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악연의 고리(1)
세계보건기구(WHO)는 2022년을 코로나 19 범유행 사태의 종식 원년으로 선포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미래제약과 네 곳의 위탁 생산 업체에서 그동안 약 30억 명분의 백신을 생산해냈고, 이는 여러 국가로 보급되었다.
덕분에 감염병이 급속도로 잡혀가는 추세다.
백신을 개발해낸 대한민국은 세계 어느 곳보다 빠르게 코로나 19 종식을 선언한 바 있다.
전 국민에게 백신을 접종시키고, 거부 반응을 일으키는 환자에게 새로이 개발한 치료제를 투여한 결과였다.
"…쯧!"
인터넷으로 세계보건기구의 기사를 살펴보던 현시운은 혀를 찼다.
코로나 19 종식 원년?
그건 실상을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은 상황에서의 섣부른 판단이다.
전 세계 인구가 78억 명을 헤아린다.
그중 백신을 접종한 이는 전체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30억 명분의 백신이 생산되었다 해도 그게 다 쓰이는 건 아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비축하는 나라도 있고, 그걸 실험 재료로 자신들만의 백신을 만들려는 곳도 있다.
그렇다 해도 20억 명분 가량의 백신이 사용되었음은 분명했다.
소위 선진국이라고 일컬어지는 유럽과 북미 대륙의 대부분 국가는 발 빠르게 백신을 확보해 대한민국에 이어 자국의 감염병 사태를 수월하게 잡아냈다.
반대로 국가 발전도가 비교적 낮은 아프리카와 남미, 동남아의 국가들은 여전히 감염병의 위협 속에서 불안에 떨며 살고 있었다.
빈익빈 부익부는 일반 사회에서만 통용되는 현상이 아니다.
국제 사회에서 국가 사이의 간극은 더욱 도드라지게 나타나는 법이다.
세계 최대 인구수를 자랑하는 중국과 그 뒤를 잇는 인도 같은 경우는 자국민의 삼 분의 일 정도 되는 인원에 백신을 접종했다.
가장 많은 할당량이 주어졌지만, 인구수가 워낙 많다 보니 빚어진 일이다.
이 두 나라를 비롯하여 아직 코로나 19 사태가 지속되는 국가들은 미래제약과 위탁 생산 업체들에 라인 증설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었다.
어서 빨리 백신 생산량을 늘려 감염병을 지구에서 몰아내자는 주장이다.
하지만, 인류애보다는 이윤이 목적인 이들 기업은 증설 완료까지 걸리는 기간과 비용, 그사이 생산되는 백신의 양과 이후의 효용성 등을 따져가며 실익이 적다는 판단을 내렸다.
자연히 중국, 인도 등 여러 나라의 요구는 묵살되었다.
"후…."
시운의 입장에선 손해를 보더라도 라인을 증설하여 코로나 종식을 앞당겼으면 하는 마음이지만, 다른 위탁 업체들이 그 뜻에 호응해주지 않고 있다.
아무리 제약 특허를 보유했지만, 엄연히 위탁 생산의 계약서가 존재하는 만큼 행동을 강제할 수 없었다.
현재 미래제약은 기존의 라인에서 1차 증설이 완료되어 매일 300만 도스의 백신을 생산해내고 있다.
150만 명에게 접종할 수 있는 양이다.
여기서 두 배, 세 배까지 라인을 늘린다 해도 미래제약 단독으로는 전체 일일 생산량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사실 지금과 같은 추세라면 향후 1년 반 이내에 전 세계인에게 돌아갈 양 만큼의 백신 생산이 완료된다.
그 기간을 참지 못해 라인 증설에 헛돈을 쏟아붓는다는 건, 이윤 추구가 목적인 기업에 무가치한 일이라는 게 회사 안팎에서의 관점이다.
마음이 다소 무거워지는 사안에서 시운은 애써 신경을 돌렸다.
그저 세계보건기구의 섣부른 감염병 종식 선언으로 큰 혼란이 생기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오전 업무를 시작하려고 시운은 책상에 쌓인 결재판을 들어 올렸다.
웬만한 일은 계열사 대표의 전결로 처리하도록 하여 결재 업무의 양을 크게 줄였음에도 결재판의 수는 적지 않았다.
'지금 구축하고 있는 사내 인트라넷이 완비되면 좀 편해지려나?'
지금의 서면 결재 역시 전자 결재로 대체가 될 예정이다.
서로 연결점이 없던 기업들을 계열사로 한데 묶어 그룹화를 이루다 보니 하나의 시스템으로 통합하는 과정에 시간이 꽤 소요되었다.
"그래도 일, 이 주 정도면 끝난다고 했으니…."
막 미래증권에서 올라온 전년도 실적 보고서를 드는데, 시운의 핸드폰이 울려댔다.
[빅스텝 엔터테인먼트 이승진 대표]
발신자로 뜨는 이름이다.
"웬일이시지?"
가끔 안부 인사차 통화를 주고받기는 했지만, 최근 소속사 싱어송라이터의 데뷔를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다고 시무식에도 오지 못했던 이승진이다.
게다가 그의 성격상 업무와 관련된 일이면 그룹 비서실을 통해 연락했을 건데?
"여보세요?"
- …회장님.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평상시와 달리 몹시도 어둡다.
"네, 대표님. 말씀하세요.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한차례 긴 심호흡이 핸드폰 너머로 들렸다.
그리고 이승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 현 회장님…. 저 좀 도와주십시오.
간곡한 그의 부탁에 시운은 미간을 좁혔다.
* * *
함수아는 예쁘장한 외모를 타고났고, 노래와 춤도 곧잘 해 여느 또래들이 그러하듯 어렸을 적부터 연예인을 꿈꿨었다.
그러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친구들과 명동 거리를 걷다가 한 연예기획사 매니저의 눈에 띄었고, 계약 제의를 받았다.
꿈을 이룰 수 있겠다는 기쁨에 함수아는 부모의 반대에도 그곳과 계약했다.
미성년자라 부모의 동의가 필요한 일이었지만, 그녀는 집에서 두 분의 인감도장을 몰래 훔쳐 나오는 것으로 이를 해결했었다.
뒤늦게 사실을 안 부모는 딸의 고집에 결국 두 손과 두 발을 다 들었다.
3년간의 연습생 생활.
함수아는 최선을 다했다.
그런 노력이 헛되지 않았는지, 스무 살이 되던 해에 그녀는 소속사에서 야심 차게 기획한 5인조 걸그룹의 멤버로 발탁되었다.
드디어 데뷔!
간절히 바라던 꿈의 무대에 성큼 다가선 것이다.
그러나 데뷔는 끝내 무산되고 말았다.
막바지에 그녀는 걸그룹 멤버에서 제외되었고, 대신 또래의 다른 연습생이 자리를 차지했다.
함수아보다 2년이나 늦게 소속사에 들어온, 아이돌 트레이닝을 받은 지 1년도 되지 않은 연습생이었다.
회사 내의 객관적인 평가 역시 자신이 월등히 앞섰다.
그런데도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은 함수아도, 자리를 대신 꿰찬 연습생도 잘 알았다.
- 그러길래 시키는 대로 했었어야지! 비싸게 구니까 이런 꼴이나 당하는 거야.
며칠 뒤, 일방적으로 소속사에서 퇴출당할 때 도민식 실장이 그녀에게 건넨 말이다.
흔히 성 접대라고 부르는 2차를 거부한 결과였다.
함수아가 3년간 연습생으로 시간을 보냈던 연예기획사의 이름은 바로 HR 엔터테인먼트.
2019년 8월, 연습생을 데리고 룸살롱 접대를 한다는 스캔들이 불거진 이후 업계에서 영원히 사라진 바로 그 회사다.
HR 엔터의 입김 때문에 다른 기획사에도 들어갈 수 없게 된 함수아는 연예 주간지 '스타 체이서'의 기자 신명훈과 합심해 자신처럼 억울한 일을 당한 전 연습생을 찾아다니며 설득했다.
자신을 비롯한 HR 엔터 전 연습생들의 생생한 증언은 '스타 체이서'에 기획 기사로 실리며 대중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줬다.
HR 엔터테인먼트 측과 진실 공방이 이루어졌고, 결국 법정에선 연습생 접대를 주도한 장본인, 고희준 대표와 도민식 실장에게 실형을 선고했다.
이후 회사가 문을 닫았음은 당연했다.
그 일이 있고 난 직후, 함수아와 전 연습생들을 향한 응원의 글들이 웹상을 도배하다시피 했다.
밝히기 쉽지 않은 스스로의 치부까지 드러낸 그 용기를 찬사하며.
동시에 악의적인 글도 함께 올라왔다.
자기들도 대가를 바라고 술자리까지 나간 거 아니냐.
데뷔하려고 별수를 다 쓰네.
차마 입에 담기도 힘든 욕설과 난잡한 음담패설들이 뒤를 이었다.
데뷔라는 꿈을 저당 잡힌 소녀들에게 회사의 말은 절대적이다.
그런 실상을 제대로 보려 하지 않는 사람들의 비수와도 같은 말에 증언에 나섰던 소녀들은 다시 방구석으로 숨어들 수밖에 없었다.
당시 HR 엔터의 스캔들을 시작으로 연예계에는 때아닌 미투 운동이 불어닥쳤다.
이로 인해 적지 않은 피해를 본 방송사와 연예기획사들은 소녀들을 철저히 외면했다.
'스타 체이서'를 비롯한 몇몇 양심적인 언론사에서 소녀들을 두둔하는 사설을 올렸지만, 크게 소용은 없었다.
그들의 행동이 옳다는 건 알지만, 어느 업계든 내부 고발자는 꺼려지는 법이다.
그렇게 완전히 꿈이 꺾였다고 여긴 함수아는 매일 자취방에서만 머물렀다.
알바도 관둔 채 하루에 한 끼도 먹는 둥 마는 둥, 매시간을 눈물로 보내며 점점 말라 죽어갔다.
그런 그녀를 살린 건 '스타 체이서'의 기자 신명훈이었다.
- 제가 말했잖아요. 끝까지 함께 싸워주겠다고. 거기엔 수아 씨의 꿈을 응원하는 것도 포함입니다.
그가 찾아와 건넨 한 장의 명함은 자살까지 심각하게 고민하던 함수아에게 다시 살아갈 힘과 용기를 주었다.
[빅스텝 엔터테인먼트 이승진 대표]
한때 HR 엔터에서 같이 연습생 생활을 하다 자신보다 1년 먼저 쫓겨났었던, 이지아가 몸담은 곳.
영세한 기획사이지만, TV 방송보다 위튜브를 공략하는 방법으로 소속 그룹인 블루비쥬의 이름을 한창 알리고 있었다.
신명훈의 소개로 빅스텝 엔터테인먼트를 찾아간 함수아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생각한 것과는 달리 강남 한가운데 사무실이 있었고, 자체 안무 연습실과 녹음실, 콘텐츠 제작실까지 갖춰진 번듯한 기획사였으니 말이다.
영세하다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 회사였다.
이승진 대표와 간단히 면접을 본 후, 노래와 춤을 테스트받았다.
결과는 합격.
함수아는 그날부로 빅스텝 엔터테인먼트 소속 연습생이 되었다.
- 아무래도 현재 분위기상 수아가 단기간에 데뷔하기는 어려워.
그 점은 함수아도 잘 알았다.
대중들과 달리 업계 관계자들은 HR 엔터 스캔들에 연루된 연습생이 누군지 대부분 다 알고 있으니까.
- 하지만, 위튜브 방송은 또 다르지. 일단 블루비쥬가 그랬던 것처럼 위튜브 채널을 개설하고 거기서부터 활동을 시작해보자.
인지도를 먼저 쌓고, HR 엔터 스캔들의 파장이 한층 가셨을 때 정식 데뷔를 해보자는 이승진 대표의 제안에 함수아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녀가 판단하기로도 그 방법 외에 당장 뾰족한 수는 없어 보였다.
그렇게 함수아는 'SU'라는 예명을 가진 위튜버가 되었다.
입 주위만 드러난 고양이 가면과 고양이 귀 액세서리를 차고, 신비주의 컨셉으로 'SU의 음악 카페'라는 채널을 개설했다.
콘텐츠는 유명 팝과 인기가요 커버.
가끔 실시간 방송으로 구독자들과의 Q&A 시간을 가졌고, 댓글로 신청을 받아 다수가 원하는 곡 위주로 미니 콘서트도 열었다.
이미 아이돌 그룹의 보컬로 완성된 함수아는 커버 콘텐츠를 표방하는 위튜버들 중에서도 단시일 내에 두각을 드러낼 수 있었다.
거기에 소속사의 아낌없는 지원이 뒷받침되니 그녀의 노래 실력은 나날이 늘어만 갔다.
그렇게 2년의 세월이 흘렀고, 함수아는 어느덧 천만 이상의 구독자를 보유한 플래티넘 등급의 위튜버가 되었다.
매번 올리는 그녀의 커버 영상은 평균 250만의 조회수를 기록했다.
열혈 구독자들로부터 정식으로 가수 데뷔를 하라는 요청까지 빗발쳤다.
- 때가 된 것 같다. 이제 정식으로 곡 내자.
이승진 대표는 지금이 적당한 시기라고 여겨 함수아를 위해 만들어뒀던 곡을 내놓았다.
두 달 간의 맹연습을 가진 뒤, 함수아는 가면을 벗고 자신의 위튜브 채널에서 데뷔 무대를 가졌다.
15분 남짓의 영상에는 미니 앨범에 수록된 세 곡이 담겼다.
처음으로 드러난 위튜버 'SU'의 얼굴에 국내외 구독자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악플이 전혀 없지는 않았지만, 95% 이상이 긍정적인 댓글이었다.
소속사인 빅스텝 측에선 순조로운 출발이라고 자체적으로 평가하며 다음 무대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하지만….
옛말 틀린 거 하나 없었다.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과거의 악몽은 꼬리표처럼 함수아를 따라다녔다.
[SU의 정체!]
분석 전문 위튜버가 전 HR 엔터 소속 아이돌들의 제보를 토대로 함수아를 심층 분석 하는 방송을 제작했다.
이는 단번에 대중들의 시선을 끌었다.
HR 엔터 스캔들의 피해자였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비슷한 내용의 영상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이름?"
"……."
험악한 인상의 형사가 자판을 두들기며 사무적으로 물었다.
함수아는 입술을 지그시 물며 바르르 몸을 떨었다.
그녀에게서 대답이 없자, 형사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좀 전보다 위협적인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이름이 뭐냐니까?"
"…함수아입니다."
차갑게만 느껴지는 백열등 아래 함수아는 형사로부터 조사를 받고 있었다.
강남경찰서 형사과 생활범죄수사팀.
현재 함수아가 붙들려온 곳이다.
과거의 일이 다시 그녀의 발목을 잡아채 이곳에 데려다 놓았다.
고개를 푹 숙인 함수아의 뺨으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 * *
"회장님께서 알아보라고 하신 함수아 양 사건 내용입니다."
현시운은 비서실장 권재환이 내민 결재판을 받아 들었다.
"사건이 벌어진 장소는 함수아 씨가 사는 아파트 지하주차장이었습니다."
"주차장? 그럼 CCTV가 있잖습니까? 어째서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뀐 거죠?"
"확인을 위해서 아파트 관리실에 협조를 요청했습니다만…. 그 시각 기계 오류로 CCTV가 작동하지 않았다는 답변만 들었습니다."
"이미 상대 쪽에서 손을 썼다는 거군요."
"네, 아무래도 그렇게 추측됩니다. 마땅한 증거가 없다 보니 당사자들의 증언에 무게가 실린 상황입니다."
그런 경우 힘 있는 쪽이 유리해지는 법이다.
시운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법무팀은 어쩌고 있습니까?"
시운의 물음에 권재환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이십 분 전쯤에 출발했습니다. 아마 강남경찰서에 도착했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수고 많았습니다."
"아닙니다. 회장님."
고개 숙여 인사한 뒤, 권재환은 집무실을 나갔다.
"……."
결재판에 끼워진 이번 사건의 개요를 살펴보던 시운은 헛웃음을 흘리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전생부터 무슨 악연이라도 있었나? 이 집안과 꽤 엮이네, 진짜."
보고서 안에 명시된 이번 사건의 피해자.
아니, 스스로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34세의 가해자 이력을 살펴보는 시운의 눈빛이 한없이 차가워졌다.
[삼정물산 상무 신수호(34세). 현재 서울 삼정의료원 VIP실에서 치료 중.]
입가가 절로 비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