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결자해지(6)
"워낙 성질이 급한 녀석이라서 말이지. 먼저 갔다네."
"……."
두 눈을 부릅뜨고 입으로 피를 가득 쏟아낸 채 죽은 벤 로쉬찰트.
백여 년 전만 해도 1경의 재산을 가진, 세계 제일 부호로 추앙받던 로쉬찰트 가문이다.
그곳 당주의 말로라 하기엔 너무나도 비참한 모습이었다.
생기가 빠져나가 탁한 빛을 띠는 벤 로쉬찰트의 눈동자.
그의 주검을 확인한 윌리엄 라인하트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윌리엄은 짜게 식은 웃음으로 루이스 베르너를 바라봤다.
"무척 원통해 하는 얼굴로 봐선…. 자발적으로 가신 건 아닌 모양입니다만?"
"후, 후후…. 아무리 싸움에서 패했다 하더라도 마지막 기개는 지켜야 하지 않겠나. 천 년을 넘게 이어온 가문의 수장답게 말이지. 당장이라도 자네들을 찾아가서 무릎 꿇고 싹싹 빌겠다기에 이별주를 한잔 건넸네."
그 술에 독을 탔음을 루이스는 순순히 시인했다.
사촌이 건넨 독주를 마시고 죽은 벤 로쉬찰트.
평생 자신을 따르던 사촌에게 독주를 건넨 루이스 베르너.
유럽 재계의 거물로 불렸던 둘의 몰락에 윌리엄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이젠 내 차례겠지. 자."
쓱-
옆에 놓인 권총으로 손을 옮길 때, 찰리 정과 팀원들의 총구가 루이스의 머리와 몸통을 향했다.
윌리엄이 손을 들어 제지하지 않았으면 당장이라도 방아쇠를 당길 기세다.
루이스는 그런 행동에도 별 관심이 없는지 무덤덤한 얼굴로 권총을 밀어 윌리엄의 앞에 가져다 놓았다.
"…무슨 뜻입니까?"
표정을 굳힌 채 묻는 윌리엄에게 루이스는 씩 웃었다.
"원하던 것 아닌가? 오래도록 이 순간만을 바랐을 텐데."
"……."
맞는 말이다.
비명에 가신 부모님만 떠올리면 항상 피가 들끓었었지.
어렸을 적엔 원수의 살점을 도려내 마지막 한점까지 짓씹어 먹겠다고 다짐까지 했었다.
그만큼 원한이 깊었다.
근데 막상 평온한 얼굴의 루이스를 마주하니 덩달아 마음이 차게 식는다.
당장 눈앞의 권총을 들어 그의 머리통에 총알을 박아넣는 것.
손쉽기도 하거니와, 그 순간은 속이 후련해지겠지.
하지만….
어쩌면 그게 루이스가 원하는 결말이 아닐까 싶어서 권총에 선뜻 손이 가질 않는다.
그가 원하는 방식의 죽음을 선사할 마음이 전혀 없다.
윌리엄은 작게 한숨을 내쉰 뒤에 입을 열었다.
"하나만 묻겠습니다."
"얼마든지."
"당신이 정말 내 부모님을 죽였습니까?"
"…그래."
이미 짐작하고 있었지만, 당사자에게 확인을 받으니 애써 억눌렀던 화가 속에서 울렁거렸다.
"왜? 무엇 때문에 그런 짓을 한 겁니까?"
윌리엄의 이어지는 질문에 루이스는 잔에 담긴 술을 모두 비워내고 알코올이 섞인 숨을 몰아쉬었다.
"하나만 묻는다지 않았나?"
"……."
루이스는 살짝 굳어진 윌리엄의 표정을 보며 픽 웃었다.
"이유를 모르진 않을 텐데? 톨 영감에게서 듣지 못했나?"
"…확인차 묻는 겁니다."
"허, 허허허. 여전히 고약한 성미군. 왜긴 왜겠어. 모두 우로보로스를 손에 넣기 위해서였지. 라인하트 가문은…, 예나 지금이나 눈엣가시 같은 존재니까."
자조 섞인 루이스의 대답에 윌리엄은 차게 대꾸했다.
"1940년대, 베르너 가문 식솔들이 몰살당한 탓을 우리 집안에 한 건 아니고요?"
"……."
루이스는 대꾸 없이 와인병을 들어 남은 술을 잔에 전부 채웠다.
"근데 그건 아십니까?"
"뭘?"
"제 증조부께서 당시의 이 장로에게 강권한 덕분에 당신의 부친이 영국 유학길에 올랐다는 걸."
"…뭐?"
뜻밖의 말에 루이스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건 몰랐나 보군요. 아니, 어쩌면 전대 베르너 가 당주께서 일부러 말하지 않았던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치에 의해 죽임을 당한 가족…. 그 원망을 쏟아낼 대상이 필요했겠죠. 운이 없게도 거기에 라인하트가 지목되었고 말입니다."
"그걸 나더러 믿으라고?"
"믿든 말든, 이제 와서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진실을 알았더라도 당신 역시 부친과 마찬가지였을 텐데."
"……."
루이스는 가만히 생전의 부친을 그려본다.
하루가 멀다고 비명에 간 가족들 사연을 세뇌하듯 읊조리던 그였다.
부친의 울분과 깊은 한은 마지막엔 항상 라인하트를 향했다.
자연히 루이스도 라인하트 가문에 적대감을 품게 되었다.
끼익-
의자를 뒤로 밀며 일어서는 윌리엄을 루이스는 멀뚱히 바라봤다.
눈동자를 아래로 내리며 그는 나직이 말했다.
"그냥 가려고?"
그의 시선을 따라 윌리엄도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시린 빛을 머금은 권총 한 자루.
죽음을 잔뜩 묻힌 그것에서 윌리엄은 금세 눈을 돌렸다.
"굳이 제가 손을 쓰지 않아도 되겠더군요. 우리가 떠나면 이 섬엔 당신 혼자 남습니다. 유일하게 말벗이 되어줄 벤 로쉬찰트를 그 손으로 죽였으니까."
"……."
"무슨 생각으로 고용인을 다 떠나보낸 건지 모르지만…. 배도 없으니 여길 나갈 방법도 없겠죠. 아무도 모르는 외딴섬에서 쓸쓸히 말라 죽어가는 것도 뭐, 저로선 나쁜 결말이 아닙니다."
말을 끝낸 윌리엄은 등을 돌렸다.
"잠깐만."
"뭐죠?"
"나도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말씀하시죠."
"…나와 벤이 여기 있다는 거. 그것도 현시운의 미래안으로 알아낸 건가?"
그에 윌리엄은 작은 웃음으로 화답했다.
"그렇군."
제대로 대답이 된 듯 루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짝 긴장한 모습으로 총구를 루이스에게 겨눈 찰리 정과 가디언 팀원들.
언제 루이스가 돌발 행동을 할지 몰라 잔뜩 경계하는 모습이다.
윌리엄은 루이스와 일별하고 그들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그만 가죠."
여기서 할 일은 모두 끝났다.
윌리엄이 앞장서서 후원을 빠져나갔다.
찰리 정은 한 차례 루이스와 죽은 벤을 노려본 후, 그 뒤를 따랐다.
루이스는 하나둘 멀어져가는 기척을 느끼며 남은 술을 단숨에 비워냈다.
내려놓는 잔 너머로 권총이 비쳤다.
부둣가로 내려온 윌리엄과 일행은 클리트에서 밧줄을 풀고, 닻을 올린 뒤 출항을 서둘렀다.
타앙-
한 발의 총성이 섬 전체에 울린 건 요트의 선미를 바다를 향해 막 돌릴 무렵이었다.
윌리엄은 가만히 섬을 바라보다 이내 시선을 망망대해로 돌렸다.
길었던 악몽이 마침내 깨는 순간이다.
* * *
루이스 베르너와 벤 로쉬찰트가 감쪽같이 사라진 지도 어느덧 한 달이 지났다.
로쉬찰트 가문 소유의 야산에서 시체가 무더기로 나온 사건 이후, 그들의 여죄가 속속들이 드러났다.
현시운이 정보 이용권을 이용해 증거를 알아내지 않아도 꼬리에 꼬리를 물듯 숨겨진 범죄 사실들이 하나씩 밝혀졌다.
베르너와 로쉬찰트 가문의 상속자들은 부친이 저지른 죄를 대물림받지 않기 위해 철저히 둘과 거리를 뒀다.
자신들은 결코 알지 못했던 일이라고 호소하는 한편, 부친의 잘못을 대신 사죄한다며 가산의 절반 가까이를 피해자들의 가족과 국가에 헌납했다.
이번 일의 시작이 우로보로스 내의 권력 싸움에서 빚어진 걸 상속자들도 잘 알았지만, 이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꺼내지 못했다.
입을 잘못 놀렸다가는 지금의 재앙이 자신들에게까지 번질지 모른다고 여겨서였다.
끝내 루이스와 벤의 행방은 밝혀지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사건은 일단락되었고, 사람들 기억에서 점차 잊혀갔다.
2023년 10월.
두 장로의 제명과 응징 등 당면한 일들이 모두 수습되자, 현시운은 다시 장로들을 소집했다.
변절 3인방 장로들은 사전에 만나 이번 소집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여러 추측이 오고 갔다.
그리고 셋은 가장 가능성 높은 예측을 하기에 이르렀다.
비어 있는 일 장로와 이 장로의 자리를 채우는 것.
예전만 못한 위치라 해도 일반 단원들의 목표는 여전히 장로직이다.
권한을 상당 부분 잃었다고 해서 오랜 세월 그 자리가 지녀왔던 상징성마저 퇴색한 건 아니다.
또한, 다들 현시운 이후로 단주가 바로 나타나지 않을 거로 확신했다.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단주로 오른 인물이 고작 셋뿐이었을 상기하면서 말이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다시 장로의 권위가 전과 같이 우뚝 서게 될 거다.
3인방은 그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젠 일 장로가 되시겠습니다? 미리 축하드립니다."
사 장로의 너스레에 삼 장로는 당치도 않다며 손사래를 쳐댔지만, 속내는 또 달랐다.
'일 장로라…. 내게도 이런 날이 오는구나!'
서슬이 퍼렀던 루이스 베르너와 폭압적인 벤 로쉬찰트의 그늘 때문에 서열의 상승은 꿈도 꿔보지 못했었는데….
예상치도 않게 찾아온 서열 상승의 기회에 삼 장로는 속으로 무척 기뻐했다.
일주일 뒤, 전에도 들렀었던 제주도 리조트의 대회의장에 다섯 장로가 모였다.
잠시 후, 약속 시각에 맞춰 현시운이 입장했다.
"일, 이 장로 일로 그간 다들 고생이 많았습니다."
웃으며 건네는 시운의 말에 변절 3인방 역시 마주 웃었다.
"오늘 여러분들을 오시라고 한 이유는…. 중대발표가 있어서입니다."
아무래도 서열 정리와 새로운 장로 선출 때문이겠지.
그렇게 확신한 3인방은 저들끼리 시선을 마주하며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맞은편에 앉은 윌리엄 라인하트와 노아 펠노러는 조금 뒤 그들이 지을 표정을 상상하며 입꼬리를 위로 올렸다.
"무려 천 년 이상을 이어온 우로보로스."
모두 시운의 입을 바라봤다.
각자 다른 내용을 예상하면서.
시운은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오늘부로 해체합니다. 완전히!"
비밀 결사단, 우로보로스의 해산을 명령했다.
뒤이어 변절 3인방의 경악성이 대회의장 전체에 울렸음은 당연했다.
* * *
점심을 간단히 해결하고, 소화도 시킬 겸 집 앞 정원을 한 바퀴 산책한 노아 펠노러는 오랜만에 비밀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두 달 전, 우로보로스 3대 단주인 현시운의 명으로 조직이 해산되었다.
삼 장로부터 오 장로까지 극렬히 반대하고 나섰지만, 단주의 말이 조직의 법이나 마찬가지라 결정을 번복할 수 없었다.
일반 단원들에게 소식이 전해진 건 소집일 이후 이틀 뒤였다.
생각 외로 해산에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일곱 장로를 중심으로 한 점조직의 구조라 정리할 게 적었다.
문제는 일자리를 잃게 된 가디언 팀의 향후 거취였는데, 현시운은 간단히 이를 해결했다.
- 그들을 임명한 가문이 책임을 져라.
정보 수집과 뒷공작에도 특화된 집단이 바로 가디언.
그 편리한 도구를 유지할 수 있게 된 것만 해도 장로들로선 천만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가디언 3팀부터 7팀까지 그대로 자신들을 선임했었던 장로의 수족이 되었다.
남은 건, 죽은 일 장로와 이 장로가 부렸던 가디언 1팀과 2팀.
지난 베르너와 로쉬찰트의 범죄에 연루되어 감옥살이를 하게 된 인원만 과반수를 넘었다.
수가 줄기는 했어도 두 팀을 합치면, 가디언 일개 팀 정원에 살짝 못 미치는 정도다.
장로 모두가 눈독을 들였다.
처치 곤란한 그들에 관한 결정 역시 현시운이 간단히 내려버렸다.
- 가디언 1, 2팀의 잔존 인원은 모두 라인하트 가문으로 소속된다.
주인으로 모시던 일, 이 장로와 맞섰던 라인하트다.
현시운의 말을 들을 리 없다고 여긴 다른 장로들의 생각과는 달리 모두 군말 없이 단주의 결정에 따랐다.
루이스 베르너와 벤 로쉬찰트 밑에서 온갖 악행을 일삼은 그들이다.
거부했을 때, 비밀 유지를 위해 어떤 일을 당하게 될지 너무나도 잘 알았다.
그들도 사람인 이상 자신의 목숨이 가장 귀했다.
"아깝지만, 어쩔 수 없지."
전력증강의 기회를 놓친 건 무척 아쉬웠지만, 노아로서는 현재 상황도 제법 만족스러웠다.
우로보로스.
2대 전, 조부였던 잔 펠노러의 전성기 시절 그곳에 가입하였다.
이후 빠르게 재산을 늘려 부친이 살아계실 적에 칠 장로로 선출되었다.
대부호들로 구성되었고, 가디언이란 쓸만한 도구도 있어 가문의 재산을 지키고 늘려가기에 여러 이점이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장로 회의를 통해 결정된 방침을 절대 거스를 수 없다는 태생적 한계에도 직면했다.
부친에게서 장로직을 그대로 물려받은 노아는 우로보로스에 속한 이점보단 한계가 더 크게 와닿았다.
한쪽 발에 무거운 족쇄가 채워진 느낌이랄까.
그 때문일까?
윌리엄 라인하트가 자신을 찾아와 우로보로스를 없앨 계획이라고 말했을 때, 몹시 기뻤다.
흔쾌히 그와 손을 맞잡았다.
근 2년을 넘는 시간이 걸렸지만, 협력의 대가는 완벽히 치러졌다.
삑-
지문과 홍채 인식에 비밀방의 문이 활짝 열렸다.
벽면 가득한 여섯 개의 대형 모니터와 그 앞에 놓인 기계 장치들.
우로보로스가 해산된 상황에서 필요가 없어진 물건들이다.
"재활용할 때가 되었군."
노아는 씩 웃으며 방으로 들어가 콘솔 앞에 섰다.
오후 2시가 다 되어간다.
그는 콘솔을 조작하여 화상통화를 준비했다.
이내 밝혀지는 모니터들.
그곳을 바라보는 노아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