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로 재벌 참교육-132화 (132/139)

§132화 참교육(1)

지병을 이유로 장철구가 일선에서 물러난 게 작년 12월의 일이다.

명예회장이 된 그의 뒤를 이어 장기우가 올해 1월 초, 장강 그룹 3대 회장직에 올랐다.

그토록 염원하던 자리에 올랐으니 이제부턴 자신이 원하는 대로 모든 걸 이룰 수 있을 줄만 알았다.

하지만, 웬걸?

총수가 된 지 채 1년도 지나지 않아 그룹에 최대 위기가 찾아왔다.

"그룹의 사내유보금 중 사용 가능한 현금은 얼마나 남았습니까?"

장기우의 서슬도 퍼런 눈빛이 비서실장인 김학수에게 꽂혔다.

인도네시아 정부의 결정이 마치 그의 탓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장철구가 물러날 때, 전임 비서실장 문지환은 바로 사직서를 올리고 그룹을 떠났다.

장기우는 그 자리에 자신이 수족처럼 부렸던 김학수를 앉혔다.

장강 그룹의 실세라고 할 수 있는 비서실장 자리.

하지만, 막상 차지하고 보니 김학수가 기대했던 것과는 크게 달랐다.

그룹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길 때마다 자신의 잘못도 아닌데 대신 화를 받아내야만 하는 신세다.

"네. 그것이…, 올해 전반기까지 해외 공사에 상담 금액을 투입해 버려서 현재 약 900억 원가량 남았습니다."

김학수의 대답에 장기우는 질끈 눈을 감았다.

인도네시아 신수도 건설에 뛰어들기 전인 2022년 초만 하더라도 가용할 수 있는 여유 자금이 수십조 원에 달했었는데….

그게 이젠 천억 원도 안 남았다니.

인도네시아의 신수도 건설 사업에서 장강건설은 대한민국 수위권의 건설사라는 점을 내세우며 경쟁사들에 비해 넓은 면적의 개발권을 따냈다.

총공사비 20조 원에 달하는 대규모 건설 사업.

인도네시아의 신수도 개발 사업처에서 발릭파판 신수도 건설에 약 43조 원을 예산으로 책정했었다.

장강건설이 수주한 공사의 규모가 거의 절반에 가깝다는 것.

사내에서도 성공적인 입찰이었다고 자평했지만, 장기우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발릭파판 신수도 건설과는 별개로 진행되는 보르네오섬의 동서를 잇는 고속도로 공사.

거기에는 신수도 건설의 두 배에 가까운 예산이 잡혔다.

약 86조 원에 달하는 도로 건설을 입찰도 거치지 않은 채, 현시운의 미래 그룹 산하 미래건설이 독차지했다.

안호영 경제수석을 통해 강압적으로 그 사업에 참여하려고 했지만, 사생활의 문란으로 그가 경질되면서 계획이 어그러졌다.

최종 결재만 장철구를 통할 뿐, 그룹의 전반적인 업무를 장기우가 도맡아 처리하던 시기였다.

장기우는 수주한 공사 규모에 성이 차지 않았다.

그래서 장강건설 해외사업부에 TF팀을 설립해 해외 공사 입찰 경쟁에 공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장소가 어디든지 상관하지 않았다.

건물을 짓는 건지 아님, 교량과 도로를 놓는 건지도 구분하지 않았다.

코로나 사태 이후로 뚜렷한 해외 건설 실적이 없었지만, 인도네시아 신수도 건설 계약이 아쉬운 대로 그 역할을 대신해 줬다.

원래라면 이번 인도네시아 공사 건을 잘 마무리한 뒤에 해외 판로 개척에 힘쓰려 했었다.

장기적으로, 최대의 이익을 얻기 위한 준비 과정을 거치면서.

그러나 현시운보다 뒤처지고 있다는 사실을 참을 수가 없었던 장기우는 수익률이 다소 낮더라도 전체 해외 실적을 늘리는 전략을 강행했다.

일선에서 물러난 장철구도 딱히 제지 없이 침묵했고, 그룹 임원들은 확고한 신임 회장의 뜻에 조용히 입을 닫았다.

계기가 이성적이지 못하다뿐이지, 이런 식으로 해외 실적을 쌓아두는 것도 좋은 전략의 일환이다.

향후 인도네시아 신수도 이전과 같은 굵직한 공사 입찰 시 큰 장점으로 작용할 게 분명했으니까.

다만, 동시다발적으로 많은 해외 공사가 진행된다면 자금의 유동성에 문제가 생길 우려가 있다.

하지만, 당시의 장철구를 비롯한 그룹 임원들은 그것에 대해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1년 6개월 전, 장철구는 장강 그룹의 주거래 은행이기도 한 대한은행의 은행장인 민규식과 자식들의 혼사를 추진했다.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장기우는 민규식의 장녀 민혜림과 백년가약을 맺었고, 든든한 자금줄을 손에 쥐게 되었다.

돈 걱정은 말라는 장인의 호언장담에 장기우는 해외 건설 수주에 열을 올렸고, 미국과 러시아, 프랑스, 사우디아라비아에 이르기까지 여러 건의 입찰 경쟁에서 승리했다.

인도네시아 신수도 건설 건과 합하면 모두 100조 원에 가까운 계약이었다.

장강건설은 창사 이래 최대의 호황을 맞았고, 사옥의 불빛은 24시간 꺼질 줄을 몰랐다.

착공 일정과 공사 진행 스케줄 모두 계약서에 명시된 대금 수금 일자를 반영해 짜였다.

인도네시아에서의 갑작스러운 대금 지급 지연만 아니었다면 모든 게 순조로웠을 거다.

"왜 하필 올해에 이런 일들이 몰아서…!"

장기우는 말을 하다 말고 이를 악물었다.

인도네시아의 결정에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다.

한 달 전에 강력한 태풍이 자바섬에 상륙했고, 먼 해상에서 일어난 10M 높이의 쓰나미가 남서쪽 해안을 덮쳤다.

사상자와 실종자가 만 명을 넘어설 정도로 심각했던 자연재해.

인명피해와 함께 자바섬 남서쪽 해안가의 기반 시설과 가옥들 역시 무참히 파괴되었다.

인도네시아 정부 입장에선 신수도의 건설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인구의 대부분이 몰려있는 자바섬의 정상화가 더 시급했다.

자연히 신수도 건설에 들어가야 할 자금이 모두 자바섬 복구 비용으로 들어갔다.

"미래건설도 대금을 지급받지 못했습니까?"

일말의 기대를 품고 장기우가 물었지만, 김학수의 점점 어두워지는 표정에서 답을 미리 알 수 있었다.

"거긴…, 공사 진행률에 따라 정상적으로 대금을 정산받았다고 보고받았습니다."

장기우는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그도 전후 사정은 이미 파악해놓았다.

인도네시아 당국이 왜 이런 차별을 하는지를.

이번 보르네오섬의 신수도 건설과 고속도로 공사 모두 외국 자본의 유치 없이는 불가능한 사업이었다.

5년간 1,000억 달러.

천문학적인 액수의 투자금을 기꺼이 인도네시아에 쏟아부은 곳이 대만의 투자 전문회사 티엔유를 비롯한 다섯 외국계 투자기업들이다.

예전 장강리조트 임시주주총회 때 장세연의 편을 든 세 회사가 거기에 모두 포함되어 있음은 조사를 통해 이미 확인했다.

'그 기업들과 현시운 그놈이 도대체 무슨 관계이길래!'

보르네오섬 고속도로 공사도 순전히 티엔유 대표인 헬렌 리우와의 인맥 덕분에 성사된 것이라고 국내 언론을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됐었다.

고작해야 일류에도 못 미치는 4년제 대학교를 중퇴한 소시민일 뿐인데.

언제 어디서 그런 대단한 인맥을 쌓을 수 있었는지 장기우로선 믿기지 않았다.

그동안 숱하게 현시운의 주변과 당사자를 철저히 조사했지만, 끝내 알아낼 수 없었다.

아직도 장기우를 비롯한 대다수의 사람은 보르네오섬 개발에 자금을 대주는 외국 투자기업들이 모두 현시운의 소유인 줄은 알지 못했다.

"리조트와 유통, 푸드만 아직 남아있었어도…."

장기우의 나직한 중얼거림을 들은 김학수도 그에 동의하는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장세연에게 뺏긴 세 회사가 지금처럼 아쉬울 수가 없었다.

생명·보험, 증권과 카드에는 못 미쳐도 계열사 중 현금 보유량이 제법 되는 곳들이었으니까.

그동안 전 계열사의 여유 자금을 장강건설에다 모두 밀어 넣었다.

그러고도 모자라 대한은행을 비롯한 시중은행에 장강건설 주식을 담보로 대출까지 끌어다 썼다.

만기일이 돌아오는 대출을 인도네시아에서 받는 대금으로 상환하고, 다시 대출을 받을 계획이었는데 어긋나버렸다.

지금 상황에서 그나마 믿을 만한 곳은 장인이 은행장으로 있는 대한은행이었으나….

"대한은행 쪽 일은 어떻게 되어간답니까?"

"네, 회장님. 그게 아직…, 검찰에서도 조사 중이라고만 하고 딱히 어찌 될 지는 아무도…."

"……."

장기우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간 공들여 구축해놓은 검찰 라인마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아마도 지금 같은 때에 잘못 연루되었다간 자신들의 모가지가 날아갈 수도 있으니 몸을 사리는 걸 테지.

[대한은행 민규식 은행장, 12건의 불법 대출에 관여한 혐의 드러나]

일주일 전, 언론으로 대서특필된 내용이다.

든든한 뒷배로 여겼던 처가가 단번에 자신을 찌르는 칼이 되었다.

검찰에선 특수관계자인 장강 그룹에 불법 대출 정황이 없었나 낱낱이 파고들고 있다.

장기우의 장인인 민규식 은행장 역시 현재 검찰에 소환되어 지난 잘못에 대한 조사를 받고 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4/4분기 공사 비용 해결은커녕 돌아오는 대출을 막기도 벅차다.

9월 중으로 돌아오는 대출 상환금만 10조 원에 다다른다.

"후우…. 비서실장."

"네, 회장님."

장기우는 지친 듯한 기색으로 지시를 내렸다.

"일단 검찰 쪽 동태 철저히 파악해둬요. 장인의 잘못을 두고 우리까지 치고 들어올 수도 있으니 경계를 늦추면 안 됩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만 가서 일 봐요."

물러가라는 지시에 김학수는 냉큼 고개를 숙이고선 집무실을 나갔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장기우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수족으로 부릴 때는 크게 아쉬운 걸 몰랐는데, 비서실장 자리에 앉혀놓고 보니 문지환에 비하면 많이 부족해 보인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였다.

문지환에 대한 아쉬움을 애써 지우며 장기우는 당장 시급한 일의 해결에 몰두했다.

"자금을 확보할 방법이래 봐야 이젠…."

몇 가지 없다.

주식이나 자산을 담보로 시중은행에서 대출을 받는 것도 힘들어진 상황.

그렇다고 명동 사채 시장에 손을 뻗는 건 너무나도 위험하다.

불법과 합법 사이에서 어중간하게 줄다리기를 하는 족속들이다.

돈이 궁하다고 그들과 엮였다가는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른다.

결국 장기우가 생각해낸 방법은 두 가지였다.

장철구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과 주식을 내다 파는 것.

다른 계열사에서 자금을 끌어오려고 해도 확보할 수 있는 금액은 만기일이 도래하는 대출 한두 건 막아내기도 벅차다.

크게 도움도 안 되는 걸 억지로 긁어모았다가는 다른 계열사들마저 자금 흐름이 나빠질 거다.

"둘 중 하나라…."

첫 번째 방법은 생각하고 말 것도 없다.

비록 자신이 회장 자리에 올랐다고 해서 장강 그룹이 온전히 자신의 것은 아니다.

명예 회장으로 물러났다지만 장철구의 입김은 현직 회장의 권한보다 위다.

자신의 부족함을 이런 일로 보여 주고 싶지는 않았다.

장기우는 결국 두 번째 방법을 선택했다.

돌아오는 대출과 4/4분기 공사 비용까지 해결하려면 못해도 5%의 지분을 처분해야 했다.

장강지주가 건설의 지분 32%를 보유하여 최대 주주로 등극해 있으며, 그 외 장철구와 자신의 명의로 6%, 차명 계좌로 분산해놓은 게 3%.

여기에 우호 지분 7%까지 더하면 모두 48%다.

이것으로 장강건설을 비롯한 전 계열사를 지배해왔었다.

여기서 5%의 지분이 빠져버린다면 경영권 방어가 힘들어지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겠지만, 장기우는 그런 위험을 초래할 마음이 없었다.

지분을 팔더라도 그 대상은 자신에게 우호적인 세력이어야만 한다.

순간의 어려움을 모면하는 대로 다시 돌려받을 수 있도록.

그사이 어떤 분탕질에도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이에게.

생각을 정리한 장기우는 곧바로 핸드폰을 들어 전화를 걸었다.

"Mr. 라인하트. 장강의 장기우입니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 이렇게 연락을 드렸습니다."

독일 명차 MMW와 VANZ를 소유한 라인하트 그룹의 주인, 윌리엄 라인하트.

장기우가 장강건설 5%의 지분을 잠시 맡기려는 상대가 바로 그였다.

1년 전, 미국에서 있었던 세계 경영인 모임에서 만나 친분을 쌓았다.

그 덕분에 반년 전에는 독일 브레멘에 세워지는 라인하트 그룹의 신사옥까지 별도의 입찰 경쟁 없이 직접 수주받을 수 있었다.

또한, 장강건설 지분 3%를 보유한 우호 세력이기도 하다.

- 뭐든지 말해봐요. 친애하는 친구여.

평소보다 진한 웃음을 보이는 윌리엄 라인하트였지만, 장기우는 그걸 미처 깨닫지 못했다.

* * *

2024년 10월.

미래 그룹 회장실에는 현시운과 강하민이 모여 지난 두 달 간 변화가 있었던 장강건설의 주주현황을 살피기 바빴다.

각자의 태블릿PC를 한참 들여다보던 둘은 비슷한 속도로 내용을 확인하곤 고개를 들었다.

"어때?"

강하민의 기대에 찬 물음에 시운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시작해도 될 것 같은데요?"

70년 가까이 장강 그룹에 군림해왔던 장씨 일가의 지배력이 이처럼 약해졌던 적도 없다.

시운과 강하민은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다음 임시주주총회가 언제랬죠?"

"11월 22일."

강하민의 대답에 시운은 힘주어 말했다.

"장강건설 대표이사 해임안을 올리도록 하죠."

그에 강하민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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