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결자해지(5)
현시운의 입장에선 당연한 결정이었다.
자신의 목숨을 한 번도 아니고 십수 차례나 노렸던 이들을 가만히 두고 볼 이유가 없다.
- 일 장로님과 이 장로님께서 보유하신 무기명 채권입니다. 이런 거로 지난 일의 잘못을 만회할 수는 없겠지만 부디 용서를 바란다고 하셨습니다.
대리인을 통해 30억 달러어치의, 한화로 약 3조 2천억 원 상당의 무기명 채권을 전달받았다.
자신이 순순히 그걸 받아주자 루이스 베르너와 벤 로쉬찰트는 용서를 받아들인 거로 여겼을지 모르지만, 시운의 생각은 달랐다.
"지, 지금 대체 무슨…."
"제대로 못 들으셨습니까? 그럼 다시 한번 말씀드리죠. 오늘부로 루이스 베르너와 벤 로쉬찰트의 장로직을 거두고 우로보로스에서도 제명한다고 했습니다."
적잖게 당황하며 되묻는 루이스에게 시운은 못을 박듯 대답했다.
사전에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있었던 칠 장로, 윌리엄 라인하트와 육 장로, 노아 펠노러만이 평온했다.
나머지 장로들은 당사자들과 마찬가지로 매우 놀란 얼굴이다.
검증을 마치고 정식으로 단주의 자리에 오른 뒤에도 별다른 조치가 없었기에, 자신들에게 그룹 지분을 넘긴 것처럼 시운에게도 막대한 보상을 약속하고 면죄부를 받았을 거로 추측했었다.
그런데 실상은 그와 정반대였다.
쾅-!!
눌러왔던 감정을 테이블에다 쏟아부으며 이 장로, 벤 로쉬찰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난 일은 묻어두기로 장로들 모두와 약속을 했습니다! 게다가 우리가 준 무기명 채권까지 받아먹고선 어디서 그런…."
시운은 벤을 향해 손을 뻗으며 말을 중간에 막았다.
뭔가 싶어 벤은 입을 다물고 시운을 노려봤다.
그를 마주 보며 시운은 씩 웃었다.
"방금 말했을 텐데요. 지금까지의 장로 협의 체제는 없앤다고. 그리고 애당초 장로 회의에서 결의한 내용이 단주의 결정보다 우선할 순 없죠."
"그걸 말이…."
"또한!"
벤의 입을 다시 막은 뒤, 시운은 말을 이었다.
"무기명 채권은 용서하겠다고 받아들인 게 아닙니다."
"뭐…?"
"합의금이죠. 제 목숨을 노린 것에 대한."
"……."
"무려 열일곱 차례의 살인 미수였습니다. 법대로라면 두 분은 감옥에서 평생을 썩어도 부족합니다. 살인 청부에 대한 법적인 조치는 하지 않겠다는 대가로 받은 합의금일 뿐입니다."
벤의 얼굴이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졌다.
그런 거였다면 채권을 받을 때, 대리인에게 그렇게 밝혔어야 했다.
지금까지 사과를 받아들이는 듯 가만히 있다가 다들 모인 자리에서 이렇게 일방적으로 말할 게 아니라.
한 차례 더 쏘아붙이려고 벤이 입을 열려는 찰라, 옆자리의 루이스가 그를 만류하며 대신 나섰다.
"우로보로스 내에 저와 이 장로를 따르는 이들이 많다는 걸 알면서도 내린 결정입니까?"
"흠…. 두 장로님의 세력이 어느 정도였죠?"
"……."
정작 시운은 루이스가 아닌 윌리엄 라인하트를 향해 고개를 돌려 물었다.
윌리엄은 작게 고개를 숙여 보인 뒤 물음에 답했다.
"4할을 조금 넘는 거로 알고 있습니다."
"거의 절반에 가까운 숫자군요."
"네, 그렇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시운과 그에 답하는 윌리엄의 얼굴에 딱히 놀라거나 당황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상관없습니다."
"……."
이번에는 루이스를 향해 한 말이었다.
"지금 우로보로스의 절반 가까이나 되는 세력을 내치겠다는 말입니까?"
루이스의 되물음에 시운은 빙그레 웃었다.
절반 가까이라.
일 장로와 이 장로의 파벌에 속한 단원들의 숫자와 그들의 영향력을 생각하면 틀린 말도 아니다.
하지만, 루이스가 말한 지표는 과거의 수치일 뿐이다.
장로들이 두 쪽으로 나뉘어 소리 없는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나 공신력이 있었을 법한.
"두 분을 따르는 이들이 베르너와 로쉬찰트 가문을 섬기는 가신은 아니지 않습니까?"
"……."
"충성으로 맺어진 관계가 아니라면? 단지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물려서 뭉쳤을 뿐이겠죠. 지금 같은 상황에서 과연 두 분의 파벌에 속한 일반 단원들이 따라나설까요?"
지금도 베르너 그룹과 로쉬찰트 금융 그룹의 비리에 대한 기사가 끊이질 않고 있다.
평판도 나빠진 마당에 외국 자본에 잠식되어 계열사마저 뺏기고 있는 상황.
과연 과거의 위세만 보고 그들을 따를 단원들이 있을까?
설사 그렇다고 해도 그 수가 얼마나 되겠는가.
시운의 말대로 그들은 군신으로 맺어진 사이가 아니다.
장로나 그 아래 몸을 담은 일반 단원이나 모두 다 사업가.
손해가 될 일은 생리적으로 꺼리는 족속이다.
'뭐, 따라 나간다고 해도 굳이 상관없기도 하지만.'
우로보로스의 세가 반으로 준다고 해도 시운은 크게 걱정 없었다.
윌리엄과 함께 세운 계획에 장로나 단원들의 수는 중요하지 않았으니까.
"충분한 대답이 됐습니까?"
"…이익!"
"……."
시운의 물음에 벤은 이를 갈았고, 루이스는 사납게 노려봤다.
그에 시운은 가볍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문을 가리켰다.
"인제 그만 두 분은 여기서 나가주십시오. 외부인이 있는 자리에서 중요한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잖습니까."
빙글거리는 시운을 잠시간 쏘아본 루이스는 거칠게 의자를 밀치고는 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어디 두고 보자고!"
좌중을 둘러보며 한 차례 큰소리를 지른 벤 역시 외종사촌의 뒤를 따라 대회의장을 나섰다.
삼 장로를 비롯한 약점 잡힌 3인방이 무겁게 가라앉은 시선으로 문 쪽을 쳐다봤다.
앞서나간 둘의 모습에 왠지 자신들의 앞날이 투영되며, 절로 불안해졌다.
반면, 윌리엄과 노아 펠노러는 일이 예정대로 흘러가자 작게 웃음을 지으며 시운을 바라봤다.
"그럼 앞으로의 방침을 내리겠습니다."
시운은 자신을 향해 다시 모인 다섯 쌍의 눈을 마주하며 지시를 내렸다.
베르너와 로쉬찰트를 향한 지분 싸움을 계속하라는.
3대 단주로 등극한 현시운의 첫 지시였다.
시운과 윌리엄의 예상대로 두 장로를 따라 우로보로스를 이탈한 단원은 거의 없었다.
한둘이 그들을 따라 조직을 떠났지만, 곧 뼈아픈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과거부터 우로보로스는 제명되거나 탈퇴한 조직원을 가만히 내버려 두는 법이 없었으니 말이다.
곧 대대적인 보복이 이루어졌다.
장로들만 움직였던 8개월 전과는 달리 이번엔 조직 차원에서의 응징인 만큼 일반 단원들까지 이에 합류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중국 자본까지 거기에 한 손을 보탰다.
파나마 비자금을 시운에게 대여해주며 적지 않은 이익을 취한 신진 그룹 명예 회장 왕원의 부추김 덕분에 중국 5대 대기업이 움직인 것이다.
이렇게 동서양의 막대한 자금이 밀어닥치면서 베르너 그룹과 로쉬찰트 금융 그룹은 급속도로 무너져내렸다.
각 나라의 경제 신문에서는 유럽에서 일어나고 있는, 심상치 않은 자본의 흐름과 두 그룹의 해체를 심도 있게 다뤘다.
두 달 뒤.
베르너 그룹과 로쉬찰트 금융 그룹의 지주회사마저 외국 자본에 잠식당했다.
그즈음 루이스 베르너와 벤 로쉬찰트에 관한 기사가 실렸는데, 전의 단순 비리와는 궤를 달리하는 내용이었다.
[루이스 베르너와 벤 로쉬찰트. 납치, 감금에 폭행 및 살인 청부 혐의 드러나다!]
[베르너와 로쉬찰트 가문이 합심하여 만든 범죄 조직, 픽서를 파헤친다!]
현시운을 통해 수집한 증거들로 윌리엄 라인하트는 두 원수를 집요하게 궁지로 몰아갔다.
만천하에 드러난 범죄 정황에 영국과 프랑스 사법부에서는 사실 확인을 위해 대대적인 조사에 들어갔다.
출처를 알 수 없는 증거를 따라 곳곳을 헤집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로쉬찰트 가문 소유의 한 야산에서 시체를 무더기로 발견했다.
반인륜적인 사건의 실체에 영국, 프랑스 양 국가는 비상이 걸렸다.
곧바로 루이스 베르너와 벤 로쉬찰트에게 긴급 체포령이 내려졌다.
하지만, 이미 둘은 자취를 감춘 뒤였다.
우로보로스에서 현시운에게 미래안의 소유자인지 검증을 요청했던 일주일이라는 짧은 시간.
루이스 베르너는 현시운의 화를 무마하려고 무기명 채권을 준비하는 것 외에도 만약을 위한 도피 수단을 마련했었다.
물론, 미래를 아는 현시운에게 그게 얼마나 통할지는 루이스 본인 역시 확신할 수 없었다.
* * *
촤아아-
20인승 요트가 물살을 가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
선미에 서서 푸른 하늘과 에메랄드빛 바다의 어름을 바라보던 윌리엄 라인하트.
잠시 후, 그의 시야로 섬 그림자 하나가 들어왔다.
"10분 후면 도착할 겁니다."
어느새 옆에 다가온 찰리 정의 보고에 윌리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더운 바람이 불어와 윌리엄의 얼굴을 간질였다.
현재 윌리엄이 향하고 있는 섬은 아프리카 서부 해안선에서 120km 가까이 떨어진 낙도로, 적도 선에 맞물려있는 곳이다.
사시사철 열대 기후인 그곳에 윌리엄이 찾던 인물들이 모여 있다.
멀게만 느껴졌던 해안선이 점점 가까워졌다.
요트는 이내 부두에 다다랐다.
육지와 멀리 떨어진, 외딴섬답지 않게 부둣가는 여느 항구 못지않은 시설이 갖춰져 있었다.
방파제와 소형 등대, 길게 뻗어 나온 계류장은 윌리엄이 타고 온 크기의 요트 열 척 가까이 수용할 수 있을 만큼 길고 넓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접안한 요트는 닻을 내리고 정박용 밧줄을 계류장 클리트에 칭칭 동여매며 선체를 단단히 고정했다.
배에서 내린 윌리엄은 찰리 정과 열 명의 가디언 팀원들을 대동하고 섬 안으로 발길을 돌렸다.
자재를 조달하기도 쉽지 않았을 텐데 부둣가에서부터 안으로 이어지는 소로가 콘크리트로 전부 덮여있다.
그 길을 따라 오 분여쯤 올라가자, 나무로 둘러싸인 한 채의 그림 같은 저택이 나왔다.
먼저 야트막한 벽돌담 사이로 나무문이 보였다.
정문 문턱을 넘어서자 하얀 대리석으로 지어진 저택이 두 눈 가득 들어왔다.
작게 꾸며진 정원이 윌리엄 일행을 맞았다.
가디언 팀원들은 혹시 모를 위험을 대비해 품에서 권총을 꺼내 들고 긴장한 시선으로 주변을 샅샅이 살폈다.
부둣가에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 마주친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아니, 이 섬에는 한 척의 배도 존재하지 않았다.
정황상 섬에 아무도 없는 게 당연했지만 윌리엄은 알고 있다.
이곳 어딘가에 그들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듯 안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100평 가까이 되는 저택 내에서도 아무런 기척이 없다.
한발 앞서 안으로 향했던 가디언 팀원 중 한 명이 그때 달려와 보고했다.
"윌리엄 님, 뒤쪽입니다!"
윌리엄과 찰리 정은 그를 따라 저택의 후원으로 향했다.
야외 풀장이 갖춰진 후원.
해안 절벽과 맞닿아 있는 후원 너머로 대서양의 풍광이 넓게 펼쳐졌다.
쉬이 보기 힘든 절경이지만, 윌리엄과 따라온 이들 모두 그걸 감상할 여력이 없었다.
풀장 옆의 하얀 테이블.
그곳에 윌리엄이 찾던 두 사람이 앉아 있다.
등을 지고 앉아 술잔을 드는 노인.
술에 취해 뻗기라도 했는지 이쪽을 향해 엎드린 노인.
"……."
두 노인을 향해 윌리엄이 발걸음을 뗐다.
그때 갑자기 찰리 정이 그의 팔을 붙잡으며 걸음을 멈춰 세웠다.
"총입니다!"
과연 찰리의 말대로 술잔을 기울이는 노인이 손을 뻗으면 닿은 거리의 테이블 위에 권총 한 자루가 놓여 있었다.
그의 몸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것이 거리를 좁히자 눈에 들어온 것이다.
가디언 팀 전원이 쥐고 있던 권총을 노인을 향해 들어 올렸다.
"왔는가?"
살벌한 분위기에 아랑곳하지 않으며 와인을 마시던 노인이 고개를 살짝 돌리며 말했다.
마치 오래 기다렸다는 말투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무척 수척해진 모습이지만, 분명 베르너 가의 당주인 루이스 베르너였다.
"……."
그를 바라보던 윌리엄이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윌리엄 님!"
찰리가 재차 만류해보지만, 윌리엄은 가볍게 손을 털며 웃었다.
"괜찮아요. 찰리."
현시운은 분명 앞으로 7일간 자신이 다칠 일은 없다고 장담했었다.
유레카의 정식 이용자가 한 말이다.
믿을 수 있다는 소리다.
"그래도…."
찰리에게 살짝 웃어 보인 윌리엄은 걸음을 다시 옮겨 루이스와 마주 보는 자리에 앉았다.
다른 노인, 벤 로쉬찰트의 모습이 자세히 눈에 들어온 건 그 직후였다.
"이 장로님은…. 잠이 든 게 아니었군요?"
테이블에 엎드려 있기에 술에 곯아떨어졌다고 여겼었는데….
루이스의 몸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았던 사각을 확인하니 그게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뚝- 뚝-
짙은 피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응어리진 핏방울이 테이블 끝자락을 타고 한 방울씩 바닥으로 떨어지며 바닥을 붉게 적신다.
윌리엄의 가라앉은 눈을 마주하며 루이스는 피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