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7화 제안
장철구는 손을 뻗어 맞은편 자리를 가리켰다.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여기 와서 앉지."
"…네, 회장님."
아무리 장철구가 사적인 자리임을 강조했지만, 그렇다고 아버님이라고 부를 수는 없었다.
강하민은 긴장을 숨기지 못한 채 굳은 얼굴로 그와 마주 앉았다.
"회장님, 차를 준비하겠습니다."
비서실장 문지환의 말에 장철구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문지환이 자리를 피하고 둘만 남았다.
강하민으로선 어떤 용무로 만남을 청했는지 알 길이 없다.
그나마 장세연과 교제한다는 것 때문일 가능성이 가장 크기는 한데….
설마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물을 끼얹거나 돈 봉투를 건네며 헤어지라는 뻔한 전개는 아니겠지?
잠시 강하민을 바라보던 장철구가 짧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석태는 잘 지내나?"
"!!"
장철구가 꺼낸 말은 강하민으로선 매우 뜻밖이었다.
그가 방금 안부를 물은 석태란 사람은 바로 강하민의 친부였으니까.
"제 아버지를 아십니까?"
"그럼. 알다마다."
강하민의 물음에 장철구는 작게 웃음을 지었다.
먼 과거를 회상하기라도 하듯 그의 시선이 먼 곳을 향했다.
"벌써 육십 년도 더 지났군. 석태는 내가 처음 사귄 동무였지."
"……."
"같은 나이에 같은 동네에서 자랐어. 자네도 알다시피 내 부친과 자네 조부는 둘도 없는 친우셨지 않나. 자연히 자식들도 가까워진 게지."
강하민은 그에 동의할 수 없다는 듯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그 표정을 읽은 장철구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물론 두 분의 끝이 결코 좋았다고는 할 수 없겠지. 하지만…."
"……."
장철구는 잠시 말을 멈추고 창밖을 바라봤다.
강하민은 그의 입을 쳐다보며 무슨 말을 할지 기다렸다.
"이런 말이 어떻게 들릴지 잘 아네만….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는 시절이었어. 살기 위해선 형제와도 같은 친우마저 버려야 하는."
"그건…. 비겁한 변명입니다."
강하민이 입술을 짓씹으며 대꾸했다.
그 말에 장철구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입장에선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겠지. 이해하네."
"……."
끓어오르는 화를 숨기기 위해 강하민은 고개를 숙여 한껏 사나워진 얼굴을 가렸다.
장강이란 사명의 유래와는 상관없이 이미 관계가 틀어져 버린 두 가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장세연이 나고 자란 집안이기도 했다.
상충하는 상황에 마음이 갈피를 잡지 못한다.
"두 집안 사이에 묵은 이야기는 이쯤 할까? 어차피 여기서 결론이 날 일도 아니고. 이제 본론으로 넘어가 볼까 하는데?"
"…말씀하십시오."
"세연이, 그 아이와는 어쩔 생각인가?"
옛 동무의 자식을 보는 듯했던, 조금 전까지의 온화한 시선이 빠르게 걷혔다.
대신하듯 매서운 눈빛이 강하민에게 꽂혔는데, 소문으로 들었던 것처럼 차갑게만 느껴졌다.
"둘의 교제는 익히 들은 바 있지."
어떤 식으로 알게 됐을지는 뻔하다.
사람을 붙여 장세연과 자신을 감시한 거겠지.
"이제 근 1년이 다 되어가지 않나?"
"…그렇습니다."
"그러니 말해보게. 앞으로 어쩔 생각인 건지를."
장강 그룹 비서실을 통해 만나자는 연락이 왔을 때부터 짐작했던 일이다.
혹시 몰라 그에 대한 답변도 미리 준비해뒀다.
강하민은 지체 없이 몇 번이나 되뇌던 생각을 말로 꺼냈다.
"저와 세연 씨의 일입니다. 저희 둘이 알아서 하겠습니다."
"뭐, 요즘 젊은이들의 그런 자유분방한 연애 방식이야 들어서 알고는 있네만…. 애비 된 입장에서 걱정하지 않을 순 없잖은가. 금지옥엽으로 귀하게 키운 딸이야."
"……."
강하민은 그 말에 제대로 반박하고 싶었다.
귀하게 키웠다면서 왜 그렇게 모질게 대했는지를 따져 묻고 싶은 심정이다.
친모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하게 하고,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정략결혼을 강요하며 매주 선을 보게 하지 않았던가.
그게 본인의 입으로 귀하다고 한 딸에게 할만한 행동이라 생각하는 건가?
당장이라도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말들을 이를 악물며 겨우 참아냈다.
강하민은 아까처럼 간섭하지 말아 달라는 말을 하려고 어렵사리 입술을 뗐다.
하지만, 채 말을 꺼내기도 전에 장철구가 먼저 입을 열었다.
"결혼하게."
"…네?"
"세연이와 결혼을 하란 말일세."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말에 강하민은 얼떨떨한 시선으로 장철구를 바라봤다.
"자네 조부와 내 부친께선 생전에 이런 약속을 했다지. 나중에 자식들을 결혼 시켜 사돈을 맺자고."
장철구는 픽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애석하게도 양쪽 집안 모두 딸이 나오지 않아서 말로만 끝난 일이지만 말이야."
아니, 그 전에 서로 원수가 되지 않았습니까!
강하민은 속으로나마 그렇게 항변했다.
"선대의 약속을 손주 대에서 이루는 것도 나쁘지 않지. 둘의 나이도 적지 않으니 서둘러서 식을 올렸으면 하네만."
강하민은 미간을 좁혔다.
선대의 약속?
장철구에게 그런 감상적인 면모가 있을 리 없다.
장강의 주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친형제들마저 쳐낼 정도로 냉혈한인 그다.
자식들의 결혼 상대도 그룹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 신경 쓰며 고를 장철구가 선뜻 자신과 장세연을 맺어주려고 한다?
거기에 다른 속셈이 있을 게 분명하다.
"…왜입니까?"
"흠?"
"무슨 이유로 세연 씨를 저와 결혼시키려고 하시는 겁니까? 지금까지 맞선 자리에 나온 상대들보다 제 조건이 훨씬 못 미칠 텐데 말입니다."
장철구는 입가에 웃음을 띠며 반문했다.
"내 딸이 배우자로서는 마음에 안 드는 건가? 그게 아니면…, 자네도 연애와 별개로 결혼에는 여러 조건을 따지는 그런 부류인가? 그렇다고 해도 세연이 정도면 충분히 눈에 찰 신붓감이라고 여기네만."
강하민은 고개를 강하게 내저으며 답했다.
"그런 뜻으로 말씀드린 게 아닙니다. 선대의 지키지 못한 약속을 이제라도 이루겠다는 회장님의 말씀. 솔직히 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장철구는 맞장구치듯 고개를 끄덕였다.
"뭐, 자네 말도 틀리지는 않지."
"……."
"만약 자네가 유능한 재목이 아니었다면…, 맞아. 세연이 근처에 얼씬도 못 하게 했겠지. 근데 자네는 뛰어나잖나."
면전에서 그 말을 들으면 쑥스러움에 얼굴을 붉힐 만도 하건만, 강하민은 장철구의 다음 말을 기다리며 인상을 살짝 굳혔다.
"내 자네의 이력을 살펴봤네만, 참으로 놀랍더군. 서울대 수석 졸업쯤이야 매년 나오는 상황이니 특별할 게 없다고 쳐도…, 처음 입사한 수호증권에서 보였던 실력과 거길 나온 뒤에 해낸 일들."
강하민의 미간이 점차 좁혀졌다.
아무래도 장철구 역시….
"좀 더 조사해보니 지난번 장강리조트 임시주총 때 세연이의 편을 든 해외 투자법인들 역시 자네와 연관이 있더군. 미국에 있는 스피어란 곳은 자네 친형이 운영하고 있다지."
장철구 역시 장기우와 마찬가지로 큰 착각을 하고 있었다.
지금의 미래 그룹과 스피어, 블레스, 티엔유 등의 해외 투자법인 설립과 성장에 자신이 크게 기여했다고 여기는 거다.
실상은 그와 전혀 다른데도 말이다.
그들의 입장에선 명문대도 아닌 일반 4년제 대학교를 졸업도 못 한 현시운의 성과일 거라고는 생각도 할 수 없었겠지.
"세연이와 결혼해서 우리 집안 사람이 되게. 과거의 묵은 악연 역시 이참에 풀어야 하지 않겠나. 그리고…."
"……."
"기우 녀석을 도와 장강을 더욱 크게 일으켜."
사위가 아닌, 그룹에 도움이 될 인재를 영입하려는 장철구의 의중이 이로써 잘 드러났다.
그것도 딸을 미끼처럼 이용해서 말이다.
강하민은 자식보다 회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장철구의 태도에 말문이 막혀 버렸다.
* * *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내년 상반기 영업 계획을 보고받으러 장강백화점에 들렀었던 장세연은 회의를 마치고 매장을 둘러보던 중, 반갑지 않은 이로부터 연락을 받게 되었다.
- 누님은 모르셨나 봅니다? 아버지께서 강하민 대표와 오늘 만난다고 하시던데…. 사귀는 사이면서도 서로 비밀이 많은가 봐요?"
"비꼬지 말고 똑바로 말해. 장 회장이 하민 씨를 왜 만나?"
- 이런…. 아무리 미워도 아버지를 그렇게 부르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누님?
걱정스럽다는 말투의 장기우.
그 이면에 자리한 조롱을 모를 리 없는 장세연은 이를 아득 갈며 언성을 높였다.
전화를 건 이가 누군지 확인하자마자 발길을 돌려 백화점에 별도로 마련된 자신만의 집무실에 들어왔다.
소리를 지른다고 해서 밖으로 새어 나갈 염려는 없었다.
"잔말 말고 묻는 말에나 제대로 대답해!"
- 그게 부탁하는 사람의 태도입니까?
"…너어!"
- 뭐, 그래도 누님은 알고 있어야 할 테니까. 왜겠습니까? 뻔하잖아요.
"뻔해? 뭐가?"
- 누님도 잘 아실 텐데요. 강하민 대표의 집안이 우리와 어떤 관계인지. 아버지께선 강 대표가 의도적으로 누님한테 접근했다고 생각하시겠죠. 그럼 만나서 할 얘기가 뭐겠습니까? 당연히 헤어져라, 그 말 아닐까요?
"……."
더는 들을 가치도 없다 여기며 장세연은 통화를 종료하려 했다.
- 근데 누님, 전 찬성입니다.
"…무슨 소리야, 그게?"
- 가문이 미천해서 그렇지 능력은 있는 사람 아닙니까. 전 매형으로 강 대표 괜찮다고요.
"누가 네 매형이야!"
장세연은 감정이 실린 세 마디의 외침과 함께 전화를 끊어버렸다.
솟구치는 화를 몇 차례의 들숨과 날숨으로 가라앉힌 후, 그녀는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 나다. 무슨 일이냐?
"…하민 씨 만난다면서요."
장세연의 전화를 받은 이는 바로 장철구였다.
- 늦게 알았구나. 이미 만났다. 지금은 헤어졌고.
"무슨 일로 만나신 거예요. 대체 그 사람한테 무슨 말을 하려고…."
- 결혼하라고 했다. 너와.
"…네?"
사실 장세연도 장기우의 말처럼 장철구가 강하민을 만나는 게 좋은 의도는 아닐 거로 여겼었다.
근데 그녀의 예상이 빗나갔다.
"결혼이라뇨? 그게 무슨…."
- 전혀 얘기를 듣지 못했나 보구나. 입이 제법 무거운 편이군. 그거 하난 마음에 드네.
"그게 무슨 말이냐니까요?"
- 말 그대로다. 너와 결혼하라고 했다. 나이도 찰 만큼 찬 녀석들이 언제까지 연애질만 하려고. 어서 가정을 꾸려 안정을 찾아야지.
"……."
순간 장세연은 자신이 아는 장철구가 맞나 의심이 들 정도였다.
장강 그룹보다는 세가 약하더라도 충분히 도움이 될 정도의 재력이나 권력을 쥔 집안들에서 정략결혼 대상을 물색하던 그가 아니었던가.
첫째와 둘째 오빠들 역시 그렇게 결혼을 했다.
물론, 자식을 보기도 전에 사고를 당했지만.
정작 장세연만은 그 기준에서 제외됐었다.
이유는 후계자로 낙점한 장기우의 자리를 노릴 것을 우려하여.
그렇다고 강하민을 자신의 짝으로 흔쾌히 허락할 장철구가 아닌데….
- 근데 녀석은 별로 내켜 하지 않는 모양이더구나.
"……?!"
- 앵무새처럼 같은 말만 되풀이하더군. 둘 사이의 문제이니 관여하지 말라고.
왜일까?
강하민의 입장에서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 줄을 알면서도 내심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 넌 어떠냐?
"…네?"
- 그 녀석과 결혼하는 것 말이다.
좋아서 사귀는 건 맞지만, 사실 지금까지 결혼에 대해선 장세연도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었다.
하는 일도 바빴고, 공동의 목표를 향해 가야 할 길이 구만리와도 같아 그런 생각을 할 심적인 여유도 별로 없었다.
- 선뜻 답을 못하는 걸 보니 너도 녀석과 비슷한가 보군. 그렇게 내키지 않으면 얼른 헤어….
"우리 둘의 문제에요. 더는 간섭하지 마세요!"
- …….
장철구의 침묵을 대답으로 알고 장세연은 얼른 전화를 끊어버렸다.
핸드폰을 내려놓고, 무심코 손을 얼굴에다 갖다 댔는데 뜨거웠다.
열이 후끈할 정도로 체온이 올랐다.
"한동안…, 모르는 척해야겠지?"
강하민이 장철구와의 만남을 말하지 않은 건 자신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서일 거다.
다행히 오늘 그런 일은 없었지만, 만약 강하민이 모진 말이나 대접을 받았다면 장세연은 자신 때문이라고 여기며 한동안 자책했을 테니까.
장세연은 이번 일에 대해 강하민이 먼저 말을 꺼내기 전까지 모르는 척하기로 마음 먹었다.
"근데 왜 이리 더워."
장철구에게 강하민과의 결혼 얘기를 들은 직후 오른 열이 식지 않는다.
장세연은 두 손으로 열심히 손부채질을 하며 얼굴에 바람을 실어 보냈다.
바깥은 영하의 기온을 자랑하는 12월의 겨울이었다.
* * *
2021년 12월 20일.
현시운은 올해 마지막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아침 일찍 비행기에 올랐다.
퍼스트클래스석의 안락함을 만끽하며 서서히 하늘로 날아오르는 비행기의 바깥 풍경을 감상하는데 옆에서 감격한 듯한 음성이 들려왔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전 그냥 이코노미석에 타도되는데…."
자신을 수행하려 따라온 강철완의 말에 시운은 픽 웃었다.
- 저 혼자 가도 됩니다.
- 안 됩니다. 현지에서 무슨 사고가 일어날지 모릅니다.
- 어차피 현지 통역관과 경호원까지 고용해놨지 않습니까. 그냥 혼자 가도….
- 회장님 한 분께 미래 그룹 임직원들 모두의 안위까지 달렸다고 생각해주십시오. 언제 어느 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습니다. 말이 통하는 경호원 한 명쯤은 있어야 합니다.
강하민의 사주를 받기라도 했는지 미래 그룹 비서실장 권재환은 절대 양보를 하지 않았다.
그들의 입장에선 당연한 반응일 거다.
신진 그룹의 왕원 회장 심기를 어지럽혔으니 언제 보복을 당할지 모른다.
그나마 치안이 좋은 대한민국에서야 섣불리 행동하기 힘들겠지만, 해외에서는….
얼마든지 시도해볼 수 있는 일이다.
"한참을 가야 하니 강 비서도 눈 좀 붙여요."
"아닙니다! 회장님의 신변에 그 어떠한 일도 일어나지 않게 철통같이 지키겠습니다."
비행기 안인데 그럴 필요가 있을까?
권재환으로부터 단단히 주의를 받았는지 평소보다 강철완의 의욕이 과해 보였다.
그러면서도 난생처음 타보는 퍼스트클래스석이 신기한지 좌석 이곳저곳을 살피기 바빴다.
시운은 잠깐 창밖을 바라보다가 슬며시 눈을 감았다.
자신이 방금 말한 것처럼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될 비행이다.
그렇게 얼마 뒤 잠이 들었고, 인천국제공항 발 항공기는 구름을 뚫으며 빠르게 나아갔다.
7시간 뒤, 시운이 탄 비행기가 목적지인 공항에 내려섰다.
수카르노 하타 국제공항.
기회의 땅, 인도네시아에 시운은 마침내 도착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