을 기울이며 놀란 속을 진정시켰다.
불현듯 그의 시선이 강하민에게 향했다.
"형은 할 말 없어요?"
"어? 무슨 말?"
시운은 게슴츠레한 눈으로 김현석을 흘깃 쳐다보고는 다시 시선을 강하민에게로 향했다.
"……."
일부러 티 나게 한 행동에 강하민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언제부터 알았냐?"
"작년 크리스마스이브 즈음? 그때 단순히 의심이었는데…. 올해 되면서 확신으로 바뀌었죠."
시운의 말에 강하민은 어색하게 웃었다.
"지금 무슨 말들을 하는 거야?"
둘에 비해 눈치가 다소 느린 김현석이 의아해하며 물었고, 시운은 웃으며 답해줬다.
"하민이 형도 비슷한 상황이라는 겁니다."
"…뭐? 그럼 너도 결혼할 사람이 있다는 거야?"
강하민은 겸연쩍게 웃었다.
"아직 그런 사이까지는 아니고…."
"여자친구가 있긴 하단 소리잖아."
"…어."
오늘 김현석의 중대발표에 강하민도 조만간 알려야겠다고 마음은 먹었는데, 이렇듯 갑작스레 밝히게 될 줄은 몰랐다.
"누구예요? 저도 아는 사람입니까?"
"나도 궁금하다. 누구야?"
강하민은 술잔만 만지작거렸다.
"아는 사람이 맞나 보죠? 회사 직원?"
"사내 커플이라…. 괜찮네."
입을 다물었더니 자기들끼리 소설 한 편을 쓸 기세다.
강하민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회사 사람 아니야."
"그럼요?"
"그게…."
"그만 뜸 들이고 속 시원히 말해봐."
둘의 은근한 재촉에 강하민은 입술을 달싹이며 작게 소리를 냈다.
"…야."
"어? 누구?"
"목소리가 작아서 안 들립니다."
둘의 아우성에 강하민은 조금 전보다 소리 높여 말했다.
"장강유통 장세연 대표라고."
"……."
"……."
김현석은 자신이 방금 뭘 잘못 들었나 싶어 귀를 만지작거렸고, 시운은 예상외의 인물에 입을 쩍 벌렸다.
설명을 요구하는 둘의 시선에 강하민은 어깨를 으쓱였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뭔가 많이 생략된 설명이다.
강하민의 사연을 알고 있었던 둘이기에 더더욱 믿기지 않아 했다.
* * *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일주일의 중간이라고 할 수 있는 수요일 저녁.
평소보다 일찍 근무를 마친 강하민은 현시운과 함께 서울 장강호텔에 도착했다.
- 안 그래도 널 한 번 만나보고 싶어 해.
주말의 술자리에서 장세연과의 교제를 밝히고 난 뒤, 강하민이 시운에게 한 말이다.
예전의 거래 대상이기만 했던 때라면 중간에 강하민이 있으니 시운까지 나설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이젠 상황이 달라졌다.
'형수님이라….'
앞서가는 강하민의 뒤통수를 쳐다보며 시운은 혼자 속으로 되뇌어본다.
엘리베이터에 오른 둘은 약속장소인 스카이라운지로 향했다.
잠시 후, 레스토랑에 들어선 강하민은 묘한 미소와 함께 주변을 둘러봤다.
"왜 그러세요?"
그에 시운이 물었고, 강하민은 웃음을 흘리며 답했다.
"음…. 그냥 새로워서."
"네?"
뭐가 새롭다는 걸까?
야경이 뛰어나고, 내부 인테리어도 훌륭하지만 그렇다고 새롭다고 표현할 정도로 특별한 건 없었다.
강하민은 사람들로 들어찬 레스토랑 안을 보며 말했다.
"내가 여길 딱 두 번 와 봤었거든."
"……?"
"두 번 다 장기우와 만나는 자리였는데…. 그때마다 손님 하나 없이 텅텅 비어있었어."
"아아…."
시운은 둘이 만나서 나눈 내용만 전해 들었었기에 그런 상황이었을 줄은 몰랐다.
그나저나 이 넓은 곳을 비워놨었단 말이야?
'장기우답네.'
돈 아까운 줄 모르는 자식.
이곳 레스토랑은 남들 시선을 의식하는 고객들을 위해 따로 룸도 마련되어 있다.
비밀 얘기를 하기에도 적합한 장소.
그런 곳을 두고 야경을 즐길 셈이었는지 레스토랑 홀 전체를 비우다니.
시운이 보기엔 그냥 돈지랄이다.
둘은 종업원의 안내를 받아 내실로 향했다.
이윽고 안내받은 특실로 들어서자, 한 아리따운 여인이 둘을 맞이했다.
장세연이었다.
"먼저 와 있었네? 늦어서 미안."
강하민의 사과에 장세연은 옅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도 도착한 지 얼마 안 됐어요. 근데 이분이…?"
장세연의 시선이 시운에게 닿았다.
시운은 웃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현시운입니다."
"반가워요. 장세연이에요."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자리에 앉았다.
종업원에게 미리 주문한 음식을 부탁한 장세연은 옆에 앉은 강하민을 살짝 흘겨보며 말했다.
"명의만 빌린 거라더니…. 여태껏 속은 걸 생각하면…."
"아, 하하…."
시운이 미래 그룹의 회장으로 취임한 걸 알고 나서야 장세연은 그동안 강하민에게 속았다는 걸 깨달았다.
미국 사모펀드?
명의만 빌린 내국인?
모두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그날 바로 약속을 잡은 그녀는 강하민을 만나자마자 쥐잡듯 잡았다.
시운의 회장 취임 전, 미리 말해준다는 걸 깜빡한 대가를 강하민은 톡톡히 치른 셈이다.
"시운 씨…, 라고 불러도 될까요?"
"네, 편한 대로 하십시오."
"고마워요."
한 그룹의 총수라면 권위를 내세울 법도 하건만 시운에게는 아직 그런 게 없었다.
장세연은 작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저와 가족들…, 장철구 회장과 장기우와의 관계는 충분히 알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에 시운은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근데 시운 씨도 장기우와 악연이 있다고 들었어요. 근데 그게 뭔지는 아직 이 사람이 알려주지 않아서…. 실례가 안 된다면 얘기를 들어볼 수 있을까요?"
시운의 시선이 강하민을 향했다.
그에 강하민은 어깨를 으쓱이며 그 시선에 답했다.
"개인 사정이잖아. 네 허락도 없이 말하고 싶지는 않았어."
그의 상식적인 배려에 시운은 피식 웃은 뒤, 장세연을 향해 입을 열었다.
"장기우와는 대학 동기였습니다."
"…아."
그리고 시운은 그녀의 이복동생과 얽힌 악연을 털어놓았다.
이유도 모른 채 학교에서 시험지 도둑으로 몰려 쫓겨난 것부터 최근 반도전자 주식 매입 건으로 날을 세웠던 일까지.
시운의 얘기를 모두 들은 장세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짓을 하고도 남을 녀석이죠."
장세연도 그간 자신이 겪은 일들을 떠올리며 공감했다.
그렇게 시작한 대화는 현재 상황에 대한 정보 공유와 향후 계획들에 대한 의논으로 이어졌다.
시운에게 이 자리는 강하민의 연인을 소개받는 사적인 자리임과 동시에, 앞으로 어떻게 장강을 공략할지 의견을 나누는 석상이기도 했다.
"주문하신 음식 나왔습니다."
음식이 나오며 잠시 끊겼던 대화는 식사가 끝난 후, 후식으로 나온 커피를 마실 즈음 다시 이어졌다.
"현재 리조트 지분을 가지고 있는 스피어, 블레스, 티엔유 말입니다만…."
어렵게 꺼내는 장세연의 말에 강하민은 뭔가를 눈치챈 듯 눈빛이 깊어졌다.
"네, 말씀하십시오."
시운의 답변에도 장세연은 한참 커피잔을 만지작거렸다.
쉽게 꺼낼 이야기가 아니라는 거겠지.
이내 결심한 듯한 눈으로 시운을 바라보며 장세연은 말했다.
"제게 신뢰를 보여주세요."
"……."
장세연은 오늘 이 자리를 마련하면서부터 생각해온 본심을 꺼냈다.
시운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입을 뗐다.
"신뢰라면….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거죠?"
"주식양수도계약서. 시운 씨 소유의 해외 투자법인 세 곳이 보유한 장강리조트의 지분에 대해 미리 계약서를 썼으면 합니다."
강하민이 약속했던 말을 믿지 못해서는 아니다.
하지만, 말뿐인 약속에는 효력이 없다.
시운과 강하민의 뜻에 동조하기는 하나, 그 이전에 장세연은 기업가다.
눈에 보이고 법적인 강제성마저 띠는, 확실한 담보가 필요했다.
시운은 그녀의 제안에 살짝 고개를 돌려 강하민을 쳐다봤다.
그의 의견을 구하는 것이다.
강하민은 쓴웃음과 함께 고개를 살짝 옆으로 저었다.
"이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난 빠질게. 사적인 관계가 판단에 영향을 미칠지도 모르니까."
연인 입장에서 섭섭한 소리일 수도 있다.
그러나 장세연은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없었다.
시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러죠. 계약서, 작성하죠."
장세연의 얼굴이 대번에 밝아졌다.
"대신, 특별 조항 하나를 넣었으면 합니다."
"네? 어떤…."
시운은 강하민을 쓱 한 번 보고는 입을 열었다.
"하민이 형이 장강 그룹을 접수하는 그날까지 장세연 대표님께선 저희 편에 서야 한다는 거. 그걸 명문화하고 싶습니다. 괜찮을까요?"
장세연 역시 강하민의 사연에 대해서 이미 들었다.
처음에 얼마나 놀랐던가.
동시에 괜찮은 결말로도 느껴졌다.
또 다른 창업주의 핏줄에게 그룹이 돌아가는 것도.
마음의 결정을 내린 장세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세요. 저 역시 바라는 바입니다."
세 사람 사이에 더욱 굳건한 동맹이 맺어지는 순간이다.
* * *
박우석은 바텐더가 막 채워준 술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
쓴맛과 함께 높은 도수의 알코올이 속을 지져놓았다.
그런데도 뻥 뚫린 가슴의 구멍은 메워지지 않는다.
'세연아….'
속으로 그녀의 이름을 불러본다.
당장이라도 전화를 걸 수 있고, 육성으로 이름을 부를 수 있음에도 박우석은 그러지 않았다.
아니, 외면했다.
벌써 5개월이 지났다.
어중간한 사이로 남기 싫어 작년 이브에 장세연의 오피스텔에 찾아갔던 일이.
고백하려 했다.
거절당해도 상관없었다.
앞으로 친구가 아닌, 남자로 다가서겠다는 결심을 밝히는 게 목적이었으니까.
그럴 생각이었는데….
그랬었는데….
박우석의 각오는 입 밖으로 새어 나와 보지도 못하고 저 아래 깊이 침잠했다.
투자회사 대표와 함께 있던 장세연의 모습이 다시 떠오른다.
자신이 오해한 걸지도 모른다고 여겼다.
그래서….
그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사람을 사서 두 사람을 며칠간 살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두 사람이 사귀고 있다는 것을.
그 이후로 박우석은 일부러 장세연을 피해 다녔다.
전화가 와도 바쁘다는 핑계로 짧게 끊었고, 혹시 마주칠까 싶어 자주 찾던 '디오니소스'에도 발길을 끊었다.
"바텐더. 한 잔 더요."
어느새 비운 술잔을 앞으로 밀었다.
쓰린 술을 아무리 부어도 쓰린 속이 희석되지 않았다.
그저 오늘도 취기에 기절하듯 잠들 뿐이다.
"이런 데서 뵙는군요."
"?"
귀에 익은 음성과 함께 옆자리로 누군가 와서 앉았다.
고개를 옆으로 돌린 박우석의 눈썹이 미미하게 떨렸다.
스물 대여섯쯤 되어 보이는 남성.
박우석도 잘 알고 있는 얼굴이다.
"오랜만입니다."
장기우는 박우석을 향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