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7화 이이제이(1)
며칠 전, 재벌 3세들의 친목 모임에 나간 장기우는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다.
- 우석이 형 이젠 모임에도 안 나오네?
- 그런 적 제법 됐잖아. 언제부터였더라?
- 왜, 박 회장님이랑 싸우고 집 나간 뒤부터.
- 그래, 맞아! 뭐, 지금은 다시 회사로 복귀했지만.
- 바로 부회장으로 승진했지. 부럽다. 우석이 형은 그 집안 외동이라 경쟁자도 없잖아.
- 근데 그거 알아?
- 뭘?
- 우석이 형, 세연이 누나 좋아하는 거.
- 정말?!
- 그렇다니까. 이 바닥에선 제법 유명해
- 근데 난 왜 몰랐지?
불과 작년까지만 해도 서자라며 거들떠보지도 않던 자신에게 초대장이 날아왔다.
아마도 장강 그룹의 후계자로 공표되어 그런 걸 테지.
참석하지 않아도 무방했지만, 소위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인 이들은 과연 어떤 생각을 지녔는지 궁금해서 초대에 응했다.
덕분에 솔깃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 그 얘기, 저도 자세히 좀 들어볼 수 있을까요?
- 아…. 장기우.
- 벼, 별거 아닙니다.
자신이 참석했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그들은 대충 얼버무리며 자리를 피하려 했지만, 장기우는 집요하게 물고 늘어져 결국 재벌 3세 사이에서 떠도는 소문을 알게 되었다.
진도 그룹 부회장인 박우석이 장세연을 좋아한다?
둘이 선을 봤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있다.
단순히 얼굴과 이름만 알고 있는 남남인 줄 알았다.
그랬는데 고등학교 시절부터 서로 잘 아는 친구 사이라니….
'일이 재미있게 돌아가는데?'
알아보니 소문은 사실이었다.
이미 장세연에게 다른 남자가 있다는 것과, 그게 바로 강하민이라는 걸 파악해뒀던 장기우는 이 상황을 이용해 보기로 했다.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말이다.
"여긴 무슨 일로…."
장기우를 쳐다보는 박우석의 얼굴에 옅은 불쾌감이 드러났다.
"술집에 어쩐 일이겠습니까. 술을 마시러 온 거죠."
박우석과 만날 목적으로 이곳을 찾은 장기우는 천연덕스럽게 그의 옆자리에 앉으며 바텐더에게 술을 주문했다.
"……."
자신만의 비밀 공간이 아니니 박우석으로서는 그의 출입을 가지고 뭐라 할 수는 없었다.
근데 어째서 지금의 만남이 우연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 자꾸 드는 걸까?
뭐,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방해를 받았으니 자리를 피하면 그뿐이다.
"그럼 마시고 가세요. 전 이만…."
"이렇게 만난 것도 쉽지 않은 일인데, 바쁘시지 않으면 저랑 대화나 좀 더 하다 가시죠? 안 그래도 술친구가 필요해서 말입니다."
일어서려는데 장기우가 말로서 붙잡는다.
장기우에 대한 박우석의 인식이 좋을 리 없다.
자신이 마음에 품고 있는 이를 힘들게 하는 존재.
자연히 나오는 대답은 차가웠다.
"바쁩니다."
"그래요? 매우 아쉽군요. 서로 나눌 얘기가 많다고 생각했는데…. 누님에 관한 것도 말이죠."
"……."
박우석은 인상을 팍 썼다.
어떤 의도로 이 자리에서 장세연을 들먹이는 걸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자신보다 세 살은 어린 장기우.
그렇다고 말을 놓을 순 없다.
친구의 동생이라지만, 호적 상만 그럴 뿐이다.
장세연과 장기우는 남만도 못한 사이다.
"글쎄요…. 아무래도 우린 각자가 원하는 게 따로 있을 것 같은데요. 혹시 또 모르죠. 서로 협력하다보면 바라는 걸 이루게 될지."
"……."
그 말이 뜻하는 바를 어렵지 않게 이해한 박우석은 잠시 고민하더니 자리에 앉았다.
장기우는 씩 웃으며 바텐더에게 술 한잔을 더 주문했다.
"얘기에 앞서 가볍게 술이나 한잔하시죠."
"……."
바텐더가 눈치껏 내민 술잔을 집어 든 박우석은 밝지 않은 표정으로 장기우와 잔을 부딪쳤다.
재계 서열 7위의 반도 그룹.
게다가 장강 그룹의 지분을 적지 않게 들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늦든 빠르든 향후 장세연, 현시운, 강하민 연합과 장강 그룹의 경영권을 두고 다툼이 생길 지도 모른다.
미리 반도 그룹과 같은 우호 세력을 늘려놓는 것도 나쁘지 않다.
장세연에 대한 박우석의 마음을 알았으니, 적당히 그를 돕고 구슬리면 확실한 자신의 편으로 만들 수 있겠지.
술잔을 기울이며 장기우는 비릿하게 웃었다.
그날 밤, 둘은 무척 긴 대화를 나눴다.
* * *
6월 말 무렵.
하나의 소식이 태평양을 건너 대한민국에 도착했다.
사실 여부가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음에도 그 소식은 적지 않은 반향을 일으켰다.
특히, 대한민국 소재의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및 게임 제작사의 반응은 극렬했다.
[고글, 인앱 결제 수수료 기존의 30%에서 5% 더 인상한 35% 방안 고려 중]
[국내 스타트업과 앱 제작 기업 적신호 켜져]
[독과점의 폐해. 공룡의 기습에 국내 IT 업계 망연자실]
[개발 중인 애플리케이션을 중도 포기하는 업체, 예년에 비해 두 배 이상으로 늘어나]
국내 언론사에서 고글의 결제 수수료 인상 정책에 관한 기사를 앞다퉈 실었고, 고글 코리아 사옥 앞으로 취재진까지 몰려갔다.
- 아직 확정된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본사 내에서도 검토 중인 사안입니다.
작년 고글 모바일앱 인앱 결제 수수료 확대 시행 전에도 고글 코리아 대표인 박성원은 비슷한 말을 했었다.
오히려 박성원의 그 말에 수수료 인상을 기정사실로 하는 신문사도 있었다.
고글 관계자의 입에서 내년 1월부터 시행 예정이라는 믿을만한 정보에 불만들이 터져 나올 때쯤, 출처를 알 수 없는 소문이 웹 상을 떠돌아다녔다.
[고글이 우리나라만 인앱 결제 수수료 인상하려는 이유!]
익명성에 기댄 누군가의 커뮤니티 게시글.
원본은 올라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지워졌고, 계정마저 삭제되었다.
하지만, 캡처된 내용이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내용은 이랬다.
고글이 발굴한 IT 기업이 있었다.
그곳과 협업을 진행하는 도중에 국내의 한 증권사가 끼어들었다.
탐내던 기술을 홀라당 집어삼킨 증권사는 고글 지분의 10%를 대가로 딜을 하고 있으며, 그에 격분한 고글이 이번 결제 수수료 인상안을 결의했다는 것.
고작 IT 기술 하나에 천조 원 이상의 가치를 지닌 기업, 고글의 지분 10%를 요구했다는 것도 황당했고, 세계 시장을 선도하는 고글이 고작 이런 이유로 인상안을 결의했을 리 없다는 대다수의 주장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한 신문사의 인터뷰 기사가 올라오며 여론은 크게 반전하였다.
- 고글은 합리적인 회사입니다. 추측성 글의 내용은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이번 인앱 결제 수수료 인상은 치밀한 시장 분석하에 당사의 모바일샵이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판단에 논의 중인 겁니다. 아직 확정된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일단 박성원 고글 코리아 대표는 루머에 대해 사실무근이라는 말로 입을 뗐다.
근데 그가 이어서 한 말이 사람들 이목을 집중시켰다.
- 물론 당사에서 협업을 원했던 IT 기업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결국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고글은 그런 일로 보복성 행위를 하는 기업이 아닙니다.
뒷말은 중요하지 않았다.
루머라고 여겼던 글의 내용 중 일부를 박성원이 사실이라고 인정을 했다는 게 중요했다.
잘만 짜면 스토리가 그럴듯하게 만들어진다.
각 언론사는 고글이 눈독을 들였다는 IT 기업과 게시글에 나온 증권사를 찾으려 뛰어다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업체를 밝혀냈다.
2달 전에 있었던 상하이 국제 IT 박람회에서 선풍을 일으켰던 가상현실 콘텐츠 제작기업 넥스트와 최근 설립된 미래 그룹의 지주회사인 미래증권.
고글의 수수료 인상 기사에 넥스트와 미래증권에 관한 내용이 원인인 것처럼 내용이 실렸고, 인터넷 영세 신문사들까지 2차, 3차 가공하여 기사를 냄으로써 각 포털사이트는 한동안 이와 관련한 이야기로 북새통을 이뤘다.
앱과 게임 제작사들의 불만 섞인 시선 역시 고글이 아닌 미래 그룹을 향했다.
덩달아 그룹 회장인 현시운 역시 화제의 인물로 떠올랐다.
아직 사진이나 인물 정보가 공개된 것은 아니지만, 스물일곱의 자수성가한 재벌이라는 사실은 언론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다.
각 신문사의 인터뷰 요청이 미래 그룹 비서실로 쇄도했지만, 현시운의 지시를 받은 비서실장 권지환은 이를 모두 거절했다.
동시에 당사자의 동의 없이 낸 기사를 즉시 내릴 것을 요구하며, 불응 시 법적인 조처를 하겠다고 엄포까지 놓았다.
미래 그룹의 이런 대응에도 현시운에 대한 기사는 빠르게 퍼져나갔다.
* * *
"……."
약속 장소에 도착한 현시운은 미팅룸에 혼자 앉아 상대를 기다렸다.
내부 회의가 잠깐 길어진다는 비서의 말에 시운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앞에 놓인 차를 들이켰다.
기다리기 무료하던 차에 핸드폰으로 인터넷을 확인했고, 여전히 고글의 일로 시끄러운 기사를 대충 훑어봤다.
[미래 그룹 현시운 회장의 대학교 동창을 만나다.]
한 지역 인터넷 신문사의 기획 기사.
궁금증에 시운은 클릭했고, 몇 줄 읽지 않아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
[현시운 회장과 같은 대학교 동창인 진모 씨(27)의 말에 따르면, 그는 학창 시절부터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남의 불행쯤은 아랑곳하지 않았던 인물이며….]
뒤를 잇는 내용에 시험지를 훔치려다 퇴학당했다는 일화까지 실려있다.
이걸 안다는 점에서 분명 시운의 동창을 인터뷰한 게 맞았다.
"진모 씨라…."
자신의 대학교 동창 중 진씨 성을 가진 녀석은 단 한 명뿐이다.
진상진.
과거 미래투자신탁에 친척의 도움으로 입사를 하려다 쫓겨난 뒤에 조용하다 했더니….
이런 식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또 드러내는구나.
끼익-
혀를 차며 기사를 읽어내리던 시운은 문이 열리는 소리에 얼른 핸드폰을 종료했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흰 머리카락이 절반 이상을 덮은 육십도 넘어 보이는 노인.
시운이 오늘 만나기로 약속했던 인물이다.
"아닙니다. 제가 조금 일찍 온 겁니다."
웹소설 플랫폼, 글천국.
그곳의 대표이사인 김철이다.
글천국은 한때, 국내 제일의 웹소설 플랫폼으로 이름났던 곳이다.
지금은 후발 주자로 뛰어든 대기업들의 물량 공세에 시장 점유율을 많이 뺏겼지만, 여전히 신인들의 등용문이라는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다.
시운이 여기에 온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드라마로 제작할 인기 웹소설의 판권을 계약하기 위해서다.
이미 이곳에서 영화 판권을 계약한 '3인칭 조연 시점'이 다음 달 중순, 크랭크인을 준비 중이다.
5년간 세 편이 제작될 예정이며, 주·조연의 캐스팅까지 끝난 상황이다.
미래E&M의 성공적인 시장 진입을 위해 시운은 오늘도 콘텐츠 확보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어떻게, 결정은 내리셨습니까?"
"……."
김철 대표는 대답 없이 가져온 서류만 만지작거렸다.
최근 인기리에 완결된 '재벌가 막둥이'의 드라마 판권 계약서다.
"외람되지만, 결정을 내리기 전에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김철의 굳은 표정에서 시운은 어떤 걸 말하려는지 대충 예상이 되었다.
"말씀하시죠."
"…지금 시끄러운 고글 사태. 기사에 나온 것처럼 귀사가 관련된 겁니까?"
시운은 옅게 웃으며 대답했다.
"어느 정도는 말이죠."
"어디까지가 사실입니까?"
"고글이 자회사인 넥스트에서 개발한 기술을 탐낸다는 건 맞습니다."
"그럼 고글 지분 10%를 대가로 요구하셨다는 건 사실이 아니란 말이군요."
조금은 안도해 하는 김철을 보며 시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실제로는 지분 100%를 요구했었으니까요."
"?!"
박람회에서 딜을 한 조셉 테이슨에게 시운이 고글의 현재 시장 가치를 요구한 건 사실이니 말이다.
시운의 말이 믿기지 않는지 한참을 바라보던 김철은 이내 헛웃음을 흘렸다.
"허, 거참. 소문이 과장되었다고 여겼는데…."
물론 악의적으로 탈바꿈된 내용이 많다.
그 때문에 여러 앱 제작사로부터 비난을 받는 것도 사실이고.
그렇다고 고글과 얽힌 모든 속사정을 공개하기도 여의치 않다.
이미 여론이 자신들에게 불리한 상황이니 사실을 말해도 믿어줄지 의문이다.
더그 베이커의 기밀 유출 시도는 이미 덮기로 약속이 된 터라 써먹을 수도 없었다.
"내부에서 걱정이 많나 봅니다."
"흠…. 아무래도 그렇지요. 글천국 역시 모바일 앱 플랫폼이 고글이니까요."
요즘 웹소설을 컴퓨터로 읽는 이는 많지 않다.
아니, 모바일로 손쉽게 접할 수 있기에 웹소설 시장이 지금처럼 폭발적으로 성장했다고 해야겠지.
그동안 프리웨어처럼 가져다 쓴 플랫폼의 유료화 정책에 글천국의 수익성은 예전보다 많이 나빠졌다.
만약, 기사에 나온 것처럼 내년부터 고글의 인앱 결제 수수료 인상안이 시행된다면?
그만큼 더 수익 구조는 악화할 전망이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네?"
"고글의 수수료 인상안은 낭설일 뿐입니다."
"……."
인상안 자체가 넥스트와 미래 그룹을 압박하려는 고글의 기만책임을 이미 파악했다.
그렇지 않고선 루머나 다름이 없던 악의적인 소문이 이렇듯 빨리 퍼질 수 없었다.
이미 다른 경로로 확인한 바이기도 했고.
방금 김철에게 확신을 가지고 말한 것처럼 시운은 이번 일을 하나의 해프닝으로 만들 작정이다.
그에 대한 준비는 이미 마쳤다.
"흠…."
고글의 인앱 결제 수수료 인상 문제를 논외로 치더라도 이번 드라마 판권 계약은 글천국 입장에선 이득이다.
괜히 문제의 핵심에 있는 미래 그룹과 계약을 맺었다간 여론의 뭇매를 함께 맞게 될 걸 염려한 임원들의 반대가 있었지만….
김철의 결심은 확고했다.
"계약하시죠."
"네, 결정에 감사드립니다."
일사천리로 '재벌가 막둥이' 드라마 판권 계약을 마친 시운은 계약서 한 부를 챙겨 들고 글천국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강철완을 대동하고 지하주차장으로 향한 시운은 차에 오르자마자 핸드폰을 들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신호음 뒤로 상대가 받았다.
"현시운입니다."
- 네, 시운.
미국 뉴욕에 있는 투자법인, 스피어의 대표인 대런 체스터였다.
부웅-
차의 출발과 함께 뒤로 쏠리는 무게감을 느끼며 시운은 준비했던 말을 핸드폰에 대고 읊어댔다.
"고글…. 예정대로 진행하시죠."
- 그러겠습니다.
통화는 짧게 끝났다.
도로 양 옆으로 높게 솟은 건물을 바라보며 시운은 중얼거렸다.
"오랑캐로 오랑캐를 제압한다…."
그의 입가로 미소가 그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