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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로 재벌 참교육-111화 (111/139)

§111화 우로보로스(1)

독일에서부터 시작된 베르너 가의 역사는 공식적으로 삼백 년에 달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천년도 더 넘었다.

물론 이를 증명할 길은 없다.

시조 때부터 내려온 가문의 계보가 명시된 고문서들이 2차 세계 대전 당시 잿더미로 변해버렸으니 말이다.

그나마 몇 남지 않은 기록 덕분에 삼백년 이전부터의 가계도는 보전되었다.

"음…."

베르너 가의 당주인 일흔셋의 루이스 베르너는 막 내어온 홍차의 맛에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찻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그는 현재 프랑스 남서부 보르도 지방에 있는 자신의 별장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었다.

루이스가 주인으로 있는 베르너 그룹은 전 세계 600여 곳에 호텔과 리조트를 소유한 거대 기업이다.

그 밖에도 그는 차명으로 페르시아만과 솔로몬해에 섬도 여럿 가지고 있다.

천조 원을 가뿐히 넘어서는 가문의 재산.

그 시작은 965년 브레멘에서 우로보로스가 생겨났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장로…, 아니. 루이스 형님."

느긋하게 차를 즐기는 자신과 달리 마주 앉은 노인은 몹시 조급해 보였다.

루이스는 짧게 혀를 차며 입을 열었다.

"벤. 어째 넌 그 나이가 되었으면서 아직도 어린애같이 구는 거냐."

"……."

나직한 꾸중에 벤이라 불린 노인이 얼굴을 붉혔다.

"그러는 형님이야말로 뭘 믿고 이리 느긋한 게요? 라인하트 가의 애송이 녀석 말을 뭐하러 들어줍니까. 대세는 어차피 우리에게 넘어온 거나 마찬가지인데!"

루이스는 찻잔을 들며 고개를 옆으로 내저었다.

"항시 말했잖냐. 너의 그 조바심이 언젠가 일을 크게 그르칠 수도 있다고. 그간 공을 들인 고글도 미하일 르빈 같은 녀석에게 뺏기질 않나. 쯧쯧."

"…그, 그건. 단지 방심했었던 것뿐입니다. 머지않아 도로 찾아올 겁니다."

"우리가 누구냐?"

"……."

"일반인과 우리가 선 위치가 어디 같다던? 보통의 사람들은 실수했다고 해서 큰일이 일어나는 경우가 드물지만, 우린 같은 결정권자들은 한 번의 실수로도 수백, 수천억 달러가 넘는 사업체가 오고 가는 거다. 외숙께서도 생전에 그렇게 너에게 강조하고 또 타이르셨거늘."

루이스의 말에 노인, 벤 로쉬찰트는 불만 어린 표정을 내비쳤다.

세계적인 호텔 체인 기업 베르너 그룹의 회장 루이스 베르너에게 로쉬찰트 금융 그룹의 회장인 벤 로쉬찰트는 외종사촌이었다.

루이스의 어머니가 벤의 큰 고모이다.

또한, 둘은 천 년 이상을 이어온 비밀 결사단 우로보로스의 이 장로와 삼 장로이기도 했다.

"굳이 '찬반의 장'이 마무리될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실력 있는 업자들 몇만 보내면 쥐도 새도 모르게 깔끔하게 처리해줄 텐데요."

삼 장로 벤은 자신이 그리도 싫어하는 칠 장로 노아와 하나 닮은 점이 있었다.

우로보로스의 오랜 관습에 진절머리를 낸다는 것.

시대가 변한 만큼 조직도 변해야 한다고 여기는 그다.

지금처럼 칠 장로 체제가 아닌, 일인 수장 체제로의 변화를 그는 바라고 있었다.

그 생각에는 루이스도 동의했다.

하지만, 그는 다혈질인 벤과 달리 돌다리도 두들겨 볼 만큼 신중한 성격이다.

"자그마치 천년이다."

"……."

"그 오랜 세월 동안 지켜왔던 철칙에 함부로 손을 댈 순 없는 거다. 그랬다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지금껏 공명정대하게 장로직을 수행해오며 쌓았던 평판을 하루아침에 잃게 된다.

뒤로 몰래 저지른 암수와는 상관없이 루이스는 언제나 우로보로스의 역사를 존중하고 규율을 지켜왔었다.

만약 지금까지의 행보를 무시하고 벤의 말대로 실리를 위해서만 움직인다면?

빌미를 제공할 뿐이다.

반대 세력이 자신에게 반기를 들 수 있는.

루이스와 벤의 연합 세력이 가지는 우로보로스 내의 영향력은 여느 장로도 견줄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조직의 일을 독단적으로 처리할 수 있을 만큼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굳이 백분율로 따지자면 42% 정도의 장악력이랄까?

아직 우로보로스를 좌지우지할 수 있을 정도의 세력을 일구지는 못했다.

괜히 분란의 불씨가 될 일을 자처해 나머지 파벌을 뭉치게 할 명분을 제공해서는 안 된다.

루이스의 목표는 우로보로스의 정점이다.

이를 위해서라면 어떠한 짓도 할 수 있지만, 벤이 말하는 급진적인 방법은 아직 논할 계제가 아니다.

그건… 이른바 긴박한 순간에나 써 먹어봄 직한.

최후의 수단이다.

조직 내의 여론을 크게 거스르지 않는 선에서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물꼬를 잘 틀어왔었다.

앞으로 약간의 계기만 주어진다면….

루이스는 자연스럽게 우로보로스를 접수할 수 있다.

이번 '찬반의 장'이 그에게 그런 기회나 마찬가지였다.

'고대 로마의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처럼….'

시대가 원하여 그를 황제에 올렸듯이, 루이스 역시 모든 장로의 지지를 받으며 우로보로스의 주인이 될 생각이다.

아무리 각국의 정치권에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해도, 장로들의 본질은 기업가다.

이미 기운 저울추의 반대편에 서려 하지 않을 거다.

손해를 볼 게 뻔한 자리를 고집할 리 없다.

이제 계획의 막바지다.

몇 가지 일만 순리대로 처리하면 루이스는 원하던 종착지에 도달할 수 있다.

[미래안을 가진 자만이 우로보로스의 단주 자격을 가진다.]

초대 단주부터 천 년 넘도록 이어져 내려와 조직의 최우선 규율로 여겨졌던 것.

그로 인해 지난 세기 우로보로스는 참상을 한번 겪었다.

그런 일이 다신 일어나게 둘 순 없다.

이것은 대의다!

루이스는 스스로 우로보로스의 주인이 되어 변화한 시대에 맞게 조직을 개편할 생각이다.

그러려면 우선, 현재 나타난 미래안의 소유자.

아니, 그렇게 의심되는 현시운을 여기서 퇴장시켜야만 했다.

그게 완료되는 대로 일 장로인 윌리엄 라인하트도 치워버릴 계획이다.

신생 우로보로스에 일 장로직을 대대로 세습할 수 있는 라인하트 가문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곳이 지닌 상징성을 지워버려야만 비로소 자신의 앞길이 반듯하게 닦일 것이다.

'쳇! 이래서 언제 우로보로스를 차지하겠다는 거야?'

루이스의 계획에 동참하고 있는 벤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손쉬운 방법을 두고 돌아서 가려는 고종사촌의 의중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서 빨리 루이스를 정점에 세우고, 그 공으로 자신이 이인자의 자리에 올랐으면 하는 벤이다.

현재의 삼 장로 자리도 남부러운 것 없는, 우로보로스의 실질적인 지배 계층이다.

그런데도 벤은 만족하지 못했다.

일곱 장로의 협의 체제.

현재의 우로보르스는 그러했다.

자신과 동급이라고 주장하는 이가 루이스를 빼놓고도 다섯이다.

원래 가진 게 많은 사람일수록 욕심이 더 큰 법이다.

벤은 조직 내 권력의 배분을 참을 수 없었다.

특히, 눈에 가시와도 같은 칠 장로 노아 펠노러와 같은 위치라는 게 더욱더 싫었다.

"…이제 일주일 남았군요."

"음."

벤의 말에 루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윌리엄 라인하트가 요청했던, 현시운과 만날 수 있는 기한.

앞으로 일주일 뒤면 시효가 만료된다.

"아직 라인하트 쪽에서 움직임은 없는 거지?"

"네. 애송이 녀석의 회사와 본가, 관계되는 모든 사업체를 24시간 감시하고 있습니다. 자그마한 움직임이라도 있다면 즉각 연락이 올 겁니다."

마음 같아선 표적 중 하나인 현시운의 지근거리에도 감시의 눈을 붙여두고 싶지만….

아직 한국엔 우로보로스의 기반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았다.

한국 제일의 기업이라는 삼정의 총수를 입단시켰지만, 믿고 일을 맡길 만큼 검증된 인사는 아니다.

게다가 미래안과 관련한 정보는 일반 단원에게 공개할 수 없다.

장로직에 올라야만 공개되는 특급 기밀이다.

홍콩 쪽에 체류하며 동북아의 정세를 살피는 가디언 1팀도 있기는 하지만, 수장인 찰리 정이 일 장로의 사람이다.

주인의 뜻을 거스르는 행동을 하지 않을 늙은이다.

일 장로와 멀리 떨어트려 놓으려고 루이스와 벤이 주도하여 그를 로쉬찰트 금융 그룹의 홍콩지부로 배치했었다.

주기적으로 포섭을 시도하지만, 아직 넘어올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벤은 가디언 3팀의 인원 몇을 한국으로 파견해 현시운의 주변을 살피게 했다.

가까이 접근하지도 못하고, 미래 그룹 본사 근처에서 출입하는 차량과 현시운의 행적 정도를 파악하는 게 다겠지.

실효성은 적었지만, 그렇게라도 해야 벤의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야. 윌리엄 라인하트의 실체를 밝혀낼 수 있는."

"알고 있습니다."

이번 '찬반의 장'에서 루이스가 윌리엄 라인하트의 요구를 들어준 데는 다수의 의견에 따르게 하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그의 정체를 파악하려는 의도가 가장 컸다.

약속받은 대로 현시운과 만나려면 모습을 드러내야 할 테니까.

전대 일 장로인 톨 라인하트는 불의의 사고로 아들과 며느리를 잃자, 하나 남은 혈육인 윌리엄 라인하트의 외부 노출을 극도로 꺼렸다.

손자가 아들 내외처럼 불의한 무리로부터 해코지라도 당하지 않을까 우려한 까닭이었겠지.

'그때, 제 부모를 따라 죽었으면 일이 이렇게 번거롭게 되지도 않았을 텐데.'

우로보로스의 개혁도 더욱 앞당겨졌겠지.

24년 전에 있었던 라인하트 가의 비극은 루이스가 사주한 일이다.

초대 단주의 직계라는 상징성은 향후 자신이 우로보로스를 삼키는 데 큰 걸림돌이 될 게 뻔했다.

그 명맥을 전대 일 장로에서 끊어버리려는 게 애초의 계획이었다.

사고가 일어날 당시 톨 라인하트의 나이는 일흔을 넘겼었다.

살아봤자 얼마를 더 살겠는가.

필요하다면 그 늙은 목숨, 아들 내외처럼 자신이 거둬줄 의향도 있었다.

근데 손자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버렸다.

이후 공식 석상에서 자취를 완전히 감춰버렸다가 톨 라인하트의 사망 이후, 정식으로 일 장로직을 계승하며 모습을 드러냈다.

"어디 한번 지켜보자고."

찻잔을 들며 루이스가 나직이 말했다.

벤은 여전히 못마땅해하는 심기를 겉으로 내보였지만, 별다른 말 없이 고개만 작게 주억거렸다.

남은 시일이 얼마 되지 않았다.

그 안에 어디에서든 윌리엄 라인하트가 나타날 것이다.

루이스 베르너와 벤 로쉬찰트는 그렇게 기대하며 일주일을 보냈다.

하지만, 둘의 기대는 보답받지 못했다.

가디언 2, 3팀을 비롯한 수족들이 윌리엄 라인하트의 흔적을 끝내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이다.

감시를 진작에 눈치채고 흔적 하나 남기지 않게 현시운과 은밀히 만났었다는 걸 그들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다시 열린 '찬반의 장'.

일 장로, 윌리엄 라인하트는 거기에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하나의 안건을 가지고 열린 '찬반의 장'에 두 번이나 불참한 윌리엄 라인하트.

정해진 규율대로 페널티를 두 번 받은 그는 장로직을 상실하고 우로보로스에서 제명되었다.

* * *

설 연휴를 보내고 다시 회사에 출근한 현시운은 모처럼 강하민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그리고 그 자리엔 결혼 준비로 한창 바쁜 김현석도 불려와 있었다.

"따로 밖에서 자리를 마련하려니 현석이 형은 결혼 준비로 바쁘고, 하민이 형도 증권 업무가 밀려 있으니…. 어쩔 수 없이 회사에서 뵙자고 했습니다."

시운의 말에 강하민과 김현석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서로를 마주 보곤 다시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혹시 이거…. 사적인 자리인 겁니까?"

회사 업무 때문에 면담을 청했을 거로 생각했었다.

근데 그런 자리에 미래 그룹의 일과 크게 관련 없는 김현석이 함께했으니 강하민이 그렇게 여길 만도 했다.

시운은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형. 말씀 편하게 해도 됩니다."

"…어, 그래."

아무리 눈치가 없다 해도 지금 자리가 평소의 만남과는 확연히 다르다는 걸 다들 느끼고 있었다.

"……."

잠시 침묵이 좌중에 흘렀다.

절로 무거워지는 분위기에 강하민과 김현석은 살짝 굳은 얼굴로 시운을 바라봤다.

시운은 둘과 시선을 주고받으면서 자신이 말하려는 내용을 머릿속으로 다시 한번 정리했다.

윌리엄 라인하트는 말했다.

우로보로스가 한 사람을 파멸시킬 때 그의 주변인들 역시 직·간접적으로 피해를 입게 될 거라고.

법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던 과거, 우로보로스의 만행은 도가 지나칠 정도였다고 했다.

눈에 거슬리는 경쟁자 한 명 치워버리는 거로 끝내는 게 아니라, 그와 관계된 가족, 친구, 이웃들까지 한꺼번에 몰살해버린 전적도 있다고 했던가?

지금 같은 시대에 그렇게까지 할 수는 없겠지만, 혹시 또 모르는 일이다.

시운은 자신과 친분이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강하민과 김현석이 해를 입는 건 원치 않았다.

유레카가 있으니 사전에 방비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둘에게 끝까지 비밀로 할 수는 없다.

자신과 엮여 제삼자가 아닌 당사자가 되어버린 그들에게도 알아야 할 권리가 생겼다.

물론, 미래안이니 유레카니 하는 기밀 사항들까지 공유할 생각은 아니다.

윌리엄 역시 피치 못할 사정이 있지 않고서는 지금의 비밀을 철저히 숨길 것을 당부했었고 말이다.

"오늘 형들에게 긴히 드릴 말이 있습니다."

시운의 표정에서 강하민과 김현석은 범상치 않은 이야기일 거라고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조금 긴 이야기가 될 겁니다."

그렇게 운을 뗀 뒤, 말을 이었다.

우로보로스에 대해.

그리고 라인하트 가의 윌리엄에 대한 이야기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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