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우로보로스(2)
세상 사람들 대부분이 알지 못하는 이야기가 현시운의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이어지는 내용에 강하민과 김현석의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변해갔다.
그리고 시운이 모든 설명을 마쳤을 때.
"……?!"
둘은 불신과 경악에 찬 표정을 지었다.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시운은 강하민과 김현석이 진정될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
족히 5분여가 지났을 즈음, 다시 말소리가 새어나왔다.
"우로보로스…라고?"
강하민이 던진 말을.
"…965년부터 내려온 비밀 결사단?"
김현석이 무겁게 받아냈다.
"네. 믿기 쉽지는 않겠지만…. 지금까지 제가 한 말은 모두 사실입니다."
진지한 얼굴로 시운은 답했다.
물론 유레카에 관한, 밝히지 않은 비밀은 있었다.
강하민과 김현석은 고개를 돌려 서로를 쳐다봤다.
"진짠가?"
"시운이가 이런 일로 장난칠 녀석은 아니지."
"그래도 선뜻 믿기는 힘든데…."
"누가 아니래."
당사자를 앞에 두고 할 말들은 아니지만, 그만큼 둘이 느끼는 충격이 컸다는 방증이겠지.
시운도 그 심정을 잘 알았다.
유레카로 우로보로스라는 조직을 처음 맞닥뜨렸을 때.
갑자기 찾아온 윌리엄 라인하트에게 자세한 내막을 전해 들었을 때.
자신 또한 비슷한 반응이었으니까.
"그러니까…. 네가 말한 그 우로보로스라는 게. 으음…. 음모론에 흔히 나오곤 하는 일루미노나 백합십자회와 비슷한 단체라는 말이지?"
딱히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정치·종교적인 색채가 없다는 건 다르지만요. 부를 추구하는 상인 집단이라고 보면 될 겁니다."
물론, 막대한 자본을 바탕으로 한 그들의 힘은 여느 정치 세력과 종교 집단을 웃돌 정도의 영향력을 발휘할 수도 있었다.
"우습게 볼 일은 아니네. 세계 부호 순위권에 오른 이들 대부분이 거기에 속해 있다는 소리나 마찬가지잖아?"
아직도 믿기지 않는지 김현석이 넋두리처럼 말했다.
시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에 공감했다.
윌리엄 라인하트로부터 얼마 전, 일반 단원들의 리스트를 받았다.
놀랍게도 거기엔 국내 제일의 기업인 삼정 그룹 회장 신수근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돌프 히틀러까지 그 조직과 연관되어 있었다니…."
숨겨진 역사의 비밀을 엿본 듯한 기분이다.
강하민은 어이가 없다는 듯 혀를 연신 차더니 시운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근데 넌 어쩌다가 그런 무시무시한 곳과 엮이게 된 거야?"
"그게…."
아직 둘에게 우로보로스에게 노려진 이유는 밝히지 않았다.
유레카, 그들이 칭하기론 미래안을 시운이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여겨 일어난 일이라고 말할 순 없는 노릇이다.
시운은 대신 생각해둔 바를 핑계로 댔다.
"아마 반년 정도 지났네요. 형도 기억할 겁니다."
"뭘?"
"고글."
"…아!"
고글의 공동 창업자인 해리 페이퍼와 미하일 르빈이 우로보로스의 일원이라는, 조금 전 시운에게 들은 사실을 상기하며 강하민은 낮은 탄성을 내질렀다.
"제가 미하일 르빈을 도와 고글의 CEO를 교체한 게 그들 마음에는 들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게 왜? 어차피 그 둘도 같은 단원이라며."
선의의 경쟁 같은 게 아니었냐며 김현석은 항변하듯 말을 이었다.
"같은 소속이라고 해도 여러 파벌로 나뉘어 있으니까요. 해리 페이퍼가 속한 파벌이 우로보로스 내에서 영향력이 제법 큰 편인데, 고글을 다른 파벌에 뺏긴 걸 몹시 분해한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표적이 된 것도 그 때문이죠."
실제 그 일로 시운의 존재가 우로보로스에 알려졌었다.
그럴듯한 변명에 강하민과 김현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앞으로 어떡할 생각이야? 얘기를 들어보니 목적을 위해선 수단도 가리지 않는 무법자들이잖아."
강하민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시운은 짧게 답했다.
"스스로 지켜야죠."
"…어떻게?"
시운은 옅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우선, 하민이 형이 바라는 대로 경호 인력을 대거 늘릴 생각입니다. 아예 경호 업체 하나를 인수하려고요."
"진작에 좀 그러지."
번거롭게 경호원을 늘릴 생각이 없다며 자신의 제안을 번번이 거절했던 시운에게 강하민은 늦은 푸념을 털어놨다.
"내가 괜찮은 업체들로 좀 추려볼까?"
"아뇨. 이미 봐둔 곳이 있습니다."
"그래? 어딘데?"
시운은 씩 웃으며 시선을 김현석에게 돌렸다.
"가디언즈라고 하는 곳인데, 현석이 형도 아는 곳입니다."
"어? 내가?"
"네. 전에 거기서 형을 도운 적 있어요."
시운의 말에 기억을 더듬던 김현석은 순간 눈빛을 반짝이며 입을 열었다.
"설마? 그때 고시원 앞에서 그…."
3년도 더 지난 과거의 일이 불현듯 떠올랐다.
검사 임용 면접을 앞둔 날, 당시 머물던 고시원을 찾아온 사채업자와 그들로부터 자신을 구해준 시운과 경호원들.
시운은 작게 웃으며 답했다.
"맞아요. 그때 그 경호 업체. 이미 제안서를 보냈습니다. 조만간 답이 오겠죠."
기존의 경영진과 임직원들의 고용을 그대로 승계하며, 51%의 주식을 적정가의 다섯 배까지 쳐주겠다고 했다.
미래 그룹의 계열사까지 고정적인 고객사로 늘어나는 만큼 그쪽에서도 결코 손해는 아니었다.
시운은 유레카의 위기 알림권 덕분에 미래에 닥칠 위험을 일주일 전에 미리 알 수가 있다.
강하민과 김현석을 비롯한 지인과 사업 파트너 모두 위기 알림 대상자로 등록되어 있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것도 우연한, 그리고 일시적인 사건·사고에서나 쓰임새가 큰 법이다.
지금처럼 우로보로스가 작정하고 덤벼올 때는 위기 알림권에 의지할 수만은 없다.
오늘 위기를 넘겨도 내일 또 다른 위기가 닥쳐올 테니까.
위기 알림권을 낭비할 생각이 아니라면 다른 수단이 필요하다.
일신상의 위험은 방금 둘에게 말한 것처럼 경호 인력을 늘리는 식으로 대책을 세우고, 회사를 노리고 들어오는 수작질은 유레카의 정보 이용권과 윌리엄 라인하트를 통해 방비할 예정이다.
'우연치고는 참…, 공교롭네.'
이번에 인수를 진행하는 경호 업체명, 가디언즈.
우로보로스의 하부 조직이자 실행 부대 역시 가디언으로 불리고 있다.
이 무슨 운명의 장난질인지.
"도와주기로 한 윌리엄 라인하트 쪽에서 쓸모있는 정보를 넘겨줄 겁니다. 대처만 잘한다면 별일 없이 넘어갈 수 있어요."
안심시키려는 시운의 말에도 강하민과 김현석의 얼굴은 여전히 어두웠다.
"언제 끝날 줄 알고. 차라리 공권력에…. 아니다. 그건 우리보다 저들이 더 유리하겠지."
강하민의 짐작은 정확했다.
여태껏 자살로 알았던 신수겸의 죽음에 우로보로스가 개입했다는 것도 윌리엄 라인하트를 통해 얼마 전에 들었다.
둘에게는 고글의 CEO를 교체하는 데 일조하여 분노를 샀다고 상황을 축소해서 말했다.
그 정도면 목숨까지 노릴 일도 아니겠지만, 실제 이유는 유레카 때문이니….
우로보로스가 포기할 리 없다.
"윌리엄 라인하트가 한 약속을 믿어야죠. 이 모든 걸 알려준 것도 그쪽이니까. 길어도 1년이라고 했습니다. 한동안 몸을 사려야지 별수 있나요."
"…네가 당사자야. 너무 남 일처럼 여기는 거 아니냐?"
강하민의 볼멘소리에 시운은 어깨를 으쓱였다.
"걱정하고 불안에 떨어봤자 바뀌는 건 없잖아요. 제가 할 수 있는 걸 하는 수밖에요. 두 분도 저와의 친분 때문에 위험해질 수도 있으니 상황이 종료될 때까지 경호 인력 보내드릴게요."
길었던 이야기가 그렇게 마무리되어갔다.
"이거 참. 분수에도 안 맞게 경호원이라니. 허허."
어이없다는 듯 웃는 김현석과 여전히 시운을 걱정스런 얼굴로 보는 강하민.
자신 때문에 위험해질 수도 있다는데 누구 하나 원망의 기색조차 없다.
도리어 시운을 염려하기 바쁘다.
그에 시운은 미안함과 더불어 고마움을 느꼈다.
반짝!
"음?"
그때, 조명에 반사된 무언가가 시운의 시선을 끌었다.
"…하민이 형?"
"응? 왜?"
살짝 놀란 듯한 목소리로 부르는 시운.
강하민은 뭔가 싶어 고개를 돌렸다.
"그거…."
시운의 시선과 손가락은 습관처럼 턱을 긁고 있는 강하민의 왼손에 가 있었다.
정확히는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김현석도 뭔가 싶어 고개를 돌렸다가 절친의 손에 끼워진 반지를 발견했다.
분명, 여태껏 끼고 다녔던 커플링과는 달랐다.
세밀하고, 세련되게 세공된 반지 문양이나 중앙에 박힌 다이아몬드까지.
"뭐냐, 그 반지? 새로운 커플링이라도 맞춘 거야? 근데 커플링치고는…."
김현석의 말에 강하민은 그제야 둘이 뭘 보고 놀랐는지 알아챘다.
어색한 웃음과 함께 강하민의 목덜미와 볼이 점점 붉어졌다.
"형, 설마…?"
시운은 짐작한 바를 꺼내려다 입을 닫았다.
믿기지 않는 일이지만, 짐작이 맞는다면 다른 사람의 입이 아닌 강하민이 스스로 밝혀야 할 사안이다.
강하민은 쑥스러운 듯 뒷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안 그래도 오늘 말하려고 했는데…. 경황이 없었다. 사실, 나…. 지난주에 세연 씨랑 결혼했다."
순간, 공기가 얼어붙었다.
"뭐, 뭣?!"
"…진짜로요?"
우로보로스에 대한 걱정이 순간 확 달아날 정도로 충격적인 강하민의 결혼 발표였다.
* * *
박우석은 오랜만에 장세연의 연락을 받았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
강하민과의 교제 사실을 알게 된 뒤에 일부러 피해 다녔지만, 오늘은 확인해봐야 할 게 있었다.
예전에 자주 들렸던 레스토랑에 약속 시각에 맞춰 나타난 박우석은 장세연을 보자마자 심장이 쿵쾅댔다.
자신의 눈에 그녀는 여전히 사랑스러워 보였다.
하지만, 박우석의 얼굴은 금세 어두워질 수밖에 없었다.
"세연이, 너…."
그녀의 왼손가락에서 못 보던 반지를 발견한 까닭이다.
다이아몬드가 박힌 은빛의 반지.
단순히 커플링으로 볼 수 없는 비주얼이다.
심각해진 박우석을 향해 장세연은 쓰게 웃으며 왼손을 펴 보였다.
"맞아. 나 결혼했어."
"……?!"
마주 하고 싶지 않았던 현실에 박우석은 절망했다.
"언제…. 언제 그런 거야?"
"……."
한껏 표정을 구기며 되묻는 박우석.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장세연은 잠시 후 입술을 떼며 물었다.
"누구와 결혼했는지는 안 궁금하고?"
"……!"
예상 못 한 대답에 박우석은 순간 당황했다.
장세연은 한 가닥 가는 숨을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근래 들어 장기우와 자주 만난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정말이네? 녀석과 손을 잡았다는 소문이."
"…그거 때문에 부른 거야?"
"겸사겸사. 물었으니까 대답할게. 지난주 설 연휴 때 결혼했어. 번거롭기만 한 결혼식은 생략하고 교회에서 단둘이."
"……."
"상대가 누군지는 아는 것 같으니까 굳이 말 안 할게."
평소와 그리 다르지 않은 말투다.
스스럼없는 친구에게 일상적으로 대화하는 것처럼.
장세연에게 남자로서 다가가려 했었던 박우석으로선 허탈한 순간이다.
"넌 항상 똑같아."
"…뭐가?"
"날 대하는 거."
"……."
"처음으로 고백했던 스무 살 때나 11년이 지난 지금이나."
박우석이 자신에게 품은 마음을 장세연 역시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했다.
자신이 모르는 척하는 걸 그가 알고 있다는 걸 짐작하면서도 한결같이 행동했다.
이유는 단 하나.
친구를 잃기 싫어서.
지금은 지난 자신의 행동에 조금 후회가 되었다.
애초에 딱 잘라 말할 것 그랬나?
"많이 늦은 감은 있지만…, 미안해."
"……."
"네가 나한테 어떤 마음인지 알면서도 그동안 모른 척한 거. 널 친구라고 생각했고, 잃고 싶지 않아서 그랬어. 근데 지나서 생각해보니 순전히 내 마음 편해지자고 그런 거더라."
어쩌면 이런 사과도 마음 편해지려 하는 걸지도 몰랐다.
박우석은 고개를 옆으로 돌리면서 대답했다.
"…됐어. 사과는 무슨. 이미 다 지나간 일이잖아."
마음과 다른 말이 반사적으로 튀어나왔다.
"결혼 축하한다는 말은 차마 못 하겠다. 할 말도 끝난 것 같으니까 난 먼저 일어나볼게."
"잠깐만."
"……."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박우석을 장세연이 붙잡았다.
"장기우. 그 녀석 멀리해. 날 빌미로 너한테 다가간 거 알아. 결국 이용만 당할 뿐이야. 그러니…."
"내가 알아서 해."
솟구치는 감정을 애써 내리누르며 세 단어의 말을 겨우 뱉어낸 박우석은 그대로 등을 돌려 입구로 향했다.
장세연은 그런 박우석의 뒷모습을 끝까지 지켜봤다.
그게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그녀의 최선이었다.
* * *
"뭐? 누구라고?"
벤 로쉬찰트는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 홍콩지부장 찰리 정입니다.
"흠…."
그동안 수시로 포섭을 하려 사람을 보냈지만, 직접 얼굴을 마주한 적은 없는 인사다.
그런 그가 갑자기 독대를 요청하며 본사까지 찾아왔다는 말에 벤은 적잖이 놀라고 있었다.
'런던에는 언제 들어온 거지?'
자신이 임명한 가디언 3팀의 수장에게서 다른 파벌에 속한 주요 인물의 동향을 주간 단위로 보고받고 있었다.
하루 전에 올라온 동향 보고서에는 찰리 정이 홍콩에 있다고 기재되어 있었다.
무슨 일일까?
일단 만나봐야 알 수 있겠지.
"안으로 들이게."
- 네, 회장님.
지시를 내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집무실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요."
벤의 허락에 문이 열리고 비서와 함께 60대의 노인이 안으로 들어섰다.
"자넨 그만 나가보지."
"네, 회장님."
비서가 밖으로 나가자, 벤은 자리에서 일어나 찰리 정에게 다가갔다.
"실물로 보는 건 처음이구려. 만나서 반갑소. 벤 로쉬찰트요."
"……."
자기소개에도, 악수를 청하는 손길에도 찰리는 반응하지 않았다.
대신….
털썩!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아, 아니 대체 무슨…."
"회장님…. 아니, 삼 장로님. 저와 가디언 1팀을 거두어주십시오!"
"……."
찰리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벤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를 내려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