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절연
[안호영 경제수석의 은밀한 사생활 폭로!]
[청와대 대통령 비서실 소속 안호영 경제수석, 지난 5년간 두 집 살림 이어온 것으로 밝혀져]
[모델 출신 내연녀와의 사이에 3살 난 아들까지!]
장기우는 거실에서 태블릿 PC로 전날 올라온 기사를 재차 확인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그동안 안호영에게 장강 그룹에서 들인 공이 무색하게도 이젠 쓸모없는 장기말이 되어버렸다.
이 정도의 스캔들이면 그가 지금 자리를 보전하기는 힘들다.
장기우의 예상대로 청와대에서 긴급 기자회견이 열린다는 속보가 떴다.
잠시 후, 청와대 비서실장이 직접 단상으로 나와 브리핑한 내용은 예상 범주 내의 이야기들이다.
안호영 경제수석의 불명예퇴진.
차후 신임 인사 임명 시 검증에 더욱 노력을 기울이겠다는 자기반성.
올해 5월로 임기가 끝나는, 레임덕이 찾아온 정권을 향해 여·야 할 것 없이 비난의 목소리가 이어졌음은 당연했다.
정치판에서 흔히 보이는 퍼포먼스다.
자신들은 부도덕한 인사를 중직에 앉힌 현 정부와 다르다는 걸 국민에게 피력해보려는.
"쯧!"
장기우는 혀를 짧게 차고는 태블릿을 내려놓았다.
안호영이 두 집 살림했건, 그게 탄로가 나 자리에서 쫓겨나건 크게 상관없었다.
다만, 그로 인해 계획했던 일이 어그러진 데에 짜증이 솟구칠 뿐이다.
미래 그룹이 직접 인도네시아 대통령과 협상하여 따낸 보르네오섬 고속도로 건설 사업.
보르네오섬 서부의 폰티아낙에서 시작해 팔랑카라야, 반자르마신을 경유해 동부 끝자락의 항구도시 발릭파판에 이르기까지.
도합 1,124km에 다다르는 대규모 도로 공사다.
이윤도 이윤이지만, 무엇보다 전 세계에 건설사를 알릴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이기도 했다.
장강 그룹은 2022년을 재도약의 해로 천명하고, 무엇보다 장강건설의 해외 진출에 힘을 쏟고 있었다.
국내의 건설 경기가 예전만 못하여 전부터 해외 시장 개척에 매진했었다.
두바이와 베이징 등지에 초고층 빌딩을 세우는, 눈부신 업적을 달성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의 계약 물건들은 코로나 19 발생으로 공사를 시작해보기도 전에 전면 백지화되기 일쑤였다.
악재였던 감염병 사태가 이젠 서서히 가라앉고 있다.
해외 건설 사업을 재추진할 시기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장강건설의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필요하다.
3년 이전의 실적들은 이미 빛이 바랜 지 오래니까.
장기우와 장강 그룹 임원진이 보기엔 인도네시아 사업이야말로 거기에 딱 맞는 기회였다.
발릭파판 신수도 건설 역시 더없이 좋은 사업이지만, 아무래도 여러 건설사가 구획 별로 공개 입찰하여 진행되는 거라 미래 그룹이 단독으로 수주한 고속도로 공사만은 못 하다.
그룹 차원에서도 신수도 보다는 고속도로에 더욱 비중을 두고 있다.
장기우 개인적으로도 현시운의 회사가 그 좋은 기회를 독식하길 바라지 않는다.
공과 사의 이해가 모두 일치하니, 갖은 수단을 들여서라도 거기에 한발 걸치기만 하면 됐는데….
안호영의 중도 하차로 일이 틀어져 버렸다.
'그렇다고 이대로 포기할 순 없지!'
장강이 긴 세월 관계를 맺고 키워낸 인물이 비단 안호영 하나만은 아니다.
이번 일에는 경제수석인 그가 가장 효율적이라 생각해서 일을 진행했을 뿐이다.
다른 선택지도 얼마든지 있었다.
문제는….
"제대로 먹히려나?"
이제 현시운은 장기우가 예전에 알던 대학교 중퇴의 공장 생산직이 아니다.
시가총액 20조 원에 가까운 그룹의 총수다.
비록 미래 그룹과 비교해 열다섯 배 이상의 외형을 갖춘 장강이지만, 부회장일 뿐인 자신보다 녀석의 입지가 더 높다.
거기에 지난번 장강리조트 주주총회에서 처음 이름을 알린 스피어, 블레스, 티엔유라는 해외 투자법인.
이번 인도네시아 사업 협상 때 대만의 투자법인 티엔유가 적극적으로 도움을 줬고, 그게 가장 큰 역할을 했다고 보고받았다.
최근 알아본 그 세 곳의 자산 규모만 약 70조 원.
타국의 기업이라 자세한 내막까지 알아낼 수는 없었지만, 현시운 혹은 강하민과 모종의 관계가 있음은 짐작할 수 있었다.
어쩌면 그런 해외 투자법인이 더 있을지도 모르지.
장강리조트의 주주총회가 있고 난 뒤부터 장기우는 외국기업의 주식 투자에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생소한 이름의 회사면 철저히 뒤를 캐내고는 했다.
순환출자의 지배구조에서 지주회사 지배구조로의 전환을 작년 말에 끝마친 상태다.
장강리조트 때처럼 손도 못 쓰고 당하는 일은 없겠지만, 조심해서 나쁜 건 없었다.
"아이고, 아가씨! 이게 얼마 만입니까?"
현관 입구에서 들리는 집사 황성태의 호들갑에 장기우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가 아가씨라고 칭할 인물은 이 집안에 한 명밖에 없다.
장세연이 여기에는 무슨 일로?
"잘 지내셨죠, 아저씨?"
"그럼요. 잘 지내고 말고요!"
거실 쪽으로 다가오는 말소리에 장기우는 소파에서 일어났다.
곧 장세연과 황성태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누님, 오랜만입니다?"
"……."
황성태를 대할 때와는 달리 장세연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설마 설 연휴가 다 되었다고 안부 인사차 여길 들르지는 않았을 테고? 무슨 일로 온 겁니까?"
장기우 역시 그녀를 대할 때 예전만큼 살갑게 굴지는 않았다.
리조트와 유통, 푸드를 도둑맞은 뒤부터 장기우에게 장세연은 현시운 못지않은, 원수 같은 존재였다.
가뜩이나 안호영의 실각으로 심기가 불편한 마당이라 평소처럼 가식을 떨고 싶지도 않았다.
"네가 알 거 없잖아."
차갑게 쏘아붙인 장세연은 살짝 고개를 돌려 황성태에게 물었다.
"아버지, 서재에 계시죠?"
"아, 아… 네. 그렇습니다."
둘의 신경전을 옆에서 지켜보던 황성태는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확인을 마친 장세연은 걸음을 다시 옮겼다.
서재 문을 두드렸고, 잠시 후 대답이 들렸다.
장세연은 문고리를 잡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
장기우는 장세연이 무슨 용건으로 장철구 회장을 찾아왔을지를 추측하며, 닫힌 서재 문을 조용히 노려봤다.
* * *
"……."
장세연은 오랜만에 보는 장철구 회장과 말없이 얼굴을 마주했다.
황성태가 내온 차를 한 모금 마신 장철구는 찻잔을 도로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할 말이 있어서 찾아왔다고 하지 않았냐. 뭔지 말해봐라."
"…저, 하민 씨랑 결혼하기로 했어요."
작년 연말에 단둘이서 떠난 여행지에서 강하민은 오랜 고민을 털어놓음과 동시에 장세연에게 프러포즈를 했다.
오로라가 찬란히 펼쳐진 아이슬란드의 겨울밤 하늘 아래에서 몰래 숨겨온 반지를 건네던 강하민의 쑥스러워하는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흠, 잘 됐구나. 결혼 날짜는 내가 알아보마. 최대한 일찍 잡도록 하지."
"……."
장세연은 별 감정의 동요도 없이, 마치 회사 업무를 보고 받는 식으로 자식의 혼례를 받아들이는 장철구를 가만히 바라봤다.
예전에는 이렇지 않았다.
자식에게 살갑게 대하던 분은 아니었지만, 지금처럼 냉정하지도 않았다.
특히, 막내딸인 자신의 응석엔 드물게나마 환하게 웃기까지 하시던 분이었다.
'왜 이렇게 변하셨나요.'
언제부터 그랬는지는 장세연도 잘 알았다.
벌써 8년이나 지났다.
두 오빠의 사고가 있은 지도.
몸져누웠던 어머니와 다르게 장철구는 평소와 다름없게 행동했다.
그러나 이후 점차 전과 달라지는 모습에서 그 역시 두 오빠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으리란 걸 장세연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한때는 이해해보려고도 했다.
여태껏 존재도 몰랐던 이복동생을 호적에 정식으로 올렸을 때도.
두 오빠를 대신해 장기우에게 집안과 그룹을 잇게 하려 했을 때도.
하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을 기점으로 장세연의 마음도 완전히 돌아서 버렸다.
"아버지께서 신경 쓰실 일이 아닙니다."
"…뭐?"
눈꼬리가 살짝 올라간 장철구를 보며 장세연은 말을 이었다.
"결혼식은 하지 않을 거예요. 미국에 계신 하민 씨 부모님 뵙고 정식으로 인사드린 뒤에 교회에서 조촐하게 반지만 나눠 낄 생각입니다."
강하민은 결혼식을 올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생에서 몇 되지 않는 중요한 순간인데 제대로 격식을 차려야 한다며.
나중에 후회와 아쉬움으로 남을 수도 있다며 그녀를 설득했다.
그러나 장세연은 이를 단호히 거절했다.
신랑 측은 몰라도 신부 측 부모석은 분명 비게 될 테니까.
장철구가 참석하겠다고 해도 장세연이 싫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이게 어디 너희 둘만의 일인 줄 알아? 두 집안이 하나가 되는 중차대한…."
"아뇨. 두 집안이 하나가 되는 일 따윈 없어요."
"……."
장철구는 장세연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의 눈동자에 약간의 불쾌감과 의문, 당혹 등이 옅게 깔렸다.
장세연은 그런 장철구를 잠시 보더니 입을 열었다.
"아버지."
왠지 모르게 처연한 목소리.
조금 전과는 달라진 말투에 장철구의 이마에 난 주름이 살짝 움찔한다.
"아버지께서 무슨 이유로 하민 씨와 저를 맺어주려 하는지 알아요."
"……."
"그룹 때문이겠죠. 하민 씨의 능력이면 장강에 많은 도움이 될 게 분명하니까요."
장철구는 입술만 달싹일 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장세연의 말처럼 그런 이유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게 다는 아니었다.
회사니, 뭐니 하는, 억지로 짊어진 무거운 것들을 다 내려놓고 자신과 달리 화목한 가정을 꾸미고 살길 바라는 마음도 분명 있었다.
그렇지만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당사자인 장세연 앞에서는 더더욱 말이다.
"하민 씨와 많은 얘기를 나누었어요. 그리고 결심했죠."
불안함이 슬금슬금 올라온다.
"무얼 말이냐?"
"아버지와 연을 끊기로요."
"뭐?!"
무표정하던 장철구의 얼굴이 처참히 깨졌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냐. 나와 연을 끊어? 이 집안에서 나가겠다고?"
"네. 오늘 이후로 더는 여길 오지 않을 생각이에요. 아버지를 뵙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고요."
"…장세연!"
보기 드물게 화를 내는 친부의 모습에 장세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어머니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하고 집안에 갇혀있을 때, 장철구와 장기우에게 복수를 다짐했다.
그 둘이 자신의 눈앞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죽어가도 웃으며 기뻐하겠노라 맹세를 했었다.
근데 연을 끊겠다는 말에 평소와 다르게 몹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는 부친에 그때의 다짐이 약간이나마 흔들리는 걸 느꼈다.
장세연은 그런 자신을 다잡으며 말을 이었다.
"낳아주시고 또 키워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건강하세요."
준비했던 모든 말을 마친 장세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세연이, 너. 거기 서. …장세연!"
장철구의 부르짖음에도 장세연은 아랑곳하지 않으며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뒤쫓아가 잡으려는 생각에 의자 팔걸이를 짚고 일어서려는 데 눈앞이 순간 캄캄해진다.
"으윽…!!"
머리로 피가 몰리며 세상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듯 어지럽다.
고혈압인 데다가 장세연의 엄포에 몹시 흥분한 까닭이다.
장철구는 주체할 수 없는 몸을 도로 의자 등받이에 붙였다.
"후우…."
장세연이 저러는 데 자신이 그간 해온 행동들이 크게 한몫했다는 건 장철구도 잘 알았다.
예전에 비서실장 문지환이 했던 말이 갑자기 떠올랐다.
- 후계자를 얻는 대신 자식을 또 잃게 되실지도 모릅니다.
"……."
그의 말대로 되어버렸다.
충분히 각오는 했었는데도 막상 현실로 닥치니 억장이 무너지는 기분이다.
"허, 허허허…."
굳게 닫힌 서재 문을 바라보며 장철구는 상실감에 나직이 웃음만 흘렸다.
* * *
오전 근무를 시작하려던 차에 권재환이 보고할 게 있다며 집무실에 들어왔다.
현시운은 뭔가 싶어 경청하는 자세로 그의 말을 기다렸고, 또 들었다.
그런 뒤, 반응했다.
"지금 어디라고 했습니까?"
"네, 회장님. 독일 라인하트 그룹입니다."
"……."
시운은 두 눈을 깜빡였다.
'…라인하트라면?'
귀에 익은 이름이다.
독일 국적의 대기업.
그리고 동시에 그곳을 대대로 소유하고 있는 오너 가의 가문명이기도 하다.
시운은 의구스러운 눈빛으로 권재환을 바라보며 서서히 입술을 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