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2화 강 건너 불구경
2021년 9월 10일의 니케이255 지수는 하베 신이치 총리의 취임과 새로운 내각 구성에 대한 기대감에 오랜 부진을 꺾고 23,435.56 포인트까지 반등해 있었다.
그러던 게 그다음 주 월요일, 전일 터진 역대급 스캔들에 오전 장부터 하락 반전하더니 이날 종가는 전주 금요일 대비 1,083.29 포인트까지 떨어졌다.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연일 800에서 1,200 포인트 사이를 오가며 하락을 반복했다.
그러다 9월 27일 월요일이 되어서야 겨우 바닥을 다지는 흐름을 보였다.
이때의 니케이255 지수는 16,215.55 포인트로 2020년 3월 코로나 19 범유행 사태 때 이후로 가장 낮은 종가를 기록했다.
"이제 수익을 실현하죠."
- 네, 보스!
30% 이상의 폭락.
현시운은 반등의 조짐을 보이는 일본 증시에 그동안 사뒀던 보험과 파생상품의 옵션 발동과 매도를 지시했고, 이번에도 그의 판단이 옳다는 걸 두 눈으로 확인한 여섯 해외투자법인과 미래증권은 즉시 이를 이행했다.
시운은 이례적으로 이번 일본 투자로 낸 성과 보고서를 약식으로 요청했고, 퇴근하기 한 시간 전에 모두 받아볼 수 있었다.
물론, 같은 건물에 있는 미래증권 해외투자사업부의 보고서는 정해진 사내 문서 양식에 맞춰 제일 먼저 결재로 올라왔다.
결재판과 메일수신함을 여는 시운의 입가에 웃음이 절로 걸렸다.
고글의 지분 3%를 계속 보유하고 있다 보니 투자한 금액 규모가 예전만큼 크지는 않았다.
그래도 박박 긁어모으니 대략 5조 원 정도는 되었다.
돌아온 수익은 그 금액의 여섯 배에 가까웠다.
보험과 파생상품의 옵션과 보장금액은 다양했는데, 그중 가장 높은 수익을 자랑한 투자 상품의 수익률은 1,000%에 이른다.
이번에 투자를 진행한 모든 금융 상품은 일본 현지의 증권사들을 통해 매입했다.
주가 하락에 오천억 엔에 가까운 투기성 자금이 유입되자 현지 증권사들은 투자사의 무능함을 비웃으며 한껏 즐거워했다.
새로운 총리와 내각 구성으로 경기가 차츰 회복세로 돌아서고 있다고 모두 전망했던 까닭이다.
그들로서는 전혀 예상도 못 했을 거다.
종전 이후 역대급 정계 스캔들이 터질 줄은.
일이 벌어지고 난 뒤에 후회해봤자 늦다.
그들의 발등 위로 펄펄 끓는 마그마가 부어졌다.
제발 자신들의 증권사에 투자금을 유치해달라는 간곡한 부탁도 외면한 채, 스피어 외 모든 해외투자법인과 미래증권은 수익만 실현한 채 홀연히 일본 투자시장을 떠나버렸다.
일본 증권사들은 보험 책임자에게 막대한 손실의 책임을 물어 퇴사 조치했다.
쫓겨난 이들은 이번 정계 스캔들을 폭로한 게 미래증권을 비롯한 해외 투자사들일 거라며 진실에 아주 가까운 추론을 내세웠지만, 아무도 이를 귀담아듣지 않았다.
금액의 차이만 있을 뿐, 평소에도 이런 식의 투자는 으레 있었던 까닭이다.
일본 투자로 약 30조 원에 달하는 자산 증식이 이루어졌다.
퇴근 준비를 하는 와중에도 시운의 입가에서 웃음이 멎지 않았다.
띠리리-
이때, 내선 전화가 울렸다.
액정 위로 뜬 발신자명.
미래증권 대표이사 강하민이었다.
"네."
- 강하민입니다.
"말씀하세요."
- 음…. 지금 퇴근 시간은 분명 지났죠?
그 말에 시운은 벽시계를 바라봤다.
정확히 오후 6시 1분을 지나고 있었다.
"그렇네요. 근데 무슨 일입니까?"
- 오늘 술이나 한잔하자.
회사 내에 보는 눈들이 많아 업무 시간만큼은 본분에 맞게 행동하자고 약속한 둘이다.
깐깐한 성격답게 퇴근 시간이 지나자 칼같이 사적인 관계로 돌변하는 강하민의 태도에 시운은 한결같다며 웃었다.
"그럽시다. 어디로 갈까요?"
- 어디긴. 당연히….
"디오니소스?"
- 그렇지.
어느 순간부터 강하민은 술을 마실 일이 있을 때마다 디오니소스를 고집했다.
여자친구인 장세연의 지분이 많은 고급 바 아니랄까 봐 이렇듯 매상을 챙기는 것이다.
평소 회사에서 직원들에게 보이는 냉철함과는 확연히 차이 나는 모습이다.
"아무리 그래도 시작부터 술로만 배를 채울 생각은 아니죠?"
- 비싼 양주로 배를 채우는 게 얼마나 호사스러운 일인데 그래.
"…알았어요. 과일 안주나 넉넉히 시켜줘요."
- 그걸 왜 나한테 말해?
"네?"
- 네가 살 건데 말이지.
"……."
순간 시운은 없는 약속을 만들어 버릴까 고민했다.
"후우. 밑에서 봐요."
- 그래. 5분 뒤에 보자.
시운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외투를 챙겨 방을 나섰다.
* * *
디오니소스의 특실을 차지한 현시운과 강하민은 호박빛 액체가 담긴 온더록스 잔을 쨍하니 부딪쳤다.
얼음이 녹으며 희석되었다지만, 역시 독한 술이니만큼 속이 찌르르 울렸다.
시운은 자신이 주문한 과일 안주 중에서 먹기 좋게 한입 크기로 잘라진 멜론을 집어 먹었다.
달곰한 과육에 혀에 남은 술의 쓴맛이 씻겨 내려갔다.
"투자요?"
"어. 제법 유망한 업체가 있어서 말이지."
"흐음…."
명목상은 일본 투자 대성공을 기념 삼아 한턱 쏘라는 거였지만, 실상은 강하민이 눈여겨본 해외 업체에 대한 투자를 의논하고자 함이다.
'이맘때 특출난 업체가 있었던가?'
회귀 전의 기억을 들추어봤지만, 딱히 떠오르는 건 없었다.
뉴스로 떠들썩하게 보도된 게 아닌 이상은 자신도 상세히 알지 못했기에 시운은 그냥 그런가보다 여기며 입을 열었다.
"어떤 업체인데요?"
"넥스트와 비슷해. IT 기술 개발."
"음…."
더더욱 알 수 없었다.
딱히 IT 부문에서 크게 도약할 만한 기념비적인 사건이 있었던 기억이 없었으니까.
뭐, 코로나 19 범유행 사태가 자신이 개입함으로 1년 일찍 종식되는 분위기니 그만큼 역사가 달라진 걸지도 모르지.
그리 생각하며 강하민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데….
"…어디라고요?"
잘못 들었나?
"니콜스. 실리콘밸리에 있는 업체야. 전기차 자율주행 기술을 개발하는 곳인데 거의 완성 직전 단계라고 하더라고."
"……."
니콜스.
시운도 알고 있는 이름이다.
방금 강하민이 한 말처럼 자율주행 부문에서 획기적인 기술을 완성했다는 소식으로 접해서 그런 건 절대 아니었다.
시운은 니콜스에 대한 얘기를 회귀 전 보고 들은 기억을 다시 떠올렸다.
분명, 범죄를 다루는 방송에서였지.
"그거 사기인데…."
"어? 뭐라고?"
시운의 작은 중얼거림에 강하민이 되물었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싱겁기는. 아무튼, 잘 들어봐. 벌써 이곳에서 이스라엘 1위 기업인 다비브로부터 1억 달러의 투자를 받았어. 미국 전기차 제조 부문 1위인 에디슨과도 기술 협약을 맺었고. 이제 막 나스닥에 상장한 상황이니 어서 투자를 해야…."
이어지는 강하민의 설명은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시운은 곰곰이 생각했다.
'니콜스. 분명 상장 후 주가가 여섯 배까지 오르기는 했지.'
그 뒤 끝도 없이 추락하게 되지만 말이다.
강하민과 연을 맺기도 전, 개인적으로 투자를 했었던 시절의 사한기술산업과 비슷한 양상을 보이는 기업이다.
가짜 호재를 만들어 주가를 잔뜩 끌어올린 뒤에 대표가 돈을 들고 튄다는 말이다.
다른 점이라면 사기산의 대표처럼 주식을 팔아치우는 게 아니라 회사 내 공금을 횡령한다는 것 정도랄까.
"안 그래도 SC모터스에서 대대적인 투자를 진행해 다비브에 이어 2대 대주주로 올라섰다고 오늘 오후 경제 기사로 났었어. 우리도 늦기 전에 들어가야지."
SC 그룹에서 전기차 시장에 뛰어들기 위해 설립한 SC모터스.
반도체 분야에서 삼정에 이은 세계 2위인 SC하이퍼닉스를 계열사로 거느리고 있는 그룹이다.
전자와의 협업으로 SC모터스의 전기차 개발 사업은 순조롭게 진행 중이다.
거기에 자율주행 시스템까지 접목한다면 아직 이렇다 할 선도기업이 없는 국내 전기차 시장에서 우위를 선점할 수 있음은 자명하다.
다만, 니콜스의 기술이 실제로 개발된다는 전제에서지만.
"괜찮을 것 같네요."
시운은 생각을 정리한 뒤에 강하민이 원할만한 답변을 해주었다.
"형 생각대로 진행해보세요. 어차피 전 미래증권에서 손을 뗐잖아요."
정기적으로 주·월간 보고는 받고 있지만, 이번 일본 투자처럼 강하민의 재량권을 침해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네가 보기에도 괜찮을 것 같지?"
"뭐, 얘기만 들어서는 아직 잘 모르지만…. 형이 유망하다면 그런 거겠죠."
자신을 인정해주는 말에 강하민의 입가가 들썩였다.
"이번 일본 투자 성공에 이어서 나도 한 건 해보마."
"행운을 빌어요."
둘은 니콜스 투자 성공을 기원하며 잔을 다시 부딪쳤다.
시원스레 독한 술을 들이켜는 강하민을 힐긋 쳐다보며 시운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뭐, 다섯 배로 오를 때까지는 가만히 있자.'
이후에 제동을 걸어도 늦지 않을 거다.
동시에 시운은 해외 투자법인을 움직여 그 이후의 돈벌이를 궁리했다.
아무리 여섯 배까지 오르는 투자처라도 시가총액은 3억 달러, 원화로 3,400여억 원 남짓이다.
수십억 달러의 자금을 운용할 수 있는 스피어 등이 투자하기에는 좁고 얕은 물이다.
괜히 뛰어들었다가 제때 손 털고 나오지 못할 위험마저 있었다.
다만.
'보험과 파생상품이라면 얘기가 달라지지.'
이번 일본 증시 하락 투자로 많은 재미를 본 분야다.
주가 지수가 아닌 특정 주식 종목을 지정하는 상품이 많지는 않지만, 존재하기는 했다.
시운은 니콜스의 주가가 오를 동안 그런 상품을 낱낱이 알아볼 작정이다.
* * *
"네, 네. 좋은 정보 알려줘서 고맙습니다."
자신의 집무실에서 통화를 하던 장기우는 무심코 창밖으로 돌린 시선에 미래 그룹 본사가 들어오자 미간을 좁히며 리모컨으로 블라인드를 내렸다.
"그래요. 언제 한번 식사나 함께 하죠. 제가 대접하겠습니다. 네."
석 달 전, 재벌 3세들의 모임에 처음으로 나간 뒤에도 초청장은 매달 날아왔다.
그때 얻은 정보 덕분에 박우석과 모종의 밀약을 맺을 수 있었던 장기우는 그 뒤로도 빼놓지 않고 참석했다.
아무리 서자 출신이라도 재계 서열 2위 그룹의 후계자인 자신이다.
미래의 이익을 위해 본심을 숨기고 꼬리를 흔드는 이들은 제법 많았다.
방금 통화를 마친 상대도 그런 사람 중 한 명이다.
"니콜스라…."
박우석과 장세연의 관계만큼은 아니지만, 유용한 투자 정보를 하나 얻은 셈이다.
장기우는 즉시 인터넷 브라우저를 열어 니콜스를 검색했다.
[SC 모터스, 적극적인 니콜스 투자 진행]
[이스라엘 다비브에 이어 2대 대주주 등극한 SC 모터스]
[니콜스, 자율주행 시대의 막을 열 것인가?]
자율주행 기술 개발은 고글을 비롯한 세계 유수의 기업들이 뛰어들어 상용화 직전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대부분 지도와 GPS를 기반으로 이루어지는 기술이다 보니 대한민국처럼 전국에 인터넷망이 깔릴 정도로 IT 인프라가 구축되지 않은 곳은 실상 무의미한 기술이다.
근데 이번에 니콜스가 입안한 기술의 접근법은 기존의 자율주행과는 사뭇 달랐다.
도로의 일정 거리마다 상황 분석이 가능한 수·발신기를 설치해 자율주행 모드의 차량과 유기적으로 실시간 정보를 주고받는 방식이다.
자율주행 기술 완성에 있어 풀어야 할 숙제이기도 한 해킹 방비에도 유리하고, 지도나 GPS보다 정확하다.
수·발신기를 도로망 전체에 깔아야 하는 만큼 초기 시설 비용은 많이 들겠지만, 보다 안전하다는 점에서 투자자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흐음…."
나쁘지 않은 투자처다.
이미 기사로도 난 이슈지만, 상용화의 시기가 아직 멀었다는 판단에서인지 적극적으로 투자에 뛰어드는 투자자와 투자사는 그리 많지 않았다.
- 최소 열 배까지는 뛸 겁니다.
방금 통화한 재벌 3세가 극비리에 입수한 정보라며 생색까지 냈다.
어느 정도 허세로 여겨지는 부분을 걷어내더라도 분명 단기간에 고수익을 낼 종목인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장기우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생각 같아선 SC처럼 그룹 차원에서 대대적으로 투자를 진행하고 싶었지만, 이미 장강전자의 부진과 장강리조트 등이 계열사에서 떨어져 나간 일로 장철구의 신뢰를 잃었다.
평소 IT 분야의 투자를 투기나 마찬가지로 생각하는 친부였기에 니콜스에 대한 투자는 입 밖으로 꺼낼 수도 없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장기우가 아니다.
"얼마더라? 차명 계좌 잔액이…."
장기우는 지난번 올라온 보고 내용을 다시 기억해냈다.
수십여 개의 타인 명의 통장에 분산된 비자금이 거의 이천억 원에 육박했던 거로 안다.
그 순간, 강하민의 얼굴이 떠올랐다.
"쳇!"
그자 덕분에 비자금 액수를 이만큼이나 늘릴 수 있었다.
의도야 어쨌든 그가 전해준 투자 정보는 아주 쓸 만했으니 말이다.
자신의 마지막 호의도 저버린 위인이다.
장기우는 이미 지나간 일이라 여기며 애써 그에 대한 미련을 끊어냈다.
삑-
- 네, 부회장님.
"김학수 과장 들어오라고 해요."
평소 그룹과 관련된 일은 문지환 비서실장에게 시키지만, 개인적인 용무는 전부터 부렸던 김학수를 이용했다.
"부르셨습니까, 부회장님."
"개인적으로 투자할 곳이 생겼습니다."
"아, 네. 말씀하십시오."
장기우의 비자금 역시 김학수가 관리했다.
"니콜스. 그 회사에 천억 투자해요."
"처, 천억 원이나 말입니까?"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닙니다…."
비자금의 절반가량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확실한 투자처니 이렇듯 자신 있게 지시를 내리는 거겠지만, 김학수로선 잘못되었을 경우도 생각해야만 했다.
"바로 진행시켜요."
"아…, 네. 알겠습니다, 부회장님."
충신은 쓴소리도 거리낌 없이 내야만 한다.
그러나 김학수는 자신이 충신과는 거리가 멀다는 걸 익히 알고 있었다.
괜히 부정적인 말로 장기우의 심기를 어지럽힐 바엔 입을 다무는 게 그로선 편했다.
장기우는 그렇게 비자금의 절반에 해당하는 천억 원을 니콜스에 투자했고, 10월 중순 여섯 배까지 주가가 뛰어오르자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10월 25일 월요일.
니콜스의 주가가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