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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로 재벌 참교육-95화 (95/139)

§095화 뒤끝 작렬

창문을 통해 새어 들어오는 시린 달빛에 제일 먼저 중년 남성의 얼굴이 드러났다.

"……."

헬렌 리우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온몸이 밧줄에 묶이고, 입에도 재갈이 채워져 말과 행동으로 표현하지는 못했지만, 그녀의 눈동자에 공포가 서린 것만은 분명했다.

중년 남성은 한참동안 헬렌을 쏘아보더니 따라 들어온 다른 사내들에게 짧게 지시를 내렸다.

"차에 다시 실어."

"네!"

사내들이 다가와 헬렌의 양팔을 잡고 일으켰다.

봉고 차량에 끌려가면서도 헬렌은 이렇다 할 반항도 하지 못했다.

건장한 그들을 상대로 반항을 시도하기에는 자신의 몸이 너무 연약한 걸 잘 알아서다.

납치될 당시 이미 해봤다가 소용없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었다.

차에 실려 또다시 어디론가 옮겨지는 헬렌은 경황이 없는 와중에도 중년 남성을 힐끗 쳐다보았다.

아까 창고에서 자신을 향해 짓던 그 표정은….

그래, 마치 벌레를 씹기라도 한 듯 짜증과 화가 뒤섞인 얼굴이었다.

헬렌으로선 좋지 않은 징조다.

'또 어디로 끌려가는 거지? 왜 이들은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는 걸까? 신진 그룹에서 나온 게 아닌가?'

그녀의 머릿속으로 의문이 계속 이어졌다.

한 시간 여쯤 지났을까?

봉고 차량은 어딘가에 도착했고, 헬렌은 거기서 내리게 되었다.

"…뭐야?"

저도 모르게 나온 말 한 마디.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 거지?'

절로 떠오르는 생각이다.

부우웅-

헬렌은 멍한 시선을 옮겨 자신을 내려주고 떠나는 봉고 차량을 멀뚱히 바라봤다.

어느새 입의 재갈도, 몸을 옭아매던 밧줄도 사라진 상태다.

헬렌은 몇 시간 전에 납치를 당했었던, 티엔유 사무실 건물의 지하주차장에서 한동안 넋이 나간 듯 서 있었다.

* * *

♬~ ♪♬~

오후 9시가 다 되어갈 무렵, 현시운의 핸드폰이 울렸다.

액정화면에 표시된 발신자는 헬렌 리우였다.

시운은 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보스.

약간은 울먹이는 듯한 음성.

헬렌의 목소리가 분명했다.

시운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했다.

자신의 협박에 신진 그룹 왕원 회장이 고분고분 잘 따라준 모양이다.

"어딥니까? 회사에요?"

핸드폰을 회사에 두고 퇴근했었다는 장예린이 해준 말을 떠올렸다.

지금 이렇듯 본인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는 건 장예린과 만났다는 소리겠지.

- 네. 지금 회사입니다.

"몸은 어때요? 괜찮습니까? 어디 다친 곳은 없나요?"

왕원 회장과 담판을 짓는 사이 왕룽의 일로 고초를 겪었을 지도 몰랐다.

다행히도 별일이 없었는지 헬렌은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 밧줄에 묶이고 재갈도 물었지만, 그것 말고 별 다른 일은 없었습니다.

"다행입니다."

동시에 미안했다.

이런 봉변을 당한 게 다 자신이 부탁한 왕룽의 일 때문이었으니 말이다.

막 사죄를 하려 입을 뗄 때, 한발 먼저 헬렌이 말했다.

- 보스가 하신 거죠?

"…네?"

- 놈들이 절 다시 풀어준 거 말이에요.

그들에게서 풀려난 뒤에 헬렌은 장예린과 만났고, 마침 자신의 납치 사건을 조사하던 경찰과도 마주쳤다.

겪은 일에 대해 상세히 진술하고, 납치 차량의 번호판도 알려줬지만 별로 소용은 없었다.

경찰은 헬렌이 말해준 번호로 차량을 조회해봤지만, 정식으로 등록되어 있지도 않은 가짜 번호판이었다.

서둘러 인근 CCTV를 확인해 추적한다고 하지만, 그처럼 용의주도한 자들이라면 쉽게 찾아내기 어려울 듯 싶다.

경찰이 그녀에게 원한을 사거나 의심이 가는 자에 대해 물었지만, 헬렌은 신진 그룹을 입에 담을 수 없었다.

본토에서뿐만 아니라, 대만에서도 신진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명확한 증거가 없는 한, 잘못 말했다가는 되레 그녀만 궁지에 몰릴 뿐이다.

"아아…. 네, 그렇긴 한데…."

- 고마워요, 보스. 절 구해주셔서….

다시 울먹이는 듯한 헬렌의 음성에 시운은 난처해했다.

이번 일의 원인을 제공한 건 바로 자신이었으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저 때문에 미스 리우가 험한 일을 겪었던 건데요. 제가 미안합니다."

- 역시…. 신진이군요?

"네, 맞습니다."

원인이야 어쨌든 헬렌으로선 구명지은을 입은 거나 마찬가지다.

녹록지 않는 왕원 회장을 물러서게 만든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것도 그 짧은 시간 만에 해냈다는 건 의미하는 바가 크다.

시운이 몸담고 있을 세력의 힘이 자신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막강하다고 헬렌은 지레짐작했다.

신진 그룹을 순순히 물러나게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또한, 그녀는 희망했다.

자신도 시운처럼 거기에 속하고 싶다고.

그런 헬렌의 망상을 시운이 알 리 없었다.

띠링!

서로 고맙다고, 또 미안하다고 말을 주고받는 그때 시운의 핸드폰에서 메시지 알림음이 짧게 울렸다.

뭔가 싶어 통화 중임에도 이를 확인하던 시운의 낯빛이 급격히 굳어졌다.

[위기 알림!]

유레카 위기 알림 서비스가 오랜만에 발동한 것이다.

"……."

지금 같은 상황에서 위기 알림이라?

왠지 누구를 향한, 또 누구로부터의 위기일지 짐작이 갔다.

"헬렌, 잠시만요. 확인할 게 좀 있습니다."

- 네? 아, 네….

헬렌에게 양해를 구한 시운은 즉시 메시지를 읽어내렸고, 그 내용에 미간을 찌푸렸다.

'왕원, 이 자가 정말…!'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그렇게 경고를 했는데도 신진 그룹이 움직일 예정이다.

시운은 끓어오르는 속을 진정시키며 다시 헬렌과의 통화에 집중했다.

"헬렌."

- 네. 보스.

한 차례 생각을 정리한 시운은 차갑게 식은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홍청단과 닿는 라인이 있습니까?"

- 네에?

예상도 하지 못한 말에 헬렌은 놀라는 반응을 보였다.

시운은 입을 굳게 닫은 채, 방금 읽은 메시지 내용을 떠올렸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일주일 뒤, 자신에게 변고가 닥친다.

거의 죽을 위기에까지 몰리는 상황.

참을 이유는 없다.

시운의 칼끝이 신진 그룹의 왕원에게로 향했다.

* * *

"뭐? 지금 뭐라고 한 거지?"

팔십 넘은 노인답지 않게 왕원의 풍채는 여전히 건장했고, 타고난 외모 역시 강인해 보였다.

그와 마주한 헬렌 리우는 그런 위협적인 모습에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방금 내뱉은 말을 다시 들려줬다.

"신진 지주회사에서 가지고 있는 신진자원개발 지분 34%에 대한 인수 가격으로 현 시세의 80%를 지불하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지금 장난쳐! 약속한 것과 다르잖아!"

왕원 입장에선 고생해서 키운 회사를 남에게 뺏기는 상황이다.

그것만 해도 억울해 죽겠는데 1.5배로 구두 협약까지 한 가격을 절반에 가깝게 후려치려고 하는 행태에 기염을 토했다.

가뜩이나 중국 전역에 금맥이 잇달아 발견되면서 신진자원개발의 가치가 더 올라간 상태다.

그에 아랑곳하지 않으며 헬렌은 할 말을 이어나갔다.

그녀의 입장에서 왕원 회장은 불과 이틀 전에 있었던 자신의 납치를 사주한 인물이다.

굳이 그를 배려할 이유가 하등 없었다.

"제 보스가 전해달라더군요."

"뭘?"

"마음이 바뀌었다고. 그 이유는 나중에 알려주겠다고도 하셨습니다. 단, 지금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거래는 취소될 거라고, 어떤 마음을 먹게 될지 모르겠다고도 하셨고요."

"……."

왕원은 이를 악물었다.

이토록 빨리 지분 거래를 진행할 줄은 몰랐다.

한국의 신생 재벌인 미래 그룹이 티엔유의 뒤에 있음을 확인한 건 분명 이득이었다.

남들이 모르는 정보는 이 바닥에서 돈이 되니까.

평소였다면 그걸 이용해 자신과 그룹에 이득이 될 일을 꾸몄겠지만….

이번엔 다르다.

왕원은 이득과 상관없이 현시운이라는 애송이를 이 세상에서 한시라도 빨리 지울 심산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

그리 하면 왕룽의 일은 자연히 덮어진다.

아울러, 녀석과 약속한 신진자원개발 양도 건 역시 없던 일이 되는 거다.

그런데…, 애송이가 생각보다 발 빠르게 일을 진행해 버렸다.

자신의 예상이 빗나간 것이다.

"어떡하시겠습니까? 거절하실 겁니까? 저로선 그래 주셨으면 합니다만."

왕원을 똑바로 마주 보는 헬렌의 눈빛이 무척이나 날카롭다.

"…받아들이지."

일이 번거롭게 되었다며 왕원은 속으로 욕하면서 헬렌이 내건 조건을 수락했다.

일단은 응하는 모습을 보인 뒤, 예정한 일을 서두르면 되겠지.

유리한 패를 들었다고 벌써 약속한 사안도 번복하는 작자이다.

언제 또 그걸 들이밀며 자신과 신진 그룹을 위협할지 모른다.

그 전에… 없애버리는 게 능사다.

애송이가 사라지면 눈앞의 계집도 겁을 집어먹고 알아서 쥐 죽은 듯 지내겠지.

물론, 왕원은 헬렌 역시 가만히 내버려 둘 생각은 없었다.

"아쉽군요. 그럼…."

탁!

"……."

탁자 위에 두 개의 계약서가 올려졌다.

왕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미리 준비해온 계약서를 헬렌이 꺼내놓은 것이다.

그 철두철미함에 왕원은 얼굴을 붉혔다.

"사인하시죠."

"으음…."

생각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탁자를 뒤엎고, 아까부터 건방진 소리만 해대는 계집의 뺨을 힘껏 쳐올리고 싶지만….

지금 자신의 처지는 그럴 수가 없었다.

제 손으로 사업을 꾸린 이후,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굴욕감에 왕원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격한 감정이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나타났다.

왕원은 인상을 굳힌 채 계약서에 사인을 마쳤다.

헬렌은 두 계약서 사이의 간인까지 요청했고, 그는 입술을 짓씹으며 이에 따랐다.

빠진 곳은 없는지 꼼꼼히 살펴본 헬렌은 고소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며 계약서 한 부를 내밀었다.

"지분 매입대금은 오늘 오후 중으로 신진 지주회사 계좌에 들어갈 겁니다. 유익한 거래 감사드려요."

그 말을 끝으로 헬렌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왕원의 집무실을 나가버렸다.

쾅!

왕원의 커다란 주먹이 계약서 위를 세게 내리쳤다.

그런다고 되돌려질 거래는 아니었지만, 이렇게라도 분을 풀어야만 했다.

끼익-

집무실 안쪽에 있는, 내부 화장실 문이 열리며 왕원의 오른팔인 림첸이 모습을 드러냈다.

"회장님. 명만 내려주십시오. 당장이라도 뒤쫓아가서 제 손으로 저 년을 요절내겠습니다!"

화장실 문 뒤에 숨어 자신이 모시는 이와 건방진 계집의 대화를 모두 들은 림첸은 왕원 못지않게 화가 나 있었다.

림첸이 자신을 대신해 화를 표출하자 반대로 왕원은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조금 식은 머리로 계산을 마친 왕원은 옆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그건 나중에라도 할 수 있는 일이야."

"…네."

말 그대로 헬렌이라는 저 건방진 계집은 뒤에 있는 현시운만 치워버린다면 언제든 요리해버릴 수 있다.

우선은 현시운의 처결이 먼저다.

"준비하라고 한 건 어떻게 돼가나?"

왕원의 물음에 림첸은 고개를 숙이며 자신 있게 대답했다.

"이미 다 세팅되어있습니다. 회장님께서 지시만 내리시면 언제든 실행할 수 있습니다."

"그래?"

왕원은 잠시 눈을 감은 채 골똘히 생각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예정대로 진행시켜."

"네, 회장님!"

이미 타깃이 스스로 모습을 드러낸 상황.

수많은 라이벌들을 합법과 비합법을 가리지 않고 쳐내면서 지금 자리에까지 올라섰다.

왕원은 한낱 소국의 애송이가 내뱉은 말에 굴한 인물이 아니었다.

'감히 날 가지고 놀아?'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할 생각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왕원은 뜻을 이룰 수 없었다.

다음날, 그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어디라고?"

- 네, 회장님. 중앙서기처 서기께서 통화를 원하신다며 직접 전화하셨습니다.

"……."

현 주석과 부주석에 이어 중국 공산당 내 서열 3위의 인물이다.

비록 신진 그룹이 줄을 대고 있는 대자당과 다른 계파인 홍청단이지만, 그렇다고 홀대할 수는 없었다.

"당장! 당장 전화를 돌리게."

- 네, 회장님.

통화가 돌려지는 그 짧은 시간에 왕원은 몹시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별 접점도 없던 홍청단의 수장에게서 갑자기 전화가 오다니.

'설마…?!'

짧은 신호음이 울리다 이내 끊겼다.

전화가 연결된 것이다.

"아, 쑨차이 서기님. 신진 그룹의 왕원입니다. 근데 무슨 일로 이렇듯 직접 전화를…."

중국에서 사업을 하려면, 권력자들의 눈치를 봐야만 했다.

자신보다 한참이나 어린 상대이지만, 왕원은 평소보다 긴장한 목소리로 최대한 공손하게 말을 꺼냈다.

그리고 이어서 들리는 상대방의 목소리.

- 아, 아버지….

"?!"

예상외의 인물이 튀어나와 버렸다.

현재 평양에 있어야 할 셋째 아들, 왕룽의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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