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로 재벌 참교육-89화 (89/139)

§089화 이이제이(3)

3주의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웅성웅성.

방금 의장의 입을 통해 알려진 안건에 고글 임시주주총회 장내는 소란스러워졌다.

미하일 르빈은 자신을 표독스럽게 노려보는 해리 페이퍼의 시선을 여유 있게 받아넘겼다.

"지금부터 투표를 시작하겠습니다. 의결권을 가진 주주들께서는 나눠드린 용지에 찬반을 표시하여 앞에 놓인 투표함에 넣어주십시오."

어수선한 와중에도 투표는 예정대로 이루어졌다.

"……."

막 투표를 끝내고 자리로 돌아가는 스피어의 대표, 대런 체스터를 보는 두 쌍의 시선.

죽일 듯 노려보는 해리와 협의한 대로 의결권을 행사했을 거로 여기며 환히 웃는 미하일.

둘의 대조적인 시선을 한 몸에 받은 대런은 쓴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박성원이 전한 현시운의 요구 조건에 해리는 응하지 않았다.

현시운과 고글 지분 3%를 가진 세 투자회사의 관계.

우연이 알게 되었다는 변명은 설득력도 없고, 궁색하기만 하다.

넌지시 미하일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며 정보를 흘렸지만, 그에 대한 반응은 없었다.

급해진 해리는 박성원을 통해 회유와 협박을 동시에 했다.

임시주주총회에서 3%의 의결권을 행사하지만 않으면, 기존의 30% 인앱 결제 수수료를 20%까지 낮춰주겠다.

만약,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미래증권을 인수해버리겠다.

어차피 현시운 입장에서는 인앱 결제 수수료가 인상되든 인하되든 크게 상관이 없었다.

또한, 미래증권의 지배구조가 탄탄하기에 아무리 자금이 많은 고글이라도 섣불리 기업 인수를 단행할 수 없었다.

해리가 그랬듯 현시운 역시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렇게 진전 없이 고글의 임시주주총회가 열린 오늘.

미하일의 바람은 이루어졌다.

"찬성 44.2%, 반대 44.1%로 해리 페이퍼의 CEO 해임안이 가결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의장의 선언에 장내는 좀 전보다 훨씬 더 시끄러워졌다.

미하일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얼굴 가득 지었고, 해리는 이를 악물었다.

미하일의 노림수대로 양 진영의 지분율 차이는 평행선을 달렸다.

이번 해리 페이퍼의 해임안 가부의 결정권을 쥔 것은 스피어, 블레스, 티엔유가 들고 있는 3%가량의 지분이었다.

이변은 없었다.

"쳇!"

이어서 신임 CEO 선임안이 안건으로 올라오자, 해리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해임안이 통과되면서부터 이미 미하일이 새로운 CEO가 되리라는 건 이 자리에 모인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잔뜩 화가 난 얼굴로 회장을 나가는 해리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미하일의 입가에서 웃음이 떠나지를 않았다.

"지금부터 투표를 시작하겠습니다."

의장에 선언에 미하일은 투표용지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신임 CEO 선임안의 결과가 나왔다.

이 역시 앞선 해임안과 마찬가지로 가결되었다.

그렇게 고글 창립 이래 처음으로 CEO가 해리 페이퍼에서 미하일 르빈으로 바뀌었다.

같은 날, 대한민국의 언론사들은 일제히 미하일 르빈의 CEO 취임과 함께 고글에서 정식으로 발표한 인앱 결제 수수료 인상안 전면 무효화를 주요 기사로 다뤘다.

미래 그룹을 향한 날선 시선이 걷혔음은 당연했다.

* * *

뚜벅뚜벅.

노아 펠노러는 예정된 시각에 맞춰 자신의 비밀방으로 향했다.

펠노러 가문의 당주인 자신 외에는 그 누구도 발을 들일 수 없는 공간.

지문과 홍채 인식까지 거치고 나서야 굳게 닫혔던 문이 열렸다.

노아는 들어서자마자 문가에 놓인 옷걸이에서 긴 후드가 달린 검정 로브를 몸에 걸쳤다.

로브의 왼쪽 가슴 부위에는, 구체를 감싸며 자신의 꼬리를 물고 있는 뱀의 형상이 금실로 수놓아져 있었다.

1800년대 중반 미국 석유 재벌로 일가를 이룬 론 펠노러의 고손자인 노아는 비밀 결사단, 우로보로스의 일원이다.

일반 단원도 중간 간부도 아니다.

그는 우로보로스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일곱의 장로직 중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한쪽 벽면을 차지한 여섯 개의 대형 모니터.

노아는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는 그 앞에 앉아 기계를 조작했다.

이내 모니터가 일제히 켜지며 자신과 비슷한 복장을 한 이들을 비췄다.

- 칠 장로. 늦었군.

2번 모니터의 인물이 나직이 말했고, 3번 모니터가 이를 받았다.

- 말석을 차지한 주제에 모두를 기다리게 하다니.

그 말속에 은은한 분노가 스몄다는 걸 노아는 간파했다.

아무래도 최근 고글에서 있었던 일 때문이겠지.

한껏 콧대 높게 행동하던 삼 장로의 일그러진 얼굴을 상상하니 노아는 즐거워졌다.

후드에 살짝 가려진 입가로 은근한 미소가 그려졌다.

"아직 1분 정도는 남은 거로 아는데? 내가 시간을 잘못 안 건가?

우로보로스의 서열은 각자가 가진 재산의 크기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결사단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장로직에까지 오르면 그건 무의미해진다.

우로보로스의 수장인 단주의 자리가 초대 이후로 쭉 공석으로 남은 상황이라 그 아래의 지위인 장로들이 협의 체제로 천년 넘게 조직을 이끌어왔다.

일곱 장로 사이에 서열은 없으며, 모두가 한 표의 의결권을 쥔 평등한 관계였다.

노아는 슬쩍 1번 모니터로 시선을 옮겼다가 푸념하듯 말을 늘어놓았다.

"오늘도 일 장로는 참석 안 하는 건가?"

그에 나머지 다섯 장로 모두 침묵했다.

이 장로부터 칠 장로인 자신과는 달리 일 장로는 특별했다.

재산의 정도에 따라 가치가 매겨지는 우로보로스에서 일 장로만은 그 잣대에서 자유로웠다.

우로보로스의 전신은 브레멘 상인길드로 그 역사는 서기 96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의 길드장.

그가 바로 우로보로스의 초대 단주였으며, 일 장로 직위는 대대로 그의 후손에게 이어졌다.

무려 천년도 더 전에 죽은 인물이지만, 그가 이룩한 위업을 기리고자 초대 장로들이 만장일치로 결정한 관습이 여태까지 지켜진 것이다.

또한, 우로보로스의 기원을 잊지 말자는 의미에서 조직 내 공용언어는 독일어가 사용되었다.

세습을 보장받아 이어 내려왔다지만, 일 장로의 가문 역시 천문학적인 재산을 보유한 유서 깊은 상인 집안이다.

하지만, 이 장로와 삼 장로 가문의 재산 규모보다는 상당히 뒤처졌다.

- 젊은 애송이를 그 자리에 올렸으니 이럴 수밖에.

- 육 장로의 의견에 동감하는 바야. 어리다 보니 오랜 전통을 무시하는 행동을 보여. 경고가 필요해.

'후후.'

노아는 그저 웃음만 나왔다.

사실 여기 모인 여섯의 장로 중 이 장로와 삼 장로를 제외하면 우로보로스에 입단한 지 백 년도 되지 않은 가문들이다.

그런 이들이 전통 운운이라니.

- 다들 쓸데없는 말은 삼가도록.

오랜 시간 일 장로를 대신하여 장로 회의를 주관해온 이 장로의 말에 다들 입을 다물었다.

- 모일 사람은 다 모였으니, 이만 회의를 시작하도록 하지.

이 장로의 선언과 함께 순서에 따라 장로 한 명씩 자신이 들고 온 건의 사항과 특이점들을 말하기 시작했다.

- 근래에 서아시아 지역의 분쟁이 심상치가 않아. NATO를 투입해야 할 시점이 아닌가 싶은데….

- 유가를 안정시키려면 그래야 하지. 나 역시 이에 동의하는 바야.

- 그보다는 남중국해 분쟁의 해결이 시급해. 난사군도에 대한 중국의 야욕을 꺾어놓을 필요가 있어.

- 그러면 뭐 해. 현 미국 대통령은 온건파라 중국과 부딪치길 겁내 한다고. 차라리 사업가 출신의 허풍쟁이라도 전 대통령이 나았어.

- 남미 마약 카르텔의 문제는 언제….

- 그보다는 러시아 가스 채굴권부터….

각자의 이권이 걸려있다 보니 자신의 안건부터 정식으로 채택되길 바라며 다들 아우성들이다.

그에 끼어들지 않고 침묵을 지키는 이는 셋이었다.

이 장로와 삼 장로, 그리고 칠 장로 노아.

- 자, 다들 그만.

이 장로가 손을 들어 모두를 제지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이 장로는 정면을 주시하며 입을 열었다.

- 칠 장로는 할 말이 없는가? 평소와 달리 아까부터 조용하군.

이 장로의 지적에 모두의 시선이 칠 장로를 향했다.

그에 쓰게 웃으며 노아는 입을 열었다.

"최근에 손에 들어온 회사 하나에 신경을 온전히 쏟다 보니 말이야. 오늘은 건의할 게 없군.

- …….

삼 장로의 후드가 부르르 떨리는 게 한눈에 보였다.

고글의 CEO가 바뀌었다는 걸 대략적으로나마 전해 들은 다른 장로들은 작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 그들을 향해 시선을 옮기며 노아는 말을 이었다.

"근데 도중에 흥미로운 특이점을 하나 발견했어."

그게 무언지 직감한 삼 장로의 시선이 노아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 뭔가, 그 특이점이라는 게?

이 장로의 물음에 노아는 입가를 끌어올리며 대답했다.

"아직 확실한 건 아니지만…. 어쩌면 초대 단주와 마찬가지의…, 미래안을 지닌 이가 나타났을지도 몰라."

- ?!

- 뭐, 그게 무슨….

- 말도 안 되는 소리!

- 허어…. 만약 그게 사실이면….

각양각색의 반응들.

노아는 자신 앞의 콘솔을 조작하여 미리 준비해온 인물의 정보를 다른 장로들과 공유했다.

그걸 확인하느라 한참 침묵이 흘렀고, 각자의 속내를 들키지 않으려 애쓰며 저마다의 궁리를 해대는 모습들이 화면으로 비쳤다.

'나만 알고 있었으면 공개하지 않았을 텐데….'

노아의 시선이 3번 모니터로 향했다.

지난번 고글 CEO 교체 때 삼 장로 측으로도 정보가 넘어갔었다.

다른 장로와 달리 노아처럼 이미 이를 알고 있었던 그는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 이게 사실인가?

이 장로의 확인에 노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미래안을 지녔는지 어떤지는 몰라도 그간의 행적들을 보면 가능성은 있지 않아? 우로보로스의 기록에 남아있는 초대 단주와도 비슷한 행보야. 어쩌면 예언서에 나와 있던 그 존재일 지도 모르지."

- 으음….

이 장로의 침음성과 함께 다른 장로들이 입을 열어 저마다의 의견을 꺼내놓았다.

정말 미래안을 보유했는지를 떠나 인재임은 분명하니 우로보로스에 영입해야 한다는 의견과 미래안을 가진 게 사실이라면 자신들을 위협할 정도로 성장하기 전에 미리 제거해야 한다는 의견까지 나왔다.

- 그만.

이 장로는 생각을 마쳤는지 다시 입을 열었다.

- 정말 그가 미래안의 주인이라면…. 이 사안은 초대 단주의 유지에 따라 진행한다.

죽기 직전, 자신과 비슷한 능력을 지닌 후인의 등장을 예언하며 유지로 남겼던 말.

[그가 원한다면 우로보로스의 모든 걸 넘겨라.]

하지만, 천년도 더 전의 유지였고 이를 지키려는 장로는 드물다.

그건 전통을 중시하는 이 장로 역시 마찬가지였다.

- 다만, 그 전에 장로 전원이 참석한 자리에서의 표결로 초대의 유지를 받들 것인지 말 것인지를 정하도록 하지. 결정이 나기 전까지는 이자에게 그 누구의 접근도 허용하지 않겠다. 이를 어기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를 거다.

그동안 자리를 비워도 크게 신경쓰지 않았던 일 장로가 필요해진 순간이다.

'이거, 일이 재밌게 돌아가는군.'

자신이 쏘아 올린 불꽃이 어떤 모양으로 하늘을 수놓을지 노아는 무척 기대가 되었다.

* * *

무더웠던 여름이 지나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가을로 계절은 접어들었다.

2021년 9월 4일 토요일.

현시운은 모처럼 혼자 차를 운전하여 어디론가로 향했다.

목적지는 강남의 어느 한 예식장.

오늘은 지인이 결혼하는 날이다.

예식장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위로 올라간 시운은 입구에 서서 손님을 맞이하는 새신랑을 향해 다가갔다.

"결혼 축하드립니다."

"아, 아…. 회장님. 오,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와야죠. 장 대리님 결혼식인데."

결혼식을 올리는 사람은 바로, 예전 미래투자신탁 시절에 팀원으로 데리고 있었던 장구용이었다.

그리고….

"어머! 회장님!"

신부대기실에 들른 시운을 반갑게 맞이하는 여성.

오늘 장구용과 백년가약을 올리는 피앙세 역시 같은 투자운용2팀에서 함께 일했었던 전민아다.

두 사람이 사귀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불과 며칠 전, 전민아가 자신의 집무실로 찾아와 청첩장을 건넬 때 비로소 알았으니 말이다.

내성적인 장구용과 외향적인 전민아.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으면서도, 또한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

둘의 결혼식에 많은 하객이 참석했다.

미래투자신탁 시절부터 함께 일해온 임직원들은 물론, 미래증권의 새 식구들도 대거 자리했다.

시운을 발견한 회사 직원들이 놀라는 표정으로 인사를 건넸고, 그는 일일이 고개를 끄덕여주며 걸음을 옮겼다.

장구용과 전민아의 신혼집에 들어갈 가전제품 일체를 결혼 선물로 해줬지만, 그걸로 끝낼 생각은 없었다.

시운은 신랑과 신부 양측에 공평하게 동일한 금액의 축의금을 내고 돌아섰다.

"헉!"

"……."

액수를 확인한 신랑, 신부 측 사람들의 놀라는 반응이 뒤따른다.

십여 분 후, 식이 시작되었다.

장구용이 긴장한 발걸음으로 입장하고, 그 뒤를 이어 부친의 손을 잡고 전민아가 식장을 가로질렀다.

짧고 굵은 주례사에 이어 신랑 측 친구들의 짓궂은 체력 테스트와 축가가 이어졌고, 두 사람의 행진을 끝으로 결혼식은 일단락되었다.

시운은 기념 사진 촬영까지 마치고 예식장을 나왔다.

식사라도 하고 가라는 두 사람의 권유에 시운은 약속이 있다고 말하며 양해를 구했다.

내심 섭섭해하는 눈치였지만, 시운이 바쁜 몸이란 걸 둘도 충분히 이해했다.

주차장으로 돌아온 시운은 곧바로 차에 올라타고선 일산의 한 영화세트장을 내비게이션에 찍었다.

블루드래곤 픽처스에서 한창 촬영 중인 첫 영화 현장을 방문하여 격려하고자 함이다.

남들 다 쉬는 주말에도 고생하는 직원을 위해 허기를 채워줄 풍성한 메뉴의 밥차를 이미 보내놓았다.

막 목적지 설정을 마치고 차를 출발하려 하는데, 시운의 핸드폰이 짧게 울렸다.

"아, 벌써 이때가 되었나?"

전화도 문자메시지도 아니다.

일정을 미리 지정해놓은 스케줄 알람이 울린 것이다.

알람 내용을 보는 시운의 입가가 씰룩였다.

"빚을 갚아줄 차례군."

인터넷 앱을 실행하여 일본발 뉴스를 확인한 시운은 웃는 낯으로 차를 몰아 예식장을 빠져나왔다.

그가 향하는 방향은 북쪽이었지만, 마음은 남쪽 바다 건너 일본을 향해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