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악연의 고리(3)
우로보로스는 원래 한 명의 단주와 일곱의 장로, 오십 안팎의 단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초대 단주 이후 자격을 운운하며 오랜 시간 주인의 자리는 비워졌고 대신 일곱 장로가 조직을 지배했다.
60여 명의 상인으로 이루어진 집단.
친목 성향의 집단은 변질하였다.
막대한 부를 바탕으로 이면에서 세상을 조종하여 더 큰 이익을 얻는 게 당면한 목표였다.
그걸 이루기 위해선 여러 수단과 방법이 필요하다.
각처의 정보를 수집하는 것부터 방해되는 사람을 제거하는 부도덕한 일까지.
상단 혹은 길드의 수장인 우로보로스의 단원들이 직접 나서서 행하기엔 위험하고 또 꺼려지는 행동들이다.
자신들을 대신해 음지의 일을 해줄 이들이 필요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게 바로 가디언이다.
오로지 우로보로스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음지의 파수꾼.
윌리엄 라인하트의 조부에게 큰 은혜를 입었던 찰리 정 역시 가디언에 속했다.
그것도 일곱의 가디언 팀 중 1팀을 이끄는 수장으로서 말이다.
우로보로스의 일곱 장로처럼 가디언 역시 일곱의 수장이 각각의 팀을 이끈다.
각 장로에게 한 명씩의 가디언 수장을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져 있다.
보통 자신이 신임하는 인물을 앉히는데, 이때 임명된 수장의 거취는 다른 장로들이 합의하여 선정하는 게 원칙이다.
찰리 정이 라인하트 가문의 사업장이 아닌, 삼 장로의 로쉬찰트 금융 그룹에서 일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일종의 경계.
혹은…, 회유를 위한 걸지도?
아무튼, 가디언의 존재 이유는 우로보로스의 장로와 단원들에게 봉사하는 것이다.
조직 내 규율상 정식 단원인 삼정의 신수근은 찰리보다 윗줄의 신분이다.
"음…."
전과 비슷한 형태의 의뢰다.
평소였다면 상대가 원하는 대로 조사를 진행했겠지.
하지만, 그럴 수 없는 상황에 찰리는 난감했다.
"방금 어느 기업… 아니, 누구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까?"
찰리는 자신이 잘못 들은 거길 바랐다.
- 미래 그룹의 현시운이라고 했습니다.
"…….
애석하게도 그의 귀는 정상이다.
'현시운이라….'
찰리의 미간이 절로 좁혀졌다.
나흘 전에 '찬반의 장'이 열렸었다.
어떤 결과가 나왔는지는 일 장로인 윌리엄 라인하트에게 전해 들어 알고 있었다.
하필 현시운이라니.
동명이인일 가능성도 있겠지.
그러나 찰리는 잘 알았다.
그럴 리 없다는 걸.
반년 전, 고글의 현 CEO인 미하일 르빈의 의뢰로 그에 대한 뒷조사를 진행했던 게 바로 자신의 가디언 1팀이었으니 말이다.
현시운에 대한 우로보로스의 방침이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최종 결정이 나기 전까지는 함부로 건드려선 안 된다.
"결례가 아니라면 무슨 연유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 …음.
찰리의 물음에 전화를 건 상대, 신수근은 망설였다.
막내 신수호의 일은 남에게 쉬이 밝히기 힘든 집안의 수치였다.
-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잠시 고민하던 신수근은 그냥 사실대로 털어놓기로 했다.
거짓으로 지어내서 말해봤자 소용없다는 생각에서다.
원한다면 CIA의 기밀정보까지 알아낼 수 있다는 우로보로스의 정보력.
일견 과장스럽게 들릴 수도 있는 말이지만, 실제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신수근은 이전의 의뢰들에서 이미 그걸 확인한 바 있다.
신수호가 엮인 사건의 진상도 이들이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알아낼 수 있을 거다.
"음…."
자초지종을 모두 들은 찰리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별 시답잖은 일로 현시운과 엮여버렸다.
고심 끝에 찰리는 입을 열었다.
"신 회장님."
- 듣고 있습니다. 말씀하시죠.
"이번 일은…. 상대의 요구를 들어주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 …네?
찰리의 답변이 워낙 예상 밖이라 신수근의 반문이 한 템포 늦게 튀어나왔다.
'쯧!'
찰리 역시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지금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일 장로 윌리엄이 곧 현시운을 만나러 한국으로 향할 예정이다.
만남의 결과에 따라 '찬반의 장'에서 결의될 내용도 달라지겠지.
그전까지는 일체 잡음이 생겨선 안 되었다.
찰리는 사실과 다른 거짓으로 핑계를 대기 시작했다.
"방금 조사를 부탁한 자의 정보가 전무합니다. 아무래도 우리 쪽에서 관심을 두던 인물이 아닌지라…."
- …….
"신 회장님께서 조금 전에 말씀하셨죠. 자체적으로 조사를 해봐도 특이한 사항은 없었다고. 그렇다면 그만큼 비밀을 잘 감추고 있다고 봐야겠죠. 아무리 저희라도 작정하고 숨긴 걸 알아내는 데에 적지 않은 시일이 소요될 겁니다."
- 음…. 얼마나 말입니까?
"못해도 한두 달은 넘겠죠."
- …….
신수근의 입장에선 한시라도 빨리 현시운의 치부를 알아내 협박을 하든 반격을 해야 했다.
정말 삼정중공업의 비리를 터트린 게 그가 맞는다면 말이다.
수개월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에 신수근은 입을 열지 못했다.
"삼정의 이미지가 실추되는 게 안타깝지만, 이번만은 상대의 요구를 들어주십시오. 급한 불부터 끈 후에 훗날을 기약하시죠."
- 음…. 일단 무슨 말씀인지 알아들었습니다.
"도움이 되지 못해 죄송합니다."
-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상관없으니 그자의 정보를 알아내는 대로 알려주십시오.
"네, 그러겠습니다."
통화는 그렇게 일단락되었다.
현시운의 정보?
이미 알 만큼 안다.
이번 '찬반의 장'에서 그의 처우가 결정되기 전까지는 일반 단원들에게 비공개로 락이 걸려서 그렇지.
"흠…. 며칠 남지 않았군."
찰리는 탁상 달력을 보며 윌리엄의 한국 방문 일정을 확인했다.
둘의 만남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찰리는 약간의 기대까지 품었다.
아무쪼록 윌리엄에게 도움이 되기를 빌면서.
* * *
- 물의를 일으켜서…. 국민 여러분께 대단히 죄송합니다.
현시운은 TV 화면이 비추는 어느 한 기자회견 석상에 시선을 두었다.
찰칵! 찰칵찰칵-
크게 뉘우치는 듯한 얼굴의 서른넷 청년.
그를 향해 수십 개의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 다시 한번 고개 숙여 사죄드립니다.
잘못을 시인하고 용서를 비는 신수호의 모습을 놓치지 않고 다 담아내려는 듯, 카메라 셔터 소리가 기자회견장을 가득 메웠다.
그리고 잠시 뒤, 기자들의 본격적인 질문 세례가 이어졌다.
시운은 더는 볼 필요 없다고 여기며 TV를 껐다.
"……."
왠지 찝찝한 기분이다.
방금 기자회견을 열어 공식적으로 사과한 신수호는 삼정 그룹 오너가의 막내다.
일주일 전에 빅스텝 엔터 소속의 아티스트인 함수아를 지하주차장에서 성추행하려다 실패하고 피해자 코스프레를 한 장본인이기도 했다.
안하무인에 개차반이라는 소문이 시운의 귀에까지 닿은 그가 이렇듯 손쉽게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한다?
절대 그럴 리 없다.
삼정 그룹 회장 신수근의 강요에 의해 마지못해서 하는 고도의 연기겠지.
- 신수호의 공개 사과…. 그 정도면 되겠소?
어제 오전, 신수근이 연락하여 백기를 들었다.
고작 삼정중공업의 비리 하나를 터트린 상황에서의 항복이었다.
"아쉬운데…."
들춰낼 삼정의 치부가 아직 여럿 남았는데 말이다.
유레카 앱의 과거 검색 이력을 살펴보며 시운은 입맛을 다셨다.
중간 과정이 어쨌든 덕분에 이번 사건은 나름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신수호의 공개 사과와 함께 피해자인 함수아에게 물질적인 배상까지 이루어졌다.
다신 그녀에게 접근하지 않겠다는 각서까지 받아냈고, 공증까지 마친 상태다.
이번 일이 본보기가 됐을 테니 함수아를 쉽게 여기면 수작을 거는 자들도 줄어들 거다.
"분명 잘 해결되기는 했는데…."
왠지 모르게 께름칙하다.
삼정중공업의 비리를 까발린 게 자신이라는 걸 확인했음에도 신수근은 아무 반격 없이 쉽게 싸움을 포기했다.
국내 제일의 기업 삼정 그룹 총수답지 않은 행동이다.
[잔여 정보이용권 : 9장]
"……."
평균 열 장을 넘어서던 정보이용권이 다시 한 자리로 내려왔다.
인도네시아의 국채를 사들이는 데 들어가는 22조 원을 하루라도 빨리 벌충하려 투자 정보를 확인하는 데 사용 횟수를 늘려서다.
여기서 한 장을 소진하면 신수근이 쉽게 항복한 이유를 알 수 있다.
하지만, 역시….
"아깝지. 고작 이런 데에 쓰는 건."
시운은 고개를 내저으며 유레카를 종료했다.
괜히 화면만 바라보고 있다가는 저도 모르게 손가락이 검색창으로 향할 것만 같아서다.
핸드폰을 멀리 밀어놓고선 다신 본연의 업무에 집중했다.
시운은 컴퓨터 모니터로 시선을 옮겼다.
마침 전자로 올라온 결재 문서를 확인하던 중이었다.
그룹 인트라넷이 이틀 전에 구축이 완료되면서 시운은 결재판의 압박에서 벗어났다.
수십 건의 결재 대기 문서를 들춰가며 하나씩 확인과 승인을 이어갔다.
거의 절반 정도 되는 결재 문서의 확인을 마쳤을 즈음.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시운의 허락에 문이 열렸다.
"음?"
비서실 직원 중 한 명이겠거니 여겼는데, 방문자는 뜻밖의 인물이었다.
"강하민 대표님께서 갑자기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같은 건물에서 일하지만, 각자의 일이 바빠 보통 일주일에 두세 번도 마주치기 어려운 얼굴이다.
"…급히 보고드릴 사안이 있습니다."
"그래요? 일단 여기 앉으시죠."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응접용 소파로 그를 안내한 시운은 눈빛으로 무슨 일인지를 물었고, 강하민은 쓴웃음과 함께 입을 열었다.
"오전에 강남소방서에서 본사 건물의 소방 안전관리 실태를 조사한다며 왔다 갔습니다."
"…네? 그건 소방안전대행업체를 통해서 문제없게 해오고 있었지 않습니까?"
"그뿐만이 아닙니다."
"……?"
강하민은 어이없다는 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전자와 화학, 제약 공장으로 근로복지공단에서 현장 안전관리 불시 점검을 나왔답니다. 이건 여기 들어오기 직전에 비서실장에게 전해 들은 겁니다."
시운도 곧 강하민과 비슷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소방서에 이어 근로복지공단이라….
"국세청에선 아직 연락이 없습니까?"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대충 짐작한 시운의 물음에 강하민은 어깨를 으쓱였다.
"또 모르죠. 조금 있다가 팩스로 통보가 올는지."
"이거…."
시운은 말을 잇다 말고 강하민의 눈을 바라봤다.
정답을 알고 있는 듯한 그의 눈빛.
확신어린 답안을 시운이 내놓았다.
"안호영이 벌인 짓이겠군요?"
강하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확실합니다."
그러면서 두어 시간 전에 받았다는 문자메시지를 보여줬다.
[후배님. 지난번의 내 제안을 다시 생각해줬으면 하는데? 서로 돕고 사는 게 좋지 않습니까. 독불장군은 오래 살아남지 못하는 법이거든.]
노골적인 협박이다.
잠깐 삼정과 장강을 의심했지만, 안호영이 보낸 문자메시지로 상황이 명확해졌다.
"어쩔 겁니까?"
강하민이 물었고.
"발끈할 겁니다."
시운이 답했다.
안호영이 둘을 청와대로 초청 의사를 타진했을 때, 이미 좋은 의도는 아닐 거로 짐작했었다.
그래서 시운은 포크레인 흥신소에 그의 뒷조사를 맡겼고, 약점을 손에 쥐었다.
"터트릴 거죠?"
그게 뭔지는 강하민도 알고 있었다.
시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죠."
걸어오는 시비를 앉아서 참아줄 만큼 좋은 성격이 못 된다.
기왕이면 다신 일어설 수 없을 정도로 제대로 다리를 걸 생각이다.
둘의 얼굴에 지어진 표정이 조금 짓궂게 변해갔다.
* * *
후룹-
안호영은 지난달 장강 그룹의 장기우 부회장과 만날 때, 선물로 받은 최고급 보이차를 찻물로 우려냈다.
솔직히 자신의 입맛에는 맞지 않았다.
현금화 하기 편한 물건이었으면 오죽 좋으련만….
그럴 수 없으니 먹어 없앨 수밖에.
"이제 슬슬 연락해볼까?"
대통령 비서실 경제수석이라는 직분을 이용해 미래 그룹 괴롭히기를 시작했다.
이틀 전에 강남소방서와 근로복지공단을 움직여 본사와 계열사 공장들을 들쑤셨고, 소소하게나마 위반 사항을 적발해 벌금까지 물렸다.
강하민에게 자신의 말을 따르라는 문자도 보냈으니,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는 짐작할 거다.
이번 일이 잘만 성사되면 장강건설 차명 주식 10만 주를 대가로 챙길 수 있다.
이미 장기우와 사전에 약속한 내용이다.
시장가로 76억 원을 넘는 주식.
안호영은 그걸 포기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올해 초, 접견실에서 있었던 일이 새삼 떠오른다.
모교 후배이면서도 자신의 편을 들지 않는 강하민과 운 좋게 그 자리에 올랐으면서 자신의 실력인 것처럼 뻗대던 현시운까지.
"건방진 새끼들!"
그때 일만 생각하면 절로 이가 갈렸다.
하지만, 이제 놈들도 별수 없을 거다.
어디 대한민국에서 사업을 하면서 권력에 대들려고 해!
"후후."
안호영은 기분 좋은 웃음을 흘리며 찻잔을 들었다.
이 잔을 다 비운 후, 미래 그룹으로 전화를 넣을 참이다.
만약 이번에도 거절을 한다?
그러면 국세청과 금융감독원을 동원하여 회사를 탈탈 털어볼 심산이다.
아무리 투명경영을 표방해도 털어서 먼지 안 나는 경우는 없다.
그렇게 떨어진 먼지는 안호영의 필요에 따라 얼룩으로까지 과대 포장할 수 있다.
찻잔을 기울이며 그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벌컥-
"큰일이 났습니다!"
노크도 없이 경제수석실 비서관이 문을 열고 뛰어 들어왔다.
"앗! 뜨, 뜨거!"
안호영은 화들짝 놀라 찻물을 급히 들이켰고, 입천장을 홀라당 뎄다.
"무, 무슨 일인데 이리 호들갑이야!"
쓰라린 입안의 통증에 안호영은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평소라면 그의 호통에 바짝 엎드렸을 비서관이다.
근데 지금은 뭐가 그리도 급한지 리모컨을 집어 TV 전원을 켰다.
"자네, 지금 도대체…."
뭐라고 한소리를 하려던 안호영의 말이 다음 순간 쏙 들어갔다.
자극적인 문구의 자막과 함께 보도되는 뉴스 화면에 그의 시선이 멈췄다.
이어지는 내용에 안호영의 입은 함지박만 하게 벌어졌다.
"뭐야, 저건?!"
자신의 비밀이 전국으로 방송되는 상황에 그가 할 수 있는 건 놀라는 것 외에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