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열애설(2)
"뭐?"
황철영의 치켜뜬 눈에 조연출은 머리를 긁적이며 궁색하게 답했다.
"그게…, 오는 길에 배탈이 나서 그만…. 다시 돌아갔답니다."
"무슨 그런 책임감 없는 놈을 불렀어!"
감독의 호통에 조연출은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난들 그런 놈인 줄 알았나.'
다음 씬을 위해 섭외한 단역 배우가 그만 펑크를 내버린 것이다.
"황 감독. 촬영 안 들어가요? 나 5시에 스케줄 있단 말이야."
"아, 죄송합니다. 금방 준비하겠습니다."
최진희의 신경질에 황철영은 진땀을 뺐다.
조연출의 팔을 잡아당긴 그는 조곤조곤 속삭였다.
"보조 출연자에서 대충 쓸만한 사람 한 명 추려내."
"네? 그게…."
"얼른!"
"…네. 알겠습니다."
조연출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보조 출연자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향했다.
"……."
얼굴도 나오고 대사도 한 줄이 있는 단역인 만큼 신중히 골라야 했다.
감독 말대로 정말 대충 골랐다가는 자신만 고달파진다.
황철영과 나눈 이야기를 지나가다 들은 몇몇 보조 출연자들은 기대감에 부푼 눈으로 조연출을 바라봤다.
돈이 궁해서 엑스트라를 자처하지만, 이 중 대부분은 연극판에서 꽤 잔뼈가 굵은 배우들이다.
드라마로 진출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
보조 출연자들의 눈동자에 열망이 그렁그렁하다.
"어휴…."
하지만, 애석하게도 마음에 드는 인물이 없었다.
조연출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등을 돌렸다.
대부분이 실망한 표정을 지었고, 개중 몇몇은 조연출의 등을 원망 어린 시선으로 노려봤다.
"TV에 나오는 게 소원이라고 해서 자리를 만들어줬더니. 개 같은 놈!"
절로 험한 말이 튀어나온다.
모델 일을 하는 지인이 연기에도 욕심을 보이길래 이번 드라마의 단역을 맡겼다.
연극을 오래 했다고 황철영에게 없는 말까지 지어내면서 겨우 밀어준 배역이다.
근데 지인은 추천한 자신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배탈은 무슨!"
다 죽어가는 음성으로 앓는 소리를 할 때부터 단번에 눈치챘다.
배탈이 아니라 전날의 숙취로 집에 드러누운 거란 걸.
녀석과 자주 어울리는 지인을 통해 이미 확인한 사실이다.
"다신 기회를 주나 봐라! 후우…, 어?"
쓸만한 대역이 없을까 촬영장 주위를 살펴보던 조연출은 말끔한 정장 차림의 젊은 남성을 발견했다.
바로 응원차 현장에 들른 현시운이었다.
"저 키에, 저 마스크면…. 나쁘지 않겠는데?"
그는 곧장 시운에게 다가갔다.
"저기…, 실례하겠습니다."
"?"
시운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절 부르신 겁니까?"
"아, 네. 혹시 시간이 되시면…."
촬영장에 정장을 입고 돌아다닐 만한 사람은 많지 않다.
현대극이 아닌 퓨전 사극인 만큼 배우나 보조 출연자로 보기도 어렵다.
그렇다면 제작사나 배우 소속사 관계자 중 하나란 소린데….
블루드래곤 픽처스에 입사한 지 불과 3개월밖에 되지 않았지만, 사무실과 현장을 오가면서 한 번도 보지 못한 얼굴이다.
'그렇다면 소속사 쪽이겠지?'
젊어 보이지만 정장이 제법 고급스러워 보이는 게 로드 매니저는 아닐 거다.
그렇다고 대표일 리는 없고, 팀장급 간부인가?
직위가 너무 높으면 부탁해도 들어주지 않겠지만…, 그로선 밑져야 본전이다.
"단역으로 드라마에 출연해주시면 안 될까요?"
"…네?"
살짝 당황한 듯한 시운의 얼굴에 조연출은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게…, 섭외했던 단역 배우가 갑자기 몸이 아파서 펑크를 냈거든요. 어려운 역할도 아닙니다. 대사가 있기는 한데 무척 짧습니다."
"워낙 갑작스러워서…."
"네, 알죠. 황당하실 겁니다. 부탁드리는 저도 그런걸요. 어느 배우분 소속사에서 일하시는지는 모르지만…, 제발 좀 도와주십시오!"
"……."
시운으로서는 난감한 순간이다.
팔자에도 없는 연기를 해달라니.
'근데 이 사람…. 날 모르나?'
이번 드라마의 제작 스태프 전원이 블루드래곤 픽처스 소속이다.
주목받기 싫어서 미래 그룹 회장이란 사실을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같은 그룹 임직원 중에서 아직도 자신을 모르는 사람이 있다?
새삼 신기한 기분이다.
커피차와 함께 현장을 방문했을 때, 분명 황철영 감독과 인사도 나눴었는데?
'그때 자리에 없었었나?'
그렇다고 뒤늦게 자기소개하는 것도 낯간지럽다.
"아주 간단한 씬입니다. 어떤 거냐면 말이죠."
허락도 하지 않았는데 조연출은 촬영할 장면에 대해 길게 늘어놓았다.
거절당하지 않으려고 은근히 부담까지 주면서.
사정은 딱하지만 내키지 않는 일을 할 순 없었다.
조연출의 제안을 막 거절하려던 시운은 다음 순간, 눈빛을 반짝였다.
촬영 장면에 대한 설명을 모두 들은 직후였다.
"……."
잠시 고민을 하던 시운은 어렵사리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자신은 없지만, 저라도 괜찮다면…. 한번 해보죠."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고마워하는 조연출을 보며 시운은 나직이 웃었다.
* * *
"아니, 이게 무슨…."
조연출이 배역에 맞는 사람을 섭외했다며 보여줄 때, 황철영은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극의 배경에 맞게 조선 중기 의상을 입고 메이크업까지 받고 나온 단역 배우는 그도 잘 아는 얼굴이었다.
불과 한 시간 전쯤에 담소를 나누기도 했었다.
"…감독님께서 아시는 분입니까?"
황철영의 예사롭지 않은 반응에 조연출은 불안해졌다.
아까 의상과 분장팀에서도 자신이 데려온 청년을 보고 적잖이 놀랐었다.
얼굴이 일반인치고 괜찮은 편이라서 그런가보다 여겼는데….
황철영의 표정으로 자신이 잘못 짚었음을 깨달았다.
"너, 그걸 말이라고! 이분이 누군지 정말 몰라서 그래?"
"네? 누, 누구신데요…?"
당장 요절이라도 낼 듯 눈알을 부라리며 노려보는 황철영이다.
"황 감독님. 전 괜찮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촬영에 문제가 있으면 안 되잖습니까. 제가 작게나마 도움이 된다면 그걸로 족합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조연출은 경직된 얼굴로 둘의 대화를 지켜봤다.
청년의 신분이 예사롭지 않은 게 분명하다.
조연출을 흘겨보며 작게 한숨을 내쉰 황철영은 시운에게 잠시 연기를 지도한 후 배역에 맞는 위치로 보냈다.
"넌 마치고 나 좀 보자."
"…네."
독이 바짝 오른 황철영의 낮은 읊조림에 조연출의 등은 땀으로 젖어갔다.
"스탠바이- 액션!"
촬영 준비가 모두 끝나자, 황철영이 외쳤다.
카메라가 돌아가기 시작했고, 주·조연 연기자와 보조 출연자들이 정해진 동선에 따라 움직였다.
시운 역시 그들과 마찬가지로 맡은 역할에 충실하게 달렸다.
퍽-
"악!"
빠르게 뛰어가다 모퉁이에서 돌아 나오는 누군가와 어깨를 세게 부딪히는 시운.
상대방은 충격에 뒤로 벌러덩 넘어졌다.
중년 여배우의 표독스러운 얼굴 위로 고통과 짜증이 떠올랐다.
겉치마가 휙 돌아갈 정도로 심하게 넘어진 그녀의 정체는 바로 신인 킬러, 최진희였다.
"야!"
스태프와 연기자들 앞에서 제대로 추태를 보인 최진희는 격분에 찬 고함을 내질렀다.
그에 시운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죄송합니다."
건성건성.
진심이 1도 담겨있지 않은 말투.
"이, 이익! 너…!"
시운을 가리키며 뭐라고 말하려는 그녀에게 황철영과 매니저가 달려왔다.
"괜찮으세요?"
"선생님, 어디 안 다치셨습니까?"
둘의 등장에 제대로 욕도 못 한 그녀다.
시운은 휙 돌아서서 배역의 시작점으로 향했다.
"황 감독! 저 자식 뭐야!"
"아…, 네. 단역을 맡은 분인데…."
"잘라! 다른 사람으로 바꿔!"
"그건 안 됩니다."
"황 감독…?"
거절당할 줄 몰랐다는 듯 그녀의 눈이 불신의 빛을 띠며 커졌다.
황철영은 쓰게 웃으며 답했다.
"대신 할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황철영은 내심 통쾌했다.
꽈당 넘어지던 최진희를 떠올리자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기분이다.
"살살하라고 전하겠습니다."
"어휴! 뭐, 저런 게 다 있어!"
황철영은 웃음을 애써 참으며 시운에게 다가갔다.
"회장님, 방금은 너무 세게 부딪혔습니다. 조금 살살 부탁드립니다."
"음…, 네. 알겠습니다. 연기가 아주 어렵군요."
"처음치고는 굉장히 잘하고 계시는 겁니다."
응원을 받으며 시운은 다시 촬영을 준비했다.
잠시 후, 황철영의 큐 사인에 앞으로 달렸다.
"야아!!"
"죄송합니다."
최진희와의 충돌 사고는 계속 이어졌다.
대여섯 차례 더 촬영한 뒤에야 황철영으로부터 OK 사인이 떨어졌다.
자신이 일삼던 행패를 고스란히 돌려받은 최진희다.
그렇다고 과거의 잘못을 반성할 그녀가 아니다.
대체할 인력이 없다는 황철영의 말에 OK 사인을 받을 때까지 성질을 억눌렀다.
그리고 지금 참았던 분노를 한꺼번에 분출하려 했다.
원래 남에게 피해를 주는 걸 아무렇지 않게 여겨도 당하는 입장이 되면 못 참는 부류는 있는 법이니까.
당장이라도 저 단역의 뺨을 제대로 올려붙여야 속이 풀릴 것 같았다.
하지만, 시운의 정체를 넌지시 전해 들은 소속사 매니저와 황철영이 극구 만류하면서 최진희는 뜻을 이루지 못했다.
거친 욕설만 한바탕 쏟아부었을 뿐이다.
"황 감독님."
"네?"
"제가 제작에까지 간섭하려는 생각은 없지만…. 저분은 좀 그렇네요."
"…네."
팬심 때문에 시작했지만, 본인의 행동이 무척 유치했다는 걸 시운도 잘 알았다.
그래서 마지막에 정중히 사과하려고 했었는데, 돌아가신 부모님의 안부까지 묻는 최진희의 태도는 도무지 참고 넘길 수가 없었다.
이미 출연 계약이 되어 있어 물의를 일으키지 않는 한은 마음대로 자를 수도 없다.
마음 같아선 열 배의 위약금을 사비로 물어주고서라도 그녀를 하차시키고 싶지만, 감독의 입장을 고려하여 무리한 요구는 하지 않았다.
한편, 시운의 말을 흘려들을 수 없었던 황철영은 고심 끝에 작가와 상의하여 최진희의 분량을 확 줄여버렸다.
최진희는 결국 2화 만에 비명횡사하는 거로 극에서 퇴장당했다.
덕분에 최진희와 함께 찍는 씬이 대거 줄어든 이지아는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맡은 배역에 충실히 임했고, 신인 같지 않게 연기에 능숙하다는 호평을 얻었다.
이후 아이돌 출신이라는 꼬리표에도 작품 제의가 끊이질 않고 들어왔음은 당연했다.
연기자로 새롭게 시작하는 첫걸음에 시운이 적잖이 도움이 되었음은 이지아도 알았다.
그래서 소속사 대표인 이승진을 통해 보답의 의미로 식사 자리를 마련했다.
팬과 보은하는 입장으로 한 자리에 마주한 두 사람은 이후로 부쩍 친해져 이따금 만남을 가졌다.
그렇게 반년이 지났을 때, 둘은 연인 관계로 발전했다.
* * *
"신문사에 입장은 전했습니까?"
냉랭해진 현시운의 물음에 권재환은 고개를 작게 숙이며 답했다.
"네. 내일까지 정정 기사를 내지 않으면 허위 사실 유포와 명예 훼손, 사생활 침해까지 모든 법적인 책임을 묻겠다고 공식적으로 항의했습니다."
"후…."
신문사에서 어떤 식으로 나올지는 모르지만, 일단 기본적인 대처는 문제없이 이루어졌다.
그런데도 시운의 마음은 무거웠다.
오전에 난 이지아의 열애설 기사.
어두운 한강 둔치를 배경으로 두 남녀가 찍힌 사진 한 장이 첨부되었는데, 당사자가 아니고선 누군지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화질이 흐릿하다.
모자와 마스크까지 쓰고 있어 신분을 특정하기 어려울 텐데도, 신문사는 자신 있게 사진 속 여성을 이지아라고 주장했다.
평소 건수 하나 건지려고 그녀의 동선을 쫓았다는 거겠지.
"빅스텝 이승진 대표에게는 제가 연락하겠습니다. 실장님은 돌아가는 상황 계속 주시하다가 특이점이 생기는 대로 저한테 알리세요."
"네, 회장님."
지시를 내린 시운은 이승진에게 전화를 걸려고 수화기를 들었다.
"……."
막 다이얼을 누르려던 손을 도중에 멈춘 시운은 아직도 앞에 선 권재환을 올려다봤다.
"무슨 할 말이라도?"
"…아닙니다."
권재환은 살짝 굳은 얼굴로 고개 숙인 뒤, 집무실을 나갔다.
잠깐 마주친 그의 시선에서 서운함을 읽었지만, 시운으로선 해명보다 수습이 먼저였다.
단축 다이얼을 누르자 곧 신호음이 갔다.
수초 후, 이승진이 전화를 받았다.
- 네, 회장님.
무척 지친 듯한 목소리.
아마도 열애설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는 전화가 빗발쳤을 거다.
시운은 자신의 부주의로 여러 사람을 고생시키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앞섰다.
"한반도일보에는 그룹 차원에서 항의했습니다. 거기에 맞춰서 빅스텝도 대응하시면…."
- 저기….
"네?"
- 음….
이승진은 잠시 뜸을 들이다 말을 이었다.
- 회장님, 지아랑 얘기를 나눠봤는데 말입니다.
"…네."
- 열애설…. 그냥 인정하자는 쪽으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
의외의 대답에 시운은 말문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