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6화 유료 확장
왕원은 순간 자신의 귀가 잘못되었나 의심했다.
"네가 왜 거기에…. 정말 왕룽이냐?"
- …네, 아버지.
"아니, 평양에 있어야 할 네가 왜…."
채 다 묻기도 전에 수화기로 다른 음성이 튀어나왔다.
- 오랜만이오. 왕원 회장.
"……."
굵직하면서도 차분한 목소리.
중국 공산당 서열 3위의 거물이자 홍청단의 수장인, 중앙서기처 서기 쑨차이였다.
아무 대답도 없는 왕원의 반응에 쑨차이는 짧게 웃더니 말을 이었다.
- 당신, 참…. 재밌는 일을 벌였더군요.
"그, 그게…."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말투다.
분신자살한 거로 알려진 왕룽이 그와 함께 있다는 사실에서부터 지난 5월의 조작이 탄로 났다는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왕원이 겪어온 것 중 가장 큰 위기에 봉착했다.
'그놈 짓이다!'
한국에 있을, 현시운이란 그 애송이가 결국 왕룽의 일을 홍청단에 넘긴 거다.
뭐라 변명을 하기도 전에 쑨차이가 짜게 식은 목소리로 말했다.
- 중앙서기처로 당장 들어오시오. 서로 나눌 얘기가 많을 것 같습니다.
다행히 협상의 여지는 있어 보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왕룽의 위장 사망 기사와 함께 공안들이 회사에 들이닥쳐 자신을 연행해 갔을 테니까.
왕원으로선 그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면 쑨차이가 원할만한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네, 그러겠습니다."
뚝-
왕원의 대답을 듣자마자 상대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
왕원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비서실을 호출했다.
- 네, 회장님.
"지금 바로 중앙서기처로 갈 준비 하게."
- 바로 차량 준비하겠습니다.
평소 함께 움직이던 림첸은 왕원이 시킨 일 때문에 외부에 잠깐 나가 있는 상태다.
다른 수행비서와 함께 차에 오른 왕원은 불편한 심기를 얼굴에 그대로 드러냈다.
림첸 대신 그를 수행하게 된 비서는 속으로 잘못 걸렸다고 투덜대며 몸가짐을 평소보다 더 바르게 했다.
"이봐."
"네, 회장님."
"…지금 바로 비서실에 연락해서 그놈 전화번호 한 번 알아봐."
"네? 어떤…."
되묻는 수행비서에게 짜증을 쏟아내려던 왕원은 순간 왕룽에 관한 일은 그룹 내에서도 자신과 림첸을 제외하면 아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는 애써 화를 누르며 대답했다.
"한… 5일 전쯤. 한국의 미래 뭐라는 기업의 대표와 전화 통화를 한 적이 있네. 비서실에 그곳 전화번호를 물어보게나."
"네, 회장님."
비서는 즉각 비서실로 연락해 전화번호를 알아낸 뒤 왕원에게 전했다.
자신의 핸드폰에 번호를 찍은 왕원은 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몇 번의 연결음 뒤에 상대가 받았다.
이에 왕원은 차 안이 울릴 만큼 크게 고함을 질렀다.
"지금 이게 도대체 뭐 하는 짓이야!"
수행비서뿐만 아니라 차를 몰던 운전기사까지 화들짝 놀랄 정도였다.
그들의 반응에 신경을 쓸 왕원이 아니다.
그는 몰아치듯 핸드폰에 대고 연거푸 소리 질렀다.
"신진자원개발을 원하는 대로 넘겼는데도 내 뒤통수를 쳐?! 그러고도 네놈이 무사할 것 같아!"
쏟아내는 화에 상대는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현시운으로부터 대답이 들려온 건 조금 더 시간이 흘러서였다.
- 연세에 비해 매우 정정하시군요. 그래도 조심하셔야죠. 그러다 고혈압으로 쓰러지십니다.
"이, 이놈이 어디서 감히…."
자신을 놀리는 거냐며 말을 이으려는데 현시운이 중간을 끊으며 끼어들었다.
- 제가 지난번 통화 때 알아듣게 말씀드렸을 텐데요.
"뭐?"
- 어떤 수작이든 부릴 생각이라면 일찌감치 접으시라고. 분명 그렇게 경고했던 거로 기억합니다만?
"……."
왕원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마치 자신이 림첸에게 지시한 일을 알고 있다는 말투이지 않은가?
내부에 배신자가 있지 않고서는 결코 알 수 없는 일을 말이다.
'배신자? 설마….'
왕룽의 일을 현시운이 알고 있다는 사실에 잠깐 림첸을 의심한 적도 있지만, 말도 안 되는 생각이라며 부정했었다.
근데 한 번도 아닌 두 번이나 이러면….
생각을 달리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 대답이 없으신 걸 보니 뭔가 켕기는 일이 있기는 한가 봅니다.
그냥 떠본 건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 연변 해결사들은 언제 한국행 배를 탄답니까? 아…. 내일 오후 인천항 도착이던가?
"……!!"
왕원은 확신했다.
분명 현시운은 자신의 계획을 알고 있다.
그것도 상세히 말이다.
왕원의 침묵에 현시운은 작게 웃었다.
- 왕 회장님. 세상에 온전히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한다고 보십니까? 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림첸인가?"
- 글쎄요. 판단은 회장님 몫이죠.
그 대답에 오히려 더 확신이 생긴다.
"그게 사실이라면 왜 내게 알려주는 거지?"
앞으로도 이용하면 될 것을 말이다.
- 제가 박쥐 혐오증이 있어서 말입니다.
"…뭐?"
- 한 번 배신한 버러지가 두 번은 또 못할까요. 어차피 제겐 일회용이었습니다.
"음…."
왕원은 현시운에 대한 평가를 정정했다.
생각 외로 위험한 인물이다.
- 내일 도착할 선물은 감사히 잘 받도록 하죠. 회장님은 제가 쏜 화살이나 잘 피하십시오. 그럼 이만.
뚝-
왕원은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뿌드득!
"?!"
옆의 수행비서가 놀랄 정도로 왕원은 지금 야차와도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5월에 있었던 왕룽의 일도, 이번 헬렌 리우 납치 때 현시운으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가 온 것 역시.
림첸이 미리 정보를 흘렸기에 벌어진 일이라고 그는 굳게 믿었다.
'감히!'
그랬으면서 앞에서는 신진 그룹과 자신을 걱정하는 듯 가식을 떨다니!
왕원은 참을 수 없었다.
왜 그랬는지, 자신을 배신한 게 진짜인지 아닌지 사실 확인도 필요치 않았다.
이미 왕원 스스로 진실이라 믿고 있었으니까.
림첸의 구차한 변명을 듣기보다는 그에게 처절한 응징을 내리길 원했다.
"이보게."
"네, 네! 회장님."
"마오 사장에게 전화를 넣어."
"네?!"
마오 사장이라면 중국 삼합회에 속한 하부 폭력조직의 두목이다.
간혹 신진 그룹에서 대놓고 손대기 어려운 불법적인 일에 동원되는 곳이기도 했다.
"뭐 하고 있어? 얼른 전화 넣으라니까!"
"아, 네, 네! 회장님."
이 순간만큼은 현시운보다 림첸에게 살의가 치솟았다.
왕원은 림첸이 여태껏 자신을 가지고 놀았다고 여겼다.
'살 만해지니까 내 등에 칼을 꽂으려고 해!'
림첸의 불운한 앞날이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 * *
현시운은 중국 경제 뉴스를 보며 혀를 찼다.
기대했던 것과는 상황이 다르게 흘러간 까닭이다.
[중국 5대 대기업 중 하나인 신진 그룹의 왕원 회장, 금일 노환을 이유로 일선에서 물러나]
[신진 그룹 2대 회장직은 왕원 명예 회장의 장남인 왕가이 부회장에게 돌아갈 예정]
사실, 어느 정도는 예상을 했었다.
홍청단 입장에서도 사실대로 터트려 왕원 회장 일가를 무너뜨리기보다는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게 훨씬 이득이었을 테니 말이다.
- 그런다고 해서 보스 생각대로 일이 풀리지는 않을 겁니다. 홍청단 좋은 일만 시켜주는 걸지도 모르죠.
헬렌 리우가 말한 대로 되어 버렸다.
본토 라인을 이용해서 홍청단의 간부급 단원에게 왕원과 왕룽의 정보를 넘기기 직전까지 그녀는 그 점을 우려했었다.
그렇다고 중국 언론에 흘리기엔 별 실효성이 없어 보였다.
검열이 남다른 국가인 만큼 중간에서 어떤 식으로 일이 틀어질지 알 수 없다.
기대에 못 미치는 결과가 나온다 해도 홍청단이 이번 일에 제격이라는 게 시운의 판단이다.
운이 좋다면 중국 공산당 실세 중 한 명이자 2년 뒤, 주석에 오를 쑨차이와 연을 맺게 될지도 몰랐으니까.
"역시…, 중국답네."
그래도 내심 씁쓸한 건 어쩔 수가 없나 보다.
시운은 나직이 혀를 찼다.
물론 홍청단에서도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는지 아직 정정한 왕원 회장의 은퇴를 종용한 모양이다.
앞으로 거래를 이어가기엔 노회한 왕원보다는 아직 덜 영근 그의 아들이 상대하기 편하다는 생각이었겠지.
"림첸은 어떻게 됐으려나?"
사흘 전, 걸려온 왕원과의 통화에 슬쩍 블러핑을 날렸다.
제대로 먹혔는지 어땠는지는 모른다.
다만 통화할 당시의 반응으로 짐작건대, 분명 무슨 일은 벌어졌을 거다.
그와는 반대로 시운의 주변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미 무슨 수작을 부리는지 알고 있으니, 소용없다고 여겼는지 위기 알림 메시지 내용대로의 상황은 없었다.
물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이후, 지금껏 또 다른 위기 알림이 오지 않는 거로 봐선 자신에 대한 보복은 관둔 모양이다.
물론 안심할 수는 없다.
나중에라도 다시 수작을 부릴지 모른다.
어쩌면 자신이 아닌 주변인들을 타깃으로 삼을지도.
헬렌 리우의 납치 때처럼 말이다.
톡! 토도톡!
시운은 유레카를 실행하여 위기 알림 대상자 등록 화면으로 들어갔다.
[대상자 등록]
[현시운][김현석][강하민][한진형][장세연][장기우][대런 체스터][정혜련][한신철][???]
등록할 수 있는 슬롯이 이제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시운은 망설임 없이 빈 슬롯을 눌러 새로운 대상자를 등록했다.
[헬렌 리우]
또 언제 저번과 같은 일을 당할지 모른다.
왕원이 독기를 발산할 곳은 자신과 그녀가 가장 유력하니까.
"이로써 남는 슬롯도 이제 없네."
슬롯만 충분하다면 다른 해외투자법인의 파트너들도 등록했을 텐데 말이다.
띠링!
"어?"
알림음과 함께 핸드폰 액정 화면 위로 하나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유레카 위기 알림 서비스 대상자 슬롯이 모두 채워졌습니다.]
[우수이용자 특전이 적용됩니다.]
[위기 알림 대상자 등록 슬롯이 상점 창에 등록됩니다.]
상점 창에 등록?
그 말인즉슨!
"…슬롯을 늘릴 수 있다고?"
우수이용자로 등급이 상승하면서 단순히 슬롯의 수가 두 배로 늘어난 게 다라고 생각했었는데….
이용권처럼 유레카 포인트를 소모해 구매할 수 있다는 말이겠지?
공짜는 아니지만, 이게 어디인가.
미리 알았더라면 슬롯을 아껴두지 않았을 거다.
시운은 기대감을 안고 유레카 상점 메뉴로 이동했다.
[유레카 상점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보유 유레카 포인트 : 7,000 EP]
[유레카 포인트 충전]
[이용권 구매]
[위기 알림 대상자 등록 슬롯 구매]
새로 생겨난 선택지에 시운은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곧바로 맨 아랫줄의 슬롯 구매를 눌렀다.
그리고….
생겨나는 새로운 창에 미소는 어느덧 사라지고 대신하듯 황당함이 자리를 잡았다.
[위기 알림 대상자 등록 슬롯 - 10,000 EP]
[구매할 슬롯 수 : 0 ▲▼]
[실행 / 취소]
"…10,000 EP?"
1 유레카 포인트를 충전하는 데 드는 금액은 백만 원.
슬롯 구매 비용은 10억인 이용권의 열 배인.
무려 백억 원이었다.
* * *
강하민은 숲길로 차를 몰았다.
평일 낮이라 약속 장소까지 가는 길은 별로 막히지 않았다.
이내 도착한 그는 시동을 끌고 차에서 내렸다.
"……."
북한산 아래 고즈넉이 자리한 전통 찻집.
지대가 높은 옥외 주차장 아래 겨울나기를 준비하는 앙상한 가지의 나무들이 즐비했다.
그 너머 살짝 비치는 서울 도심의 전경을 잠시 바라보던 강하민은 짧은 심호흡을 내뱉고는 찻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평소라면 아름다운 주위 풍경에 주말, 평일 가리지 않고 제법 많은 사람들이 찾았을 장소지만, 오늘은 무척 한적했다.
[금일 휴업]
주차장으로 들어서는 입구에 세워진 입간판의 문구와는 달리 찻집은 열려 있었다.
오늘은 예외적으로 제한된 손님을 받기 위해서였다.
주차장에 강하민의 차량을 포함해 총 세 대가 세워져 있었다.
아마도 하나는 가게 주인의 차량일 테고, 나머지 하나는….
"어서 오십시오.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네. 처음 뵙겠습니다."
가게 입구에 서 있는 오십 대의 남성.
과연 듣던 대로 이지적이면서도 눈매가 번뜩일 정도로 날카롭다.
강하민의 인사에 남성의 딱딱하던 얼굴에 쓴웃음이 살짝 걸렸다.
그를 따라 가게 안으로 들어선 강하민.
밖과는 달리 따스한 공기가 먼저 그를 맞이했다.
그리고….
북한산자락이 보이는 반대쪽 창가 자리에 노년의 신사가 보였다.
세월이 겹겹이 쌓인 눈동자가 바깥 풍경에서 강하민에게로 옮겨갔다.
"……."
자신의 아버지와 비슷한 연배.
사진으로 본 얼굴과 그리 다르지 않음을 확인한 강하민은 노인의 앞에 다가가 고개를 정중히 숙였다.
"처음 인사드립니다. 미래증권의 대표이사로 있는 강하민입니다."
강하민의 인사에 노인은 가만히 바라보더니 입가로 실웃음을 지었다.
"일로 만난 사이도 아닌데, 소개가 잘못되었구먼."
"…네?"
"만나서 반갑네. 세연이 애비일세."
고집스러워 보이는 입매가 강하민이 아는 누군가와 쏙 빼닮았다.
오늘 그와 약속을 한 상대는 바로 장강 그룹의 현 총수인 장철구 회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