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부패와의 전쟁(2)
따사로운 햇살이 창을 통과해 집무실을 포근하게 데운다.
나들이 가기 좋을 정도로 화창한 5월의 오후.
하지만, 쾌청한 바깥 날씨와는 상반되게 집무실 책상 앞에 앉은 현시운의 표정은 다소 어두웠다.
통화 중이었는지 수화기를 귀에 대고 있던 그는 나직한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금광 인근 여섯 곳이라…."
가라앉은 시운의 목소리에 수화기 너머의 상대방이 대꾸했다.
- 네. 용의자들 모두 현장에서 검거되어 경찰이 조사 중입니다.
"그나마 다행이군요."
헬렌 리우의 말에 긍정적인 대답을 하면서도 얼굴은 여전히 어둡다.
'불법 금광 채굴….'
예상도 못 했던 일이다.
당연히 대비책도 생각하지 않았다.
근래에 여러 사업으로 정신이 없었다고는 하지만, 이런 사태가 벌어질지 짐작조차 못 했다는 건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시운은 안일해진 자신을 책망하고 또 반성했다.
"이번 불법 채굴 건은 미스 리우 덕분에 미리 방지할 수 있었습니다. 고마워요."
- 제가 맡아서 진행하는 사업입니다. 당연히 할 일을 했을 뿐인걸요.
현지 총책임자의 최근 동향이 수상하다는 보고가 사전에 올라왔다고는 해도, 재빨리 상황을 파악하고 알맞은 조처를 한 건 헬렌 리우다.
그녀의 빠른 판단과 행동이 아니었다면, 상당량의 금이 빼돌려졌을지도 몰랐다.
현재 보르네오섬 건엉 사란 금광에서 연간 4조 원에 달하는 금이 생산된다.
본격적인 개발에 들어간 지 이제 겨우 2년이라서 4조 원에 그칠 뿐이지, 향후 연평균 6조 원까지 채굴량이 늘어나게 될 거다.
회귀 전에 그러했으니까 이번에도 크게 다르지는 않겠지.
인도네시아 당국에 로열티를 지불하고, 국영 기업 '니알룸'의 지분율을 빼고도 기대수익이 1조 8천억 원에 달한다.
그런 곳간의 영근 알곡을 하마터면 쥐새끼들에게 갉아 먹힐 뻔했다.
"이번 한 번으로 끝이 아니겠죠?"
- 네, 아무래도…. 인도네시아의 불법 금광 채굴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니까요.
"……."
만연해있는 범죄인데도 시운은 미처 파악하지 못했었다.
타성에 젖은 자신을 다그치는 것과는 별개로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허락도 없이 누가 자신의 물건에 손을 대는 건 결코 참을 수 없었다.
시선이 책상으로 향했다.
한쪽에 가지런히 놓인 자신의 핸드폰.
시운은 손을 뻗어 그것을 움켜쥐었다.
현지 총책임자를 교체한다고 해서 일이 해결될 것 같진 않다.
새로 임명된 총책임자 역시 전임자처럼 매수될 위험이 있다.
그렇다고 인도네시아 당국에 이번 일의 재발이 없게끔 단속을 강화해달라고 요청한다고 해서 안심할 수 있을까?
'천만에!'
인도네시아의 공직 사회의 부패를 보면 당국에 크게 기대하기는 힘들다.
그렇다고 경비업체를 추가로 고용해 감시 체계를 더욱 강화하는 것도 효율성이 떨어진다.
향후 수십 년을 더 채굴할 수 있는 양의 금이 매장된 광산이다.
그 기간 동안 많은 인력과 자금을 낭비하느니….
"정보 이용권을 쓰는 게 훨씬 낫지."
10억 원의 정보 이용권 한 장으로 최상의 결과를 끌어낼 수 있다.
시운은 유레카를 통해 얻을 정보로 남의 곳간을 탐하는 쥐새끼들 모두 한꺼번에 박멸할 생각이다.
- 네? 보스 지금 뭐라고 하셨죠?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말을 헬렌 리우가 듣고선 반문했다.
다행히 한국어였고, 작게 말한 거라서 의미도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시운은 잠시 아무 말 없이 핸드폰만 만지작거리다가 이내 입술을 뗐다.
"미스 리우."
- 네, 보스.
"…저 대신 토라 위라완 대통령에게 한 가지 선물을 전해주세요."
- 그게 무슨…?
아래로 길게 나열된 유레카의 검색 결과를 힐긋 쳐다보는 시운의 눈빛이 무척 매섭게 번뜩였다.
* * *
"……."
자신의 집무실에서 창밖의 정원을 내려다보는 토라 위라완.
올해 9월을 끝으로 대통령 임기가 끝나는 그에게 요즘 들어 한 가지 고민이 생겼다.
인도네시아 역사상 최초의 직선제를 통해 정권 교체를 이룬 그는 재임 기간 내내 군부 정당을 비롯한 보수파의 입김에 시달리면서도 끝까지 소신을 지킨 대통령이다.
국제 원자재 가격 하락과 코로나 19 범유행 사태라는 여러 악재 속에서도 경기 부양책으로 실업률과 빈곤율을 역대 최저치까지 낮췄다.
이 밖에도 그라스버그 광산의 채굴권을 52년 만에 되찾아오는 등 여러 성과를 보였다.
그 많은 업적 중 단연 최고로 손꼽히는 것은 보르네오섬으로 신수도를 이전하는 사업일 것이다.
자바섬의 고질적인 문제인 인구 과밀집 현상.
신수도 이전과 고속도로 건설이 시작된 2022년 이후로 자바섬의 인구가 조금씩이지만, 보르네오섬으로 옮겨가고 있다.
신수도 완공 예상 시기인 2028년이 되면 자바섬의 인구 과밀집으로 인한 문제가 상당 부분 해소될 거로 예상이 된다.
물론, 수도 이전 사업의 진행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2020년 3월에 전 세계로 확산한 감염병으로 야심 차게 준비한 국가사업이 물거품이 될 뻔했다.
감염병 사태를 견뎌오며 국고가 비어버린 게 원인이다.
수도 이전 공사의 첫 삽을 뜨는 게 요원해졌을 때, 토라 위라완이 직접 나서서 외국 자본을 유치해왔다.
덕분에 지금 보르네오섬의 국가사업은 순조롭게 이어졌다.
이 정도면 백 년 뒤 후대에까지 널리 이름이 남을 정도의 위업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임기의 종료를 앞둔 토라 위라완은 마음속에 아직 무거운 짐이 하나 남았다.
"후우."
토라는 창밖을 향했던 시선을 돌려 컴퓨터 모니터를 바라봤다.
조금 전에 확인했던 인터넷 기사가 박제되듯 변함없이 화면 위로 출력되고 있었다.
[2024년 세계 국가별 부패인식지수]
[인도네시아 28점. 96위.]
여전히 인도네시아에 부정부패는 만연해있다.
한때는 숙원사업으로 부패 척결에 힘써보려 했지만, 많은 시련에 부딪혔다.
공무원들의 감찰을 맡은 담당관이 오히려 뒷돈을 받는 일이 생겼으며, 의회에서 법안을 통과시키려 해도 과반수의 찬성을 얻어내지 못했다.
전체 공무원과 정치인 중 뇌물을 한번도 받지 않은 이들보다 그렇지 않은 이들의 수가 월등히 많다.
2019년 재선 성공으로 2기 내각을 구성하면서 부패 척결을 위해 서구의 선진화된 행정제도를 많이 도입했음에도, 여전히 과거에 머무르고 있다.
오랜 군부 정치를 끝내고 문민정부를 열었지만, 정작 공산주의 국가인 중국보다 부패인식지수가 낮다.
이 사실만으로도 지난 임기 중 이룬 업적들이 퇴색되는 기분이다.
아무리 남들이 잘했다고 칭찬해줘도 해결하지 못한 부패 척결 때문에 10년간의 노력이 모두 부정당하는 것 같다.
못다 이룬 과업에 토라 위라완 스스로 실패를 곱씹던 그때, 비서실장이 문을 두드렸다.
"어, 그래요. 무슨 일입니까?"
"네, 각하. 다름이 아니오라 조금 전에 대만 티엔유 대표인 헬렌 리우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헬렌 리우요?"
불현듯 며칠 전 건엉 사란 금광 인근에서 있었다는 사건이 떠올랐다.
'불법 채굴업자의 처벌에 대해 따지려는 건가?'
아쉽게도 그때의 일은 현장에서 검거된 용의자들만 처벌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그들의 배후로 짐작되는 조디 뭉가라를 옭아매려 했지만, 물증이 없었다.
용의자들을 아무리 심문해도 그 입에서 조디 뭉가라의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
아니, 나왔었다 하더라도 자신의 귀에 전달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높은 확률로 경찰 고위 간부들마저 조디 뭉가라의 돈에 넘어갔을 테니까.
"각하께서 허락하신다면 직접 만나 뵙고 드릴 말이 있다고 합니다."
"흠…."
역시 불법 채굴업자들과 관련된 말이겠지?
순간 만나지 말까 고민했지만, 신수도 이전 사업과 고속도로 건설에 필요한 자금을 끌어와야 하니 밉보여선 안 된다.
임기가 끝나가는 마당에도 뒷일을 걱정하는 꼴이라니.
토라는 속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그래요. 그럼 다음 주에 일정을 맞춰봅시다."
"네, 그렇게 전달하겠습니다. 각하."
비서실장이 지시를 받고 나간 뒤, 토라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헬렌 리우에게 무슨 변명을 해야 하려나.
하지만, 일주일 뒤에 그녀와 마주 앉은 토라는 뜻밖의 말을 전해 듣고 매우 놀랐다.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불법 채굴업자의 처벌에 대해 따지러 왔다고 생각했던 토라에게 헬렌 리우는 전혀 다른 말을 건넸다.
헬렌은 밝게 웃으며 하나의 USB 메모리를 토라 쪽으로 밀었다.
"인도네시아 전역에서 불법 금광 채굴을 일삼는 광산업자들의 명단입니다. 대통령 각하."
현시운이 유레카의 정보 이용권을 사용하여 알아낸 정보다.
불법 채굴이 발생할 때마다 대응한다는 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이참에 인도네시아에서 암약하는 불법 채굴업자 전원을 색출하는 것으로 방해요소를 없애려 한다.
건엉 사란 금광을 지키기 위한 현시운의 선택이지만, 부패 척결을 이루지 못한 것을 후회하던 토라 위라완에게 임기 중 마지막 행보를 내딛게 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아니! 이런 걸 어떻게…?"
자국의 수사기관에서도 파헤치지 못한 암적인 존재들이다.
그걸 외국의, 그것도 한낱 사업가인 헬렌이 알아냈다는 게 토라는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아…, 그게 말이죠."
현시운에게 받아왔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헬렌은 각국에서 여러 투자사업을 진행하며 알게 된 인맥을 통해 어렵사리 알아냈다는 식으로 변명했다.
"아무리 그래도 인맥으로 이런 걸…."
"CIA와 MI6 등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정보기관에도 친구들이 몇 있거든요."
"아…."
거짓으로 둘러댄 거지만, 토라는 그런 게 아니고선 이런 정보를 손에 넣을 수 없을 거로 여기며 납득했다.
동시에 등골이 오싹했다.
자국에서도 파악하지 못한 범죄자들을 타국의 정보기관에서 이렇듯 명단으로 작성해뒀다는 것에.
토라의 표정에서 이를 눈치챈 헬렌은 불법 채굴업자들이 초기의 자본을 외국에서 끌어오는 과정에서 자연히 알려진 것뿐이라며, 명단 외에도 아직 밝혀지지 않은 불법 채굴업자들이 있을 거라고 그를 이해시켰다.
물론, 현시운이 유레카를 이용해 알아낸 정보인 만큼 그녀가 전한 명단에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기록되어 있었다.
"그래도 이건…, 그저 놀랍다는 말 밖에는…."
USB 메모리를 쥐고 심각한 표정을 짓는 토라를 향해 헬렌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웃음을 가장했다.
'보스의 정체는 대체 뭘까? 이런 고급 정보를 매번 어디에서 얻어오는 거야?'
예전에 비밀단체의 일원이 아니냐며 술김에 물어봤을 때, 극구 부인하던 현시운의 모습이 다시 떠올랐다.
진심으로 보여서 그 뒤로 자신의 망상을 애써 밀어냈는데….
오늘 토라에게 전달한 명단을 보니 그때의 의심이 새록새록 솟아난다.
'고도의 훈련을 받은 게 아닐까? 남을 감쪽같이 속일 수 있을 정도로 말이지.'
헬렌의 머릿속에 현시운이란 이름이 비밀단체에서 임무를 받아 대한민국 재벌을 연기하는, 뛰어난 스파이와 동의어로 새겨지는 순간이다.
총 208명의 범죄자 명단이 담긴 USB 메모리.
그 안엔 그들의 해외 비밀 계좌와 은닉 자금의 규모까지 이미지 파일과 함께 담겼다.
토라는 이것으로 공직 사회와 정계에 만연한 부패를 다소 걷어낼 수 있겠다는 생각에 임기 말인데도 강한 의욕을 보였다.
며칠 후, 의회를 소집하고 헌법이 부여한 대통령의 최대 권한으로 불법 금광 채굴업자들의 일망타진을 결의했다.
의회에 참석한 의원들로선 예전처럼 부패 척결을 부르짖는 게 아닌, 최근 발생한 불법 채굴 조직을 잡아들이겠다는 토라의 선언에 반대할 명분이 없었다.
아니, 아무리 공권력을 동원해도 물증이 없는 이상 피라미 몇만 잡아들일 뿐 몸통에는 닿지 못할 거로 안심했다는 게 맞을 거다.
그들은 토라의 손에 이미 명단이 들어있음을 몰랐다.
토라의 안건은 의회를 무사히 통과했다.
그게 자신들의 목줄을 옭아맬 줄은….
이때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의회의 승낙을 얻어낸 토라 위라완은 즉시 특별 치안부를 설치했다.
외부의 간섭에서 벗어날 수 있게 대통령 직속 기관으로 세웠으며, 불법 채굴업자와 관련된 이들을 구속하는 데 문제가 없게끔 임시 수사권까지 부여했다.
그렇게 일주일간 겉으로는 범죄자를 잡아들이는.
하지만, 속내는 부패 척결인 전쟁의 막이 올랐다.
그리고 결과는….
208명의 불법 채굴업자와 그들로부터 뇌물을 받고 편의를 제공한 정치인 58명, 고위 공직자 185명, 그 외 직간접적으로 연루된 이들까지.
총 2만 5천여 명을 구속하는 성과를 이뤘다.
이토록 많은 이들이 연루되었을 줄은 토라도 알지 못했다.
우습게도 임기 말의 이번 검거 작전이 토라 위라완 재임 중 가장 빛나는 위업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그 후, 인도네시아의 부패인식지수가 매년 높아지더니 3년 후에 중국을 앞질렀다.
토라 위라완은 염원하던 부패 척결을 임기가 끝나기 전에 이룰 수 있도록 해준 헬렌 리우에게 큰 고마움을 느꼈다.
어떤 식으로라도 사례를 하고 싶었으나, 헬렌은 이를 거절하며 한 가지 부탁을 했다.
"보르네오섬에 고속도로를 놓고 있는 미래건설의 공사 대금만 밀리지 않고 제때 지급해주시면 됩니다."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이라 그렇게 하겠다고 굳게 약속했다.
토라는 차기 정권에까지 자신의 약속이 이어질 수 있게 안배했다.
아무리 그가 은퇴했다고 해도 정계에 미치는 영향력마저 사라진 것은 아니다.
토라의 약속은 보르네오섬 고속도로가 완공되기까지 지켜졌다.
* * *
쾅!
부서질 듯 책상을 내리치는 주먹에 장강 그룹 비서실장 김학수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댔다.
"방금 뭐라고 했습니까?"
강렬한 눈빛을 쏘는 장기우의 시선을 차마 마주할 수 없었던 김학수는 눈동자를 살짝 아래로 내리며 방금 한 보고를 앵무새처럼 다시 말했다.
"네, 네. 인도네시아 신수도 개발 사업처에서 통보하길…. 지난달 자바섬을 덮친 태풍과 쓰나미로 파괴된 기반 시설을 복구하느라…."
"요점만."
"올해 신수도 건설 예산을 긴급복구비용으로 사용해버렸다고…. 내년 가을까진 공사 대금 지급이 어렵다고 합니…."
콰앙!
장기우의 주먹이 다시 책상을 내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