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유레카(1)
"제가 아는 그 라인하트란 말씀이시죠?"
"네, 그렇습니다."
권재환 비서실장의 대답에 현시운은 절로 찡그려지려는 얼굴 근육에 억지로 힘을 줘서 폈다.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가장한 채 시운은 말을 이었다.
"갑자기 비공식적인 만남을 요청해왔다고요?"
독일 명차 MMW와 VANZ를 소유한 라인하트 그룹은 1800년대 중반부터 이어진,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기업이다.
그곳의 최고 의사결정권자가 아무 연관도 없는 미래 그룹에 은밀히 만남을 청해오는 건, 시운에게 내용을 전달하는 권재환으로서도 뜻밖의 일이었다.
"네. 전달받기로는 윌리엄 라인하트 회장이 새로이 구상하는 사업이 있는데…. 그걸 회장님과 의논하고 싶다고 합니다."
새로운 사업?
시운은 그게 핑계일 뿐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분명 다른 이유가 있을 거다.
굳이… 방문 요청을 수락할 필요가 있을까?
만나지 않으려면 무슨 핑계든 댈 수 있다.
하지만, 궁금하기는 했다.
자신을 만나려는 이유가 무엇일지.
확인이나 해볼까?
고민 끝에 시운은 결정을 내렸다.
"…알겠습니다. 방문을 환영한다고 전해주세요."
"네, 그렇게 전달하겠습니다. 회장님."
보고를 마친 권재환이 물러났다.
시운은 창밖을 바라보며 한참을 곰곰이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그동안 잠잠하더니…. 이제서야 움직이는 건가?"
세간에는 독일 명차 회사를 소유한 대기업 정도로만 알려졌지만, 시운은 라인하트 그룹의 실체를 알고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대대로 그룹을 소유하고 있는 라인하트 가문이라고 해야 하려나?
"…우로보로스."
일곱 명의 장로와 쉰다섯 명의 정식 단원으로 결성된, 역사도 천년을 훌쩍 넘은 비밀 결사단.
그중 라인하트 가문이 일 장로직을 대대로 세습하고 있다는 걸 시운은 예전 유레카로 검색하다 알게 되었다.
자신의 기억에 혼선은 없는지 다시 유레카 앱을 실행 시켜 검색 이력을 뒤졌다.
"윌리엄 라인하트라…."
유레카의 검색 결과를 띄운 시운은 우로보로스의 중추인 장로직을 역임하고 있는 일곱 명의 이름을 위에서부터 훑어내렸다.
고글 주주총회 이후로 반년이 흘렀다.
지금껏 딱히 어떤 행동도 보이지 않길래, 시운이 미하일 르빈의 손을 들어준 데 대해 별 말 없이 넘어가려는 줄로만 알았다.
다르게 생각해보면….
미하일도 우로보로스의 일원이다.
단원들끼리의 알력 다툼 정도로 여겨도 될 일이었다.
근데 인제 와서 자신에게 접근한다고?
'날 영입하려고 그러나?'
세계 각지의 대부호들을 영입해 각지에서의 영향력을 높이는 게 우로보로스의 주된 방법이라고 알고 있다.
"내가 그 정도 급은 아닌데…."
아직은 말이다.
일곱 장로를 제외하면 현재 우로보로스에 속한 전 세계 대부호들의 숫자는 쉰다섯.
그들의 명단까지는 전에 검색했던 우로보로스의 기록에 나와 있지 않았다.
제대로 알아보려면 유레카의 정보이용권을 한 장 소진해야만 하는데….
'아직은 급할 게 없으니….'
일단은 보류다.
최소한 거기에 고글의 공동 창업자 둘은 포함되었다.
'신규 멤버 영입에는 가디언의 수장들이 움직이는 거 아니었나?'
무려 일 장로씩이나 되는 인물이 친히 이곳까지 왕림하신다?
시운은 손가락으로 다시 핸드폰 화면을 내리며 관련 내용을 확인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그대로였다.
우로보로스의 하부 조직인 가디언의 수장들이 인재 영입부터 정보 수집, 뒷처리 등의 일을 도맡아 처리한다는 문구를 발견했다.
물론, 그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건 장로들이겠지만 말이다.
"……."
일 장로의 방문 목적을 모르니, 괜히 불길한 기분만 들었다.
'직접 만나봐야 확실해지겠군.'
고작 이틀이다.
그새를 못 참고 수량이 한정된 정보이용권을 사용할 순 없었다.
독일에서 연락이 오고 이틀 뒤.
시운은 자신의 집무실에서 라인하트 그룹의 주인을 맞이했다.
* * *
"어?"
수행원과 함께 방에 들어서는 라인하트 그룹의 회장, 윌리엄 라인하트를 본 순간 현시운의 두 눈이 절로 커졌다.
금발 머리에 푸른 눈을 가진 삼십 대의 백인 청년.
외모가 무척 낯익다.
"……."
착각인가 싶어 다시 확인해봤고, 확신할 수 있었다.
분명 시운의 기억에 있는 얼굴이다.
현시운의 반응에 윌리엄 라인하트는 방긋 웃으며 수행원에게 손짓했다.
손짓의 의미를 금방 알아챈 수행원은 고개를 정중히 아래로 숙이고는 발걸음을 밖으로 돌렸다.
윌리엄은 이어서 옆에 서 있던 권재환을 향해 영어로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현시운 회장과 단둘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요."
"…네?"
이제 막 집무실에 도착해 서로 인사도 나누지 않은 상황이다.
권재환은 살짝 당황한 얼굴로 시운을 쳐다봤다.
"……."
시운은 말없이 고개를 한번 끄덕여 보였다.
아무리 안팎으로 알려지지 않은 만남이라 하더라도 의전에 소홀할 수는 없었다.
그에 아무런 책도 잡히지 않으려 비서실장인 권재환은 이번 일정에 많은 신경을 썼었다.
"그럼…, 말씀 나누십시오."
내심 이게 아니란 생각은 들었지만, 당사자인 시운과 윌리엄 모두가 원하고 있으니 권재환으로서도 별수 없었다.
그 역시 앞서나간 윌리엄의 수행원처럼 시운에게 고개를 숙인 후 집무실 문을 나섰다.
"……."
"……."
한 공간에 시운과 윌리엄만 남았다.
둘은 잠시 서로를 바라봤다.
먼저 입을 연 건 윌리엄이었다.
"오랜만입니다. 형제님."
"…절 기억하시는군요."
"그럼요. 그때 형제님이 아니었으면 굶어 죽었을 지도 몰랐는걸요."
"……."
혹시 착각한 건 아닐까 하는 일말의 의심은 있었다.
전에 봤을 때와 지금의 모습은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었으니까.
불과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았다.
작년 연말 휴가를 즐기기 위해 향했던 하와이.
이국의 그 땅에서 만난 노숙자 행색의 이방인 청년.
지금의 말끔한 수트로 몸을 치장한 윌리엄에게서 그때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설마 그때의 은인이 미래 그룹의 현시운 회장님이셨을 줄이야…. 저도 최근에 그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모를 겁니다."
시운도 그 기분이 어떨지 충분히 알 것 같다고 속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자신이 느끼기에 바로 그러했으니까.
다소 과장된 듯한 말과는 달리 윌리엄의 몸가짐은 가지런하고 또 차분해 보였다.
'그때 느꼈던 기품이 착각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군.'
당시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맛을 음미하며 핫도그를 먹던 모습이 다시금 떠올랐다.
천 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독일 재벌의 상속자.
그와 비슷한 세월을 이어 내려온 비밀 결사단, 우로보로스의 일 장로.
'설마 그때도 내가 누군 줄 알고 접근했던 건가?'
우연한 만남인 것처럼 보였지만, 이 역시 얼마든지 위장할 수 있었겠지.
윌리엄은 이번 방문을 위해 미리 조사하던 중에 자신에 대해 알았다고 털어놓았지만, 선뜻 믿기지는 않았다.
"일단 정식으로 인사부터 나눠야겠군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미래 그룹의 현시운입니다."
"라인하트 그룹, 윌리엄 라인하트입니다. 저 역시 형제님을 다시 뵙게 되어 무척이나 반가워요."
시운의 내민 손을 윌리엄이 넉살 좋게 웃으며 마주 잡아 흔들었다.
"다시 생각해도 놀랍군요. 유명 독일 명차 회사들을 산하에 거느린 라인하트 그룹의 회장님께서 하와이에서 그러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저로선 참… 뜻밖입니다."
"이런! 저의 소소한 취미 생활을 형제님께 들켜버렸군요. 많이 민망합니다. 하하하."
민망하다?
어딜 봐서?
그때 당당한 태도로 핫도그를 청하던 모습처럼 지금 윌리엄의 얼굴에서 한 점 부끄러움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반면, 시운의 얼굴은 살짝 굳어있었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 해도, 지금의 만남이 무슨 의도와 목적을 가졌는지 알 수 없거니와 초면이 아닌 윌리엄 덕분에 혼란스럽기까지 했다.
시운이 몰라서 그렇지 윌리엄 역시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는 겉으로는 생각이 없는 듯 웃으면서도 시운의 표정 하나하나를 면밀히 살폈다.
'이 자가 맞을까?'
미래안의 소유자.
아니더라도 손해를 볼 건 없다.
유능한 인재의 영입을 할 수 있는 기회니까.
그러나 윌리엄은 소망했다.
눈앞의 이자가 바로 선조의 예언서에 나왔던 그 인물이길.
"앉아서 이야길 마저 나누시죠."
통성명을 끝낸 시운은 손을 뻗어 소파의 한 자리를 가리켰다.
"감사합니다."
윌리엄은 예의 그 밝은 웃음을 얼굴에 머금고 안내받은 자리로 가서 앉았다.
생각보다 소파의 쿠션이 마음에 드는지 그는 엉덩이를 여러 번 들썩이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우선."
"?"
맞은편 자리에 앉자마자 운을 떼는 시운.
윌리엄은 뒤이어 나올 말을 기다리며 앞을 바라봤다.
"비서진에게 전해 들었습니다만, 무슨…? 새로운 사업을 미래 그룹과 함께하고 싶어 하신다고요?"
"네, 맞아요."
윌리엄의 긍정에 시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재차 물었다.
"어떤 사업을 말씀하시는…."
"그 전에!"
윌리엄이 한 손을 앞으로 뻗으며 시운의 말을 막았다.
뭔가 싶어 쳐다보는 시운의 눈을 마주 보며 윌리엄은 씩 웃었다.
"확인이 필요합니다."
"확인?"
윌리엄은 시운의 반문에 고개를 끄덕이곤 입을 열었다.
"우로보로스를 아십니까?"
"……."
단도직입적으로 그 단어를 언급할 줄은 몰랐다.
우로보로스 일 장로의 방문이라는 초유의 사태에 여러 상황을 머릿속으로 그려봤지만, 단연코 지금처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일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자신은 유레카의 정보 검색 덕에 윌리엄 라인하트가 속한 조직의 비밀과 정체를 알고 있지만, 저들 입장에선 시운은 대한민국의 신흥 재벌일 뿐이다.
우로보로스의 실체를 알고 있을 거라고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거다.
시운은 속으로 적잖이 당황해하면서도 겉으로 티를 내지 않으려 무진장 애를 썼다.
윌리엄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생각하는 척 시간을 끌었다.
그리고 꺼낸 대답은 상식선에서의 내용이었다.
"우로보로스라면…, 신화 속에 나오는 거대 뱀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원하던 대답이었는지 아닌지는 불분명하다.
시운은 윌리엄이 그랬듯 은연중 그의 표정을 낱낱이 살펴봤다.
약간 뜸을 들이며 시운의 대답을 음미하던 윌리엄은 이내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환수죠. 자기 꼬리를 입에 문 뱀의 형상으로 우주를 휘감고 있다고 전해집니다. 기호와 상징으로서의 의미가 강한데, 그 형태에 만족을 모른다고 여기기도 합니다. 또한, 무한히 순환하는 원을 그리기에 영원을 의미하기도 하죠."
"……."
말하고자 하는 바를 짐작할 수 없어 시운은 가만히 그의 말을 경청했다.
사업을 제안한다며 마련한 자리에서 윌리엄은 마치 하나의 강연처럼 우로보로스의 형태와 상징성, 각 분야에 미친 영향과 의미 등에 대해서 말을 길게 늘어놓았다.
"……."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분간하기 쉽지 않았다.
시운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를 봤다.
윌리엄은 족히 5분 이상은 걸린, 우로보로스에 대한 설명을 만족스럽다는 얼굴로 마쳤다.
그리고 짓궂은 웃음을 띠며 다음 말을 던졌다.
"무한, 영원의 상징성 때문에 우로보로스의 이름과 문양을 그대로 가져와 쓰는 비밀 단체가 있다는 걸 알고 계십니까?"
"…네?"
"그 조직의 이름도 우로보로스. 서기 965년 독일 브레멘에서 결성하여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곳입니다. 부연하자면, 전… 그곳의 지배 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장로 중 한 명입니다."
처음 우로보로스를 아냐며 말을 꺼냈을 때 이상의 당혹감을 맛봤다.
이걸 이렇게 쉽게 말해도 되는 건가?
천 년 이상을 내려왔다는 단체의 비밀을 뭐 이리 쉽게 밝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까?
당장 느끼는 혼란스러움은 나중에 수습하면 된다.
시운은 아까처럼 일반적인 반응을 내보였다.
불신과 의혹을 얼굴에 띄우며 입을 열었다.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하나만 더 묻죠."
"네?"
"형제님 아니, 현시운 님은 혹시 미래안을 가지고 있습니까?"
…미래안?
무얼 말하는지 알 것 같은 예감에 시운의 얼굴은 점점 굳어져 갔다.
"아니, 아니지! 미래안이라고 하면 모를 수도 있겠군요. 그건 우로보로스 내에서 창조한 단어일 뿐이니…. 그러니 이렇게 물어봐야 하겠죠?"
"아까부터 무슨 말을…."
"유레카."
"…네?"
"현시운 씨는 혹시 유레카의 정식이용자입니까?"
"……."
둘 사이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