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로 재벌 참교육-106화 (106/139)

§106화 악연의 고리(2)

비서실에서 올린 보고서는 확인된 사실만을 토대로 객관적 관점에서 작성되었다.

현시운은 시간순으로 나열된 내용을 두어 차례 반복해서 읽어내렸다.

텁-

결재판을 덮은 뒤, 시운은 눈자위를 문지르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뉘었다.

"……."

눈을 감은 채 이번 일의 시작부터 다시 되뇌어본다.

비록 위튜브 채널을 통해서이지만, 여태까지와는 달리 정식으로 얼굴을 드러내고 활동을 시작한 함수아.

호응을 꽤 얻음과 동시에 그녀를 알아본 이들 때문에 3년 전의 과거사가 만천하에 드러났다.

악의적인 댓글이 늘어난 것은 당연했다.

- 수아도 이미 그 부분은 충분히 각오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을 응원해 주는 팬들을 위해서라도 이겨내겠다고 의지를 다지기까지 했죠. 하지만….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한 악질들이 많더라고요.

이승진 대표와 통화 중에 들었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한번 스캔들에 연루되면 사실과 다르다 해도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개중 몇몇은 함수아를 향해 자신의 추악한 욕망을 드러내기도 했다.

[스폰 제의합니다. 개인 자산 100억 원도 넘어요. 계좌 인증 사진 첨부합니다.]

[시간당 백만 원! 어때? 이런 일 처음도 아닐 거잖아. 회신 기다릴게.]

함수아의 위튜브 채널 계정으로 이런 악질적인 DM이 하루에도 열 통이 넘게 날아왔다.

심지어 자신의 성기를 찍은 사진까지 첨부해서 보내는 또라이들도 있었다.

소속사인 빅스텝은 법적 대응을 하기 위해 경찰에 조사를 의뢰했지만, 대부분 해킹툴을 이용하거나 남의 개인정보로 개설한 계정이라 범인을 찾아내기도 쉽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재벌 3세 스토커가 나타났다.

- 나 삼정 그룹의 신수호. 잘 알지? 국내 1위 기업의 재벌 3세. 너 내 애인이나 해라.

어떻게 알아냈는지 함수아의 핸드폰 번호까지 알고 있는 그는 날마다 전화와 문자메시지로 그녀를 괴롭혔다.

함수아가 끝까지 거부하다 나중에 번호마저 차단하자, 신수호는 그녀가 사는 아파트를 직접 찾아왔다.

마침 귀가하던 함수아는 지하주차장에서 자신을 기다리던 신수호와 맞닥뜨렸다.

선민사상에 찌든 신수호는 아무것도 아닌 게 반반한 얼굴 하나 믿고 튕긴다며 추행과 함께 위협을 가했고, 함수아는 평소 들고 다니던 전기충격기를 그에게 사용하고야 말았다.

아파트 경비원의 신고로 경찰이 출동하고, 구급차가 달려왔다.

삼정 그룹이 수습에 개입하면서 상황은 함수아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함수아라."

기억에 남는 이름이다.

예전 빅스텝 엔터테인먼트를 집어삼키려 수를 쓰던 HR 엔터를 스캔들로 날려버릴 때, 결정적인 증언을 해준 소녀였다.

포크레인 흥신소의 정민철 사장에게 사정을 자세히 전해 들은 바 있었다.

그를 통해 신명훈의 부탁을 들어줬었지.

빅스텝 엔터 이승진 대표를 연결해주는 방법으로 말이다.

인기 위튜버로 잘 나간다고 지나가듯 듣기는 했었는데….

가면을 벗고 양지로 한발을 들이자마자 구정물이 튀었다.

"이왕 신세를 갚기로 했으니…."

제대로 도와야 하겠지?

과거의 일을 차치하고서라도 함수아는 현재 미래 그룹의 계열사 중 하나인 빅스텝 엔터의 아티스트다.

같은 회사 식구인 만큼 챙기는 건 당연한 일이다.

시운은 결재판으로 다시 시선을 옮겼다.

[삼정물산 상무 신수호(34세). 현재 서울 삼정의료원 VIP실에서 치료 중.]

"……."

국내 1위 기업, 삼정 그룹 오너 가의 일원.

누가 생각해 봐도 쉽지 않은 상대다.

증거가 될 지하주차장 CCTV 영상을 없애고, 피해자를 가해자로 몰아버릴 수 있을 정도니까.

하지만….

"후후."

시운은 절로 미소를 지었다.

삼정.

이미 자신과 여러 번 부딪힌 전적이 있는 곳이다.

지피지기면 백전불태.

삼정의 어두운 면에 나름 조예가 깊은 시운이었다.

故 신정문 회장의 해외 비자금이라는 빅카드는 이미 써버렸지만, 아직도 여러 장의 카드가 남았다.

"삼정도 운이 없군. 매번 나랑 부딪히기나 하고."

아니, 인과응보일지도.

사회 질서와 법을 우습게 여기며 살아온 대가를 자신과의 악연으로 치르는 거겠지.

시운은 삼정 그룹 비서실 전화번호를 알아보려 인터넷 브라우저를 실행시켰다.

일단 계획한 바를 실행에 옮기기 전에 협상을 먼저 진행해볼 요량이다.

좋은 게 좋다고, 되도록이면 조용히 해결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원만한 해결이 가능할 거란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았지만 말이다.

* * *

하나의 병실과 두 개의 게스트룸, 넓은 거실에다가 욕조가 딸린 화장실까지.

서울 삼정의료원의 VIP실 구조다.

내부 인테리어부터 갖춰진 물품까지 고급이 아닌 것이 없다.

환자복을 입은, 서른 중반쯤 되어 보이는 남성이 거실 소파에 편히 드러누운 채 예능 프로그램을 보며 낄낄대고 있었다.

소파 앞 탁자 위에는 방금 먹어 치운 듯한 랍스터의 잔재가 어지러이 널렸다.

드륵-

노크도 없이 별안간 열리는 문에 남성은 이맛살을 살짝 찌푸렸다.

자신의 병실에 이렇듯 함부로 들어올 이는 몇 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이들 중 자신이 반길만한 인물은 별로 없다.

"아주 팔자가 늘어졌구나, 너?"

"…왔어?"

역시나 반갑지 않은 얼굴이다.

남성은 자신과 똑 닮은 여인의 얼굴에 맺힌 감정이 무언지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다.

평소 자신도 자주 짓는 표정이었기에.

그래, 상종하고 싶지도 않은 족속들을 바라볼 때의 눈빛과 표정.

바로 그것이었다.

"하나뿐인 동생을 바라보는 표정이 왜 그따위야."

"내 표정이 어떤데?"

"……."

남성은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밝히고 싶지 않았다.

아마도 정답이겠지만, 맞췄다고 상품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자신만 되레 비참해질 뿐이다.

"왜 왔어?"

"오빠 말을 전하러."

"…뭐?"

친혈육을 남 보듯 쳐다보며 신정아가 입을 열었다.

"이번 일을 덮어주는 조건으로, 네가 가지고 있는 삼정 지주회사의 지분을 모두 넘기래."

"뭐어?!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2%도 안 되는 지분이다.

그것마저 빼앗기면 자신은 삼정 그룹 내에서 아무런 힘도 없는 존재가 된다.

신수호는 이를 꽈득 물었다.

"씨발! 이게 말이 돼? 별것도 아닌 일로 지분을 다 넘기라는 게!"

"……."

안 그래도 몇 년째 자신만 제자리라는 사실에 짜증이 났었다.

병문안 같지도 않은 방문을 한 눈앞의 누이는 작년 상반기 인사발령에서 고려호텔의 사장으로 올라섰다.

자신만 삼정물산의 상무다.

벌써 5년째나 말이다.

"말이 안 되면 어쩔 건데, 네가?"

"뭐? 그걸 말이라고…."

"수근 오빠에게 대들기라도 하게?"

"……."

신정아의 물음에 신수호는 대답을 못 했다.

억울하고 분통이 터지지만….

감히 성격대로 행동하기에는 큰형 신수근이 너무나도 무섭다.

예전부터 장남이라고 거들먹거리는 꼴을 보였지만, 지금처럼 앞에만 서면 겁이 날 정도는 아니었다.

현재의 신수근은 마치…, 생전의 신정문 회장을 보는 듯했다.

'그때부터였지, 아마?'

2년 전, 초여름이 지나면서 변했다.

둘째 형 신수겸이 검찰 조사를 받으러 갔다가 투신자살로 생을 마감한 그 날 이후로 말이다.

예전의 우유부단한 면이 사라지고, 무척 냉혹해졌다.

"쳇!"

신수근에게 밉보여 그룹에서 쫓겨난 임원이 수두룩하다.

신수겸의 편에 섰거나 자신에게 손을 내밀지 않은 이들은 반년도 지나지 않아 모조리 내쳐졌다.

가족이라고 예외는 아닐 거다.

그래도 억울했다.

호감이 가는 계집에게 수작을 걸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가진 밑천까지 탈탈 털리게 생겼으니 말이다.

재벌가의 흔한 한량이 되고 싶지 않았지만, 현실은 신수호를 그리로 내몰고 있었다.

"형한테 내 말 좀 전해줘."

"내가 무슨 메신저니? 할 말 있으면 네가 직접 해!"

"아, 진짜! 지금 사람 차별해? 형 말은 전하면서 내 말은 왜!"

철부지 막내의 투정에 신정아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뭔데?"

"…지분 넘기는 대신 이번 일 제대로 마무리 지어달라고. 그 계집 다신 나대지도 못하게 확실히 밟아달라고 해줘."

"……."

이왕 이렇게 됐으니 분이라도 실컷 풀고 싶었다.

이 모든 불행이 주제도 모르고 자신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은 함수아 때문이라고 신수호는 생각했다.

"하아…. 찌질한 새끼."

그런 동생에게 진실한 소감을 내뱉은 신정아는 바로 등을 돌려 병실을 나섰다.

"…빌어먹을!"

홀로 병실에 남은 신수호는 끓어오르는 속에 리모컨을 바닥에 힘껏 던져버렸다.

그렇다고 분이 풀리는 건 아니었지만.

'두고 봐! 그 쌍년, 내가 두고두고 괴롭혀줄 테니까!'

훗날의 앙갚음을 다짐하는 그였지만….

상황은 신수호의 바람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 * *

"…방금 뭐라고 했습니까?"

신수근의 이마로 골이 깊게 파였다.

그의 반문에 전화를 걸어온 상대는 방금처럼 무미건조하게 말을 꺼내놓았다.

- 회장님의 동생분, 삼정물산 신수호 상무가 자기 잘못을 만인 앞에서 뉘우치고, 결례를 범한 피해자에게 정식으로 사과했으면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

신수근은 입술을 짓씹으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어디서 건방지게!'

이런 용건인 줄 알았다면 전화를 돌리라고 하지도 않았을 거다.

재계 모임에서 자주 언급되던 기업, 미래 그룹.

그곳의 회장이라기에 애써 시간을 허락했거늘….

"성함이 현…, 뭐라고 하셨죠?"

- 현시운입니다.

"그래요, 현 회장. 무슨 연유로 제 동생을 걸고넘어지시는지 모르겠지만…."

- 빅스텝 엔터 소속 가수 SU를 성추행하려다가 전기충격기에 실신하고선, 지금은 되레 피해자 코스프레하고 있는 신수호 상무. 제가 사실과 다르게 알고 있습니까?

적나라한 데다 신랄하기까지 한 상대의 말.

신수근의 인상이 와락 일그러졌다.

"대체 무슨 근거로 그딴 말을 하는 겁니까! 명백한 증거도 없는 음해성 발언이 명예훼손에 해당한다는 건 알고 하는 소리요? 당신 눈에는 우리 삼정이 우스워!"

자신과 똑같이 회장이라는 직함으로 불린다고 해서, 다 같은 위치는 아니다.

'근본도 없는 벼락부자 따위가 감히 나와 맞먹으려고 들어?!'

항간에 떠도는 평처럼 신수근은 현시운을 운 좋게도 능력이 출중한 투자가를 아래에 둔 행운아 정도로만 여겼다.

신수근의 고성에 수화기 너머는 잠시 조용했다.

더는 할 말이 없다는 듯 신수근이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으려 할 때, 다시 상대의 말이 들려왔다.

- 저로선 마지막 기회를 드리는 건데…. 그걸 회장님께서 거절하시겠다면 어쩔 수 없죠. 우리 회사 사람을 건드린 만큼 저 역시 참지는 않겠습니다.

이걸 협박이라고 하는 건가?

신수근은 헛웃음을 흘렸다.

"참지 않겠다? 이봐요, 현 회장. 이제 생겨난 지 1년 남짓 된 미래 그룹이 우리 삼정을 상대로 싸움이라도 걸겠다는 거요? 달걀로 바위를 치는 것에도 정도가 있는 법입니다."

- 글쎄요? 어느 쪽이 바위인지는 곧 밝혀지겠죠.

세간의 평가와는 달리 배포는 두둑했다.

자신 앞에서 기죽지도 않고 할 말 다 하는 걸 보면 말이다.

물론, 그 오만한 행동에 대한 대가는 톡톡히 치러야 할 거다.

신수근은 동원 가능한 응징의 수단들을 떠올리며 조소를 지었다.

- 그럼 행운을 빌겠습니다.

현시운과의 통화는 그렇게 끊겼다.

"하! 뭐, 이런 건방진 새끼가 다 있어! 행운? 허허…."

어이가 없었다.

삼정의 회장인 자신에게 이딴 망발이라니.

하지만, 하루가 채 지나기도 전에 신수근은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삼정중공업, 다년간 분식회계로 수백억 원대 비자금 조성 혐의 포착!]

[시사 주간지 '고발IN', 이밖에 다른 계열사들의 비리 정황도 포착했다고 자신해.]

"뭐야, 이거!!"

삼정 그룹 회장실에서 고성이 울렸다.

"당장 기사 내려! 무슨 수를 쓰든 내리라고!"

"네, 네! 회장님."

지시를 받은 비서실장이 다급히 나갔다.

"후욱! 훅-"

불현듯 어제 통화한 현시운의 경고가 떠올랐다.

"설마…?"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 공교로운 타이밍이지 않은가.

세간에 알려진 것과는 다른 뭔가가 있는 건가?

현시운… 아니, 미래 그룹에?

"……."

신수근은 삼정 그룹 내에서 암암리에 운용하는 정보분석팀을 통해 현시운과 미래 그룹에 대해 샅샅이 조사를 시켰지만,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 외에 밝혀낼 수 있는 건 거의 없었다.

더군다나 삼정중공업 분식회계 문제로 이미 검찰에서 수사를 들어온 상황이다.

"젠장!"

자신을 대신할 희생양을 세워놨지만, 어느 정도의 비자금 노출은 감수해야만 했다.

"미래 그룹…. 현시운!!"

대한민국 1위 기업인 삼정에서도 알아내지 못하는 정보.

하지만….

우로보로스라면 다르겠지?

입단한 후에 종종 도움을 받곤 했었다.

그때마다 어떤 식으로든 대가를 치러야 했지만, 얻는 것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신수근은 이번 일도 우로보로스의 힘을 빌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핸드폰에 저장한 번호를 찾아 눌렀다.

이내 통화연결음이 울렸다.

- 신수근 회장님? 어쩐 일로 전화를 하신 겁니까?

노인의 음성이 핸드폰에서 흘러나왔다.

"도움을 받고 싶습니다."

- 흠…. 말씀하시죠.

신수근이 전화를 건 이는 2년 전, 자신을 우로보로스로 끌어들인 로쉬찰트 금융 그룹 홍콩지부장.

찰리 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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