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9화 인도네시아(2)
평소처럼 오전 업무를 이어가던 토라 위라완의 귀로 협상 얘기가 들려온 건 용변을 보러 들른 화장실 안에서였다.
보통 자신의 집무실에 딸린 전용 화장실을 이용하는 편이지만, 현재 내부를 수리하고 있어 직원 화장실을 이용해야만 했다.
번거롭고, 또 불편한 상황이었지만, 덕분에 미처 알지 못했던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혹시 그 얘기 들었습니까?"
"뭐? 무슨 얘기?"
변기 위에 앉아있던 토라는 밖에서 들리는 말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국가개발기획부, 에너지/광물자원부, 교통부까지. 이 세 곳의 장관들 뒷주머니가 간만에 두둑해지게 생겼잖습니까."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그 양반들 뒷주머니가 두둑해지다니. 어디 좋은 건수라도 물었다는 거야?"
"저도 교통부에서 일하는 친구한테 엊그제 전해 들은 얘기입니다만. 그게 어떻게 된 일이냐면…."
칸 너머로 들리는 둘의 대화에 처음에는 흥미를 갖고 듣기 시작한 토라의 안색이 점점 굳어져 갔다.
그들이 나누는 대화 내용은 이러했다.
한국의 미래 그룹이란 회사에서 보르네오섬 고속도로 건설과 광산 개발 사업을 협상하러 인도네시아를 방문했는데….
아까 언급했던 세 부처의 장관들이 은근슬쩍 뇌물을 요구하며 협상을 엉망으로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이 작자들이!'
대통령궁에서 일하는 직원의 귀에까지 들려온 걸 보면 공공연히 알려지기도 했거니와, 사실일 가능성도 매우 크다.
보르네오섬의 인프라 구축과 관련하여 한국의 기업, 미래 그룹과의 협상이 진행된다는 건 토라도 이미 보고받아 알고 있는 내용이다.
현재 수도 자카르타가 있는 자바섬의 인구 과밀집 문제는 날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었다.
더는 손을 댈 수 없을 정도로 사태가 악화하기 전에 해결책을 마련해야만 했다.
그래서 결정된 것이 바로 신수도 건설 사업.
보르네오섬 동부 발릭파판으로의 수도 이전과 동서 횡단 고속도로 건설은 토라 위라완이 남은 임기 동안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국가사업이었다.
하지만, 순조롭게 사업을 시작해보기도 전에 방해꾼이 나타나 버리다니.
2020년 코로나 19 범유행 사태.
유례를 찾기 힘든 감염병의 여파로 국고는 바닥을 보이고 있고, 보르네오섬 개발을 위한 예산 집행 역시 어려워졌다.
해외 차관을 들여오거나 국채를 발행해서라도 사업 진행을 서두르려 했지만, 국외뿐만 아니라 국내의 호응도 매우 낮아 초장부터 무산되어 버리고 말았다.
임시로 신설된 '신수도 개발 사업처'에서 현재의 여러 여건을 종합하여 예상한 공사 시작 시점은 지금으로부터 3년 뒤인, 2024년 7월이다.
그것도 희망적일 때 그렇다는 것뿐이지, 실제로 얼마나 더 지체될지 장담할 수도 없었다.
대통령 임기 내에 수도 이전 사업을 시작하고, 절반 가까이 완성해놓는 게 토라의 바람이다.
그래야 자신의 업적으로 역사에 새겨질 것이고, 소속 정당에서 출마할 차기 대통령 후보에게 힘을 실어줄 수 있다.
그런 자신의 고민에 해결책을 제시하겠다며 다가온 게 한국의 미래 그룹이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들과의 협상을 추진했고, 밖에서 떠들어대는 이들이 언급한 세 장관에게 그 일을 믿고 맡긴 게 바로 토라 위라완이었다.
자신의 의중을 모를 리 없는 그들이 이런 일에까지 사사로운 욕심을 채우려 한다?
사실이라면 토라로선 묵과할 수 없는 일이다.
인도네시아 공직 사회에 만연한 부정과 부패를 토라도 모르지는 않았다.
과거의 정치인들이 그래왔듯이, 불문율처럼 알면서도 어느 정도까지는 묵인해줬었다.
하지만, 이번 협상은 국가의 앞날을 결정할 만큼 큰 사안이라 기존의 범주에 놓고 볼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미래 그룹이란 곳은….
코로나 19 범유행 사태 초기에 높은 정확도를 자랑하는 진단키트를 자국에 선뜻 기부하고, 백신 개발 이후 한국을 제외한 타 국가 중 인도네시아를 최우선 공급 대상으로 선정해주기까지 한 곳이다.
덕분에 얼마나 많은 인도네시아인이 감염병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가.
거기에는 토라의 모친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겠군.'
자신이 나서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어느새, 바깥은 조용해졌다.
이야기를 나누던 두 사람이 나간 모양이다.
토라는 용변을 마치고, 서둘러 집무실로 향했다.
바로 비서실장을 호출한 그는 먼저 사실 확인을 위해 지시를 내렸다.
"지금 바로 한국에서 왔다는 미래 그룹과의 보르네오섬 개발 사업 협상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를 알아봐 주시오."
"네, 각하!"
나갔던 비서실장은 불과 삼십 분도 지나지 않아 다시 집무실로 돌아왔다.
거창하게 조사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제대로 된 협상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어제 오후에 잠깐 첫 면담만 가지고, 오늘 본격적인 협상에 들어갈 예정이라고 합니다."
"첫 면담?"
"네, 각하."
아까 화장실에서 들었던 것과는 사뭇 다른 내용이다.
토라는 비서실장의 얼굴을 뚫어지라 쳐다봤다.
그게 부담스러운지 비서실장은 슬쩍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토라와 벌써 4년을 함께한 비서실장이다.
그의 그런 행동이 뜻하는 바를 모를 리 없는 토라는 좀 전보다 딱딱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비서실장."
"네, 각하!"
"실장은 누굴 위해 일하는 사람이오?"
"그야 당연히 대통령 각하…."
"날 위해 한다는 일 중에…. 내가 들어서 기분 나쁠 사실을 걸러버리는 것도 포함이 되오?"
"……."
비서실장의 표정이 단번에 굳어버렸다.
그의 표정에서 확신을 얻은 토라는 거듭 비서실장을 추궁했고, 일부러 보고하지 않은 전날의 경과를 똑똑히 전해 들을 수 있었다.
화장실에서 들었던 직원들의 대화와 크게 차이 나지 않는 내용이다.
"협상 장소로 갑시다."
"가, 각하!"
각 부처에 책임자인 장관들이 있고, 그들에게 이미 맡긴 일이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는 건 자칫 월권행위로 비칠 수도 있었다.
아니, 그보다는 같은 정당 소속의 장관들을 대통령이 불신임하는 것처럼 보일 가능성이 더 높았다.
그리되면, 아직도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토라 위라완의 실정을 바라는 반대파에게 좋은 빌미만 될 뿐이다.
"내가 추구하는 방향으로 일을 진행하게끔 책무를 대신 맡은 인사들이 엄한 수작질로 대사를 그르치고 있다지 않소. 응당 맡긴 당사자가 나서서 해결을 봐야죠!"
"……."
단호한 태도의 토라를 비서실장도 말릴 수 없었다.
토라는 지금의 심정을 고스란히 담은 거친 발걸음으로 현시운과 헬렌 리우, 세 장관이 모여있는 협상 장소로 향했다.
* * *
"토, 토라 위라완 님께서 여, 여기는 어쩐 일로 친히…."
예상치도 못한 인물의 등장에 국가개발사업부의 장관은 화들짝 놀라며 말까지 더듬었다.
"이 자리는 공적인 자리인 줄로 압니다만…. 호칭에 신경을 쓰시오!"
"아…, 네. 대, 대통령 각하. 죄송합니다."
사적으로 친분이 제법 두터웠던 토라 위라완과 배불뚝이 장관이다.
그렇기에 토라의 실망감은 더욱 컸다.
다른 두 장관도 대통령의 등장에 방금까지의 거만한 태도를 버리고 바짝 긴장한 표정들이다.
토라는 세 장관을 쳐다보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리고 다짐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현 시각 부로 세 장관은 이번 협상에서 손을 떼시오."
"네?! 각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저, 저희가 책임자인데 어찌 그런 말씀을…."
항변하는 그들에게 매서운 시선을 쏘아주자 금세 반발은 잦아들었다.
"내가 손님들이 있는 자리에서 그대들의 잘못을 하나하나 늘어놓아 보리까? 그걸 원하시오?"
"……."
쥐죽은 듯 조용해지는 세 장관에게 토라는 남은 말을 마저 내뱉었다.
"이번 협상은 내가 직접 주관할 겁니다. 결과는 각 부처에 통보해줄 터이니 그 이후의 일들이나 신경 쓰시오. 만약, 그때도 이번과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면…."
"……."
뒷말은 생략되었지만, 세 장관은 듣지 않고도 어떤 내용일지 충분히 짐작했다.
"내 할 말은 다 끝났으니 다들 그만 나가 보구려. 어서!"
평소와 달리 매섭게 날이 선 토라의 모습에 배불뚝이는 옆의 장관들에게 눈짓하며 물러날 것을 종용했다.
셋은 짜증과 아쉬움, 걱정이 뒤섞인 얼굴로 미팅룸을 나섰다.
"거기 당신…. 인도네시아인으로 보이는데, 혹시 통역으로 이 자리에 있는 것이오?"
"…아, 네, 넷! 그, 그렇습니다."
매스컴에서나 봤던 대통령의 등장에 바짝 얼어있던 통역관이 뒤늦게 대답을 했다.
"당신도 그만 나가보시오. 이분들과는 내 직접 대화를 하지."
"하, 하지만 서로 말이 통하지 않…."
통역관은 말을 하다 말고 뭔가를 깨달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토라가 미국 유학을 다녀왔다는 사실을 뒤늦게 떠올린 것이다.
"그, 그럼 저도 이만…."
현시운과 헬렌 리우 입장에선 지금의 상황이 몹시 갑작스럽고 혼란스러웠다.
어제보다 훨씬 늦게 들어온 세 장관에게 속으로만 욕을 하면서 못다 한 사업 설명회를 진행하려는 찰라, 인도네시아의 현 대통령이 깜짝 등장을 하는 믿기지 않는 일이 발생했다.
그 뒤 인도네시아어로 말들이 오고 가서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토라 위라완과 자신들만 미팅룸에 남겨두고 모두 나가버린 데에 적잖이 당황하고 있었다.
"우선 사과의 말씀부터 드립니다. 제가 갑자기 들어와 많이 놀라셨을 거요."
인도네시아 사업을 준비하며 국내외 사정과 주요 인물에 대한 사항들을 미리 숙지했었기에 시운과 헬렌은 토라가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데에 별로 놀라지는 않았다.
"아닙니다. 그보다는, 각하께서 여기는 어쩐 일로 오신 것인지…. 그리고 왜 다들 나가버렸는지…."
조심스럽게 건네는 헬렌의 물음에 토라는 쓴웃음과 함께 입을 열었다.
"조금 전에 세 장관의 무례함에 대해 전해 들었소. 우리 인도네시아에 도움을 주려고 오신 분들께 큰 결례를 범했습니다. 제가 대신 사과드리죠."
고개를 작게 숙이는 토라의 모습에 시운과 헬렌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한 국가의 수장인 토라 위라완이지 않은가.
아무리 국익을 위해서라지만, 일개 사업가쯤으로 여길 자신들에게 아랫사람의 일로 직접 고개 숙여 사과까지 하다니.
시운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입을 열었다.
"대통령 각하. 근데 이렇게 장관들이 나가버리면 저희가 들고 온 협상안은 누구와 의논을 해야 할는지요."
다른 책임자와 다시 일정을 잡아야 하나 싶어서 물었고, 그에 대한 답을 토라가 시원스럽게 내놓았다.
"저와 하시죠."
"…네?"
"이제부터 제가 직접 협상을 진행할 겁니다."
"……."
실무자나 관계 부처 장관도 아닌 대통령이 직접?
시운과 헬렌은 당황해하며 서로의 눈을 잠시 마주 봤다.
"이래 보여도 자카르타 시장도 역임한 바 있습니다. 관급 공사에 관한 계약도 직접 주관한 적이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웃으며 대꾸하는 토라의 모습에 시운은 재빠르게 생각하고 또 판단을 내렸다.
'오히려 아까보다 나은 상황인데?'
떡고물에 더 관심을 두었던 장관들을 상대하는 것보다 본 사업에만 치중하는 대통령과의 협상이 훨씬 좋은 선택지다.
부패인식지수가 낮은, 그러니까 부패도가 높은 나라일수록 지도자의 권력이 강해지는 경향이 있다.
그런 논리로 따지자면, 중국의 주석보다도 토라 위라완의 국가 장악력이 더 높다는 예상치가 도출된다.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라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의 결정이 향후 사업의 향방에 큰 영향을 미칠 거라는 건 분명했다.
안 그래도 친 대한민국 성향의 토라 위라완이다.
수도 이전 사업의 파트너로 대한민국을 선택한 결과에 그의 의견이 많이 반영되었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다.
어쩌면 일이 더 쉽게 풀릴지도 몰랐다.
헬렌도 시운과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조금 전보다는 밝은 표정이다.
"근데 제가 대략적인 개요만 들어봤지, 상세한 사업 내용과 귀하들이 제시할 조건들은 모르오. 번거롭겠지만, 다시 한번 설명을 부탁드려도 되겠소?"
어차피 어제 첫 협상 자리에서도 장관들에게 자세한 내용까지 전달하지 못했었다.
시운과 헬렌은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대통령 각하."
어제와 달리 준비해온 자료를 테이블 위에 질서정연하게 늘어놓아 순서대로 고속도로 건설과 광산 개발 사업에 대한 설명을 이어나갔다.
고속도로 건설 사업 설명에선 두 눈을 반짝이면서까지 집중하던 토라는 상대적으로 광산 개발에서는 그리 탐탁지 않아 하는 눈치다.
그 이유는 시운과 헬렌도 잘 알고 있었다.
현재 세계 최대의 금 생산지이기도 한 인도네시아 파푸아 주 푼착자야 산의 그라스버그 광산.
1967년 친 서방 정책을 펼쳤던 당시의 대통령이 외국인 투자를 끌어들일 목적으로 광산 채굴권을 미국의 업체에 넘겼던 금광이다.
50년도 지난 재작년 2019년에서야 겨우 광산 경영권을 되찾아올 수 있었다.
그 사이 광산 개발로 인한 환경 파괴는 피해액만 130억 달러에 달했다.
그에 비해 인도네시아 정부가 그간 로열티로 받았었던 금액은 한해 전체 순이익의 9% 남짓으로 1억 달러에도 못 미쳤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사업이었던 것이다.
그라스버그의 경영권을 되찾아온 것은 토라의 임기 내에 있었던 일로 그의 자랑할 만한 업적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런 전적이 있는 만큼 자국의 광산 개발을 타국의 사업체에 맡기는 건 토라로선 꺼려지는 부분이기도 했다.
그걸 잘 설득해서 광산 개발권까지 따내야 하는 게 시운과 헬렌의 당면 과제였다.
한 시간 반 남짓의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 시운과 헬렌은 세 장관에게도 하지 못했었던 상세한 사업 설명을 모두 마쳤다.
그리고, 헬렌은 토라의 마음을 사로잡을 먹음직스러운 미끼를 던졌다.
"…200억 달러?"
헬렌이 협상의 카드로 꺼내든 조건에 토라는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