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로 재벌 참교육-124화 (124/139)

§124화 열애설(1)

현시운은 이쯤에서 일을 마무리 짓기로 했다.

쥐도 도망갈 구멍은 주고 몰라고 하지 않던가.

괜히 궁지로 더 밀어넣었다가 신수근이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으로 나오면 귀찮기만 할 뿐이다.

"신 회장님께서 제대로 정리하셨다니 이번은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 …감사합니다.

옅게 떨리는 목소리에서 그가 얼마나 큰 굴욕감을 느끼고 있을지 짐작이 된다.

- 그럼 다음에 따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서둘러 인사하고 전화를 끊으려는 신수근이다.

그와 달리 아직 할 말이 남아있었던 시운이 불러세웠다.

"잠깐만요."

- 네?

의아함과 불안감이 반씩 섞인 목소리에 시운은 자그마하게 웃음 지었다.

"신 회장님 막냇동생분 말입니다."

- 수호가 또 무슨….

잘못이라도 저질렀습니까?

입밖으로 나오지 못한 뒷말은 시운도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그의 동생, 신수호가 사고치고 다니는 게 어제 오늘 일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시운은 얼마 전 빅스텝 엔터 대표 이승진과의 술자리에서 나온 이야기를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삼정물산 신수호 상무가 아직도 함수아 양을 쫓아다닌다는 얘기가 들려오던데요?"

- …네?

함수아를 스토킹한 혐의로 신수호는 법원으로부터 벌금형과 함께 접근금지처분을 받았었다.

하지만, 벌써 1년 전의 일.

임시조치인 접근금지는 이미 6개월 전에 그 효력이 끝나버렸다.

그 뒤, 신수호는 다시 함수아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전처럼 하루에도 수십 통의 문자와 전화, 막무가내로 찾아오는 식의 행동을 보이진 않았다.

그저 꽃다발과 고가의 선물 등을 함수아의 집과 소속사로 주기적으로 보내며 스스로를 각인시켰다.

아무래도 1년 전의 일로 본인도 느낀 바가 있어서 조심하는 모양이겠지.

접금금지가처분 신청을 다시 하려면 명확한 근거가 필요한데, 신수호가 하는 일련의 행동들은 함수아의 일부 열혈 팬과 비슷한 양상을 띠는지라 증거로 채택하기도 애매했다.

그렇다고 팬의 한 사람으로 받아들이기엔 둘 사이에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이 쉽게 잊힐만한 성격은 아니었다.

"뭐, 전과 달리 강압적이거나 폭력적인 행동은 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아무래도 한 번 스토킹을 당한 당사자로서는 어떤 식으로든 엮이는 게 싫지 않겠습니까?"

- …그렇죠.

"소속사에서 여러 번 경고했는데도 신수호 상무가 말을 듣지 않는 모양입니다. 저로선 조용히 무마하고 싶은데…. 신 회장님 생각은 어떠십니까?"

이미 답은 정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신수근이 시운의 요청을 거부할 수 있을 리 없었으니까.

- 제가 다시 한번 제대로 주의를 주겠습니다.

"그래요? 그럼 믿겠습니다."

- …네.

간단한 인사를 주고받은 둘은 그렇게 통화를 마쳤다.

시운은 신수근의 연락이 오기 전에 살펴보던 인터넷 기사로 시선을 옮겼다.

[솔로 가수 SU, 2024년 정규 앨범 2집으로 돌아오다!]

[SU의 2집 타이틀곡 '비처럼 내리는' 발매 6시간 만에 음원 차트 올킬!]

오랜 설움과 수많은 악플 속에서도 함수아는 작년에 발매한 싱글 앨범과 정규 1집으로 음악성을 인정받고 인기스타로 발돋움했었고, 이번에 낸 앨범 또한 반응이 좋았다.

계열사인 빅스텝 엔터테인먼트로선 4년 전, 블루비쥬의 성공 이후로 역대급 성적을 기록하는 셈이다.

비록 직접 얼굴을 마주한 적은 없지만, 주변으로부터 그녀의 사정을 들어 알고 있던 시운은 속으로나마 이번 앨범의 대성공을 빌며 기사글을 내렸다.

"…쯧!"

연관 기사로 링크된 자극적인 제목이 그 순간 눈에 들어왔다.

시운의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내게 전기충격기를 갖다 댄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 - 특집 인터뷰!]

한 언론사에서 기획으로 낸 인터뷰 기사였다.

제목만으로도 무슨 내용일지 예상을 하는 자신이 싫어지는 순간이다.

그래도 확인해봐야겠지.

시운은 내키지 않는 손가락을 억지로 움직여 마우스를 두드렸다.

딸칵!

마우스 클릭과 함께 모니터로 기사 전문이 떠올랐다.

빠르게 눈동자를 움직이며 활자를 읽었다.

"미친놈!"

기사를 다 읽고 난 뒤에 나온 시운의 짧은 감상평이다.

함수아의 열혈팬임을 자처하는 한 재벌 3세와의 인터뷰.

실명은 나오지 않았지만, 당사자가 누구인지 유추할 수 있을 단서가 본문 곳곳에 나타나 있다.

"신수근 회장한테 좀 더 강하게 어필할 걸 그랬나?"

호감을 느끼고 접근했다가 스토커로 몰리는 등 억울한 일을 겪었으면서도 팬심을 놓지 않는 재벌 3세 열혈팬.

그게 기사의 주요 골자였다.

다시 신수근에게 전화를 하는 것도 멋쩍다.

시운은 잠깐 고민하다 이내 마음을 결정했다.

기사의 URL을 복사한 그는 신수근에게 문자메시지로 보내버렸다.

내용을 확인하면 자신이 무엇을 바라는지 알겠지.

홀로그램 폰과 신수호에 대한 일이 얼추 정리되었다고 여긴 시운은 본연의 업무에 집중했다.

그리고 한 시간여가 지났을 때, 핸드폰이 짧게 울렸다.

"벌써 4시군."

미리 저장해놓은 일정 알람이다.

시운은 하던 일을 마무리 짓고선 비서실로 연결되는 인터폰을 눌렀다.

- 네, 회장님.

"오늘은 약속이 있어 좀 일찍 퇴근할 겁니다."

- 강 비서와 경호원들을 지하주차장에 대기 시켜 놓겠습니다.

"아뇨. 으음…."

- ……?

잠시 뜸을 들이는 시운이다.

"강 비서만 있으면 됩니다."

- …네, 알겠습니다. 회장님.

대답하는 권재환 비서실장의 말투가 시원스럽지가 못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매월 한두 차례씩 시운의 주변에 불미스러운 일이 생겼었다.

다양한 국적의 불량배와 전문적인 청부업자까지.

그들에게 그룹 총수의 목숨을 위협받았던 일에 권재환은 비서실장으로서 큰 책임감과 의무를 스스로 어깨에 얹었다.

일을 사주한 자가 잡혀서 앞으로 똑같은 일은 없을 거라고 시운이 설명해도 그는 경호의 손길을 늦추지 않았다.

이 문제로 시운과 권재환은 여러 번 각을 세웠다.

하지만, 아무래도 권재환이 회사에선 아랫사람이다 보니 시운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진심에 우러나는 충언도 반복되다 보면 잔소리고 간섭으로 여겨질 뿐이다.

오늘도 본심과는 달리 권재환은 한발 뒤로 물러났다.

"…뭐. 강철완 비서는 이미 알고 있는 일이니까."

오늘 있는 약속은 지극히 개인적이면서도 높은 수준의 보안을 필요로 한다.

이는 자신보다도 상대방을 위한 배려였다.

잠시 후, 집무실을 나온 시운은 강철완을 대동하고 비밀의 장소로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약속 장소에 도착했지만, 일부러 근처를 배회한다든지 주변에 수상한 차량이나 인적은 없는지 살펴보는 등.

시운과 강철완은 첩보 작전과도 같은 용의주도함을 보였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시운의 그 날 행적은 들통나버리고 말았다.

닌자에 버금갈 정도로 은밀하고 신출귀몰한 연예부 기자들에게 말이다.

[아이돌 그룹, 블루비쥬 출신의 떠오르는 신예 여배우 이지아. 한강 둔치에서의 비밀 데이트! 열애 상대는 젊은 사업가?]

"…아, 젠장."

이틀 뒤, 기사로 열애설을 접한 시운의 첫마디였다.

* * *

현시운이 이지아를 처음 알게 된 것은 회귀 전의 일이었다.

2032년의 겨울, 금상예술대상을 중계하던 TV 화면으로 말이다.

그해에 개봉된 영화 중 유일하게 천만을 돌파한 작품에서 이지아는 열연을 펼쳤었다.

덕분에 서른한 살의 비교적 젊은 나이에도 대상 후보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비록 대상의 영예를 안지는 못했지만, 여러 쟁쟁한 스타들과 같은 위치에 선 것만으로도 대중의 많은 관심과 스포트라이트를 받았고, 우연히 그걸 본 시운의 뇌리에도 깊게 박혔다.

어려운 형편 때문에 덕질까지 엄두는 못 냈지만, 그날 이후로 시운은 이지아의 팬이 되었다.

그러다 회귀를 겪고 20년 전으로 돌아와 전과 다른 삶을 살던 시운이 이지아와 다시 마주친 것은 지금으로부터 5년 전의 일이다.

그것도 TV 화면이 아닌 실물로.

당시는 빅스텝 엔터테인먼트를 인수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이제는 사라진 HR 엔터테인먼트가 빅스텝 엔터 1호 아이돌 그룹인 블루비쥬를 뺏어가려고 수작을 걸어온다는 이승진 대표의 다급한 얘기를 듣고 찾아간 허름한 사무실 안에서 말이다.

그때, 시운의 나이는 스물여섯이었고 이지아는 열여덟.

팬으로서 좋아했던 여배우의 어릴 적 모습이 마냥 신기하기만 했었다.

훗날, 둘의 인연이 어떤 식으로 이어질지도 모른 채 말이다.

짝!

"아악!"

지금으로부터 2년 전, 미래 그룹의 계열사인 미래E&M이 MVN이라는 방송국을 개국했다.

영화와 드라마 전문 채널.

타 방송사의 인기 드라마와 평작 이상의 성적을 기록한 영화 위주로 방영권을 사 와 24시간 방영했으며, 동시에 산하 기업인 블루드래곤 픽처스를 통해 자체 콘텐츠 제작에도 힘썼다.

"NG! 다시 한번 더 가겠습니다."

2022년의 3월 중순.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그날은 블루드래곤 픽처스에서 야심 차게 준비한 퓨전 사극의 첫 촬영일이었다.

배우와 촬영 스태프들을 응원하려고 커피차와 함께 현장에 들렀던 시운은 추운 날씨 속에서도 극 중 배역에 몰입하여 열연을 펼치는 장면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이런 천한 것이!"

짝-

"꺄악!"

대갓집 마님이 딸의 몸종에게 손찌검하는 장면이다.

지난 3년간 블루비쥬로 인기를 끌고 배우로서 처음 연기에 도전하는 이지아가 몸종의 배역을 맡았다.

짝!

연이어 울리는 뺨 맞는 소리.

상대 배우의 손바닥에 뺨을 제대로 얻어맞은 이지아는 고통에 찬 신음을 흘리며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실제를 방불케 할 정도로 실감 나는 연기였다.

블루드래곤 픽처스 대표인 백진섭의 대학교 후배이기도 한, 황철영 감독은 신인답지 않은 이지아의 연기에 매우 만족하며 계속 카메라를 돌렸다.

그런데….

"잠깐. 이번 씬 별로였어요. 다시 찍죠, 황 감독."

"…네. 다들 다시 준비해주세요!"

조금 전과는 달리 상대 배우의 자발적인 NG 선언으로 뺨 맞는 씬을 다시 찍게 되었다.

불행히도 이지아의 첫 촬영 상대 역은 최진희라는 중견 배우였다.

그녀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최진희를 이렇게 지칭했다.

신인 킬러.

그것도 자신보다 어리고 예쁜 여배우들에게 특히나 가혹하게 구는 거로 업계에 유명했다.

후배들에게 하는 것과는 달리 선배 연기자들에게 아주 깍듯했던 그녀는 연예계 마당발로 불릴 정도로 인맥이 넓고 두터웠으며, 영향력 역시 무시할 수 없었다.

자신의 그런 위치를 이용해 신인 여배우와 함께 하는 씬이 있으면, PD와 작가를 들들 볶아 없던 따귀 장면을 추가로 만들기까지 했다.

그리고 의도적으로 NG를 여러 번 내며, 나이와 외모에서 오는 열등감을 신인에게 화풀이하는 식이다.

그녀의 악명을 알고 있음에도 극을 연출해야 하는 황철영 감독의 입장에선 최진희가 필요했다.

자타가 공인하는 괴팍한 성격과 고약한 심보가 이번 작품의 여자 주인공 모친 역할로 딱 맞았으니까.

굳이 연기하지 않아도 실제 성격이 자연스레 묻어나기에 극의 완성도를 높일 수 있는, 보기 드문 유형의 연기자였다.

"스탠바이- 액션!"

황철영 감독은 최진희의 상대역으로 나온 신인 여배우, 이지아에게 마음속으로나마 미안함을 표하며 촬영을 이어나갔다.

짝!

또다시 뺨을 때리는 소리와 함께.

"악!"

역할에 충실하게 이지아가 내지른 비명이 촬영장을 가득 메웠다.

그렇게 몇 번의 재촬영 후에야 그 씬은 무사히 마무리될 수 있었다.

"고생하셨습니다, 선생님."

"그래. 근데 넌 좀 더 연기 연습을 해야겠더라. 너무 작위적이야."

"…네. 명심하겠습니다."

한쪽 뺨이 빨갛게 부어오른 이지아는 신인의 설움을 꾹 참고는 선배 연기자들과 촬영 스태프들에게 일일이 밝은 얼굴로 인사한 뒤에 세트장을 빠져나왔다.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눈물을 수습하려 화장실로 향하는 것이다.

"황 감독. 난 마음에 안 들던데? 몇 컷 더 찍지 그랬어요."

최진희의 말에 황철영은 속으로 욕을 했다.

"아닙니다. 충분했어요. 사실 두 번째 컷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은연중 적당히 하라는 뜻을 실어 보내지만, 못 알아들었는지 아님, 알고도 모르는 척 하는 건지 최진희는 태연스럽게 대답했다.

"드라마라고 대충하면 되겠어? 뭐든지 사실처럼 보이게 해야지. 그래야 시청자들도 재밌어 하는 법이야."

연신 불만 섞인 투정을 늘어놓는 최진희다.

이지아가 나오는 장면의 촬영을 처음부터 지켜봤던 시운은 그런 최진희를 보며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미래 그룹 계열의 제작사에서 만드는 드라마이기도 하거니와, 이지아는 빅스텝 엔터에서도 무척 애지중지하는 연예인이다.

게다가 회귀 전, 시운은 그녀의 팬이었다.

개인적인 친분은 없지만, 팔은 안으로 굽는다.

최진희의 악명을 현장 스태프들의 대화를 엿들으며 알게된 시운은 현재 상황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 사람도 한 번 제대로 당해봐야 할 텐데….'

시운의 그런 바람은 오래지 않아 실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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